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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 東夷列傳 校正 ◈

해설본문  1925. 1.
신채호
1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1. 1. 校正의 이유

 
1
조선사(朝鮮史) 연구의 제목을 가지고 어떤 까닭으로 중국 위ㆍ진(魏晋)시대 사관(史官)이 지은 『삼국지(三國志)』 동이열전(東夷列傳) 같은 것을 취하느냐. 조선 고문헌이 너무 멸망하여 상고의 조선을 연구하자면 마치 바빌론 고사(古史)를 연구하는 자가 헤로도투스의 희랍사에 참고하지 아니할 수 없음과 같이 중국 고사에 힘입을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쓰인 조선열전(朝鮮列傳)은 중국 망명자로 조선의 일우(一隅)를 절거(竊據)한 위씨(衛氏) 일가가 한(漢)과 대항하던 약기(略記)니, 조선열전이라느니보다 도리어 중국 유적(流賊)의 침략사라 함이 옳으며, 『남북사(南北史)』『수서(隋書)』 『당서(唐書)』 등의 동이열전은 비교적 상비하나 또한 각기 당시 중국의 관계된 일만 적었으니 이는 한족(漢族)의 외경사(外競史)라 함이 옳거니와 위ㆍ진 시대의 사관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단군왕검의 건국이 왕침(王沈)의 『위서(魏書)』에 보이며, 조선왕 부(否), 조선왕 준(準) 등의 약사가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 보이며, 고대 열국의 국명ㆍ관제ㆍ풍속 등이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보여 중국과 관계되지 않은 고사까지도 간혹 기재하였다.
 
2
이는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때에 위장(魏將) 관구검(毌丘儉)이 환도(丸都:高句麗[고구려] 서울 ─ 原註[원주])에 입구(入寇)하여 주워간 서적과 전설을 거록(據錄)한 것이니, 당시에는 비록 국치(國恥)이나 후세의 사적 재료는 이에서 더 진귀한 것이 없는 까닭이다.
 
3
위ㆍ진 사관의 기록 가운데서 어떤 까닭으로 『삼국지』만 취하느냐. 전술한 모든 사관의 기록에 왕침의 『위서』는 “往在二千載前[왕재이천재전] 有檀君王儉[유단군왕검] 立國阿斯達[입국아사달]……”의 수십자가 여승(麗僧) 무극(無亟:一然[일연] ─ 原註[원주])의 『삼국유사』에 전하였을 뿐 이며, 어환(魚豢)의 『위략』은 배송지(裴松之)의 『삼국지』 주에 인용한 4,5조가 전하였을 뿐이요, 그 양서의 전부가 다 결망(缺亡)하였으므로 하릴없이 『삼국지』만을 취하게 됨이며, 선유는 매양 『삼국지』 동이열전을 버리고 『후한서』의 것을 취하였으나 이는 다만 후한이 삼국의 전대인 줄 만 알고 『후한서』 저자 범엽(范曄)이 『삼국지』 저자 진수보다 백여 년 이후의 사람임을 생각하지 아니함일뿐더러, 두 동이열전을 대조하면 『후한서』의 것이 명백히 『삼국지』의 초록임을 깨닫지 못함이다. 그러므로 『후한서』를 버리고 『삼국지』를 취함이다.
 
4
어떤 까닭으로 이를 취하는 동시에 교정(校正)을 가하느냐. 천년 이전에는 인판(印板)이 없어 일반 서적이 모두 초사(抄寫)로 전하므로 전도ㆍ와오ㆍ탈락ㆍ증첩(增疊)된 자구가 허다하여 중국의 경사(經史)가 모두 고증가의 손을 거친 뒤에야 가독(可讀)하게 되었는데, 조선열전ㆍ동이열전 같은 것은 저들이 고증에 용력(用力)하지 아니하였으며 설혹 용력할지라도 자가의 눈에 서투른 인명ㆍ지명ㆍ풍속ㆍ사정 등을 잘 모르므로 그 교정한 것이 더 착오된 것이 있으니,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하나요, 저들이 그 유전적(遺傳的) 자존성으로 타국을 묘시(藐視)하여 동이(東夷)라 칭한 것도 가통(可痛)하나 그러나 이는 사실에는 관계가 없거니와, 다만 고의로 무록(誣錄)한 것도 있으며, 혹 전문(傳聞)으로 오록(誤錄)한 것도 있어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둘이니, 그러므로 저자의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이 있음이니라.
 

