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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지식창고】 2018.04.06. 00:17 (2018.04.06. 00:17)

권율 장군 묘 (2018. 4. 5)

 
휴일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는 임진왜란 명장인 권율(權慄, 1537~1599, 강화 출생) 장군 묘에 다녀왔다.
권율 장군 묘 (2018. 4. 5)
 
휴일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는 임진왜란 명장인 권율(權慄, 1537~1599, 강화 출생) 장군 묘에 다녀왔다. 행주대첩에 빛나는 권율 장군의 묘는 제일 아래 쪽(下), 중간 위치는 권순(형) 묘, 그리고 제일 위는 영의정을 지낸 부친 권철의 묘가 있다. 한산도 대첩에 빛나는 이순신 장군은 무과(武科) 출신이지만 권율 장군은 문과(文科) 출신으로 왜군에 승리했다. 붙어 있는 한국 근 현대 미술의 거장인 장욱진 화가의 미술관을 둘러 보고, 장흥 조각공원에는 4월 중순 벚꽃이 필 것 같아 함께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 부친 권철의 묘에서 본 풍경으로 산을 등지고 앞에 석현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세다.
 
▼ 정문이 닫혀있어 장욱진 미술관으로 들어옴:양주시청 관계자에게 문의하니 묘소 관람은 무료라 함
 
▼ 비각
 
▼ 비문 :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추기, 이유원(李裕元)이 쓰고 전서
 

 
권율 신도비(權慄 神道碑) 국문
 
조선국 팔도 도원수 증 영의정(朝鮮國 八道 都元帥 贈 領義政)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시(謚) 충장(忠莊) 권공(權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并序)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筳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원임 규장각 직제학(禮曹判書兼知經筳春秋館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原任奎章閣直提學) 이유원(李裕元)이 쓰고 아울러 전서하다.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效忠仗義廸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筳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영가부원군 행 자헌대부(永嘉府院君行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 팔도 도원수(議政府右參賛八道都元帥) 권공의 묘에 비문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우의정 신흠(申欽)이 말을 다듬어 새기기를, “공이 쳐 없앤 공적은 간이(簡易 : 최립의 호) 최립(崔岦)이 행주(幸州 : 지명)의 비석에 이를 기록하였고, 공의 일과 행위의 아름다움은 공의 사위 오성(鰲城) 재상 이항복(李恒福)이 유수(幽隧 : 묘지(墓誌))에 기록하였다. 마땅히 덧붙일 것은 없으나 먼 옛날 제도와 문물을 돌아보니, 공의 뛰어나고 빛나는 행적에 대해서 응당 명(銘)을 새기고 대로변에 세워 후세에 알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이름은 율이고 자는 언신(彥愼)이다. 원조(遠祖 : 고조 이상의 먼 조상)는 행(幸)이니 신라의 종성(宗姓)이다. 견훤(甄萱)을 토벌한 공이 있어, 고려 태조에게 권(權)씨 성을 하사받고 안동(安東)에 봉해지니 그대로 본적으로 삼았다. 13대인 부(溥) 정승으로 장수와 복을 누렸으며, 군(君)에 봉해진 분이 아홉 분이셨다. 3대를 지나 찬성을 지낸 양촌(陽邨) 근(近)은 공의 6대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교(僑)는 양근군수(楊根郡守)를 지냈고, 할아버지 적(勣)은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지냈다. 아버지 철(轍)은 의정부 영의정으로 네 분 임금을 모신 태평시대의 재상이다. 어머니는 조씨(曺氏)로 적순부위(廸順副尉) 승현(承睍)의 딸이며,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손이다.
 
가정(嘉靖) 정유년(중종 32, 1537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는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커서는 화려한 의복이나 사치스러운 습성이 없었다. 의정공(議政公)이 기특하게 여겨, “우리 가문에 인재가 있구나!”하였다. 경학 연구에 매우 부지런하였으나 젊어 불운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 하였다. 만력(萬曆) 임오년(선조 15, 1582년)에 식년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이때 나이 46세였다. 식견이 있는 자 중 더러 공이 장상(將相)이 될 그릇임을 알았다.
 
승문원 정자(正字) · 저작(著作) · 박사(博士)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직하였고, 다시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호조정랑, 전라도사(全羅都事),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신묘년(선조 24, 1591년)에 호조정랑에 제수되었다가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등급을 뛰어넘어 제수되었으나 임진년(선조 25, 1592년) 봄,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여름에 일본국의 우두머리 수길(秀吉)이 오만스럽게 명나라를 정복한다고 수가(秀嘉) · 행장(行長) 등 무리 60만 명으로 쳐들어오니 온 나라가 위급하였다. 선조 임금이 하교하시기를, “내가 권율(權慄)의 재주가 쓸 만하다고 들었다.”하시며,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삼으니 공이 그날로 임금을 뵙고 하직인사를 드렸다.
 
