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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방랍의 난(方臘--亂)
방랍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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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랍의 난 (方臘--亂)
중국 북송 말기 저장성에서 방랍 등이일으킨 농민 반란.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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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랍의 난 (方臘--亂)
▣ 백과사전
중국 북송 말기 저장성에서 방랍 등이 일으킨 농민 반란. 방랍은 목주 청계에서 옻나무밭을 경영하는 중지주(中地主)이며, 배화교에 불교와 크리스트교의 교의를 합쳐 만든 마니교의 계통으로 보이는 종교 단체의 지도자였다. 이 단체는 조직·구성원·소재지 등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있는 비밀 결사대로 사마당이라고 불리었다. 원래 목주 지방은 옻나무· 닥나무· 소나무· 삼나무 등의 생산이 이루어져 풍족한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휘종 말년에 채경이 임금을 돕고 모든 관원을 지휘·감독하는 재상의 자리에 있을 때에 궁정 장식품을 만들어 내고, 궁전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를 민간으로부터 사들이는 데 있어서 강제로 빼앗기도 하였다. 또 정원 배치를 위한 돌 난간 기둥 사이에 동자석을 받쳐서 가로 건너지르는 죽석과 꽃나무를 채취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것들을 나르는 데 농민들을 동원시킴으로써, 농민들의 생업을 크게 압박하고 괴롭혔다. 이에 방랍은 그 일을 추진하였던 주면을 제거하고자 1120년 반란을 일으켰으며, 여기에는 당시 사마당이라 불린 마니교 의 신도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방랍은 스스로를 성공(聖公)이라 칭한 후, 임금의 자리에 오른 해에 붙이는 연호를 영락이라고 바꾸고, 독립적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목주·항주 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러나 정부군의 무력 앞에 굴복하여 이듬해 8월 동관이 이끄는 관군에 붙잡혀 살해되면서, 반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동안 저장 지방의 민중 약 100만이 이 반란에 가담하였다고 하는데, 방랍이 살해된 후에도 강남 지방에서는 사마당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 때 자질구레한 잡세가 임시로 생겨났는데, 이것은 경제전이라고 불리며 남송에서 농민들에게 벅찬 세금이 되었다. 방랍의 난은 강남의 농민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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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