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인이며 시인이다. 본관은 청도(淸道)로 추정된다.
안향의 문인으로 1279년(충렬왕 5)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아직 현달하기 이전에 일찌기 안향으로부터 "훗날 반드시 귀현(貴顯)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1311년(충선왕 3) 다시 선군(選軍)을 설치할 때 지언부사(知讞部事)로서 별감사(別監使)가 되었다. 이때 사복영사(司僕令史)를 장살(杖殺)한 일로 영흥도(靈興島)에 귀양갔다. 뒤에 풀려나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다. 1314년(충숙왕 1)에 윤신걸(尹莘傑)·윤선좌(尹宣佐) 등과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進講)했다. 1317년(충숙왕 4)에 총부전서(摠部典書)로 동지공거(同考試官)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을 때 홍의손(洪義孫) 등을 급제하게 했다.
1321년(충숙왕 8) 밀직사(密直使)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으며, 그 해 박효수(朴孝修)와 함께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대위왕(大尉王)[주 1]의 환국(還國)을 청원하는 상서(上書)를 올렸다.
형부(刑部)와 선군(選軍)의 일을 잘 처리하여 명성이 있었다. 밀직사로 있을 때 행궁(行宮)의 여비를 착복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또 옹인(甕人) 한만복(韓萬福) 등이 충숙왕(忠肅王)의 비(妃)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의 사인(死因)이 왕의 구타에 의한 것이라는 진술이 무고임을 밝히는 글을 써서 원나라 중서성에 보내는 등 충선왕(忠宣王)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 해 김순(金恂)·윤석(尹碩) 등과 함께 상왕 충선왕의 신임을 받고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 막대한 부(富)를 누리던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을 귀양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