적이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를 함락했고, 순변사 신립(申砬)은 전사했다. 적이 기세를 몰아 한양에 육박하니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난하셨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충청도관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가 병사 10만 명을 이끌고 진위(振威 : 경기도 평택)에 도착하였다. 이광(李洸)이 부하 장수들에게 방책을 물으니 공께서 “주공께서 나라 안의 군사를 쓸어 오셨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 싸움에 달렸습니다. 지금 마땅히 대군을 이끌고 곧 바로 수원(水原)으로 가 통진(通津)을 거쳐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臨津)을 가로 막은 다음, 행재소(行在所 : 임금의 궁 밖 임시 거처)에서 명을 받든다면, 우리는 기세를 얻어 가히 도모함이 클 것입니다.”하였다. 이광(李洸)이 공의 말을 따르지 않더니, 적을 보기도 전에 궤멸되었다.
 
공은 광주(光州)로 돌아와 분개하며 말하기를,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고, 주상께선 피난하셨다. 신하된 자가 어찌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 기다릴 것인가?”하며, 인근 군(郡)에 격문을 돌려 병사 1천 5백을 얻었다. 이치(梨峙)에 나아가 주둔하며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길목을 죄니, 영남(嶺南)의 적과 금산(錦山)의 적이 힘을 합쳐 공격하여 왔다. 공께서 칼을 빼어들고 적의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앞장서니, 여러 장수들이 서로 말하기를, “선비가 어찌 이와 같은가?”하고, 사기가 백배하여 적을 고개 아래에서 패퇴시켰다. 조정에서 공에게 거진(巨鎭)을 맡기고자 가을에 나주(羅州)로 옮겨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소로 가기도 전에 전라관찰사 겸 순찰사로 제수되니 공께서 통곡하며 명을 받들었다. 전주에서 병사를 많이 선발하여 정병 1만을 직접 이끌고 서쪽으로 올라가 수원(水原) 독성(禿城)에 주둔하며 굳게 지킬 것을 계획하였다가 서울의 적을 위협하고자 바로 서로(西路 :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로 이동하였다. 수가(秀嘉)는 허를 찔릴 것을 우려하였고, 행장(行長)은 배후를 염려하여 의논하였다. 마치 제방이 물을 막는 것처럼 관서(關西)의 인심을 앉아서 결집시켰다. 선조는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급히 하사하시며, “장수들 가운데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걸로 처결하라.”하였다. 또 여러 진의 의병들 모두를 공이 통솔하도록 하였다. 서울의 적은 공이 그들의 예봉을 꺾을 것을 걱정하고, 수만의 군사를 세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싸움을 걸어왔다. 그러나 공은 성벽을 견고하게 지키며 응하지 않다가 간혹 기병을 내어 적을 격파하였다. 5일이 지나자 적은 진영을 불사르며 퇴각하였고 경기의 적들도 역시 군사를 거두어 서울로 들어갔다.
 
계사년(선조 26, 1593년)에 독성(禿城)으로부터 양천(陽川)으로 방어선을 옮겨 병사를 나누어 지원하면서 곧바로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보루의 서쪽 안현(鞍峴 : 경기도 시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극력 저지하여, 고양(高陽)의 행주산(幸州山)에 진을 쳤다. 서울의 적은 세력이 한참 불었는데, 공의 군대가 홀로 떨어져 깊이 들어온 것을 보고 2월 12일 적은 그 정예를 모두 모아 두 길로 나누어 밤에 행주(幸州) 목책에 들이닥쳤다. 공이 일어나 살펴보니 날카로운 무기가 들을 덮고, 목책을 둘러싼 적들이 여러 겹이었다. 공은 즉시 사졸들에게 음식을 전하고, 활 잘 쏘는 자들을 택하여 성 위에 쌓은 낮은 담 밑에 배치하여 화살을 빗발처럼 쏘게 했다. 또한 힘센 자를 골라 큰 돌이나 바위를 집어 던지게 하고 이어 거자화(車子火)를 쏘게 했다. 아침부터 불 뿜기 시작한 공방전은 저녁까지 계속하여 적은 아홉 번 진격하였으나 아홉 번 모두 격퇴되었다. 그러자 적은 불붙은 풀단을 가지고 함성을 지르며 목책에 오르기 시작했다. 공은 상방검(尙方劔)을 들고 서서 여러 장수를 독려하니,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나서서 싸워 적은 마침내 물러갔다. 적의 장수와 병졸 중에 사상자는 그 수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는 적을 130여 급이나 베었다.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께서는 공을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를 올리고, 장수와 사졸들은 각각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명나라 유격(遊擊) 사대수(査大受)가 찾아와 공을 보고 찬탄하며, “외국에도 또한 진정한 장수가 있었도다!”하였다. 경략 송응창(宋應昌)도 자문(咨文)을 보내어 공을 칭찬하기를, “권(權) 포정사(布政司)는 가히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은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라 할 수 있다.”하면서 비단과 백금 등으로 포상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상주하기를, “배신(陪臣 :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지칭하는 말) 권율(權慄)이 홀로 고성을 지킴으로써 강적에 대항하였다.”고 하였다. 명의 황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전라도관찰사가 죽인 적이 매우 많아 그 나라 백성들이 사기가 진작되었도다.”고 하였다. 공은 행주의 적들을 무찌른 뒤에 진영을 파주로 옮겼다. 파주는 서쪽으로 뻗은 큰 길이 있어 적들이 꺼려했다. 또한 행주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피로써 하늘에 제사하고 공을 침범하고자 했으나 끝내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 4월 서울의 적들이 퇴거하였다. 공이 장차 날쌘 병사로 이를 추격하려 할 때, 명의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마침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치려 한다고 하여, 공은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였다. 6월, 제도 도원수가 되어 영남(嶺南)에 주둔하였다. 겨울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임되었다. 갑오년(선조 27, 1594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니 선조가 이를 가슴 아파하여 어의를 보내 여러 번 문병하였다.
 
