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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수의 세상이야기     【오문수의 지식창고】 2019.01.16. 10:33 (2019.01.16. 10:33)

대통령 추대 거절한 혁명가, 돈은 왜 받았을까

 
[남미여행기 12]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볼리바르
▲ 볼리비아 혁명을 지휘했던 무리요를 기념하는 무리요 광장 모습. 뒤편에는 대통령 궁이 있다 ⓒ 오문수
 
사람 이름이 국명이 된 나라가 있을까? 있다. 남미 중앙에 위치한 볼리비아다. 볼리비아는 남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국명이다. 페루와 칠레, 파라과이, 브라질과 국경을 맞댄 볼리비아는 면적 1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인구 1100만 명이 사는 나라다.
 
볼리비아는 동부 지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일교차가 심하다. 수도 라파즈와 우유니는 15~20도 이상 일교차가 있어 여행자는 두꺼운 외투가 필요하다. 티티카카호수 관광을 마친 일행이 거대한 호수를 끼고 라파즈로 가는 길에는 때때로 5천 미터에 가까운 고산지대가 나오기도 했다.
 
▲ 뿌노에서 티티카카호수를 구경하고 라파즈로 오는 도중에 만난 코파카바나 모습으로 해변을 연상케했다 ⓒ 오문수
 
티티카카호수는 정말 크다. 뿌노를 떠나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로 가는 길에 만난 코파카바나 호숫가 경치는 흡사 바닷가 모습과 비슷했다. 수많은 보트와 방갈로에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멋진 호수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 구역이 사라지고 라파즈가 가까워질 무렵 차창 왼쪽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안데스 설산들이 보인다. 끝없는 초원 뒤로 눈을 뒤집어 쓴 모습이 몇 달 전 보았던 몽골 설산을 닮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사는 상당수 볼리비아인들의 혈통은 몽골리안이다.
 
차가 라파즈 시내로 들어가자 길가에 늘어선 포장마차와 수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작은 키, 넓적한 얼굴, 챙 있는 모자를 쓰고 길게 머리를 땋은 할머니들의 모습이 페루에서 보았던 인디오들이다.
 
▲ 케이블카를 타고 라파즈시내 높은 곳에 올라 촬영한 라파즈 야경 모습 ⓒ 오문수
 
남미국가인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달리 페루와 볼리비아의 인구 구성비를 보면 백인이 15%에 불과하다. 우리와 비슷한 생김새여서인지 낯설지가 않다.
 
해발고도 3700m 고산지대에 자리한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의 주요교통 수단은 케이블카다. 너무 높고 가파른 곳에 세워진 건물에 올라가려면 숨이 차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라파즈 시내 높은 곳에 올라서 보는 야경은 수많은 별들이 떠 있는 은하수 같다.
 
 
사가르나가 거리에 가면 '마녀시장'이 있다
 
▲ 라파즈에서 가장 유명한 산 프란시스코 성당 모습. 성당 앞은 청소년과 예술가들이 그림을 전시하기도 하는 만남의 광장이다 ⓒ 오문수
 
라파즈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는 사가르나가 인근 거리와 산 프란시스코 성당 앞 광장이다. 좁은 골목에는 아스팔트가 아닌 돌을 깔아 만든 도로가 있다. 어찌나 좁은지 관광버스가 길을 막으면 뒤차는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
 
이곳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 식당, 여행사, 쇼핑상가와 환전소가 있다. 사가르나가 여행자 길을 따라 내려가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그 앞에 산 프란시스코 성당이 나온다. 16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볼리비아의 대표적 성당이다. 성당에 들어가니 대예배당 모습이 예쁘다. 교회 앞 광장은 청소년과 예술가들이 모여 그림을 전시하기도 하고 공연을 펼치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 사가르나가 여행자 거리. 로마의 옛길처럼 돌을 깔아 만든 길이다 ⓒ 오문수
 
▲ 사가르나가 거리를 걸어가는 인디오 할머니 모습. 이곳 선물가게에서 파는 라마털로 만든 의류는 정말 싸다. ⓒ 오문수
 
사가르나가 거리를 한 블록 건너가면 라마와 양 새끼를 비롯한 동물과 각종 향신료를 파는 마녀시장(Mercado de las Brujas)이 있다. 흉측한 모습의 동물 말린 시체를 팔아 마녀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마녀를 팔거나 마녀가 장사를 하는 곳은 아니다.
 