2. 2. 字句의 校正

 
1
이제 전도(顚倒)ㆍ와오(訛誤)ㆍ탈락(脫落)ㆍ증첩(增疊)된 자구를 교정하리라.
 
2
(1) 서문의 “窮追極遠[궁추극원] 踰烏丸骨都[유오환골도]”라 하니, ‘烏丸骨都[오환골도]’는 곧 ‘烏骨丸都[오골환도]’의 잘못이요, 오골(烏骨)과 환도(丸都)는 다 성명(城名)이니, 오골성(烏骨城)은 지금의 연산관(連山關) ─ 일명 아골관(鴉骨關)이요, 환도성(丸都城)은 지금의 집안현(輯安縣) 동선령(洞仙嶺)이니, 오골과 환도의 위치ㆍ연혁은 조선사를 읽은 자의 명지(明知)하는 바이므로 이제 번록(煩錄)하지 아니하거니와, 관구검의 환도성 침입은 본 열전에 상기(上記)한바, 오골은 곧 관구검이 유주(幽州)로부터 환도성에 침입하는 경로인즉, “踰烏丸骨都[유오환골도]”가 곧 “踰烏骨丸都[유오골환도]”의 잘못임이 명백하지 아니하냐. 대개 상문의 오환전(烏丸傳)이 있음으로 인하여 초사자가 오골(烏骨)의 ‘骨[골]’과 환도(丸都)의 ‘丸[환]’을 바꾸어 ‘烏丸骨都[오환골도]’라 씀이다.
 
3
(2) 예전(濊傳)의 “有廉恥[유염치] 不請句麗[불청구려] 言語法俗[언어법속] 大抵與句麗同[대저여구려동]”이니, 우기(右記)의 문자는 문리(文理)가 닿지 아니하므로 중국학자들까지도 이를 의심하여 모두 그 오자가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건륭(乾隆)의 흠정 『삼국지』 위지(魏志) 권30 고증에는 ‘有廉恥不請[유염치불청]’의 ‘請[청]’을 ‘諳[암]’의 잘못이라 하고, 이를 하문에 속독하여 ‘不諳句麗言語[불암구려언어]’라 하였으나, 그러나 상문에 ‘濊與句麗同種[예여구려동종]’이라 하였으니, 본 열전에 이른바 ‘同種[동종]’은 매양 동언어의 인민을 가리킴인즉 청(請)을 ‘암(諳)’으로 고쳐서 ‘不諳句麗言語[불암구려언어]’라 읽음이 상하의 문의를 모순케 함일뿐더러, 예(濊)는 곧 동부여의 잘못이니(次節[차절]의 ‘記事校正[기사교정]’ 참조 ─ 原註[원주]) 동부여가 구려(句麗)의 언어를 몰랐다 하면 갑의 사촌동생 을이 갑의 언어를 모른다 함 같으니 흠정 『삼국지』의 운운이 다만 억단(臆斷)이 될 뿐이다.
 
4
『후한서』 예전의 “自謂與句麗同種[자위여구려동종] 言語法俗大抵相同[언어법속대저상동] 其人性愿愨少嗜欲不請匃[기인성원각소기욕불청개]”에 의거하여 보면 ‘不請句麗言語[불청구려언어]’의 ‘請[청]’은 오자가 아니요, ‘句[구]’가 ‘匃[개]’의 잘못이며 ‘麗[려]’는 하문의 구려(句麗)의 ‘麗[려]’로 말미암아 오증(誤增)된 자니 이를 개정하면 “有廉恥不請匃[유염치불청개] 言語法俗與句麗同[언어법속여구려동]”이니 ‘有廉恥不請匃[유염치불청개]’가 일구요, ‘言語法俗與句麗同[언어법속여구려동]’이 일구니라.
 
