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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淵蓋蘇文의 死年 ◈

해설본문  미상
신채호
1
연개소문의 사년
 

1. 1

 
1
고구려 막리지(莫離支:官名[관명] ─ 原註[원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사년(死年)이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25년(666) 당 고종(唐高宗) 건봉(乾封) 원년(檀君[단군] 2999년 ─ 原註[원주])인것은 『삼국사기』나 신ㆍ구『당서』의 기록한 바에 의하여 역래(歷來)의 사가들이 아무 의문 없이 전술(傳述)하여 왔다.
 
2
무릇 인물이란 것은 거의 시세의 제조하는 바라, 연개소문이 송도 말년에 났으며 쭉하여야 최영(崔瑩)이 될 뿐이며, 한양 말년에 났으면 대원군(大院君)이 될 뿐이지만, 다행히 고구려 전성시대, 곧 광개토왕(廣開土王) 이래의 광개(廣開)한 토지와 장수왕(長壽王) 이래 휴양(休養)한 민력과 3백만 이상의 수양제(隋煬帝) 해륙군(海陸軍)을 격파한 을지문덕(乙支文德) 이후 백전훈련(百戰訓練)의 군대를 가진 그 시대에 나서, 조선 과거 역사상 미증유의 군국적 침략주의를 행하던 인물이니, 그러면 시세가 연개소문을 낳음이요, 연개소문이 시세를 낳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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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피터대제의 위대함을 흠모하여 그 전기(傳記)를 지으려다가 세세히 사료를 수집한 결과, 도리어 그의 용렬(庸劣)한 점을 많이 발견하고 붓을 던졌다는 말도 있지만, 고대에 이른바 영웅ㆍ위인 들이 거의 시세의 산아요, 그 자체의 위대한 것은 없을 것이다.
 
4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 태종 이하 당시 전 중화인의 공파적(恐怕的) 대상이라, 신ㆍ구『당서』가 비록 그 국치(國恥)를 꺼려 당시의 전쟁사를 기록할 때에 연개소문의 진공전(進攻戰)의 사실을 빼고 방어전(防禦戰)의 사실만 썼을뿐더러, 그 방어전의 기사 가운데도 오직 안시성(安市城) 일역을 “唐兵攻之不克[당병공지불극]”으로 적은 이외에는 거의 당 태종이 승리한 것으로 적었으나, 그 ‘莫離支[막리지] 益驕傲[익교오]’ ‘莫離支[막리지] 不敢出[불감출]’등 구어(句語)의 반면에서 당인의 연개소문에 대한 공파가 여하하였던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며, 이위공(李衞公) 『병서(兵書)』에 ‘莫離支[막리지] 自謂知兵[자위지병]’이라 조소적 구어의 이면에서 연개소문의 전략을 흠탄(欽歎)한 의사가 적지 않음을 볼 수 있으며, 요양(遼陽)의 개소둔(蓋蘇屯)과 산해관(山海關) 이지(以至) 북경 등지의 종종한 황근대(謊根臺)와 직례(直隷)ㆍ산서(山西) 등성의 각지에 산재한 고려영(高麗營)이 연개소문의 병사가 중화 각지에 출몰하던 유적을 말할 수 있은즉, 만일 연개소문이 죽지 않았으면 당병이 고구려의 일촌지를 뺏지 못할 것은 명확한 사실이거늘 이제 『삼국사기』가 신ㆍ구『당서』를 의거하여 단군 2999년을 연개소문의 사년으로 단정한다 하면 고구려의 공수동맹국인 백제가 벌써 그 6년 전인 2993년에 멸망하여 연개소문이 능히 구존(救存)치 못하고, 고구려가 복배수적(腹背受敵)의 곤경을 당하여 멸망에 빈(瀕)한 지가 오래니, 만일 그렇다면 당인이 어찌 연개소문을 공파하였으리요. 내가 석년부터 이 의문을 가지고 연개소문의 사년이 백제 멸망 이전(檀君[단군] 2993년 이전 ─ 原註[원주])임을 억단(臆斷)하고 양국 사책의 기록의 실실(失實)임을 공언하나 동조자가 없었다.
 

