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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김교성(金敎性)
김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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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성 (金敎性)
[1807(순조 7) ~ 1875(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경회(景誨)이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김교성 (金敎性) 김동건 김세연 김동헌
▣ 백과사전
[1807(순조 7) ~ 1875(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경회(景誨)이다.
 
충백(忠伯)의 후손으로 고조(高祖)는 치후(致垕), 증조는 종정(鍾正), 조부는 세연(世淵), 부친은 동건(東健)이며, 모친은 청송 심능악(沈能岳)의 딸이다. 부인은 평산 신명익(申命翼)의 딸이다.
 
태어난 지 50일 만에 모친을 여의어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1834년(순조 34)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1840년(헌종 6)에 동부도사(東部都事), 1842년 선공감주부가 되었으며, 이듬해 의빈부도사가 되었다. 1844년에는 외직으로 삼등현령(三登縣令)으로 나갔다가, 1848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복시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60년(철종 11)에 서흥부사가 되어 늠봉으로 칙행(勅行)을 맞았으므로 민들은 이를 알지 못할 정도로 애민을 몸소 실천하였고, 1862년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어 민가에 농우(農牛)가 부족함을 알고 관의 재원으로 소를 구입하여 백성들이 농사철을 잃지 않도록 힘썼다. 1866년에는 여주목사가 되어 병인양요로 동요된 민심을 진정시켰으며, 은결(隱結) 수백 결을 찾아 관용(官用)으로 삼았다. 그 해 동부승지 등 내직을 역임하였고, 1870년에는 돈녕부도정이 되었다.
 
만년에는 사천(沙川)에 초가집을 지어 종인(宗人)들과 창화(唱和)하면서 지냈다. 그는 평소에 겸약(謙約)의 덕이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묘는 왕곡동 왕륜면 사근천 내 복죽동에 있다.
 
□참고문헌 : 「從氏承旨公行狀」, 金學性, 『松石遺稿』 卷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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