5
(3) 한전(韓傳)의 “臣智[신지] 或加優呼[혹가우호] 臣雲遣支[신운견지]”니, 삼한이나 부여가 다 각부대신을 ‘크치’라 칭한바, ‘크치’를 음으로 써서 ‘遣支[견지]’ ‘遣智[견지]’ 혹 ‘近支[근지]’가 되고, 뜻으로 써서 ‘大兄[대형]’ 혹 ‘大等[대등]’이 되고, 각 대신의 수장(首長) 총리대신을 ‘신크치’라 칭한바, ‘신크치’를 음으로 써서 ‘臣遣支[신견지]’ 혹 ‘臣近智[신근지]’가 되고, 뜻으로 써서 ‘太大兄[태대형]’ 혹 ‘上大等[상대등]’이 된다 함은 이미 졸저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에서 설명하였거니와, 우기(右記)한 ‘臣雲遣支[신운견지]’의 운(雲)은 곧 하문의 ‘臣雲新國[신운신국]’의 ‘雲[운]’으로 말미암아 오증(誤增)된 글자니, 이를 개정하면 “臣智[신지][혹] 加優呼臣遣支[가우호신견지]’라 할지니, ‘신크치’의 약칭이 ‘신치’가 되어 당시의 습관어가 되고 ‘신크치’라 구칭(具稱)함이 희소하므로, “臣遣支[신견지] 或略呼[혹약혹] 臣智[신지]”라 쓰지 않고 도리어 “臣智[신지] 或加優呼[혹가우호] 臣遣支[신견지]”라 씀이다.
 
6
(4) 변진전(弁辰傳)의 ‘차읍(借邑)’이니, 한전(韓傳)에는 ‘읍차(邑借)’란 관명이 있고 변진전에는 ‘借邑[차읍]’이란 관명이 있는바, 양자 중 하나는 반드시 도사(倒寫)한 글자일지니 어느 것이 도사이냐. 돈씨(頓氏)의 가보(家譜)에 의거하면 돈씨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자손이니, 을지는 관명이요 성이 아니라 하며, 일본인 백조고길(白鳥庫吉)은 ‘퉁구스’족의 말에 사자(使者)를 ‘일치’라 함에 의거하여 『진서(晋書)』 숙신전(肅愼傳)의 ‘乙力支[을력지]’를 ‘일치’로 해석한바, ‘邑借[읍차]’는 그 음이 ‘일치’와 비슷하니 또한 사자의 뜻이 될지며, 고구려 관명이 ‘鬱折[울절]’도 또한 ‘일치’니, 변진전의 차읍(借邑)은 곧 ‘邑借[읍차]’니 도재(倒載)이다.
 
7
(5) 변진전의 ‘彌烏邪馬[미오사마]’니, 야(邪)ㆍ야(耶)ㆍ아(牙) 등 자가 모두 ‘라’의 음 됨은 이미 졸저 「고사당 이두문 명사 해석법」에 설명하였거니와, 『해동역사(海東繹史)』 지리(地理)에 의거하면 현금 고령(高靈)이 곧 변진의 미마나(彌摩那)인즉, 본전(本傳)의 ‘邪馬[사마]’는 곧 ‘사馬邪[마사]’의 도사(倒寫)이다.
 
8
(6) 한전의 ‘駟盧[사노]’ ‘莫盧[막노]’와 변진전의 ‘馬延[마연]’이니, 앞의 삼국은 첩사(疊寫)이므로 『해동역사』에 산거(刪去)함이 이것이다.
 

3. 3. 記事의 校正

 
1
전절에 진술한 바는 본 열전의 초사 시대의 초사자들이 잘못한 자구를 교정한 것이거니와, 이제 본절에는 당초 그 본문의 잘못된 기사를 교정하려함이다.
 