2. 2

 
1
『삼국사기』는 매양 본국이 중화와 관계된 사실을 기록할 때에는 본국사를 버리고 중화사를 좇는 것이 그 서법(書法)인 동시에 연개소문같이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사상을 가진 인물의 사적에 대하여는 더욱 그 서법을 남용하였다.
 
2
연개소문이 “연 15에 총명신무하므로 무양왕(武陽王)이 이를 징(徵)하여 신(臣)을 삼다”함이 『삼국유사』에 보이고, “안시성의 전역(戰役)에 연개소문이 양만춘(楊萬春)으로 하여금 당 태종을 쏘아 눈을 맞춤”이 『해상잡록(海上雜錄)』에 보이고, “고구려가 승군 3만을 발하여 당병 30만을 대파함”이 『고려사』 최영전(崔瑩傳)에 보였으니, 무릇 『유사』나 『해상잡록』이나 최영전이 모두 연개소문의 전사(戰史)의 서술을 목적한 글들이 아니요, 오직 일시에 모사모어(某事某語)의 관계로 인하여 고기(古記)의 문을 인용한 것에 불과한즉, 『삼국사기』 저작 이전의 고기에 연개소문의 전기적 재료될 기록이 적지 아니하였을지어늘, 『삼국사기』 작자가 그 모든 재료를 일필로 도말(塗抹)하고 신ㆍ구 『당서』 『자치통감』을 초록하여 그 소위 ‘개소문전(蓋蘇文傳)’은 송기(宋祁)의 본문이며, 그 소위 ‘보장왕본기(寶藏王本紀)’는 당고종본기에 열간(裂簡)이요, 『고기』 중에서 인용한 연개소문의 기사는 전 『삼국사기』 중에 오직 “太大對盧蓋金館之[태대대노개금관지]” 8자가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보일 뿐이니, 이로 미루어 보면 『삼국사기』에 쓰인 “寶藏王二十五年[보장왕이십오년] 蓋蘇文死[개소문사]”가 어떤 본국의 신사(信史)를 의거함이 아니요, 오직 『당서』를 의거하였음이 명백하다.
 
3
“『당서』가 비록 적국인의 저서이므로 무록(誣錄)이 많다 하나 어찌 연개소문의 사년이야 속였으랴. 중화 고대의 사가(史家)가 비록 인국 사정에 소격(疎隔)하다 하나, 어찌 목전에 전 중국의 공파(恐怕)를 주던 연개소문의 죽은 해야 몰랐으랴”하여, 『당서』로써 연개소문의 사년을 확단하려는 이가 있겠지만, 이는 무리한 속단이다. 당 태종의 죽음을 『당서』 태종본기나 유계전(劉洎傳)이나 『자치통감』으로 참조하여 보면, 요동에서 얻은 병이며 그 병명은 양서의 소기가 각이하나, 이는 본국 전설(傳說)에 의하여 안시성(安市城)의 전창(箭瘡)됨이 명백하니, 마치 송 태종의 거란에게 맞은 전창(箭瘡)이 『양산묵담(兩山墨談)』에 보이었으나 『송사(宋史)』에 보이지 않음같이, 중화사에 당 태종의 전창을 휘닉(諱匿)하여 혹 병옹(病癰:肋膜炎[늑막염] ─ 原註[원주])이라 쓰며 혹 병리(病痢)라 썼다.
 
