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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고역사(高力士)
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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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역사 (高力士)
[684 ~ 762] 중국 당(唐) 현종(玄宗) 때의 환관(宦官). 현종(玄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권세를 부려 당(唐) 후기(後期)에 환관(宦官)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길을 열었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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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사전
[684 ~ 762] 중국 당(唐) 현종(玄宗) 때의 환관(宦官)으로서 위황후(韋皇后)와 태평공주(太平公主)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현종(玄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권세를 부려 당(唐) 후기(後期)에 환관(宦官)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길을 열었다.
 
본명(本名)은 풍원일(馮元一)이다. 고주(高州) 양덕(良德, 지금의 廣東省 電白縣) 출신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 때인 698년(聖暦 원년)에 환관(宦官)이 되어 입궁하였으며, 환관(宦官) 고연복(高延福)의 양자(養子)가 되어 성과 이름을 고역사(高力士)로 바꾸었다. ‘역사(力士)’라는 이름은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불상(佛像)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는다.
 
입궁한 뒤에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 이단(李旦)의 아들인 임치왕(臨淄王) 이융기(李隆基, 685~762)와 가까이 지내며 그의 심복(心腹)이 되었다. 그리고 710년 이융기(李隆基)가 정변을 일으켜 위황후(韋皇后, 660?~710) 일파를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713년 태평공주(太平公主, 665?~713) 일파의 모반(謀反)을 진압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융기(李隆基)는 712년 아버지인 예종(睿宗)에게 양위(讓位)를 받아 황제가 되었는데, 곧 ‘개원(開元)의 치(治)’라고 불리는 당(唐)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끈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다.
 
현종의 통치기에 고역사는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권세(權勢)를 누렸다. 현종은 전제 황권을 강화하고자 측근인 환관(宦官)의 권한을 확대하였다. 감군제도(監軍制度)를 만들어 환관을 파견해 지방군을 감시하였으며, 중앙의 금병(禁兵) 통수권도 환관(宦官)에게 부여하였다. 또한 환관을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추밀사(樞密使)로 임명하여 환관들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고역사는 현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내정(內廷)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의 지위에 올랐으며, 개원(開元, 713~741) 연간(年間)의 후기(後期)에는 신료(臣僚)들이 올리는 상주(上奏)를 미리 심의하여 필요한 것들만 황제에게 보고할 정도로 조정(朝廷)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처럼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742~756) 연간(年間)에 고역사는 황족들조차 그의 눈치를 보아야 할 정도로 막강한 권세(權勢)를 누렸으며, 그 때문에 당(唐) 후기(後期)에 나타난 환관(宦官) 세도(勢道) 정치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740년(開元 28년)에 양귀비(楊貴妃, 719~756)를 후궁(後宮)으로 들여왔으며, 이임보(李林甫, ?~752)와 양국충(楊國忠, ?~756) 등을 등용하여 정치를 문란케 하였다. 또한 안녹산(安祿山, 705~757)을 조정에 추천하여 뒷날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날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755년 양국충(楊國忠)과 반목한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역사는 현종과 함께 쓰촨[四川] 방면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장안(長安) 서쪽의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楊氏) 일족(一族)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은 양국충(楊國忠)을 죽이고 현종에게 양귀비(楊貴妃)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현종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고역사의 설득으로 결국 양귀비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756년, 현종이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고 숙종(肅宗, 재위 756~762)이 즉위하자 고역사는 환관(宦官) 이보국(李輔國, 704~762)의 탄핵을 받아 무주(巫州, 지금의 湖南 黔陽)로 유배되었다. 762년(寶應 원년) 현종이 죽자 고역사는 사면되었지만, 현종의 죽음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음식을 끊고 슬퍼하다가 낭주(朗州, 지금의 湖南 常德)에서 죽었다. 숙종(肅宗)의 뒤를 이은 대종(代宗, 재위 762~779)은 고역사의 현종에 대한 충정(忠情)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의 관위(官位)를 추증(追贈)하였다. 그리고 현종의 유지(遺志)에 따라 현종의 능묘(陵墓)인 태릉(泰陵, 지금의 陝西省 蒲城縣)에 그의 배장묘(倍葬墓, 중심 능묘를 수호하기 위한 달린 무덤)를 만들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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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의 황제.
예종 > 측천무후 >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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