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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남이의 옥(南怡--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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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의 옥 (南怡--獄)
예종 즉위년인 1468년 남이 장군(1441~1468) 등이 새로운 왕조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죄로 처형된 사건.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남이의 옥 (南怡--獄)
▣ 백과사전
예종 즉위년인 1468년 남이 장군 (1441~1468) 등이 새로운 왕조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죄로 처형된 사건. 남이 장군은 태종의 외손주로,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고 힘이 세어 무반의 기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7세 때인 1457년(세조 3) 무과에 장원 급제한 뒤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여러 무반직을 역임하였다. 27세 때인 1467년(세조 13)에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또 건주위의 오랑캐를 물리친 공로로 공조 판서가 되었고, 28세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총애하던 세조 가 죽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시련이 닥쳐 오기 시작하였다. 평소 그를 시기하던 한계희· 강희맹 등 훈구 대신들이 그가 병조 판서를 맡고 있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자, 예종이 그를 병조 판서에서 해임시키고 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겸사복장(종2품 벼슬)으로 있게 한 것이다. 예종 역시 왕이 되기 전부터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궁궐에서 숙직하던 어느 날 밤 혜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혜성을 본 순간 그는 " 혜성이 나타났다는 것은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펼쳐 나가야 할 징조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이 말을 병조 참지 유자광이 엿듣고, 그 사실을 예종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예종에게, 남이 장군이 왕을 몰아 내고 새 왕조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모함을 하였다. 본래부터 그를 못마땅하게 여겨 왔던 예종이었으므로, 유자광의 이 말은 남이 장군을 없애 버릴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예종은 곧 남이 장군과 그 주변 인물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며 그들의 죄를 확인해 줄 증인으로 유자광을 내세웠다. 유자광은 남이 장군이 혜성을 보며 새 왕조를 세울 계획을 드러냈으며, 왕이 창덕궁으로 옮겨 갈 때 거사를 일으키겠다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결국 남이를 비롯하여 문효량· 강순·조경치·변영수·고복로·변자의·오치권 등의 인물들이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이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뿐만 아니라 예종은 남이 장군 을 진심으로 아끼고 따르던 심복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으며, 장인인 김개의 벼슬을 빼앗았다.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아주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임진왜란 전까지는 남이 장군이 반란을 계획하다 그것이 발각되어 처형당한 반역자로 기록되었고,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에서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치던 그가 누명을 쓰고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었으며,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를 당시의 비극적인 영웅으로 평가한 기록들은 《연려실기술》 《대동기문》 《청야만집》 등의 문헌에 실려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그를 반역자로 몰아 세운 유자광에 대해 후세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자광은 특히 조선 중기의 ' 무오사화'와 ' 갑자사화'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학자들을 죽이고 귀양 보낸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되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남이 장군과 ' 남이의 옥'에 관련된 사람들도 간신 유자광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인식되면서 남이 장군을 영웅적인 인물로 평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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