4
그런즉 연개소문은 이와 같이 당의 군부인 당 태종을 죽인 구적(仇敵:唐國[당국] 君臣[군신]의 不共戴天[불공대천]의 仇敵[구적] ─ 原註[원주])이니, 불공대천(不共戴天)의 구적에 대하여 과(戈)를 선(旋)치 않고 투사(鬪死)함은 공구씨의 정한 황황한 예법이요, 이 예법을 잊는 자는 금수라 하는 것이니, 만일 연개소문의 생전에, 당인이 고구려에 대한 복수군을 대발한 때가 없으면, 이는 거국이 명명히 금수화됨을 자백함이다. 그러므로 중화 사관이 연개소문의 사년을 평양 침입의 이후까지 늘리려하는 치상(癡想)도 있으며, 또는 인국 군신의 죽음을 매양 그 보상(報喪)의 해로 씀은 춘추의 서법인 고로, 중화 사관이 그 서법을 고수하는 벽견(僻見)도 있었을 것이다.
 
5
그 벽견에 의하여 『구당서』에는 “6월 임인에 개소문이 죽고, 자 남생(男生)이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예성(詣城)에 출순(出巡)한 새 제 남건(男建)으로 후사를 지(知)케 하였더니, 남건이 반하여 남생을 토하므로, 남생이 별성(別城)에 의거하여 자 헌성(獻誠)을 보내어 구(救)를 구하다”하여, 연개소문의 죽음, 남건의 모반과 남생의 걸항(乞降)을, 모두 다 헌성(獻誠) 분고(奔告)의 일(6월 임인 1일 ─ 原註[원주])의 일로 적었으며, 그 치상(癡想)에 의하여 『자치통감』에는 “5월에 개소문이 졸하고 남건이 모반하여 남생이 당에 걸항하므로, 6월 임인에 당이 남생을 구하는 조(詔)를 내렸다”고 썼다.
 
6
남생전(男生傳)을 의거하면 남생과 남건이 본래는 호상 친신하던 형제이므로, 그 부의 사후에 남생이 부의 직을 대하여 막리지가 되어 예성(詣城)에 출순할새, 내부의 병마 대권을 맡기어 유수(留守)케 하다가, 혹자가 그 형제의 의를 이간하여 남생더러는 남건이 그 병력으로써 형 남생을 거(拒)하고 그 권을 빼앗으려 한다 하며 남건더러는 남생이 제 남건을 오(惡)하여 그 유수의 병권을 거두려 한다 하여, 마침내 남생은 남건을 꺼려 정찰의 사자를 보내며, 남건을 남생을 의심하여 그 정찰사자를 암살함에 이르렀으니, 그 참간(讒間)의 이룸과 의기(疑忌)의 생김이 반드시 점(漸)을 적(積)하여 된 것이며, 1년 몇개월간의 일이 아닐지며, 또는 여하 용비(庸鄙)한 매국적(賣國賊)이라도 낙지(落地)할 때에 곧 매국적의 탈을 쓰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혹 사분(私忿)에 구박(驅迫)하거나 이욕에 미혹하여 매국의 대죄를 감작(甘作)함인즉, 10만의 병을 옹(擁)한 남생이 남건의 반보(叛報)를 접한 뒤에 반드시 일장의 혈전을 행하다가 패한 뒤에야 당에 투항하였으리니, 이것도 1,2개월 내에 된 일이 아닐지니, 그러면 6월 임인의 1일 내에 이 허다 대사를 경과한 줄로 쓴 『구당서』도 믿을 수 없거니와, 5월 1개월 내의 이 허다 대사를 경과한 줄로 쓴 『자치통감』도 믿을 수 없는 것이거늘, 『삼국사기』에 이를 그대로 초록함은 그 문자상 사대주의의 완고함은 민탄(悶歎)할 밖에 없다.
 

3. 3

 
1
여하간 연개소문의 죽음은 고구려의 멸망에 지대한 관계를 가진 사실로서, 사책(史册)의 기록이 이같이 모호하여 독사자의 의문이 되는 동시에, 나의 “백제 멸망 이전에 연개소문이 이사(已死)하였다” 함은 1개의 가정이니, 가정을 곧 실록으로 기술함은 사가의 불허할 바이다.
 
