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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수의 세상이야기     【오문수의 지식창고】 2019.05.14. 18:42 (2019.05.14. 18:42)

조계산 1000여 회나 등반, 무슨 이유로

 
여순사건 다룬 소설 <조계산의 눈물> 펴낸 김배선씨와 동반 산행
▲ 조계산 고동재몬당에서 조계산 일대에 펼쳐진 산들과 마을들을 설명하는 김배선씨 모습 ⓒ 오문수
 
12일(화), 조계산을 1000여 회 등반해 두 권의 자료집을 발간한 김배선씨와 함께 조계산을 올랐다. 등산에는 순천국유림관리소 박상춘 소장 일행이 동행했다.
 
조계산은 순천시 승주읍과 송광면이 사이좋게 정상을 나누고 있으며 주암, 외서, 낙안의 3개면이 산자락에 걸쳐있다. 조계산에는 송광사와 선암사가 서쪽과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골마다 불탑과 암자가 있는 곳으로 불교문화유산이 가득하다.
 
조계산은 한말 의병장인 안규홍 부대가 향로암을 근거지로 삼아 일제에 항쟁한 곳이다. 뿐만 아니다. 6.25전쟁 전후에는 빨치산 활동의 주요 거점이 되어 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산이다.
 
조계산이란 이름이 태어난 연유 속에는 송광사와 선암사 즉,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계'라 하면 우리나라 불교의 한 종파인 조계종을 떠올리게 된다. 조계종은 고려시대에 신라의 구산선문을 통합한 한 종파이다.
 
 
근현대사의 아픔 간직한 조계산
 
▲ 고동재를 내려와 굴목재로 가는 길에선 김배선(좌측)씨와 순천국유림관리소 박상춘 소장 ⓒ 오문수
 
▲ 호남정맥을 따라 조계산 고동재를 거쳐 수정마을로 내려가는 길. 소설 <태백산맥>속 주인공 염상진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 오문수
 
미세먼지가 일부분 걷혔다지만 하늘이 아직도 뿌옇다. 호남정맥 끝자락 주변에 옹기종기 펼쳐진 마을 중 하나인 '수정마을'을 거쳐 임도를 따라 고동재로 오르니 안개가 짙게 끼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산을 오르는 내 마음에도 안개가 끼어 뿌옇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이 길이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길이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군 신월리에 주둔했던 제14연대가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시작된 여순사건의 흉터가 남아있는 길이다.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며 일어선 봉기군은 발생 3일만인 10월 22일 남원·구례 방면으로 진격했지만 순천의 학구전투에서 진압군에 패배했다. 패배한 봉기군은 지리산과 백운산 조계산 등으로 입산해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14연대 군인 중에는 낙안 출신이 11명이나 속했다.
 
우리가 오른 고동재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염상진이 오갔던 길이다. 뿐만 아니다. 6.25전쟁 당시 '외서', '이읍' 마을 청년들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기 위해 넘었던 고갯길이기도 하다.
 
고동산 정상(709m)에 오르니 관목과 철쭉 경관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안개가 앞을 가려 시야를 흐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계산 주변의 산과 들, 마을 위치가 그려진 '조계산 전망 안내도'가 있었다.
 
조망안내도에는 낙안면 목촌리, 낙안면 금산리, 낙안읍성 민속촌, 외서면 신덕리 등의 지명이 나오고 마을 뒤로는 금전산, 제석산, 백이산, 상탕군산 등의 산들이 보인다. 그 중 퍼뜩 눈에 띄는 산이 있다.
 
제석산!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산이다. 고동산 정상에 올라보니 조계산이 왜 빨치산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는지가 이해가 됐다. 전망대에 기록되어 있는 산들은 조계산 연봉으로 감자 줄기에 올망졸망 달려있는 감자처럼 연결되어 있다.
 
조계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산 사람들은 밤이 되면 인근 마을에 내려가 보급투쟁과 함께 젊은이들을 끌고 입산해 인력을 충원했다. 고동재를 돌아보고 굴목재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두 분과 대화를 나눴다.
 
 
1000번 넘게 조계산을 등반해 조계산 전문가가 된 김배선
 
김배선씨 고향은 조계산 인근 평촌마을이다. 1951년생이기 때문에 자라면서 어른들로부터 토벌대와 산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와 죽음에 대해 들었다. 글은 몸속에 흐르는 피떡(아픔)을 토해내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유전자 속에는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끼가 흐르고 있었나보다. 글쓰기를 좋아한 그는 중학교 때부터 소설 습작을 했다고 한다. 그에게 10년째 조계산을 탐방하며 기록을 남긴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변이다.
 
▲ 조계산 전문가 김배선씨가 쓴 <조계산의 눈물>과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 책 모습 ⓒ 오문수
 
"해양경찰에 근무하면서 퇴직하면 뭘할까 고민하다 향토전문가가 되기로 했어요. 퇴임을 6년 앞둔 2002년부터 조계산을 본격적으로 탐방하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죠. 인근 마을주민들을 만나고 골짜기들을 돌다가 여순사건 이후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와 죽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 첫 번째 기록이 조계산을 소개하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이고, 두 번째가 여순사건에 휘말려 죽어간 수많은 죽음에 대해 쓴 <조계산의 눈물>입니다."
 
