[1896 ~ 1923] 판소리의 여류 명창. 경상 남도 김해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웠는데, 소리 능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명창이란 소리를 들었다. 19세 때 김정문의 소개로
김창용이 맡아 하고 있던
협률사의 단원으로 발탁되었다.
협률사에는 국창
송만갑과
이동백 이 소리를 하고 있었다. 협률사의 단원이 된 김녹주는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대명창들의 더늠과 발림 등 판소리의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깨우쳐 갔다. 더늠이란 명창들이 직접 작곡하여 자신의 장기로 지녔던 대목이며, 발림이란 노래하는 이가 사설에 따라 적당하게 해 나가는 몸짓이나 동작을 말한다.
김녹주는
강소춘·
이화중선·
배설향·
김추월 등과 함께 민족 항일기 초의 뛰어난 판소리 여류 명창으로 꼽혔다. 특히, 체구가 당당하고 성격도 활달한데다가, 천성적으로 좋은 목청과 재질을 타고 났던 김녹주의 창과 연기는, 그들 가운데서도 탁월하였다. 대구에서 소리를 가르치는 사범을 하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김녹주는 《춘향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사랑가》와 어사또가 춘향 집에 당도한 대목, 그리고 《육자배기》 대목에 뛰어났었다. 당시 축음기 음반에 《화초사거리》를 취입하였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