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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러시아 원정(Russia 遠征)
러시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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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원정 (Russia 遠征)
1812년 6월에 행하여진 나폴레옹1세(1769~1821)의 러시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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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원정 (Russia 遠征) 세인트헬레나섬 1812년 통령 정부 나폴레옹 1세 루이 18세 율리우스 카이사르 알렉산드로스 3세 루이17세 국민 공회 왕당파 나폴레옹 전쟁 워털루 전투 프랑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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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6월에 행하여진 나폴레옹 1세(1769~1821)의 러시아 원정.
 
프랑스의 군인이자 황제 (재위 1804~1814/1815)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0년 이탈리아를 점령하는 오스트리아군의 불의를 무찌르기 위하여 눈 쌓인 알프스를 넘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을 간단히 무찌른 후 프랑스의 혼란을 안정시킨 나폴레옹은, 다른 나라를 잇달아 공격, 지배하였다.
 
나폴레옹의 대륙 정책은 러시아와의 동맹이 필요하였으나, 특히 오스트리아 황녀와의 결혼은 러시아를 자극하였다.
 
나폴레옹은 첫 아내인 조제핀이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녀와 1809년 이혼하고, 이듬해인 1810년에 오스트리아 황녀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러시아는 반프랑스적 태도로 일변되어 버렸다.
 
1811년부터 러시아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고, 1812년 5월 러시아가 대륙 봉쇄를 어기자, 거기에 대한 징계의 의미로 원정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1812년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70만 병력을 편성하여 이끌고 폴란드를 거쳐 모스크바 강가 보로지노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사령관 쿠트조프가 지휘하는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9월 2일 모스크바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멀리 모스크바에 도착하였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러시아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먹을 것도 없는데다,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추위로 인하여 많은 병사가 죽었다. 며칠 뒤 러시아군은 물러나면서, 프랑스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모든 시설과 자재를 불사르고 파괴하는 초토화 전술을 썼다. 그래서 모스크바 시가지가 불타 나폴레옹 자신도 불에 휩싸일 뻔하였다.
 
10월 19일 나폴레옹은 귀국길에 올랐으나, 끈질긴 러시아군의 추격과 추위로 패주하였다.
 
10만 명이 포로가 된 모스크바 원정의 실패는 이듬해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패배와 더불어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1811년에 나폴레옹 자신이 파면시켰던 게브하르트 레베레흐트 블뤼허(1742~1819)에 의하여 패배하였다.
 
모스크바 원정에서 실패한 후,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오스트리아군에 의하여 파리를 점령당한 후 나폴레옹은 황제직에서 물러나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이 없는 프랑스는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부터 귀환되었다. 이듬해 1815년 3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 해 6월 나폴레옹이 이끈 12만 5,000명의 프랑스군과 영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인 아서 웰리슬리 웰링턴(1769~1852) 장군 지휘하의 영국군 약 9만 5,000명, 블뤼허가 지휘한 프로이센군 약 12만, 도합 20만여 연합군이 벨기에 남동쪽 위털루 남방 교외에서 대전하였다. 1815년 6월 16일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퇴각시킨 다음, 18일 영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또 다른 프로이센군의 도움으로 4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하였다.
 
이 전투가 워털루 전투로서 나폴레옹 1세의 지배를 결정적으로 종식시킨 싸움이었다.
 
그 해 6월 22일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또다시 유배되었다. 엘바섬에서 유배된 지 불과 100일 남짓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폴레옹이 이렇듯 여러 나라를 정복한 것은, 처음에는 세계를 하나로 하여 전쟁 없는 나라를 만들려고 한 것이었지만, 욕심으로 인하여 전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평생 코르시카인의 솔직함을 잃지 않아, 농민 출신 사병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으나, 역사적 영웅으로 보면 인간성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행동의 주인공이었다. 광대한 구상력, 끝없는 현실 파악의 지적 능력, 감상성 없는 행동력은 마치 마력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상 유례 없는 그의 독특한 개성이 혁명 후의 안정을 바라는 과도기의 사회 상황에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 방식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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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