어떤 무사가 진영을 이탈하여 전주(全州)에 숨은 것을 공이 찾아내 그를 참하였다. 체찰사가 그 가족의 소청을 듣고 공의 죄를 청하였다. 공이 파직되자 웃으며 “장수가 된 지 수년인데 군법에 따라 군졸 한 명을 참할 수 없단 말인가?”하며, 사직하고 고향인 강화(江華)로 돌아갔다. 얼마 후 한성 판윤, 호조판서, 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비변사 당상관을 겸직하였다. 입시한 자리에서 선조 임금은 교를 내려, “경이 아니면 국가가 어찌 지금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하시며, 내구마(內廐馬 : 임금의 거동 때 쓰는 말로 내사복시에서 기름)를 하사하였다. 병신년(선조 29, 1596년)에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선조 임금께서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하시며, “경의 충성된 노고와 빼어난 용략은 시대를 뛰어넘고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니 적국도 경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도다. 원수의 직책은 경이 아니면 그 누가 이에 미치겠는가?”하셨다. 부임지로 떠나기 전 하직 인사를 드리러 임금을 뵐 때, 임금께서 술을 내려주며 노고를 위로하고, 다시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7월 호서(湖西 : 충청도)의 선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켜 연달아 다섯 읍을 함락시켰다. 조정에서 공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공이 군사를 이끌고 급히 적을 향해 나아가니, 이미 홍주(洪州)에서 섬멸되었다. 그 남은 무리를 다스리되 범죄 사실을 자세히 밝혀, 호서 지방은 평안을 되찾았다.
 
겨울에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 사람이 말을 전하되, ‘청정(淸正)이 다시 침략하고자 한다.’고 하자 조야가 흉흉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설령 청정(淸正)이 다시 쳐들어온다할지라도 이를 대비할 방책을 세워야지, 머리를 맞댄 채 근심하고 걱정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며, 목책을 재정비하고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방책을 아뢰었다. 정유년(선조 30, 1597년) 가을에 과연 다시 침입하여 진주(晋州)와 남원(南原)을 함락하고 곧바로 경기(京畿)를 향하여 진격하여 왔다. 공이 싸우기도 하고 행군하기도 하며 적의 목을 베어 조정에 보고했다.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조정에 나아가니 공에게 한강 방어를 맡기셨다.
 
조정에서 돌아온 다음날 서둘러 명나라 장관(將官) 팽우덕(彭友德)과 함께 강을 건너 직산(稷山 : 충청남도 천안)에서 싸워 적을 대파하였다. 겨울에 명나라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파견하여 울산(蔚山)의 적을 공격하였다. 공은 군사를 이끌고 돌격대로서 앞장서서 돌진하며, 뒤에 처진 자는 베어 돌리자, 군사들이 외성에 뛰어 올라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기어 올라가 함락시켰다. 제독과 경리는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무술년(선조 31, 1598년) 봄에 병으로 면직을 청하자 선조 임금이 위로하는 유서(諭書)를 내려 간곡히 만류하였다. 명나라에서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파견하여 세 제독을 독려하며 길을 나누어 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공은 유정(劉綎)을 따라서 순천(順天)의 적을 공격하였으나 유정(劉綎)은 본래 싸울 마음이 없어 신중하게 대치할 뿐 나아가지 않았고, 공이 여러 번 작전을 건의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적은 수군 도독 진린(陳璘)에게 대패하였고, 또 일본국 추장 수길(秀吉)이 죽자 각 도의 적들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기해년(선조 32, 1599년) 여름에 공이 병으로 사직을 고하자 선조 임금이 체직을 허락하였다. 7월 6일 끝내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 63세였다. 선조 임금은 몹시 슬퍼하시며 조회를 거두시고 부의를 많이 내렸다. 그리고 따로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공에게는 찬성을 증직하였다. 7월에 양주 홍복산(洪福山) 북서쪽을 등진 곳에 하관하니 이곳은 선영이 있는 곳이다.
 