2
그래서 작년 추간에 “중화민국 하남성 낙양에서 일인 모가 천남생(泉南生)의 묘지(墓誌)를 발견하였다”는 기사가 모 신문에 게재되었으므로 연개소문의 사년을 참고하기 위하여 그 초본(抄本)을 구득하였다.
 
3
말하자면 연개소문과 남생의 부자를 근세 인물에서 그 짝을 찾자면, 연개소문은 홍경래(洪景來)ㆍ김옥균(金玉均)ㆍ대원군(大院君) 3인의 정신과 수완을 합하여 1인이 됨과 같으며, 남생은 이완용(李完用)ㆍ이용구(李容九) 일류의 등물(等物)이니, 남생묘지(男生墓誌)를 구하여 연개소문의 사실을 참조하려 함이 얼마나 가소(可笑)할 모순이냐. 그러나 양인이 불행히 부자의 관계를 가져 사적 재료를 공헌하는 때는 얼마큼 보조가 있을 줄로 안 것 이다.
 
4
및 그 본문을 열람한 “曾祖子遊[증조자유]ㆍ祖太祚[조태조] 並任莫離支[병임막리지]. 父盖金[부개금] 任太大對盧[임태대대로]. 乃祖乃父[내조내부]. 良治良弓[양치양궁]. 並執兵鈴[병집병영]. 咸專國柄[함전국병].”의 6구가 연개소문의 조 자유(子遊)와 부 태조(太祖)가 세대 귀족으로 군국대권(軍國大權)을 가져오던 가문임을 증명하는 이외에 정작 그 정치상의 공적과 전략과 전술의 능부 여하(能否如何)는 일자도 제급(提及)함이 없다.
 
5
중화 문사의 자존적 벽견(僻見)으로 당에 투항한 국적 남생을 찬미할지언정, 당과 대전한 연개소문의 사실을 직서(直敍)할 리가 없으며, 또 자의 묘지(墓誌)에 그 부의 행동을 조매(嘲罵)할 수도 없은즉, 그 위공위죄(爲功爲罪)를 도무지 제급하지 아니함이 당연한 일이니, 이는 나의 의외라 실망이라 하느니보다 예기한 바라 함이 옳거니와, 다만 한가지 앙앙(怏怏)한 바는 묘지 중에 ‘연개소문의 사년을 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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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묘지의 본문이 원래 고구려 당시의 실사에 의하여 중화사의 와오를 교정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중화사 가운데 기재한 소위 동이열전(東夷列傳)의 전고를 주워, 4ㆍ6 대구의 문장을 제작하는 동시에 할 수 있는대로 중화사의 기사와 충돌됨을 피한 것이니, 당사(唐史)에 이미 연개소문의 사년을 이적(李勣) 등 평양 침입의 동년으로 기록하였은즉, 본 묘지에 남생의 부(淵蓋蘇文[연개소문] ─ 原註[원주]) 사년을 뺀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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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글 중에 남생의 임관한 차서를 기록하여 가로되 “二十四兼授將軍[이십사겸수장군] 餘官如故[여관여고] 任莫離支[임막리지] 兼授三大軍將軍[겸수삼대군장군]”이라 하고, 말단에 남생의 사년을 기록하여 가로되 “儀鳳四年[의봉사년] 正月二十九日[정월이십구일] 遘疾薨[구질훙] 於安東府之官舍[어안동부지관사] 春秋有四十六[춘추유사십육]”이라 하였으니, 남생이 당 고종 의봉 4년(679)에 46세인즉, 의봉 4년은 단군 3011년이니, 그 막리지를 임하던 24세는 단군 2990년 보장왕 16년(657)이다.
 
