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 고재완의 지식창고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지식창고】 2017.12.11. 11:19 (2017.12.11. 11:19)

서양화가 고희동 가옥 (2016. 5. 25)

 
서울 종로구 창덕궁과 현대 사옥 사이길로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 80세)이 1918년 설계하여 41년간 살던 원서동의 고희동 가옥(등록문화재 제84호, 2개동, 1층 연면적 155.1㎡)이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창덕궁과 현대 사옥 사이길로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 80세)이 1918년 설계하여 41년간 살던 원서동의 고희동 가옥(등록문화재 제84호, 2개동, 1층 연면적 155.1㎡)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때 지은 목조 기와집이 철거 위기까지 맞았으나 다행히 복원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후 휘문고보 그림 선생시절 간송 전형필을 만나 문화재 지킴에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위창 오세창, 관재 이도영, 석정 안종원, 청전 이상범,육당 최남선등과 교유하며 예술활동를 하였습니다.
 
▼ 가옥 설명
 
철거위기까지 몰렸다가 복원하여 공개 (수~일요일 공개, 10시~16시, 무료입장)
 
 
 
 
 
 
 
월, 화요일은 휴관
 
집안
 
 
 
호가 춘곡(春谷)이라 춘곡의 집이다.
 
KBS 드라마"베이비시터", 조여정-김민준-신윤주-이승준, '춘곡 고희동 고택 앞에서'
 
마당에 있는 흉상
 
실내
1900년 (15세) 외국어학교 우수상장
 
1901년 (16세)
 
화실 재현
 
 
사랑방 재현
 
사랑채 방향 복도
 
안채 방향 복도
 
 
▼ 산색연천(山色連天, 산의 아름다움이 하늘에 닿았다)라고 쓴 효봉스님
 
 
 
▼ 1915년, 부채든 자화상, 등록문화재 제487호, 국립현대미술관 소유
 
<부채를 든 자화상>은 춘곡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1915년 여름날 부채질로 더위를 식히며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밝은 황토색 바지(삼베 바지로 추정)와 흰색 상의를 입은 젊은 남자를 그린 유화작품으로 흰색 상의의 단추를 풀어 앞가슴의 일부를 드러내고 있으며 오른팔은 무릎에 올리고 부채를 들고 있다.
 
유족이 보관하던 작품을 197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하여 훼손된 오른쪽 부분(인물의 왼쪽 팔부분)을 보수하고 전체적으로 먼지를 닦아내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임. 화면 왼쪽 위에 ‘1915 Ko Hei Tong’ 이라는 영문 서명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그린 작품으로서, 인상주의 화풍을 수용한 1910년대 미술가의 정체성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화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있다.
 
 
▼산수도 대련(2,010만원에 낙찰)
 
 

 
▶고희동 알아보기
 
본관은 제주. 호는 춘곡(春谷). 서울 출생
 
14세 때(1899년)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1904년궁내부 주사로 취직하여 궁중 내의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을 하였다.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현실 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하였다.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당시 화단은 중국의 화보(畫譜: 그림을 모아서 만든 책)를 충실히 임모(臨模: 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환멸을 느낀 그는 궁내부 시절 외국인들과 접촉으로 대할 수 있었던 서양의 그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西洋畫科)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서양화 수업에 들어갔다. 이것이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서양화 제작이 되었다. 5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귀국하자 그는 신미술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다.
 
1918년 당시 서화계의 중진과 대가들을 종용하여 최초의 한국인 서화가들의 모임이자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書畫協會)를 결성하였다(초대회장 안중식, 총무 고희동).
 
서화협회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은 회원 작품전으로, 1921년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이 열렸다. 이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근대적인 전시회였다. 회원전과 더불어 계몽 사업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지인 『서화협회보(書畫協會報)』를 창간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에서」라는 제목의 유화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회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 그 뒤 줄곧 서화협회만을 이끌었다.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서화협회가 해산되기까지 총무 또는 회장으로 민족진영의 미술가 단합에 정력을 기울였다. 광복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오랫동안 심사 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부산 피난 시절을 전후하여 한국민주당에 가입, 4·19 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그리고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일본에서 귀국 후 10년 만에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 서양화적 수법을 가미한 풍(風)을 개척하였다.
 
 
▼ 팜플릿 자료
 
 
 
 
 
 
 
 
 
 
 
★ 간송 전형필은 여길 누르세요,
 
 
출처: 민족문화대백과,마이데일리,K옥션,유튜브,네이버지도,문화재청,
• 활동 지역 : 강서구(江西區)
▣ 지식창고
(A) 내 지식자료
Ο 지식창고 작업
about 고재완의 지식창고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