2
위(魏)ㆍ진(晋) 사관이 관구검이 가져간 고구려의 서적을 참고함에 불구하고 기사의 위오(違誤)가 많음은, 마치 원(元)ㆍ명(明)ㆍ청(淸) 사관들이 『원사(元史)』나 『명사(明史)』나 『일통지(一統志)』 가운데에 고려의 사책이나 이조의 『여지승람』의 본문을 등록(謄錄)하면서 매양 망개(妄改)와 위증(僞證)이 있는 유니, 이제 이를 약거하건대,
 
3
(1) 진한(辰韓)을 진인(秦人)의 자손이라 함이니, 사마천의 『사기』에 흉노(匈奴)를 하우씨(夏禹氏)의 자손이라 하며, 『한시외전(韓詩外傳)』에 고죽(孤竹)을 탕(湯)의 봉국(封國)이라 하며, 어환(魚豢)의 『위략』에 대진(大秦) ─ 로마인(羅馬人[라마인])을 중국인의 자손이라 하여, 피국(彼國) 사가들이 매양 그 자존의 벽견(僻見)으로 허다의 소화(笑話)를 끼쳤지만, 본 열전에도 그 유습(謬習)이 있어, 진한의 일명은 진한(秦韓)이라 하고, 진한(秦韓)의 ‘秦[진]’에 부회(傅會)하여 진한은 진인(秦人)의 동주(東走)한 자라 하며, 이를 위증하기 위하여 진ㆍ마 양한이 동일한 노(盧)ㆍ나(那)ㆍ불사(不斯) 등의 지명과 동일한 신지(臣智)ㆍ읍차(邑借) 등의 관명이 있음을 불구하고, “辰韓[진한]……言語不與馬韓同[언어불여마한동]”의 억단을 내리며, 모호망매한 “國爲邦[국위방], 賊爲寇[적위구], 行酒爲行觴[행주위행상], 相呼爲徒[상호위도]”등의 난구(讕句)을 가입하여 ‘言語[언어]……有似秦人[유사진인]’의 불충분한 증거를 발표하여 조선의 족계(族系)를 어지럽히려 하였다.
 
4
(2) 동부여를 예(濊)로 오인함이니, 중국인이 조선 일을 적을 때에 너무 무책임적으로 적어 공자의『춘추(春秋)』에 조선을 산융(山戎)과 섞으며, 사마천의 『사기』에 진번조선(眞番朝鮮)의 대연전쟁(對燕戰爭)을 흉노전(匈奴傳)의 동호(東胡)ㆍ산융(山戎) 혹 예맥(濊貊) 등의 사실로 넣어, 만일 『관자(管子)』서나 『위략』이 아니면 그 유오(謬誤)를 발견할 수 없이 되었거니와, 본지(本志)에도 또한 동부여를 예로 오인한 잘못이 있다.
 
5
예맥(濊貊)은 곧 ‘려신’이니, ‘려신’을 혹 ‘려’의 한 글자로 역하여 ‘離支[이지]’ ‘令支[영지]’ ‘濊[예]’ ‘穢[예]’ ‘薉[예]’등이 되며, 혹 ‘려신’ 두 자를 병역(幷譯)하여 여진(女眞)ㆍ야인(野人)등이 되며,혹 ‘려신’의 ‘아리’강으로 그를 이름하여 ‘邑婁[읍루]’ ‘鴨盧[압로]’등이 되며, 혹 ‘려신’의 별부(別部) ‘물가’로 그 전체를 총칭하여 ‘勿吉[물길]’ ‘말갈(靺鞨)’등이 된 것이다.
 
6
역래 학자들이 조선의 삼국 초인 중국의 한말(漢末)에 읍루(邑婁)란 이름만 있은 줄 알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기에 “王將馬韓[왕장마한]ㆍ濊貊一萬騎[예맥일만기]”라 하여 읍루를 예맥으로 잉서(仍書)하였으며, 조선의 삼국 말인 중국의 당초(唐初)에 말갈(靺鞨)이란 이름만 있는 줄로 알지만, 김유신전(金庾信傳)에 “唐高宗曰[당고종왈] 高句麗與濊貊同惡[고구려여예맥동악]”이라 하여 말갈을 예맥으로 잉칭(仍稱)하였으니, ‘려신’의 명칭과 연혁이 대개 이러하거늘, 본지(本志)에 읍루가 예의 별명임을 모르고 읍루전을 입(立)한 이외에 따로 예전(濊傳)을 입함이 일오(一誤)요, 동북 양부여 가운데에 북부여는 그저 부여라 칭하는 동시에 동부여를 예로 인정함이 재오(再誤)라.
 
