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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寺內]總督暗殺未遂事件)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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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 ([寺內]總督暗殺未遂事件)
1910년12월 독립 운동가 안명근(安明根)이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마사타케[寺內正毅]를 암살하려던 항일 투쟁.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 ([寺內]總督暗殺未遂事件) 1906년 1910년 1916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안명근 안중근 안창호 양기탁 윤치호 이갑 이동녕 이동휘 하세가와 요시미치 신민회 대성 학교 조선 총독부 청년 학우회 오산학교 105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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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 백과
▣ 백과사전
1910년 12월 독립 운동가 안명근(安明根)이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암살하려던 항일 투쟁.
 
안명근은 하얼빈 역전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으로, 본관은 순흥이며 신천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안중근의 영향을 받아 그의 쾌거를 본받을 결심으로 항일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국권 찬탈 후 무장 투쟁 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하고자 마음먹고 동지를 모아서 총독 등 일제의 침략 수뇌부를 폭살, 제거할 계획과 함께 남만주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무장 독립군을 키워 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안씨 일족에 대해서 혹심한 감시를 하였기 때문에 순조롭게 일을 진행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안명근은 서간도로 잠시 이주하였다가 황해도의 부호들에게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는 신천 등지의 애국 지사 박만준·배경진·한순직 등과 군관 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하고, 황해도 신천 출신 이원식에게 1만 원을 청구해서 6,000원을 마련하였고, 송화 출신 신석효에게서도 3,000원을 조달하였다. 그러던 중에 1만 원의 군자금을 요구받은 신천 출신의 민씨가 이 사실을 재령의 일본 헌병대에 밀고하여 안명근은 전국에 지명 수배 되었다.
 
할 수 없이 국내에 은신 중이던 안명근은 일본 육군 대장과 육군 대신을 지냈으며 조선 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된 인물인 데라우치가, 그 해 12월 27일 일제 침략의 관문인 압록강 철교의 준공식에 참석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안명근은 데라우치를 경의선 요지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평양역 근처로 나가다가, 사리원에서 검속당하여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안명근은 모든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데라우치를 암살하려고 한 것은 혼자서 계획한 일이라고 자백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그가 소지하고 있던 자금을 데라우치 암살 자금으로, 권총 등 가지고 있던 무기류는 거사용 무기로 억지로 조작하고 안명근을 암살 기도범으로 기소하여, 일제 법정에서 그를 강도 및 살인 미수 등의 죄목으로 취급하였다.
 
이 때 안명근은 "너희들이야말로 우리 2,000만 민중이 주지 않으려는 나라를 억지로 빼앗았으니 정말 큰 도둑이 아니냐? 내가 이 큰 도둑을 제거하고 우리 나라를 구원하여 천하의 공법을 펴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나를 도둑이라 하느냐?"고 당당히 맞서서 방청하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일제는 안명근이 신민회 회원임을 눈치채고, 이를 계기로 애국 지사들을 체포할 계획을 세워 소위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일제는 신민회가 총독 암살을 준비하고 있다는 구실을 내세워 유동열 ·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이동휘· 김구·김홍량· 최명식·도인권·안태국 등 민족 지도자 600명을 검거하여 심한 고문 끝에 그 중 대표적인 인물 105명을 기소하여 투옥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의하여 신민회는 타격을 받아 힘을 잃고 자연히 해체되었다.
 
재판에서 김구 등 7명은 15년 징역, 도인권은 10년 징역, 김용제 등 4명은 7년 징역, 최익형 등 5명은 5년 징역에 처해졌으며, 이 외에 약 40여 명은 제주도나 울릉도 등지로 유배를 당하였다.
 
안명근 은 그 후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0년 만에 출옥하였다. 그 후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계속하다가 길림성에서 병사하였다.
 
안명근에게는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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