8
그러면 단군 2990년 보장왕 16년에 연개소문이 죽고, 남생이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어 군국대권을 천(擅)한 것이 명백하며, 또 그 글 중간에 ‘二弟產建[이제산건] 一朝凶悖[일조흉패] 能忍無親[능인무친] 稱兵內拒[칭병내거]……公以共氣星分[공이공기성분] 旣飮淚而飛檄[기음루이비격]……乃遣大兄弗德等[내견대형불덕등] 奉表入朝[봉표입조] 陳其事跡[진기사적] 屬有離叛[속유리반] 德遂稽留[덕수계류]……公乃反旆遼東[공내반패요동]……更遣大兄冉有[경견대형염유]……乾封元年[건봉원년] 公又遣[공우견] 子獻誠入朝[자헌성입조]’라 하였은즉, 위의 본문에 의하여 그 사실을 역서(歷敍)하면, 연개소문의 사후에 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예성(詣城)에 출순(出巡)하다가 이제 남건ㆍ남산이 내반(內叛)하여 남생을 거(拒)하므로 남생이 반공(反攻)하다가 패하여, 첫번에 불덕(弗德)을 당에 보내어 구병(救兵)을 구하려 하더니, 부하의 의사(義士)들이 남생의 매국 불의를 오(惡)하여 공반(共叛)하여 남생을 격하매, 남생이 요동으로 달아나 다시 염유(冉有)를 당에 보내어 구병을 구하였으며, 그러다가 단군 2999년에 이르러 남생이 자 헌성을 당에 보냄이니, 그러면 연개소문의 사년이 보장왕 25년 곧 단군 2999년의 훨씬 이전임을 반증할지니, 이는 다 그 묘지 작자가 무의중에 당 사관의 제급(提及)하지 아니한 연개소문의 사년을 누설(漏洩)함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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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왈 묘지 중에 “三十二加太莫離支[삼십이가태막리지] 總錄軍國[총록군국] 阿衡元首[아형원수]”라 하였으니, 남생의 32세 되는 단군 2998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남생이 대신하여 군국대권을 총람함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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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太[태]’자의 관명은 삼국시대에 다 공덕 있는 자에게 올리는 품계요 실직이 아니니, 『삼국사기』의 직관지에 “文武王八年[문무왕팔년] 以金庾信[이김유신] 爲太大角干[위태대각간] 賞其元謀[상기원모]”라 한바, 김유신이 원래 ‘각간(角干)’으로 군권을 총람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원모(元謀)를 상(賞)하여 품계를 증가함인즉, 태막리지(太莫離支)도 남생의 공을 상한 품계가 됨이 명백하며, 또는 “總錄軍國[총록군국]ㆍ阿衡元首[아형원수]”의 양구는 “廿四[입사]……任莫離支[임막리지]……卅二加太莫離支[삽이가태막리지]”의 양사를 병승(幷承)한 문구니, 이로써 “남생이 32세에 비로소 군국대권을 총괄함”으로 억단함이 불가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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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이 또 “상문에 ‘蓋金[개금] 任太大對盧[임태대대로]’라 하였은즉, 남생이 24세 되던 해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로 승(陞)하고 남생이 막리지를 임함이 아니냐”하나, 『삼국사기』나 신ㆍ구 『당서』에는 다 연개소문의 부를 대대로라 하였는데, 본 묘지에는 남생의 조태조(祖太祚:淵蓋蘇文[연개소문]의 父[부] ─ 原註[원주])를 막리지라 하고, 『삼국사기』나 신ㆍ구 『당서』에는 다 연개소문을 막리지라 하였는데, 본 묘지에는 개금(蓋金:淵蓋蘇文[연개소문] ─ 原註[원주])을 태대대로(太大對盧)라 하여 서로 정반대의 기록을 게(揭)하였다.
 