이 재료들은 대지의 신 파차마마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주술사들이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데 사용하는 재료들을 파는 가게다. 파차마마신은 대지의 신이자, 시간을 지배하는 신이며 농사의 수확을 결정하는 신이다.
 
볼리비아 사람들은 추수철이나 큰일을 앞뒀을 때 파차마마에게 공양하거나 주술사를 불러 길흉을 점친다. 인디오 출신 가이드에게 마녀시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지금도 이런 물건을 사용하느냐?"고 묻자 답변이 돌아왔다.
 
"볼리비아에는 인디오들이 믿는 종교와 가톨릭 두 가지가 있어요. 산악지역에 사는 인디오들은 8월에 태양과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지금도 이런 제물을 사용합니다."
 
산 프란시스코 성당을 지나 라파즈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지역으로 올라가면 볼리비아 혁명을 지휘했던 무리요 박물관이 나온다. 이곳에는 1809년 7월 16일 볼리비아 혁명을 지휘했던 무리요가 살았던 집이 있다. 집에는 생전에 그가 사용했던 가구와 여러 가지 수집품을 볼 수 있다.
 
 
볼리비아를 대표하는 화가 '마마니 마마니'
 
무리요가 살았던 좁은 골목길을 지나 넓은 길에 도착하면 정면에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건물이 나온다. 현재 볼리비아를 대표하는 '마마니 마마니' 작품 전시장이다. 전시장에는 그의 탄생과 작품에 관한 해설이 적힌 책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인디오인 아이마라(Aymara)족 부모를 둔 인디오 문화 속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은 인디오의 비전과 느낌, 안데스의 풍습 속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예술은 내 존재 속에서 태어났어요. 내 작품은 대지의 신인 파차마마(Pachamama)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잉카문명을 상징적으로 그린 그의 작품은 볼리비아뿐만아니라 남미 여러 나라에서 100회 이상 전시됐고 수많은 상을 받았다. 작품 내용에 대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해서 인디오 출신 가이드에게 그의 그림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 볼리비아의 대표적 화가인 "마마니 마마니"의 그림. 잉카 후손인 그는 잉카문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림속에는 잉카를 상징하는 태양과 달, 콘도르, 퓨마, 뱀, 산과 같은 것들을 형상화 했다고 한다 ⓒ 오문수
 
▲ 여행자들이 사가르나가 거리에서 벽화를 구경하고 있다. 오른쪽 첫번째 화려한 그림은 볼리비아를 대표하는 화가 마마니마마니의 작품이다 ⓒ 오문수
 
"그의 그림은 볼리비아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그림으로 잉카를 상징하는 태양과 달, 콘도르, 퓨마, 뱀, 산과 같은 것들을 형상화한 그림입니다."
 
 
라틴아메리카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라파즈 시내를 돌아보고 인디오 출신 가이드 설명을 듣고 나니 볼리비아에 대해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국명이 볼리비아일까?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출신인데?
 
궁금증에 그에 관한 내용을 포털 사이트에서 찾아봤다. <문명의 보고 라틴아메리카를 가다>를 쓴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의 얘기는 그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필자가 일찍이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를 접할 때마다 볼리바르와 맞닥뜨리면서 그에 대한 이해 없이는 결코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음을 갈파했다.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7월 24일 베네수엘라의 부유한 끄리오요(criollo) 집안에서 태어났다. 끄리오요는 유럽 백인과 원주민 인디오간의 혼혈인을 말한다. 어릴 적 부모와 사별한 그는 초등학교 은사이자 루소의 추종자인 시몬 로드리게스 집으로 들어가 유럽의 시민의식에 관해 배우고 눈을 떴다.
 
