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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김두한(金斗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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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金斗漢)
1918~1972 정치가.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김두한 (金斗漢)
▣ 백과사전
1918~1972 정치가. 서울에서 태어났다. 제3대 및 6대 국회 의원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독립 운동 가 좌진(佐鎭)이다. 서울 교동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파고다 공원 근방에서 주먹을 쓰며 고아처럼 자랐다. 민족 항일기 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하여 우리 나라의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독립 운동가였던 장군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점을 대단한 긍지로 여겼던 그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 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서의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김두한은 또 일제 시대의 전과자 65%로 구성된 경성 특별 지원 청년단을 총독부 정무 부장과의 합의 아래 구성하여, 자기가 이끄는 단체를 합법적인 단체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이 단체는 반도 의용 정신대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8·15 광복 후에는 이승만· 김구· 신익희 등이 주도하는 대한 청년단의 감찰 부장을 맡아 반공 대열의 맨 앞에서 활약하였다. 이 단체는 미군정 경찰과 한민당계 실업인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공산주의 계열인 좌익에 반대하는 테러 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는 좌익계 조선 노동 조합 전국 평의회 주도로 일어난 9월 총파업의 용산역 철도 파업장과 조선 노동 조합 전국 평의회 본부·좌익 청년 단체 본부 등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공 투쟁 과정에서 그는 살상 행위도 서슴지 않아, 당시 한반도를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청에 의하여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다. 사형 언도를 받은 그는 오키나와 미군 부대에 수감되었으며, 그가 이끌던 단체도 해산되었다. 사형 집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그는 대한 민국 정부 수립을 맞아 사형 집행의 위기를 벗어났다. 그 후에도 그는 한독당 재정 위원·대한 민주 청년 연맹 부위원장·대한 노조 총연합회 최고 위원·대한 학도 의용군 참모장 등을 지내면서, 이승만의 반공과 단정 노선에 입각하여 좌익 운동에 맞섰으며, 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을 방해하였다. 당시 중간 좌파 민족주의자로 좌우 합작 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던 여운형 암살 사건에도 직접 관계가 있었음을 그는 스스로 인정한 바 있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에 대하여 그는 스스로가 반공 투쟁을 위한 테러리스트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1954년 종로 을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당선된 뒤 자유당 에 입당하고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 후 이승만의 3선 개헌 이 목적이었던 사사 오입 개헌을 반대하다 자유당에서 제명당하고, 야당 생활을 하였다. 1965년 6대 국회 의원의 보궐 선거 에서 당선되었다. 한독당 내란 음모 사건에 개입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으나 곧 풀려났다. 그 후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여 국회 발언대에서 정일권 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에게 미리 준비한 오물을 투척한, 이른바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독특한 정치 생활을 마감하였다. 정계 은퇴 후 1972년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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