12
‘대로(對盧)’의 ‘대(對)’는 ‘마주’의 ‘마’를 취하여 의역(意譯)한 것인즉, ‘대로(對盧)’도 ‘막리지(莫離支)’와 같이 ‘마리’로 읽을 것 이니, “대로와 막리지가 일개 동일한 관명의 이역(異譯)이라”함은, 내가 일찍 「이두문해석(吏讀文解釋)」에 논술하였거니와, 본 묘지는 매양 일명이역(一名異譯)의 이두자의 관명을 혼용하였으니, 예를 들면 남생의 고구려에서 임한 관작을 서(敍)할 때에 ‘두대형(頭大兄)’ ‘태막리지(太莫離支)’등의 관명만 있고, 그 하문에 당이 남생의 관을 서(敍)할 때에는 “任公特進太大兄[임공특진태대형] 如故[여고]”라 하여, ‘태대형(太大兄)’이 두대형(頭大兄)의 고직(故職)을 가리킴인지, 태막리지(太莫離支)의 고직을 가리킴인지 모르게 되었으며, 또는 그 전문이 대우(對偶)의 체인 까닭에 내ㆍ외구에 동일한 명사를 쓸 수 없으므로, 내구에는 “曾祖子遊[증조자유], 祖太祚[조태조] 並任[병임] 莫離支[막리지]”라 하고, 외구에는 “父蓋金[부개금] 任太大對盧[임태대대로]”라 함이요, 막리지 이외에 따로 대로란 관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13
설혹 막리지 이외에 대로란 관명이 있다 할지라도, 김춘추(金春秋)가 “太大對盧[태대대로] 淵蓋蘇文[연개소문]”을 방문할 때(金庾信傳[김유신전]─ 原註[원주])가 곧 보장왕 원년 단군 2975년이니, 단군 2975년에 연개소문이 이미 ‘태대대로(太大對盧)’의 관명을 가졌은즉, 그 16년 후(檀君[단군] 2990년 ─ 原註[원주])에 연개소문이 ‘막리지’로부터 ‘태대대로’의 직에 승하고 남생이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다 함은 불성설이니, 그러므로 단군 2990년 보장왕 16년을 ─ 막리지가 궐(闕)한 ─ 연개소문의 사년이라 하노라.
 

4. 4

 
1
연개소문이 만일 단군 2990년에 이사(已死)하였으면 당인이 어찌 이때를 타서 고구려를 치지 않고 먼저 백제를 쳤느냐.
 
2
이를 논술하자면 먼저 2978년의 동맹전역(同盟戰役)의 원인과 결과를 약술할밖에 없다. 그 전역의 원인으로 말하면 단군 2808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파하고 남진정책을 취하매, 신라와 백제가 각기 자위를 위하여 양국의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2870, 80년경에 신라 진흥왕이 출현하여 국력이 취성(驟盛)하여, 강원도ㆍ함경도 등지와 경기도의 남반부를 병유(並有)하고 충청북도 등지로 침입하니, 백제는 신라의 삼면 포위를 받아 국세가 위급하다가, 백제 무왕(武王)이 다시 군정을 닦고 국력을 기르며 부여성충(扶餘成忠)ㆍ부여윤충(扶餘允忠:兄弟? ─ 原註[원주]) 등을 썼으므로, 그 뒤 의자왕(義慈王) 원년에 신라 서비(西鄙)의 40여 성을 함락하며, 대야(大耶:지금 陜川[합천] ─ 原註[원주])의 역(役)에 김품석(金品釋)과 고타소랑(古陀炤娘)을 금살(擒殺)하니 낭(娘)은 신라 귀신(貴臣) 김춘추의 애녀(愛女)라, 춘추가 그 복수를 위하여 고구려의 구원을 구하나, 고구려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독점함을 꺼려 이를 거절하고 돌아와 백제와 동맹하니, 신라가 또 이를 저항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당의 구병을 걸하였다.
 