7년 후 을사년(선조 38, 1605년) 논공할 때 선무공신(宣武功臣) 일등에 책록되었으며 영의정부원군(領議政府院君)에 추증되었다. 공의 전부인은 창녕(昌寧) 조씨(曺氏)로 첨정 휘원(輝遠)의 따님이시다. 온화하고 예의범절이 엄정하며 화목하고 온후하니 부녀의 모범됨이 있었다. 24세에 돌아가셨고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오직 딸 하나만 두었는데 오성(鰲城 : 이항복)공에게 출가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성남(星男)이요, 차남은 정남(井男)이니, 모두 음사(蔭仕)로 군수를 지냈다. 딸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출가했다. 성남(星男)의 전처는 판서 권징(權徵)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고, 후처는 주부(主簿) 김계남(金繼男)의 딸로 2남 4녀를 낳았다. 정남(井男)은 승지 윤의(尹顗)의 딸을 맞아들여 1남 1녀를 낳았다. 윤인옥(尹仁沃)은 1남 1녀를 낳았다.
 
후부인은 박씨(朴氏)는 죽산(竹山)의 명망이 있는 집안의 현령 세형(世炯)의 딸이다. 사리에 밝고 지혜로우며 법도가 있어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공을 받드는데 있어 일체 순종하여 거슬림이 없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미망이라 자처하며 절제와 시제를 지내는데 있어 예법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며, 때로 손수 의복을 지어 올리고 나서 이를 불살랐다. 공보다 10년 후인 무신년(선조 41, 1608년) 2월에 돌아가시니 62세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고, 4월 공의 묘지에 합장되었다.
 
아들이 없어 공은 둘째 형의 아들 익경(益慶)을 후사로 삼았으니, 익경(益慶)은 음직으로 현감이 되었다. 전처는 이광륜(李光輪)의 딸로 3남을 두었으니, 음직으로 현감을 지낸 집(㠎)과 립(岦), 업(嶫)이다. 이정(李淨)의 딸을 후처로 맞아 1남 3녀를 두니, 아들은 헌(巘)이고, 큰 딸은 이도기(李道基)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집(㠎)은 2남 1녀를 두었고, 업(嶫)은 1남을 두었으며, 도기(道基)는 1남을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공은 신장이 8척으로 체격이 크고 용모가 훌륭하며 엄중한 풍채를 지녔다. 행실은 바르고 성실하고 검소하였으며, 부모형제에 대해서는 기쁜 마음으로 화목하게 지냈고, 상제에는 애도와 성심을 다하였다. 진실하며 소박하였고 종족을 대우함에 기꺼이 극진함을 다하였고, 천성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집에는 물건이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일처리는 치밀하고 신중하였고, 거행하는 데는 필히 만전을 기하였다. 적을 맞아 진을 치고 대치하면서도 말은 가지런하면서 한가한 듯이 하였고, 몸을 일으켜 장군이 되어서 다시 군영을 거느리되 몸소 사졸보다 앞에 섰다. 호령은 엄하고 분명하게 하되 병사들을 가까이 하였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도모하곤 하였다. 많은 수의 적을 무찌르는데 적은 수로써 상대하였으니 비록 옛 명장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 있었다.
 
명나라 상서 석성(石尙)이 우리나라 사신을 만나서 공의 문안을 물으며 말하기를, “귀국에 만약 권(權)공 같은 사람이 여럿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왜인 역시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반드시 권(權) 원수는 어디 계신가를 물었으니, 중국과 오랑캐가 다 같이 탄복함이 이와 같았다. 군중에 있으실 때도 성지(聖旨) 및 명나라에서 온 자문(咨文)을 걸어 붙이면서, “내가 죽으면 이의정(李議政 : 이항복)이 반드시 내 묘지를 쓸 것인데 이것이면 족할 것이다.”하였다. 의정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고향인 강화(江華)에 집 한 칸을 짓고 살며 호를 만취당이라 한 것은 그 뜻이 깃든 것이다.
 