'굴목재몬당'까지 가는 등산로 주변에는 수많은 그루의 참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등산로 주변에 허옇게 뿌리를 드러낸 채 죽어가는 나무뿌리를 보던 김배선씨가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산은 지질에 따라 '암산'과 '육산'으로 나눕니다. '암산'은 주요 봉우리와 능선이 암석과 바위로 이뤄져 남성적 위용을 자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금강산, 관악산 등의 주요 명산이 '암산'입니다. 반면에 조계산은 정상 남쪽 바로 아래 '배바위'를 제외하고는 부드러운 흙이 있는 '육산'입니다. 선암사와 송광사를 왕래하는 등산로 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만든 길이 있습니다. 이들의 발걸음에 움푹팬 등산로가 홍수 때마다 쓸려가 버린 곳이 많아요. 자연을 훼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동행한 순천국유림 관리사업소 박상춘 소장은 옛날 직책으로 치자면 산림감독원을 줄인 '산감'이다. 중학교 시절 나무를 해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다 산감에게 적발되면 벌금을 물리는 직책이어서 무서워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대화를 시작했다.
 
▲ 일행이 걸어가는 일대에는 참나무와 산죽이 어우러져 있었다. 토벌대에 쫒기다 이곳으로 몰린 빨치산들이 숨을 곳이 없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고 한다. 홍수가 나면 지금도 뼈와 총탄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 오문수
 
▲ 산을 가다 진정한 등산인을 만났다. 그분은 등산로에 떨어진 조그만 종이조각까지 줍고 있었다 ⓒ 오문수
 
"소장님. 옛날 시골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사람들이 산감이잖아요?"
"예! 맞습니다. 첫 발령지가 강원도였는데 주민들이 오래전에 유행했던 우스갯소리를 해주더라고요. 산감이 오면 방안에, 경찰이 오면 마루에, 면서기가 오면 마당에 상을 차렸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동산경제림단지를 조성하고 산림자원의 가치를 높이는 방안을 강구 중입니다. 뿐만 아니라 산에 인문학적 가치를 담아 지게놀이, 캠핑장을 만들고 송광사와 선암사, 낙안읍성을 연계하는 테마체험공간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굴목재 인근 임도를 지나가는 동안 박상춘 소장이 입을 열었다.
 
"인근 임도 주변은 저에게 애환서린 길입니다. IMF를 맞아 실업자가 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3년 동안 연인원 1만명이 이 길을 닦고 나무를 관리하던 곳입니다."
 
 
지경터 인근 산 사람 아지트
 
▲ 송광사와 선암사 중간 "지경터"에 있는 원조 보리밥집 모습. 물레방아를 이용해 발전을 하기도 했다 ⓒ 오문수
 
▲ 원조 보리밥집 옹벽에는 김배선씨가 조계산 곳곳에 세웠던 이정표를 모아놓았다. 헐어 떨어진 이정표에는 조계산 전설과 곳곳에 얽힌 사연들이 적혀 있었다 ⓒ 오문수
 
'지경터'란 선암사와 송광사로 넘어가는 산길 중간의 남쪽을 향한 개울과 보리밥집 일대를 일컫는 이름이다. '지경터'란 한자어 지경(地境) 즉, 땅의 경계와 우리말의 '자리'를 뜻하는 '터'의 합성어다.
 
'지경터'에는 양쪽을 오가는 사람들이 잠시 휴식하며 식사를 하거나 막걸리를 마시는 보리밥집이 있다. 현재는 위아래 두 개의 보리밥집이 있다. 원조 보리밥집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기 직전 김배선씨가 계곡물 주변 산죽이 우거진 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 보리밥집 옆 인근 계곡물이 흐르는 개울가에는 "산 사람"들이 숨어살았던 아지트가 있었다. 김배선씨가 여순사건 당시 빨치산들이 숨어 살았던 아지트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 오문수
 
"이곳 아지트를 맴산골아지트라고 부릅니다. 개천가 바위 사이에 굴을 파서 만든 20여 명이 은신할 수 있는 인공아지트입니다. 발각되지 않기 위해 팔 때 나온 흙은 물에 흘려보냈고 흙탕물이 아랫마을까지 흘러가지 않도록 자정 무렵에 마쳤다고 합니다."
 
 
곳곳에 남아있는 숯가마터... 100여 개의 숯가마가 있었다
 
선암사와 송광사 양 사찰에서 주관한 숯가마는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었다. 사찰에서는 산 전체를 31개 구역으로 나누어 매년 돌아가면서 숯을 구웠다. 숯가마는 주변마을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소득을 제공했다. 숯가마는 위를 돔 형태의 흙으로 만든 지붕을 덮고 앞에는 약 60㎝의 사각 불문이, 뒤에는 지면 밖으로 굴뚝이 나와 있다.
 
일행이 구경한 숯가마는 지름 3m, 높이 180㎝쯤 되는 숯가마터였다. 특별히 조계산 숯가마가 많은 것은 사찰림으로 보존한 참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계산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숯가마를 '숯굿막'이라고 부른다. 이는 숯굿(숯구덩이)과 숯막(숯 굽는 사람들의 움막)이 합쳐진 말이다.
 
▲ 조계산에는 숯을 굽는 숯굿막이 100여개나 됐다고 한다. 숯굿막에 선 일행들의 모습이 보인다. 지름 3미터에 높이 180센티미터 쯤 된다. ⓒ 오문수
 
▲ 숯을 굽는 "숯굿막"에서 연기를 빨아내기 위해 만든 굴뚝. 수십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을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 오문수
 
김배선씨는 사비를 들여 조계산 요소요소에 100여 개의 이정표를 만들어 세웠다. 원조 보리밥집 옹벽 옆에는 그동안 김배선씨가 조계산 곳곳에 만들어 붙인 전설과 이야기를 전하는 내용이 붙어있었다. 등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매화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땅을 내려다보며 생각해 보았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도 잘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그저 배고프지 않고 알콩달콩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이념이 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이념전쟁이란 격랑에 휘말려 피를 흘리며 서로를 증오하지 않았는가? 당시에도 매화꽃은 피었을텐데. 저 매화는 당시의 아픔을 기억할까?
【작성】 오문수 oms114kr@daum.net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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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