3
이때에 고구려의 전정자(專政者)는 곧 연개소문이니, 연개소문이 소시로부터 인국을 침략할 야심을 회포(懷抱)하고 중화에 유력(遊歷)하여 풍토를 시찰하고 돌아와, 부의 직을 사(嗣)하여 대대로가 되어 단군 2975년에 영류왕(榮留王)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을 전천(專擅)하더니, 당 태종이 수양제(隋煬帝)의 살수(薩水) 참패를 중화의 대치(大恥)라 하여, 매양 고구려를 침벌하여 이를 보복하려 하다가, 연개소문의 근기(根基)가 공고치 않은 시기를 타려 하는 즈음에 신라의 걸원사자(乞援使者)가 오므로, 양국이 드디어 비밀히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그 토지를 공분하기로”하여, 이에 고구려ㆍ백제 양국동맹에 대한 신라ㆍ당의 양국동맹이 성립되어 2978년의 전역을 산출하였다.
 
4
그 전역의 결과로 말하면 당 태종이 친히 30만 대병을 거느리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복몰(覆沒)하며, 태종은 유시(流矢)에 눈을 상하여 달아나다가, 이하(泥河:지금 蓒芋濼[한우락]. 唐太宗[당태종] 陷馬處[함마처] ─ 原註[원주])에서 마제(馬蹄)가 궐(蹶)하여 겨우 고구려의 부로(俘虜)가 됨을 면하고, 신라는 당에 대한 동맹의 의로 고구려의 후방을 위협하려 하여 김유신 등 제장을 명하여 대병을 이끌고 칠중하(七重河)를 건너더니, 백제는 고구려의 동맹을 위하여 신라의 서비(西鄙)를 습격하여 7성(城)을 함락하니, 이 전역에는 고구려ㆍ백제의 편이 완전히 대승리를 얻었다.
 
5
이 전역 이후 3년에 당 태종이 죽고 연개소문의 세력이 더욱 강성하여, 직례ㆍ산서 등지에 침입하여 왕왕이 군현(郡縣)을 설치하였나니, 이는 비록 사책에 빠졌으나 전술한 바, 각지의 고려영(高麗營)의 지명이 기록보다 더 적확한 사료가 될 것이며, 동시에 신라가 백제의 압박을 받은 것은 선덕(善德)ㆍ진덕(眞德) 양대의 본기(本紀)가 이를 명증한다.
 
6
및 본년에 이르러 백제의 부여성충(扶餘成忠)이 죽고 익년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죽으니, 이는 양국의 지대한 손실인 동시에 신라와 당의 비상한 복음이다. 이에 신라와 당이 다시 동맹전역을 발기할새, 당의 구적은 백제가 아니요 고구려인즉, 연개소문의 대상(大喪)을 타서 고구려를 공멸(攻滅)함이 당인의 최급한 목적일지나, 다만 당인이 전자 고구려를 침입할 때에 운량(運糧)의 간난(艱難)으로 매양 실패를 당하였으므로, 먼저 신라와 함께 백제를 쳐 멸하고 신라의 양향(糧餉)으로 당병을 공급하려 하여 이에 양국이 차상(磋商)한 결과, 2993년 가을에 신라의 김유신은 육로로, 당의 소정방(蘇定方)은 수로로 백제를 합공(合攻)함이니, 무릇 백제를 먼저 하고 고구려를 뒤에 함이, 이상의 소술(所述)한 관계에 말미암음일 듯하다.
 
7
백제가 이미 망하매, 신라는 양향을 제공하고 당은 군병을 내어 당인에게 비상한 편리를 주며, 고구려는 복배수적(腹背受敵)의 지역(地役)에 처하여 국세가 이미 급업(岌嶪)하였나니, 하물며 남생ㆍ남건의 분열을 가함이리요. 연개소문의 죽음이 이와 같이 고구려뿐 아니라 곧 백제의 흥망에까지도 지대한 관계가 있으므로 구사에 오기(誤記)한 연개소문의 사년을 정정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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