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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남도 석성(南桃石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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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석성 (南桃石城)
전라 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있는 성.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남도 석성 (南桃石城)
▣ 백과사전
전라 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성. 돌로 쌓아 올린 이 성은 둘레 약 54m, 면적 약 2만㎡이며, 사적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때 배중손이 삼별초 를 이끌고 전라 남도 진도에 와서 3년(1270~1273) 동안 몽고에 대항하여 싸울 때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즉, 배중손이 이 곳에 성을 쌓고 대몽 항쟁을 벌이는 근거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삼국 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 하면 진도군에는 백제 시대에 이미 3개의 고을이 있었으며, 지금의 진도군에 속하였던 고을은 매구리현과 도산현이었다. 매구리현의 중심은 구도포로 추정되며, 이 고을들이 통일 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점으로 볼 때 남도 석성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인 1438년(세종 20)에 진도의 남도포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으로 보아, 현재 남아 있는 남도 석성이 1438년 이후에 쌓아 올려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13세기 초부터 일본 해적인 왜구들이 바닷가에 연해 있는 마을들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에 있던 관아를 내륙 지방으로 옮기고, 백성들도 내륙 지방으로 옮겨가서 살게 하였다. 이러한 생활은 조선 시대에도 계속되어 왔다. 내륙 지방으로 피해 갔던 백성들은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진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은 남도 석성을 쌓은 시기가 1438년 이후일 것이라는 추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더구나 남도포 석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와 함께 오른쪽으로 향하는 바닷길의 요새이며,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올라가는 지점에 놓여 있어 바닷길의 중요한 요새지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1555년(명종 10) 5월에 약탈을 위해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구들이 남도포와 금갑보를 차지하여 싸움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종사품 무관직이던 만호들이 이들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1683년(숙종 9) 6월에는 현재의 전라 남도 위도와 가리포에 육군의 진관 체제와 비슷한 수군 진관을 둠으로써, 남도진은 가리포 진관에 부속된 수군 의 근거지가 되었다. 남도 석성은 처음 쌓아 올렸을 때 성의 규모가 둘레 1,233척, 높이 8척이었으며, 샘과 우물 이 1개씩 있었다고 한다. 또, 1765년(영조 41)에는 성의 둘레가 1,040척, 높이는 12척이었으며, 성 위에 낮게 쌓은 탑인 치첩(雉堞)이 43개소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동문·서문·남문과 성터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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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