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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체스터 A. 아서(Chester A. Arthur)
체스터 A.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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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A. 아서 (Chester A. Arthur)
[1829 ~ 1886] 미국의 21대 대통령(1881~85)이다. 1881년 7월 2일 가필드가 암살되자, 그해 9월 19일에 대통령 직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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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A. 아서 (Chester A. Arthur) 제임스 가필드 러더퍼드 B. 헤이스
▣ 백과사전
[1829 ~ 1886] 미국의 21대 대통령(1881~85)이다. 아서는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되기 전까지 공화당 소속 변호사였다. 그러나 1881년 7월 2일 가필드가 암살되자, 그해 9월 19일에 대통령 직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북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온 침례교 목사의 아들인 체스터 A. 아서는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이 암살 당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미국의 제21대 대통령(1881~1885년)이 되었다."
 
큰 키에 위엄을 갖추었고 턱수염을 말끔히 면도하고 구레나룻을 기른 잘 생긴 외모의 체스터 A. 아서는 그야말로 ‘대통령처럼 보이는’ 대통령이었다.
 
아서는 북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온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1829년 버몬트 주 페어필드에서 출생했다. 그는 1848년 유니온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뉴욕시에서 개업했다. 남북전쟁 초기에는 뉴욕 주 병참감(兵站監)의 직책을 맡았다.
 
1871년에 그랜트 대통령은 그를 뉴욕항 징세관으로 임명했다. 아서는 로스코 콘클링이 이끌던 공화당 강경파 조직을 대표하여 그 수가 천여 명에 이르던 뉴욕세관 직원들을 효과적으로 통솔했다.
 
사생활과 공직자로서의 경력 모두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의 연방 공직 임명권이 개혁세력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을 때 그는 여전히 이 제도의 신봉자였다. 그는 세관을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필요 이상의 직원을 고용했고 이 직원들은 공무원으로서가 아니라 당의 인력으로서 유지되고 있었다.
 
1878년에 헤이스 대통령은 세관을 개혁하기 위해 아서를 해임하였다. 콘클링과 그의 추종자들은 188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그랜트 전 대통령을 재지명하는 투쟁을 통해 이 조치를 번복시키려 했다. 이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은 마지 못해 아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데 찬성했다.
 
부통령으로 재임한 짧은 기간 동안 아서는 콘클링의 곁에서 공직 임명권을 둘러싼 가필드 대통령과의 싸움을 지원했다. 하지만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그는 자신이 흑막 정치를 초월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오랜 정치권 친구들과의 교류를 피하면서 아서는 개성있는 옷차림으로 패션 감각을 가진 대통령으로 유명해지게 되었고 워싱턴, 뉴욕, 뉴포트의 엘리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과거 일개 뉴욕항 징세관이었던 아서가 대통령의 지위에서 공직 개혁을 부르짖는 상황이 전개되자 공화당 강경파는 분노했다. 하지만 가필드 대통령의 저격으로 고조된 여론의 압력은 비대한 의회로 하여금 대통령의 말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1883년에 의회는 ‘펜들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에 따라 양당이 함께 참여하는 공직위원회가 설치되었고, 현직에 있는 공직자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금지하였으며, ‘선별 제도’의 시행을 통해 공개 필기시험을 거쳐야만 특정 공직에 오를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공직자가 정치적인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당론과는 무관하게 아서는 관세율을 인하해서 정부가 재정흑자를 기록하게 되는 수치스런 상황을 방지하려 했다. 의회는 정부가 관세율을 인하할 때마다 그만큼을 다시 끌어올리곤 했다. 그러나 아서는 결국 ‘1883년 관세법’에 서명하였다. 성난 서부와 남부는 민주당을 통해 이 조치를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고 관세 논란은 이때부터 양당 사이의 주요한 정치현안으로 부상했다.
 
아서 행정부는 최초의 연방이민법을 제정했다. 그는 1882년에 빈민, 범죄인, 정신이상자를 제외하는 조치를 승인하였다. 의회는 중국인의 이민을 10년간 중단시켰고 얼마 후에는 영구히 금지시켰다.
 
아서는 대통령으로서 자신이, 비록 당 자체를 초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당내 정파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런 소신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1년 후에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는 철저히 감추어 온 자신의 비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치명적인 신장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1884년 대선에서 아서는 자신이 패배를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후보자 재지명에 실패하였고 1886년에 사망했다. 출판인이었던 알렉산더 K. 머클루어는 “이제껏 아서만큼 심대하고 광범위한 불신을 받으며 집무를 시작한 대통령은 없었고 또한 그만큼…… 널리 존경을 받으며 퇴임한 대통령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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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가필드 > 21. 아서 > 클리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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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