오호라! 부럽도다. 공이 원수로 계실 때 나는 막좌(幕佐)로 있으면서 우경(虞卿)이 백벽(白壁)을 받은 만큼의 사랑을 받았지만 중랑 황견(黃絹)같은 문장 실력이 없었다. 일찍이 공에 대해 평하기를 “높은 산과 깊은 숲속의 호랑이와 용과 같이 변화무쌍하다.”하였다. 분양(汾陽 : 당 현종 때의 명장 곽자의)의 공을 이루었으면서도 벼슬은 중서(中書)에 이르지 못하였고, 진공(晋公 : 당 헌종 때의 재상 배도의 봉호)의 덕을 지녔으나 녹야(綠野 : 배도의 별장 녹야당)의 즐거움은 누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탄식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공은 절의를 위해 자신의 몸과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진력하여 공신록에 영구히 보존되었으니, 그 점에 있어서는 저 두 공(곽자의와 배도)과 더불어 짝을 이룰 만하다.
 
지난 임진년에, 저 생물들이 준동하여
탐악한 마음 지니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니
무찌를 자 누구인가 널린 것이 적들인데.
우리 임금께서 하문하시길,
“누가 군사를 지휘할꼬? 공에게 달렸구나.”
공이 중임을 맡고
조선 팔도 지휘하니 꺼진 재에 불붙었네.
행주에서 크게 무찔러 큰 근심을 없애고
직산(稷山) 울산(蔚山) 누비고 육지와 물을 거침없이 내달리며
목을 잡고 등을 치니 감히 넘볼 수가 없도다.
북두 다시 회복되고 황도 다시 열림은 공의 공적이요.
사람의 꾀 다 모으고 귀신도 함께 함은, 공의 계책이라.
밝고 밝은 신령함이여! 높고 높은 명성이여! 모두 공의 경사로다.
까마득히 솟은 산과 우뚝이 서있는 비석, 바로 공의 무덤이네.
공의 막좌(幕佐)로 공의 업적 드날리려 묘 앞에 새기네.
 
추기(追記)
 
임진왜란 때에 공께서 여러 번 뛰어난 공을 세우니, 명의 황제가 조서를 내리며, “지금 전라도관찰사가 적을 많이 죽여 그 나라 백성들이 이를 존경하니 사기가 진작할 만 하도다.”하시며 홍려시(鴻臚寺 : 중국의 관명, 외국에 관한 사무와 조공의 일을 담당함.) 관원을 보내 선유하였다. 명나라에서 출병한 장군과 사병들이 서로 “권(權)가의 군사는 다른 군영과는 구별된다.”말하였다. 총독군문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본국에 자문(咨文)을 보내 따로 포상하였다. 대략에, “조선 삼도(三道)의 모든 군현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싸우지 않은 채 달아나 궤멸되었다. 일찍이 영웅 걸사로서 의병을 일으켜 큰 변란을 막아 강토를 지키고 회복을 도모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조선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권(權)아무개가 홀로 고립된 고을을 지키고 뭇 사람을 모아서 여러 번 기묘한 계책으로 많은 적들에 대항하였다. 근래에는 다시 모래주머니를 식량으로 꾸며 왜적을 유인하여 격파하였으니 이는 바로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은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다.”하였다.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상주하기를, “배신(陪臣) 권(權)모가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 강적에 대항하였다.”하였다. 선조대왕께서 그 무렵에 유지를 내려 장려하기를, “충성된 노고와 빼어난 용략은 당대에 뛰어나고 천하에 명성을 떨쳤으니 적국도 경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도다.”하셨으며, 또 “경이 아니면 국가가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었으리요.”하셨다. 이 몇 가지는 모두 백사(白沙 : 이항복)가 지은 행장, 묘지 및 전첩비의 뒷면에 실려 있으며, 마지막으로 상촌(象邨) 신(申)공이 이 비석의 뒷면에 다시 밝혔다. 몇 년 후에 나도 특별히 그 뒷면에 덧붙이니, 이 몇 가지는 마땅히 거듭 써야 하는데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누가 중복된(疊床架屋) 것이라 말하겠는가?
 
