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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심우장(尋牛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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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尋牛莊)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1984년 7월 5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7호 만해 한용운 심우장으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50호로 승격되었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심우장 (尋牛莊) 독립 선언서 민족 대표 33인 성북구 한용운 3·1 운동 백담사
▣ 백과사전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1984년 7월 5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7호 만해 한용운 심우장으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50호로 승격되었다.
 
대지의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인 남쪽에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이 북향하여 서 있고, 대문 맞은편에는 벽돌조 단층으로 지은 관리인 주택이 심우장과 직교하며 동향으로 서 있다.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이다. 용운(龍雲)은 법명이며, 만해(萬海, 卍海)는 아호이다.
 
만해는 1919년 승려 백용성(白龍城)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참가하여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한 분으로 유명하다.
 
처음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시베리아와 만주를 순력한 후 28세 때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10년에는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고, 1926년에는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님의 침묵》을 펴낸 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이곳 성북동은 원래 성밖 마을 북장골, 한적한 동네였다.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한용운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심우장의 이름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소박한 명상이 가능하다.
 
마당에는 성북구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나무로 소나무와 향나무가 있으며 한켠에 올래여행(역사문화여행) 스탬프가 있는 우체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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