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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지식창고】 2018.04.05. 01:16 (2018.04.05. 01:16)

신륵사 알아보기(나옹화상과 이색) (2017. 12. 18.)

 
오늘은 지공화상, 나옹화상, 무학대사의 삼화상의 초상화가 있는 조사당(祖師堂)과 명당자리라 알려진 나옹화상의 부도(사리탑)인 석종(石鐘), 석등(石燈), 그리고 우왕의 사부인 목은 이색(李穡)이 고향 경북 영덕의 선배인 나옹화상의 비문(碑文)을 지은 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주 신륵사는 고려 공민왕과 우왕의 왕사(王師)이며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이 입적한 사찰이고, 대모산(大母山)에서 여주로 옮긴 세종대왕 영릉(英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돼 보은사(報恩寺)로 개칭되기도 했지요. 물론 벽돌로 지은 탑이 있어 벽사(甓寺)라고도 합니다. 오늘은 지공화상, 나옹화상, 무학대사의 삼화상의 초상화가 있는 조사당(祖師堂)과 명당자리라 알려진 나옹화상의 부도(사리탑)인 석종(石鐘), 석등(石燈), 그리고 우왕의 사부인 목은 이색(李穡)이 고향 경북 영덕의 선배인 나옹화상의 비문(碑文)을 지은 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눈오는 날 조사당과 향나무
 
▼ 조사당(祖師堂)
① 보물 제180호
② 덕이 높은 승려 나옹화상(1320~1376, 무학대사의 스승, 신륵사에서 입적)과 지공화상(인도, 나옹의 스승) 및 무학 대사(1327~1405, 이태조의 왕사)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
③ 정면 1칸. 측면 2칸의 八작건물로 신륵사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건물
 
 
 
 
▼ 조사당 주련(柱聯,기둥에 써있는 좋은 글)
선지서천위골수(禪指西天爲骨髓) : 선은 서천(인도)을 잊지말고 마음속 깊이 새기고
교설동토작생황(敎說東土作笙簧) : 교는 동토(동방의 나라들)에 넓게 울려 퍼지도록 하라
 
☞ 선은 선종, 교는 교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런지?
 
 
▼ 조사당 내부 삼화상(三和尙), 좌측부터 무학대사, 지공화상, 나옹화상 초상화인데 무학대사와 나옹화상이 비슷하게보인다.
 
▼ 1803년 신겸(愼兼)이 그린 문경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
나옹혜근은 1340년(충혜왕 1)에 대승사 묘적암의 요연(了然)스님에게 출가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묘적암에 나옹화상 진영이 봉안됨
 
 
 
나옹화상은 1320년 경상도 영해부(영덕)출신으로 1347년(충목왕 3)에 원(元)의 연경에서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조선 왕조 건설에 이바지한 무학대사가 제자이지요. 1358년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1371년, 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가 되고 양주 회암사 주지로 1376년 큰 법회를 열자 전국적으로 수많은 신도들이 몰려(야단법석,野壇法席) 엄청난 인기를 받자, 그 인기를 시샘하는 사람들 때문에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가던중 1376년 신륵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시호는 선각(禪覺)으로 양주 회암사에 선각 왕사비가 있습니다.
 
▼ 나옹의 "청산은 나를 보고"
 
▼ 조사당 동종(銅鐘) : 1773년
 
 
▼ 나옹화상 석종,석비,석등으로 올라 가는 계단(나옹화상 57세에 입적)
 
▶보제존자(普濟尊者.나옹의 법호)의 부도탑
산 언덕 소나무 숲속에 자리잡은 나옹스님의 부도는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와 해남 미황사 부도탑과 더불어 멋진 부도탑으로 알려져있지요.
 
 
부도전 위치는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천거한 무학대사가 정한 터인 만큼 뛰어난 명당자리일 것이라고 합니다.
 
 
▼ 석종(石鐘)
① 보물 제228호
② 높이 1.9m, 지름 1.1m
③ 1379년(우왕5) 제작
④ 부도(浮屠, 사리를 넣는 곳)가 종처럼 생겨서 석종이라하며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탑
⑤ 나옹화상의 정수리 뼈에서 나온 사리는 신륵사에 안치함은 그의 마지막을 표시한 것이요, 석종(石鐘)으로 덮은 것은 감히 와전됨이 없도록 경계함이다. -이색-
 
 
 
▼석등(石燈)
① 보물 제 231호
② 높이 1.93m
③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팔각화석은 조각이 쉬운 납석으로 기둥에는 용을 새기고 화창위에는 비천상을 두툼하게 조각하여 화려함
 
 
 
▼석종비(石鐘碑)
① 보물 제229호
② 전체 높이 212㎝, 비신높이 121㎝, 너비 61㎝
③ 고향 후배이자 문장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글을 짓고 서예가 한수(韓修)가 글을 쓴 비석으로 자경(字徑) 2㎝ 정도의 해서로 넉넉한 짜임새와 부드러운 필획이면서 흐트러짐이 없음.
 