자손 중에서 원 비석에 싣지 않은 사람은 평시령(平市令 : 권율)의 두 번째, 세 번째 사위인 참판 조수익(趙壽益)과 강원지(姜元祉)이다. 현감은 1남을 두었으니 혁으로 판관을 지냈고, 업(嶫)은 2남을 두었으니 숙(俶)과 휴(休)이며, 헌(巘)은 2남을 두었으니 임(任)과 인(仁)이다. 판관은 2남을 두었으니 상형(尙珩)과 상규(尙珪)이고, 장재랑 숙(俶)은 4남을 두었으니, 상중(尙中) · 상정(尙正) · 상경(尙經) · 상칭(尙稱)이며, 임(任)은 3남을 두었으니 상충(尙忠) · 상문(尙文) · 상질(尙質)이다. 식(寔)은 상형(尙珩)과 상규(尙珪)의 직계자손이라고 한다. 외손들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오호라! 예부터 중흥의 군주는 인재를 얻어서 맡기지 않음이 없었다. 주(周)나라의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두 분이 그러하며, 한(漢)나라의 운대(雲臺 : 후한의 명제가 공신들을 추념하여 등우(鄧禹) 등 28명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은 대)의 여러 장수나, 당(唐)나라의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 같은 인재들이 모두 충의와 정성으로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공을 세운 것 마치 물동이의 물을 쏟는 것 같이 쉬웠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이약곡(李若谷)과 장관(張觀) 같은 사람은, 군신 사이를 이간질하는 말에 현혹된 군주로 인해,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공의 지혜와 용기가 옛날 인물들보다 뛰어났다고 해도 선조의 인재를 알아보는 명철함과 전권을 위임할 정도의 신임이 없었다면 어찌 성취함이 있었으리요. 그러나 당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같은 분은, 오히려 관리들의 적대함을 면하지 못하여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므로 공의 충성과 선도(善道)가 절로 왕과 결합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성군과 훌륭한 신하의 만남은 천재일우라고 이를 만한 것이다
 
숭정(崇禎) 계해년(숙종 9, 1683년) 중춘(仲春 : 음력 2월) 일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이 쓰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조대왕이 우리나라를 중흥할 때 원수(元帥) 권공(權公)은 여러 번 왜적을 평정함으로써 큰 공훈을 세웠다. 후에 상촌(象邨) 신문정공(申文貞公)이 신도비를 짓고, 우암(尤菴) 송문정공(宋文正公)이 추기를 썼다. 수백 년이 지나 비문이 오래되어 글자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공의 9대 손 용이 비로소 정민(貞珉 :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유원(裕元)에게 글을 써주기를 부탁하였고, 또 뒤이어 새겨 기록하였다. 유원(裕元)은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공의 뛰어난 공적과 아름다운 덕행은 이미 두 분 선생의 문장이 있으니 지금 보충할 만 한 것은 오히려 한두 가지에 불과하다. 공의 처음 시호는 장렬(莊烈)이었으나 나라에서 시호를 충장(忠莊)으로 고치고, 행주(幸州)에 사당을 세우고 ‘기공(紀功)’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었다. 공의 아들 익경(益慶)은 현감으로 강도(江都 : 강화도)에서 순국하니 관직을 추증하고 정려(旌閭 : 충신, 열녀, 효자를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정문)를 세웠다. 이는 모두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친인척의 자손들은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오직 직계자손 몇 사람만 여기에 기록한다. 익경(益慶)은 4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집(㠎)으로 현감을 지냈고, 집(㠎)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혁으로 판관을 지냈으며, 혁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상형(尙珩)으로 현감을 지냈다. 상형(尙珩)은 1남을 두었으니 현감을 지낸 식(寔)이다. 식(寔)의 양자 수린(壽麟)은 현감을 지냈고, 수린(壽麟)은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종(綜)으로 현감을 지냈으며, 종(綜)의 양자 성호(聖祜)는 부사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성호(聖祜)는 1남을 두었으니 안창군(安昌君) 용이며, 용의 양자는 최조(最朝)이다. 공의 사위 백사(白沙 : 이항복)공은 유원(裕元)의 9대조이니 예전에 백사(白沙 : 이항복)공이 공의 묘지(墓誌)를 썼고, 지금 용이 선조를 추모하고 이를 세상에 밝히기 위하여, 유원(裕元)에 글을 부탁해서, 비석에 새긴다. 유원(裕元)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 사실을 모아 좌측에 쓴다.
 
신유년(철종 12, 1861년) 중하(仲夏 : 음력 5월) 외가 10대 손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삼가 적고, 숭정기원후 234년 신유년 겨울에 세우다.
 
 
 
