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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지식창고】 2018.07.02. 15:29 (2018.07.02. 15:29)

정조가 사랑한 여인과 자식이 묻혔던 효창공원

 
조선 22대 정조(이산, 재위 1776~1800) 임금이 몹시 사랑한 여인(의빈 성씨)과 장남 문효세자(文孝世子, 의빈 성씨 소생, 5세 사망)가 묻혔던 효창묘(孝昌墓, 현재 용산구 효창공원)에 다녀와 효창공원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 22대 정조(이산, 재위 1776~1800) 임금이 몹시 사랑한 여인(의빈 성씨)과 장남 문효세자(文孝世子, 의빈 성씨 소생, 5세 사망)가 묻혔던 효창묘(孝昌墓, 현재 용산구 효창공원)에 다녀와 효창공원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정조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사망해 멀리 두기 싫어 한양도성 밖 십리(城底十里) 내에 있는 당시 고양군(高陽郡) 율목동(栗木洞, 밤나무가 많은 동네)에 효창묘(고종 때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를 조성했다.
 
▼드라마 이산(李祘, 이서진)의 정조와 의빈 성씨(宜嬪成氏, 한지민)
 
이순(李㬀, 문효세자, 1782~1786)은 정조(1752~1800,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와 의빈 성씨 사이에 1782년(정조 6) 9월 창덕궁 연화당(讌華堂)에서 태어났고, 1784년 8월 3살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1786년 5월 병으로 창덕궁 별당에서 5세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 묘(廟)는 문희(文禧)로 당시 고양군 율목동의 효창묘(孝昌墓)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이때의 효창이란 말에서 시작된 마을 이름이 현재의 효창동이다.
 
☞ 의빈 성씨(宜嬪成氏.1753~1786)
아버지는 권세가 홍봉한(洪鳳漢)의 청지기(廳直, 양반집에서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 성윤우(成胤祐)이다. 어릴 때 궁중에 들어왔다가 정조의 눈에 들어 30살인 1782년(정조 6) 9월 왕자를 낳아 같은 해 12월 소용(昭容)에 봉해졌으며, 1783년(정조 7) 2월 의빈(宜嬪)으로 진봉되었다. 1784년(정조 8)에 의빈 소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손이 귀한 왕가에서 세자를 낳아 왕가를 번창하게 하였다하여 궁중 모두의 사랑을 받았으나 왕실의 기대도 보람없이 문효세자가 5세에 병으로 죽었다.
 
1784년(정조 8)에 딸을 출산하였고, 아들 문효세자가 죽어 슬픔과 상심의 나날을 보냈으며 1786년(정조 10) 셋째 아이 임신 중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 효창묘 위치
 
효창원 왕실 묘역은 동(東)으로 주교대로(舟橋大路, 청파 배다리 큰길), 서(西)로는 공덕리 신촌(孔德里 新村), 남(南)으로 율곡정(栗谷亭,활터) 삼성현(三星峴), 북으로 봉학정(鳳鶴亭, 활터)까지라고 1907년 궁내부 대신이 조선 통감부에 회신했다니 엄청나게 큰 규모다.
 
문효세자의 효창묘는 조선시대 왕실 묘를 만드는 형식에 따라 정자각, 비각, 문인석, 장명등, 석마, 혼유석, 망주석, 석호, 석양 등을 만들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효창원을 효창공원으로 만들려고 1944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했으며 이장 과정에서 정조의 신도비와 석물, 표석만 옮겼다.
 
 
▼서삼릉 내 문효세자 효창원
 
▼정조가 지은 문효세자 효창묘 신도비(神道碑, 서삼릉)
 
문효세자가 죽은 지 4달이 지나지 않아 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효창묘의 왼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의빈묘는 원래 세자묘와 거리가 100보가 채 되지 않는 가까운 위치에 조성되었다. 의빈묘에는 곡장, 혼유석,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표석, 제각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4년 서삼릉으로 이장된 곳에는 ‘의빈창녕성씨지묘(宜嬪昌寧成氏之墓)’라고 쓰인 표석과 혼유석만 남아 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고 하는데 정조가 30살 넘어 얻은 아들 문효세자가 얼마나 소중하며 사랑스러웠겠는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4달 후 사랑하던 후궁마저도 가버리니 그 슬픔과 허망함이란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
 
정조가 사랑한 후궁 의빈 성씨 죽음에 쓴 글
"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수원 화성 화령전의 정조 어진
 
서삼릉 경내로 이장하기 전에는 효창원 안에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淑儀朴氏. ~1854)와 그의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1817~1829)의 묘도 함께 있었다.
 
 
1870년(고종 7)에 효창묘(대군, 공주, 왕자녀 무덤)를 효창원(세자, 세자비, 왕의 사친 무덤)으로 승격시켰다. 능(陵)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그 이후 일본 강점기 1921년에 경성 골프장을 만들었다가 1924년 폐쇄하였고, 1940년 효창 공원으로 지정하였으며, 효창원을 1944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하였다. 그 자리에 광복 후 삼의사(三義士: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안중근 가묘) 묘, 임정요인(臨政要人 :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묘, 1949년 백범 김구(白凡 金九) 묘를 만들었고 1960년 효창운동장을 개장했다. 1989년 사적 330호로 지정받아 1991년 의열사(義烈祠)에 김구 등 7인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2002년 테니스장 터에 백범 기념관을 개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한겨레신문, 민족문화백과, 구글, 네이버, mbc, 조선왕조실록, 서울 역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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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