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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김득수(金得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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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수 (金得洙)
1917~1990 명고수(名鼓手).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김득수 (金得洙)
▣ 백과사전
1917~1990 명고수(名鼓手). 본명은 김영수 (金永洙). 전라 남도 진도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진도 명창 최두인으로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웃에 있던 신청을 드나들며 소리를 배우면서 북과 인연을 맺었다. 신청이란 광대로서 또는 예인으로서 살다 죽은 이들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는데, 이 곳에서는 판소리 등의 국악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는 12세 때 진도 신청에 와 있던 이동백에게 소리를 배웠으며, 그 후 명창 박동진으로부터 판소리 공부를 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18세 때에는 집을 나와 목포·부산·울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가르치다가, 1936년 서울로 올라와 명창 김창룡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 성악 연구회에서 국창 송만갑에게 《흥보가》 《심청가》 《춘향가》를 배웠으며, 그 뒤 김세준에게 《수궁가》를 배웠다. 이동백에게 다시 소리를 배우던 중 목이 상하여 판소리 를 포기하고, 정원섭·한성준 등 명고수로부터 북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는 동일 창극단· 조선 창극단·국극 협단 등을 따라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고수의 길을 걸었다. 해방 후에는 국극 협단과 국악사에 참여하였으며, 1956년에는 예원 국극단을 만들어 운영하였기도 하였다. 1962년부터 시립 국악단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북 솜씨는 널리 알려졌으며, 1964년에는 서울 시립 국악 관현악단 악장이 되었다. 그리고 1970년 한국 국악 협회 부이사장을 지냈다. 판소리에서 고수의 역할이 명창 못지 않게 중요함을 나타내는 '1 고수 2 명창(一鼓手二名唱)'이라는 말 대신, 그는 '1청중, 2 고수, 3 명창'이라는 말을 내세우고 있다. 판소리에서 무엇보다도 청중과의 호흡을 강조한 그의 철저한 예인 정신은 자신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1남 3녀 가운데 장녀를 뺀 3자녀가 모두 각각 국악 작곡· 아쟁· 가야금 등 예인의 길을 걷고 있다. 1986년에 중요 무형 문화재 판소리 고법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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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