 
領議政諡康定權公神道碑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贈謚康定權公神道裨銘并序」
 
嗚呼在昔明 宣之際時號隆平治化溥洽其相權公實惟宗臣四總首揆有默運之功及年至致仕 上固留公錫以几杖而公去益力則輒以 御批敦勉有」
 
曰卿德量足以鎭物才智足以謀國當今賢相莫踰於卿曰老成大臣國之蓍龜曰股肱輔霖雨舟楫夫人臣肩社稷之重稱遇於時君千百年乃幸一有况 聖」
 
諭款至若不可一日無公雖殷宗之命傳說曷以過此公亦感上之知三八四出竟卒于位是足以觀 君臣矣公殁五十二年始事下太常贈謚曰康定旣又」
 
二十一年始以墓道顯刻屬不侫敏求夫年遠則公議定事久則實蹟泯顧不侫邈然後生懼事泯論次實跠愜當公議謹采家狀及長老掌故紀傳之槩而叙之曰」
 
公諱轍字景由權氏得姓由太師華事載國乘傳至文忠公近用文學名世是生踶仍父子位貳公距公五代漣川縣監諱摩楊根郡守諱僑江華府使諱勣實公三」
 
世贈漣川公判書楊根公賛成江華公領議政皆以公貴故妣順興安氏以弘治癸亥生公貞幼氣䫉吳常偉然遠器戊子成進士甲午擢文科始隷成均館選入」
 
翰林金安老惡直筆不阿遽寘下考中廟下問權某見貶何罪安老誅復史職移承政院注書 上每於文義可疑輒以咨公一曰 御後苑試製近臣公詩後成」
 
上命中使趣進其受眷如此拜弘文館著作博士兼侍講院說書己亥陞修撰自是至丁未諸曹則兵吏佐郎吏兵刑正郎師儒則成均館直講論思則弘文館校理」
 
言官則司憲府持平司諫院戲納諸署則軍器寺繕工監司瞻寺副正掌樂院司僕寺正春坊則文學弼善中書則檢詳舍人此其九年間踐履或有再入三入與聞」
 
官散班今可略也嘗告病調急仁廟在東宮亟遣內侍 賜以珍劑佗日登 筵 問疾錫爵以公邃於易學常兼講官甚有 恩紀及 中 仁兩廟連歲禮陟」
 
公再監封陵至庚戌由承文院判校陞朝拜承政院同副承旨在院三年進都承旨歷兵曹叅知戶曹叅議時嶺南臶饑授公嘉善階拜觀察使及瓜以都承旨」
 
召入對便殿上迎謂公南甿百萬賴卿全濟 特賜煖帽丙辰 御筆擢除刑曹判書湖南新中倭寇畺事大聳迺用公爲觀察使兼都巡察使備禦得機宜賊船」
 
近岸即俘馘以聞戊午華使御 帝命來册 世子公以遠接使迎送無違禮移長夏官 上謁 光陵公充布營使部勒嚴勑士無敢讙譁離次俄拜議政府右」
 
贊成時李樑以冢宰敗上循人望用公爲代旣而公再歷貳公判本兵兼知 經筵而尹元衡得罪黜 御筆特晋公爲議政府右議政即丙寅歲也公処黃閣不」
 
激不隨維匡財輔甚允輿論明主所毗士類所恃翼年丁卯隆慶紀元公入朝賀 登極臨行 上軫念行役引接溫慰且曰新 皇初政進退人物及嘉靖舊臣」
 
之起廢收召者悉可訪問公退謂僚相聖諭出此悔端萌矣顯訟乙已無辜雪寃昭慝庶有望乎使還在途承 明廟上賓號慚欲絶旣復 命入對首以正 君」
 
心嚴宮禁爲說宣廟爲傾聽嘉納其冬陞左揆居六歲遂都上相壬申春上章告老經年始釋負踰月復畀大政於是求退益切 注倚益隆雖間蒙 恩遆而不」
 
數月輒被延登錫予便蕃禮遇殊絶以公蹈履有愆每進見 命小黃門扶掖至欲 令肩輿入朝戊寅公年七十六政府大槐樹暴風摧拆公咲曰是徵吾處耳」
 
疾甚促令正席强起草遺䟽因氣乏失聲曰吾不復見聖主矣 上聞公疾革當 筵輟講遣承旨臨問已不能言矣訃聞 上震衋特甚弔慰祭贈視例有加備」
 
物具禮官庇襄葬厝于楊州洪福山負乾之原公資性厚重體氣方嚴特心待持必誠以忠剸裁庶務志精慮專夷塗順軌鮮有蹉跌立廟四十五年悔吝靡及歷膴」
 
仕久秉勻軸而人不敢議其疵咸以推長德鉅公每念國事或明燈逮曙所重者惟安民固閨其遇四方客必詢生民利病關防緩急以至土地墝沃山川險易無不」
 
審問而周知故醻應措處悉若目見親履平生不喜華靡不通問遺臨大政決大疑不立意見必循古典遵守歷朝成憲無所紛更尤重刑法嘗曰先人敎以口不」
 
道煞字故吾屢長臬司未嘗敢輕用人命必求生道始忤舍安老而陳復昌怙安老張甚公面斥其小人李樑尹元衡相繼竄」
 
殛而公輒得其處猶陰陽晝夜君子以是卜世道焉內行淳飭盡孝祖先宗子貧無以立廟則罄家貨以營文忠公祠宇歲久」
 
頹圮則又爲之修葺撫眷宗族經紀昏娶費皆出於公初無難色常曰二親在世日給靡繼不肖僥冒專享厚祿負米之嘆實」
 
切中懷及寢疾謂諸子曰」
 
國恩隆重處難稱報旣無功德可紀處後無所事碑雖書某官姓名以表墓道使後世知吾善惡足矣更不及家事但語國事」
 
諄諄不已嗚呼周旋四朝蔚爲宗臣在公在家旣壽且祿生寵其榮歿無隕名膺受五福澤流子孫若公者豈古所謂令德」
 
全昌終始完人者非耶仰惟我國家 累聖敦化薰蒸融徹以篤生魁碩左右皇極以登熙平其遠猷長慮陰培默植扶元」
 
氣而壽國脈者非睹跡膚識可得指數一二故至今譚國朝賢相者必第公甲乙而事業猷爲無能擧其凡最夫人昌寧曺氏」
 
有懿行高識後公五年歿而祔焉擧四男曰恒廣興倉守曰愷戶曹佐郎曰恂同知中樞府事贈左叅贊曰慄用文科進破」
 
倭冦立大功以都元帥開府策宣武元勳贈領議政永嘉府院君諡莊烈孫男曰仁慶都摠府都事信慶庠生女適吏曹叅」
 