7
그러나 읍루전에 “邑婁[읍루] 在夫餘東北千餘里[재부여동북천여리]……言語不與夫餘[언어불여부여]ㆍ句麗同[구려동]……東夷飮食皆用爼豆[동이음식개용조두] 唯挹婁不[유읍루불] 法俗最無綱紀也[법속최무강기야]”라 하니, ‘夫餘東北千餘里[부여동북천여리]’가 송화(松花)ㆍ흑룡(黑龍) 등 연안의 ‘려신’국이 아니냐. ‘言語不與夫餘[언어불여부여]ㆍ句麗同[구려동]’이 『후한서』읍루전과 『북사(北史)』 물길전(勿吉傳)의 ‘在東夷中[재동이중] 言語獨異[언어독이]’한 ‘려신’족이 아니냐. ‘挹婁不[읍루불] 法俗最無綱紀也[법속최무강기야]’가 조선 열국 중 가장 미개한 ‘려신’이 아니냐. 그 위치ㆍ언어ㆍ풍속의 설명이 곧 ‘려신’임이 명백하며, 예전(濊傳)에는 “濊[예] 南與辰韓[남여진한] 北與高句麗[북여고구려]ㆍ沃沮接[옥저접]……言語法俗[언어법속] 大抵與句麗同[대저여구려동]”이라 하였으니, 남으로 진한을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沃沮)를 접한 자가 동부여가 아니냐. 언어는 당시 조선 열국이 ‘려신’ 부락 이외에 모두 동일한 언어이었지만, 법속이 부여ㆍ고구려 양국과 상동한 자가 동부여가 아니냐. 이는 그 위치ㆍ언어ㆍ풍속으로 말미암아 동부여를 예로 오인함이 명백하거늘, 후세 학자들이 『삼국지』의 잘못을 발견치 못하여, 조선사상 또는 동양사상 종족의 계한(界限)을 획청(劃淸)하지 못하여 허다의 분규를 양출(釀出)하였다. 당 가탐(賈耽)의 “新羅北界[신라북계] 溟州[명주] 古濊地[고예지] 前史以扶餘爲濊地者盖誤[전사이부여위세지자개오]”는 다만 북부여가 예 아님을 발견할 뿐이요, 동부여가 예 아님을 의구(依舊)히 발견치 못함이다. 혹왈, ‘려신’이 수초(水草)를 축(逐)하여 천사(遷徙)하는 만족(蠻族)인 고로, 삼국사에 나(羅)ㆍ제(濟)ㆍ여(麗) 삼국의 중간에 잡거한 말갈 ─ ‘려신’도 있으며, 고려사에 두만ㆍ압록 등지에 침거(侵據)한 여진(女眞) ─ ‘려신’도 있었은즉, 본지의 예도 이와 같이 일시 동부여 역내에 침입한 ‘려신’ 됨이 옳다 하나, 설혹 그렇다 할지라도, 주인 동부여를 입전(立傳)하지 않고 객인 예를 입전함은 본지의 잘못이다.
 
8
(3) 낙랑(樂浪)을 뺌이니, 낙랑은 조선사상 가장 장황분요(張皇紛擾)한 대문제라 그 상론은 타일로 미루거니와, 이제 약설하건데, 낙랑은 평양이요 평양은 ‘펴라’의 역이니, 한 무제(武帝)가 위만을 멸하고 낙랑을 주군(州郡)의 하나로 정하니, 그 위치가 지금 해성(海城) 등지요, 최씨(崔氏)란 자가 대동강 연안에서 굴기(崛起)하여 낙랑국이라 칭하다가, 말왕(末王) 최리(崔理)가 고구려에게 망하니 이는 곧 대무신왕(大武神王) 20년(37)이요, 그 뒤에 낙랑 25속국이 고구려에게 불복하여 한병(漢兵)을 영입하여 고구려를 항거하니 이는 대무신왕 말년이다. 나ㆍ제 양국이 처음에 낙랑의 침구로 말미암아 안정한 날이 없다가 대무신왕 이후부터 그 침구가 절적(絶跡)됨은, 최씨왕국이 멸망한 까닭이다.
 
