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7 ~ 1641] 조선 중기의 문신. 경상 북도 안동 예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감 부륜(富倫)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이다.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 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17세였던 그는 유성룡이 이끄는 부대로 자진하여 종군하였다. 왜군과 맞서는 싸움터에서도 학식이 많고 행동이 의젓하여, 명나라의 총병사 오유충과 유격장 노득공으로부터 깍듯한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1612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이웃 나라의 외교 문서를 맡아 보던 관아인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증광 문과란 나라에 경사가 있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실시하던 과거 시험이다. 1616년에는 주서가 되었으나, 당시 광해군이 폭압 정치를 해 나가자 이를 비관하여 사직하였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처음에는 부국 강병의 정책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며 나라를 잘 다스려 나갔다. 그런데 일부 신하들이 정비 소생이 아닌 광해군에 반대하여, 선조의 정비인 인목 대비가 낳은 영창 대군을 왕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광해군은 반대파를 과격한 수단으로 처단하였으며, 아우인 어린 영창 대군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1618년에는 어머니뻘 되는 인목 대비를 왕비의 자리에서 내쫓았다. 이렇듯 어지러운 정국에 그는 바깥 출입조차 삼간 채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광해군의 폭정에 김류·김귀· 이괄 등의 무인들이 일어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으로 모셨다. 이렇게 하여 1623년에 왕위에 오른 이가
인조이며, 이 일을
인조 반정이라고 한다. 새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김령에게 보덕·헌납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이 모두를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1636년 청나라로 국호를 고친 청태종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조선에 대하여 신하로서 청나라를 섬길 것을 요구해 왔다. 이를 조선 조정에서 거절하자, 청 태종이 10만의 병사로 쳐들어왔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청나라 병사들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그는 집안의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의 군량미로 썼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복하고,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그는 나라를 짓밟힌 것에 몹시 분개하여 이러한 심정을 읊은 시 몇 편을 남겼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영남 제1인이라고 하며 칭송하였다. 1689년에 도승지에 추증되고, 영조 때에는 원액이 하사되었다.
문집에 《계암집》 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