判李有中叅奉朴元虎公州牧使韓宗胄完陽府院君李忠元爲恒出曰女適叅奉鄭龜應右議政金尙容庠生俞大頤爲愷」
 
出曰晉慶黃海兵馬使履慶金城縣令益慶平市署令女適吉州牧使李壽俊爲恂出曰女適領議政鰲城府院君文忠公李」
 
恒福爲慄出四房內外子姓克蕃克昌門戶鼎盛君子又以知公歛積於躬而遣贏於後者豊隆如是云銘曰」
 
權派于羅受氏麗始緜緜代序或躓或起溥興其宗百福全昌文忠承之與嗣俱驤三世位庳以有康定康定當朝乃遭二」
 
聖手挈魁柄畀公調元公諧庶政不疪不煩治有常經刑有常憲我司其準百僚攸勸公拜稽首臣老乞身 王曰家耄卿」
 
余舊臣庶幾兩濟邦釐痾養公在相府有几有杖公登于筵有掖黃門存榮均哀終始 隆恩歷視功載疇匹其休有烈象賢雍公是逑子孫繩繩並國盛衰刻詩著聲於永厥垂」
 
嘉善大夫吏曹叅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子右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李敏求譔」
 
備十一世孫啓功郎權知承文院副正字應蘷書」
 
外十一世孫通訓大夫議政府檢詳兼南學敎授奎章閣檢校待敎別春秋知製敎李裕元篆」
 
公歿後二百六十九年丁未八月日立」
 
 
▼ 재실(齋室)
 
 
▼ 권율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前부인 창녕 조씨와 後부인 죽산 박씨가 안장되어 있고 묘비, 상석, 향로석, 동자석 1쌍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을 세웠다.
 
 
▼ 남면(南面) 했을 때 왼쪽이 죽산 박씨, 오른쪽이 창녕 조씨(24세 사망)의 묘라고 묘비에 적혀있다.
 
만취당(晩翠堂)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은 영의정(領議政) 권철의 4남으로 1582년(선조 15) 46세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임진왜란(1592~1598) 중에는 전주에서 군사 만 여명을 지휘하여 독산성에 진을 치고 적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1593년(선조 26년)에는 서울을 회복하고자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군, 관, 민이 힘을 합쳐 3만의 왜군을 물리쳤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진주대첩,한산도대첩,행주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幸州大捷)이다.
 
▼ 권율 장군 영정
 
▼ 장군의 집터
 
▼ 장군의 사위 백사 이항복(1556~1618).
 
▼ 권순(權恂,1536~1606, 셋째 형, 여주목사)의 묘로 파평 윤씨부인과 합장묘
 
 
▼ 권철(權轍, 1503~1578,부친)과 모친 창녕 조씨부인 묘
 
 
 
 

 
▼ 찾아가기
경기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223
 
▼ 나전 칠기장 입구에 있는 주차장. 하루 2000원
 
 
​▶아쉬운 점
권율 장군 묘 앞에 안내판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 왜냐하면 정문이 닫혀있어 묘 안내판을 볼 수 없었으므로 어느 것이 장군 묘인지 확인하는데 시간과 불편함이 따랐다. 아울러 신도비 내용을 비각 옆에 두어 방문객이 무슨 내용인지 읽게 하면 좋을텐데.....
 
 
​▼ 이이 율곡의 묘는 부모(이원수, 신사임당) 묘 위치보다 높아 권율 장군의 묘와 다르다.
 
​▼장욱진 화가의 미술관 (붙어 있음)
 
 
출처: 네이버, 구글,문화재청, 양주시청.한국금석문,유튜브, 네이버지도
• 활동 지역 : 강서구(江西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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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