 
 
 

 
▣ 여주 신륵사 보제사리석종기(普濟舍利石鐘記) 해석
선각왕사(禪覺王師)인 보제존자(普濟尊者)가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스님이 입적할 때 혁혁한 영험(靈驗)과 이서(異瑞)에 대하여 한 때 의심하였던 각신(覺信)스님이 더욱 분발하여 천년 후에까지 모든 불자(佛子)들에게 신심을 일으키게 하고자 진영당(眞影堂)을 짓고 영정을 모시는 한편, 석종탑(石鐘塔)을 만들어 사리(舍利)를 조장(厝藏)하였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난 셈이다.
 
각신(覺信)스님은 석종(石鐘) 불사(佛事)를 맡아 주선하고 각주(覺珠)스님은 비석에 사용할 돌을 구하는 한편 장차 스님의 행적(行跡) 사실을 비석에 새기고자 비문을 이색(李穡)에게 청탁하기로 하였다.
 
이 때 염(廉) 정당(政堂)이 천녕(川寧)에 있으면서 자주 신륵사에 왕래하였다. 각주(覺珠)스님이 염(廉) 정당(政堂)에게 이를 부탁하였더니 공(公)이 기꺼워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곧 개경(開京)으로 가서 마땅히 스님을 대신하여 한 말씀을 한산자(韓山子)에게 청(請)하겠습니다. 그러면 한산자는 반드시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염(廉) 정당(政堂)이 나에게 진당기(眞堂記)를 청원(請願)하므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월헌(江月軒)은 나옹스님의 주석(住錫)하던 당호(堂號)인 것이다. 보제(普濟)의 육신은 이미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여천강(驪川江)과 달은 전일(前日)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지금도 신륵사(神勒寺)는 장강(長江)을 굽어보고 있으며, 석종탑(石鐘塔)은 강변 언덕에 우뚝 서 있다. 달이 뜨면 달 그림자가 강물 속에 거꾸로 비치어서 천광(天光)과 수색(水色)과 등불 그림자와 향불 연기가 그 가운데 서로 교잡(交襍)하니, 이른바 강월헌(江月軒)은 비록 진묵겁(塵墨劫)이 지나가더라도 보제선사(普濟禪師)의 생존시(生存時)와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제 보제(普濟)의 사리(舍利)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혹은 하늘 높이 올라가 운무(雲霧)중에 있고, 혹은 여염(閭閻)의 연진(烟塵) 속에 있으며,혹은 사리함에 모시고 목에 걸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기도 하고, 혹은 그 사리를 잠잘 때에도 항상 팔 곁에 모시고 자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극진히 사리(舍利)를 봉지(奉持)하는 것을 생전에 스님을 존경하던 것과 비교하면, 백배 이상으로도 견줄 수 없다. 하물며 신륵사는 나옹이 입적(入寂)한 곳이므로, 마땅히 각주(覺珠)스님이 사리(舍利)에 대하여 온 정성을 다하였다.
 
신륵사는 보제(普濟)스님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과 규모가 높고 넓어졌다.그러므로 장차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나며, 석종탑비(石鐘塔碑)도 견고하여 신륵사와 더불어 시종(始終)을 같이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여천강(驪川江)과 이 달과 더불어 무궁할 것이다.
 
오호라! 허공에서 보이는 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눈병 때문이며, 진묵겁(塵墨劫)도 또한 인간의 분별이지 결코 긴 시간이 아닌 것이다. 세계에는 성(成)·주(住)·괴(壞)·공(空)의 변천이 있어 세계가 비록 성(成)·주 (住)·괴(壞)·공(空)에 따라 변천하지만 우리들의 인성(人性)은 영원히 불변자약(不變自若)한 것이다.
 
보제(普濟)의 사리(舍利)가 장차 세계와 더불어 성괴(成壞)함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인성(人性)과 같이 자약(自若)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비록 우부(愚夫)와 우부(愚婦)일 지라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에 이 사리에 예경(禮敬)하는 사람들은 보제(普濟)스님의 고상한 도풍(道風)을 흠모하고 귀의하여 그의 마음을 구(求)하는 것이어야 비로소 가히 보제(普濟)가 끼친 큰 은혜에 보답함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보제의 도덕은 보제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결코 우리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에 대해 보제의 사리석종기(舍利石鐘記)를 기록하는 바이다.
 
 
▼ 학창시절 읽은 나옹화상의 고향 영해(영덕)후배인 이색이 쓴 시
 

 
양주 회암사에도 조사당과 무학대사, 지공화상, 나옹화상의 부도가 있습니다.
​★ 회암사지 박물관
★ 회암사 방문기
★ 회암사 나옹의 부도비​와 선각왕사비
★ 회암사 지공화상 부도비​
★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비​
 
신륵사 부도 2기가 조사당 우측에 더 있는데 1966년 현위치로 옮겼답니다.
 
▼ 팔각원형장 석조부도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95호​
 
 
​▼원구형 석조부도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석가모니 일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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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찾아가기
경기도 여주시 오학동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신륵사,여주시,네이버지도,한국고전종합DB, 전통사찰연구회
• 활동 지역 : 강서구(江西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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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