1799년 할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집을 떠나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유명한 학자인 마르께스 데 우스따리스 집에 머물며 외국어, 수학, 역사, 무용, 승마 등을 배우고 스페인과 프랑스를 구경하며 견문을 넓혔다.
 
결혼 8개월 만에 사랑하던 아내가 병사하자 실의에 빠졌지만 다행히 옛 스승 로드리게스를 만나 루소와 볼테르 등 서구 시민혁명의 거장들을 만났다. 한때 프랑스혁명에 심취했지만 나폴레옹의 황제 군림을 저주했던 그는 1805년 스승 로드리게스와 로마를 여행하면서 맹세했다.
 
▲ 시몬 볼리바르 ⓒ wiki commons
 
"나 자신의 명예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내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의 마음과 나의 팔뚝은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당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박을 일삼았다. 본토 상품과 경쟁이 될 만한 식민지 상품을 강제로 생산을 중지시켰다. 1595년부터 라틴아메리카에서 포도생산을 금지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끄리오요를 비롯한 원주민 지도자들에 대한 정치적 앞길도 막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식민지 수탈정책에 항거해 독립을 이룬 미국에 대한 환상을 품고 미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미국이 라틴아메리카를 지원한 것은 유럽세력을 몰아내려는 속셈이었을 뿐 진심은 라틴아메리카를 장악하는 데 열을 올렸다.
 
영국이나 미국 등 외부세력의 힘을 등에 업고 독립을 이루어 보자던 순진한 꿈을 접은 그는 오로지 라틴아메리카인 자신들의 힘과 무장투쟁을 포함한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만 독립이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미란다와 함께 스페인과 싸울 혁명군을 조직해 정부군과 싸운 그는 승전과 패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승리했다. 그는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세 나라로 그란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페루와 볼리비아 독립투쟁을 진두지휘했다. 페루는 볼리바르의 지도 하에 헌법초안작성회를 개최한 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그는 사양했다. 그러자 페루 당국은 그에게 선물로 120만 페소를 보냈다. 묵묵히 선물을 받은 그가 말했다.
 
"당신들이 내게 준 이 120만 페소 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서 페루에 있는 전체 노예들을 매입해 자유로이 풀어주고 싶소. 만일 한 나라가 국민으로 하여금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 나라를 도와 독립을 쟁취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 이 길로 따라가면 볼리비아 혁명가 무리요 생가가 나오고 골목끝을 지나 넓은 길에는 볼리비아를 대표하는 화가 마마니마마니 전시관이 있다 ⓒ 오문수
 
▲ 볼리비아의 대표적인 화가 "마마니 마마니" 전시관 앞에 앉아 여가를 즐기는 할아버지 모습. 인자한 모습에 사진 한 장 찍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 오문수
 
당시 페루에는 약 3천 명 가량의 노예가 있었고 노예 1인당 몸값은 350페소였다.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 노예들의 대부였다. 베네수엘라 독립 후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일부 제안에 대해 거부한 볼리바르는 유언을 남겼다.
 
"설사 저 자신에게 왕이라는 직함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보다는 차라리 라틴아메리카 해방자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해방자라는 칭호야말로 동료 시민들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칭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830년 12월 17일 향년 47세로 생을 마감할 때 옆에 있었던 프랑스 주치의는 "고인이 입고 있던 유일한 셔츠가 심하게 해어져 있었다"고 회상했다. 20년 동안 불굴의 투지로 베네수엘라,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나마 등 6개 국가를 해방시킨 그의 혼은 볼리비아에 살아 있었다.
【작성】 오문수 oms114kr@daum.net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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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