9
한 광무(光武) 이후에 낙랑이 비록 한에 복(服)하였으나 그 인민의 자치와 각 소국의 주권은 의구히 조선인이 주하였으니, 소위 낙랑태수는 요동에 교우(僑寓)한 자요, 태조왕 때에는 요동의 낙랑까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당 가탐의 『사이술(四夷述)』 자서(自序)에 “遼東樂浪[요동낙랑] 陷於漢建安之際[함어한건안지제]”라 함이요, 동천왕(東川王) 때에 이르러 대동강의 낙랑은 고구려에 잉속(仍屬)하였으므로 동천왕이 환도(丸都)를 관구검의 유린에 버리고 묘사(廟社)와 인민을 평양에 옮겼으나, 요동의 낙랑은 위(魏)에 견실(見失)하였으므로 관구검의 환군할 때에 낙랑을 종(從)함이요, 미천왕(美川王) 때에는 요동의 낙랑이나 대동강의 낙랑이 다 고구려에 들어왔으므로 연(燕) 모용외(慕容廆)가 영평부(永平府)의 유성(柳城)에 낙랑을 이설함이며, 광개토왕(廣開土王)ㆍ장수왕(長壽王) 이후에는 유성(柳城)의 낙랑이 고구려의 침핍(侵逼)을 당하다가 백제의 병이 바다를 건너 침거하며 위(魏:拓跋氏[척발씨] ─ 原註[원주])제가 상곡(上谷:지금 大同府[대동부] ─ 原註[원주]) 내에 낙랑을 이설함이니, 이상은 사책에 증명된 것이다.
 
10
요동 낙랑은 비록 조선의 소유된 때가 있으나 그 인민과 지리가 당시 중국사의 범위에 들어간 자이며, 대동강의 낙랑은 비록 한족(漢族)의 정복을 당한 적이 있으나 항상 조선에 속한 지리거늘, 『삼국지』가 『한서』 지리지의 유규(遺規)를 습(襲)하여 낙랑을 조선열전 중에 빼었으므로 그 지리의 결감(缺憾)은 고사하고, 첫째는 고구려와 낙랑의 언어ㆍ풍속 등 동이(同異)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둘째는 낙랑과 삼한의 언어ㆍ풍속 등 동이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셋째는 따라서 고구려ㆍ부여 등 북방 제국과 삼한 등 남방 제국의 연락이 단절하여 본지 동이열전(東夷列傳)의 비상한 결점이 되었다.
 
11
(4) 발기(發岐) ─ 신대왕(新大王)의 제2자의 차서를 잘못하여 장자(長子)라 하며, 공손강(公孫康)에게 차병(借兵)한 사실에도 약간의 잘못이 있으며, 고구려왕을 고구려후(高句麗侯)라 하며, 고구려사에 보이지 아니한 고구려후의 ‘騶[추]’란 이름이 있으며, 왕망(王莽)이 고구려후 ‘騶[추]’를 참하였다 하며……기타 모든 착오가 있으나, 이는 사학상의 그리 대문제 될 것이 아니라 췌론(贅論)하지 아니한다.
 

4. 4. 結 論

 
1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고물(古物)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관영통보(寬永通寶)가 기자(箕子)의 유물도 되며, 10만책의 장서루(藏書樓) 속에서 좌와(坐臥)할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天符經)』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聖言)이 되는 것이다.
 
2
역래(歷來)의 조선사가들의 소위 사학(史學)은 매양 박학으로써 유일의 조건을 삼으며, 그 소위 박학은 오직 서적뿐이요, 그 소위 서적은 중국서적뿐 이었다.
 
