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준천사(濬川司)
준천사
자 료 실
▶ 지식지도
▶ 원문/전문 (없음)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 관련 동영상 (없음)
about 준천사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준천사 (濬川司)
1760년 영조 36년에 서울의 성내에 설치한관청.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준천사 (濬川司)
▣ 백과사전
1760년 영조 36년에 서울의 성내에 설치한 관청. 도성 안의 하수도인 개천을 준설하여 백악산· 인왕산 · 목멱산· 낙산 등 서울을 둘러싼 산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세워진 관청이 준천사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청계천 을 개천이라고 불렀는데, 여름철 홍수가 날 때면 개천이 범람하여서 큰 물난리를 겪곤 하였다. 이에 영조는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하여 개천에 대규모의 준천 역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개천의 강바닥을 준설하고 제방을 보수하는 힘든 공사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개천을 준설하는 작업은 매우 노동력이나 비용도 많이 드는 대규모 공사였지만 훌륭한 왕은 치산 치수를 잘 하는 왕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개천의 준설을 명령하였다. 원래 개천은 서울의 하수와 인근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 11년인 1411년에 인공으로 판 하천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퇴적물을 쌓여갔지만 이를 제 때에 처리하지 않아서 강바닥이 높아졌다. 강바닥이 높아지면서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조금만 비가 많이 내려도 강이 범람해서 서울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개천이 범람하면 여러 가지 토질병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준설 작업의 필요성은 영조 이전에도 느껴왔지만 워낙 비용이 많이 드는 공사였기 때문에 실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조 35년에 좌의정 신만이 제안함에 따라서 준설 작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영조는 이 작업의 책임자로 홍계희를 임명하였으며 작업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였다. 홍계희의 지휘 아래 이듬해 3월에 준설 작업을 시작하여 강바닥을 준설하였고 제방을 보수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업에는 연 인원 20만 명이 동원되어서 57일 만에 완료하였다. 이 작업에 쓰인 비용은 5만 명의 품삯 돈 3만 5,000냥이었으며 쌀 2,300여 포였다. 개천 준설 작업이 끝나고 난 후 남은 경비로 준천사를 신설하였다. 준천사는 개천을 정기적으로 보수하고 관리하는 관청이었다. 준천사를 설치한 것은 준천의 효과를 오랫동안 지속하고 또다시 오물이나 모래를 쌓이도록 방치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준천사는 준설 작업을 끝내고 남은 돈 1만 2,000냥을 쌀로 바꾸어서 미곡 4,000석을 준비하여 이를 장리로 놓았다. 여기서 나온 이자를 가지고 두 해에 한 번씩 제방을 수리하고 준설 작업을 하였다. 준천사에는 여러 명의 관리가 있었는데, 정1품에 해당하는 도제조가 3명, 종2품 이상에 해당하는 제조가 6명, 정3품 당상관인 도청이 1명, 정7품에 해당하는 낭청이 3명 있었다. 이들은 모두 현직 관리를 임명하였으며 겸직하도록 하였다. 도제조는 현직 의정부 3 정승 중의 한 사람이 맡았으며, 제조는 병조 판서·한성 판윤· 훈련 대장·금위 대장·어영 대장·비국 당상관 중에서 한 사람이 맡았다. 도청은 당상관인 어영천총이 맡았으며 낭청은 동·서·남 3도 참군이 겸직하였다. 이 외에도 5명의 서리, 4명의 사령, 1명의 고직, 1명의 수표 고직 등이 준천사에서 일하였다. 부속 기관으로는 주교사가 있었다. 주교사에서는 개천으로 드나드는 선박 을 관리하였고 개천에 놓인 교량을 보수하고 관리하는 사무를 맡았다. 준천사는 독립된 관청으로 있다가 조선 후기 고종 18년인 1882년에 한성부에 통합되었다.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