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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강주(姜籒)
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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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 (姜籒)
[1566 ~ 1650] 조선 후기 문신이자 문인이다. 인생 전반기는 관료로, 후반기는 시인으로 살았다. 당파적으로는 소북에 속했고, 중년에 관직에 있을 때 옥고를 치렀다. 그의 북인 당색 때문에 지속적인 관료 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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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 ~ 1650] 조선 후기 문신이자 문인.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고(師古), 호는 채진자(采眞子) · 죽창(竹窓)이며, 1566년(명종 21)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강문한(姜文翰), 할아버지는 강린(姜璘)이고, 아버지는 강운상(姜雲祥)이다. 어머니는 보성오씨(寶城吳氏) 오몽룡(吳夢龍)의 딸이다. 강주의 아들 강백년(姜栢年), 손자 강현(姜鋧), 증손자 강세황(姜世晃)까지 삼대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강주는 물론 그의 두 아들 강선(姜銑) · 강현(姜鋧), 강현의 아들 강세황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주요 활동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5년 문과에 급제하여서 승문원(承文院)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문한직(文翰職)과 보령 현감, 사헌부지평, 홍문관지평, 이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1604년 겨울에 있었던 장흥 병영 이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는데, 이 사건은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고, 관직 생활을 일찍 마감하는 원인이 되었다.
 
임진왜란 중 전라병영이 강진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후 이를 장흥으로 옮겼다. 이때 병영을 본래대로 강진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 과정에 사헌부 집의(執義)였던 강주에게 뇌물이 제공되었다. 그는 뇌물을 거절했지만 이 일로 3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결국 수뢰 혐의를 벗고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이후 58세에 다시 관직에 나갔지만 마침내 관료 생활을 마감하였다.
 

학문과 저술

중년에 관직에서 일찍 물러나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이 때문에 그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당풍(唐風)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그도 이 조류에 충실히 동참하였다. 그의 시에서 사회 비판적 성격의 시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중년에 겪은 일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소북(小北)주1 당색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 530수 정도의 시를 남겼다. 말년인 84세에 「논문장설(論文章說)」을 지었는데, 자신의 시와 문학에 대한 자평(自評)으로 볼 수 있다.
 

상훈과 추모

사망하자 임금이 별치부(別致賻)의 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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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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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