3
김부식은, 조선고사가 결망(缺亡)된 까닭에 무호동중(無虎洞中)의 삵(狐狸[호리] ─ 原註[원주])과 같이 조선사가들의 비조(鼻祖)가 되었지만, 그가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송인(宋人)의 『책부원귀(册府元龜)』 1천 권을 사다가, 자가(自家)의 참고에 이바지하고는, 내각(內閣)에 심장(深藏)하여 타인의 열람을 불허하여, 자가가 유일한 박학자의 명예를 가지는 동시에, 『삼국사기』가 자가의 명예와 같이 국내 유일의 역사 됨을 희망하였다. 그의 악렬(惡劣)한 수단이 참 통악(痛惡)할 만할뿐더러, 그 사학적 두뇌가 비상히 결핍하여, 즉 근세의 발달된 역사에 비하여 손색이 있을 뿐 아니라, 동양 고대의 인물 중심주의의 역사의 저울로 달아볼지라도 『삼국사기』는 몇푼어치가 못 되는 역사다. 『삼국유사』『점필재집(佔畢齋集)』 등에 산견한 천년 사상계의 지배자인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부례랑(夫禮郞) 등 위인을 쓰지 아니하며, 문무왕서(文武王書:『三國史記[삼국사기]』文武紀[문무기] ─ 原註[원주]) 『당서』『일본서기』 등에 유전(流傳)한 백제 말일의 유일한 영물(英物)인 부여복신(扶餘福信)의 열전을 짓지 아니하며, 무공이 가장 많은 동성왕 시대를 미약으로 오증(誤證)하며, 기공(奇功)을 세운 양만춘(楊萬春)을 누락하며, 족계(族系)를 이야기하려면서 왕검씨(王儉氏)의 정통인 부여(夫餘)를 산기(刪棄)하며, 지리(地理)를 기록하려면서 고구려의 후계인 발해(渤海)를 배척하여, 그러므로 『삼국사기』는 문화사로나 정치사로나 거의 가치가 전무하다.
 
4
그가 중국 서적에서 얻은 박학도 너무 창피(猖皮)하여, 『사기』 조선열전의 “聚燕齊亡命者[취연제망명자] 王之[왕지] 都王儉[도왕검]”을 인용할 때에는 ‘王之[왕지]’를 하문에 붙여 ‘王之都王儉[왕지도왕검]’이라 하여 그 구절을 옳게 떼지 못하였으며, 『송서』 고구려전의 “璉不欲使弘南來[연불욕사홍남래]”를 이록(移錄)할 때에 ‘璉[연]’을 왕으로 고치면서 ‘來[래]’는 그대로 두어, 장수왕(長壽王)이 평양에 앉지 않고 절강(浙江)에 앉아 하는 말이 되었으며, 『수서』의 “高麗傲慢不恭[고려오만불공] 帝將討之[제장토지]”는 “我傲慢不恭[아오만불공] 帝將討之[제장토지]”라 개서(改書)하여 허리 부러질 ‘我[아]’란 주인을 찾았으며, 『책부원귀』의 ‘姓募名秦[성모명진]’을 등사(謄寫)하여 신라 박(朴)ㆍ석(昔)ㆍ김(金) 3성 이외에 턱없는 의문의 모씨(募氏) 제왕을 인사하게 되고, 이밖에도 이같은 맹인 야행(夜行)의 기사가 많으니, 아아 선택 없는 박학은 박학 아닌 선택만도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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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구암(久菴)ㆍ순암(順菴) 등 여러 선유는 탄복할 만한 정상근밀(精詳謹密)을 가져 김씨의 착오를 발견한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중국 서적에 대한 신뢰가 너무 과하여, 지리를 논하려면서 진위가 착잡한 『수경(水經)』을 마구 인용하며, 연대를 표하려면서 속석(束晳:『竹書紀年[죽서기년]』의 學者[학자] ─ 原註[원주]) 이후에 위작한 『죽서기년』를 그대로 존신(尊信)하고, 저 소위 경사(經史)는 자자금옥(字字金玉)으로 보아 그 위증과 오증을 발견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6
저자가 시기(時機)를 얻으면, 중국 서적 중 일체 조선에 관한 기록의 시(是)ㆍ비(非)ㆍ오(誤)ㆍ정(正)을 찾아보려 하거니와 근래 저사자(著史者)들이 매양 각종의 진서(眞書)ㆍ위서(僞書)ㆍ와언(訛言)ㆍ정언(正言)을 모두 조선사의 재료를 삼고, 양문(洋文)의 형식으로 편장을 갈라, 신사학자(新史學者)의 지은 조선사라 함은 좀 부끄러운 일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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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 1925. 1. 16ㆍ19ㆍ21ㆍ23ㆍ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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