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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 부벽루(浮碧樓)라, 빛 낡은 편액(扁額)들이 걸려 있을 뿐, 새 한 마리 앉아 있지 않았다. 고요한 그 속을 들어서기가 그림이나 찢는 것 같아 현(玄)은 축대 아래로만 어정거리며 다락을 우러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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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퍽하게 굵은 기둥들, 힘 내닫는 대로 밀어던진 첨차와 촛가지의 깎음새들, 이조(李朝)의 문물(文物)다운 우직한 순정이 군데군데서 구수하게 풍겨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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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에 비겨 대동강은 너무나 차다. 물이 아니라 유리 같은 것이 부벽루에서도 한 뼘처럼 들여다보인다. 푸르기는 하면서도 마름〔水草〕의 포기포기 흐늘거리는 것, 조약돌 사이사이가 미꾸리라도 한 마리 엎디었기만 하면 숨쉬는 것까지 보일 듯싶다. 물은 흐르나 소리도 없다. 수도국 다리를 빠져, 청류벽(淸流壁)을 돌아서는 비단필이 훨적 펼쳐진 듯 질펀하게 깔려 나갔는데 하늘과 물은 함께 저녁놀에 물들어 아득한 장미꽃밭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광정(練光亭) 앞으로부터 까뭇까뭇 널려 있는 마상이와 수상선들, 하나도 움직여 보이지 않는다. 끝없는 대동벌에 점점이 놓인 구릉(丘陵)들과 함께 자못 유구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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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피우던 담배를 내어던지고 저고리 단추를 여미었다. 단풍은 이제부터 익기 시작하나 날씨는 어느덧 손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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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부여(夫餘)에 가서 낙화암(落花巖)이며 백마강(白馬江)의 호젓함을 바라보던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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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평양이 십여 년 만이다. 소설에서 평양 장면을 쓰게 될 때마다, 이번에는 좀 새로 가보고 써야, 스케치를 해와야, 하고 벼르기만 했지, 한 번도 그래서 와보지는 못하였다. 소설을 위해서뿐 아니라 친구들도 가끔 놀러 오라는 편지가 있었다. 학창 때 사귄 벗들로, 이곳 부회 의원이요 실업가인 김(金)도 있고, 어느 고등보통학교에서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치는 박(朴)도 있건만, 그들의 편지에 한 번도 용기를 내어 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 받은 박의 편지는 놀러 오라는 말이 있던 편지보다 오히려 현의 마음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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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간이 반이 없어진 것은 자네도 짐작할 걸세. 편안하긴 허이. 그러나 전임으론 나가 주고 시간으로나 다녀 주기를 바라는 눈칠세. 나머지 시간이라야 그리 오래 지탱돼 나갈 학과 같지는 않네. 그것마저 없어지는 날 나도 그때 아주 손을 씻어 버리려 아직은 지싯지싯 붙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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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사연을 읽고는 갑자기 박을 가 만나 주고 싶었다. 만나야만 할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고 싶어 전보만 한 장 치고 훌쩍 떠나 내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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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에 나온 박은 수염도 깎은 지 오래어 터부룩한데다 버릇처럼 자주 찡그려지는 비웃는 웃음은 전에 못 보던 표정이었다. 그 다니는 학교에서만 지싯지싯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전체에서 긴치 않게 여기는, 지싯지싯 붙어 있는 존재 같았다. 현은 박의 그런 지싯지싯함에서 선뜻 자기를 느끼고 또 자기의 작품들을 느끼고 그만 더 울고 싶게 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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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나 붙들고 섰던 손목을 놓고, 그들은 우선 대합실로 들어왔다. 할말은 많은 듯하면서도 지껄여 보고 싶은 말은 골라 낼 수가 없었다. 이내 다시 일어나 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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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래서 박은 저녁에 김을 만나 가지고 대동강가에 있는 동일관(東一館)이란 요정으로 나오기로 하고 현만이 모란봉으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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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면서 자동차에서 시가도 가끔 내다보았다. 전에 본 기억이 없는 새 빌딩들이 꽤 많이 늘어섰다. 그 중에 한 가지 인상이 깊은 것은 어느 큰 거리 한 뿌다귀에 벽돌 공장도 아닐 테요 감옥도 아닐 터인데 시뻘건 벽돌만으로, 무슨 큰 분묘(墳墓)와 같이 된 건축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현은 운전사에게 물어 보니, 경찰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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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이상하다 생각한 것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여자들의 머릿수건이다. 운전사에게 물으니 그는 없어진 이유는 말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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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잘 없어졌죠. 인전 평양두 서울과 별루 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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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평양 여자들의 머릿수건이 보기 좋았었다. 단순하면서도 흰 호접과 같이 살아 보였고, 장미처럼 자연스런 무게로 한 송이 얹힌 댕기는, 그들의 악센트 명랑한 사투리와 함께 ‘피양내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그 고장에 와서도 구경하지 못하는 것은, 평양은 또 한 가지 의미에서 폐허라는 서글픔을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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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을밀대(乙密臺)로 올라갈까 하다 비행장을 경계함인 듯, 총에 창을 꽂아 든 병정이 섰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냥 강가로 내려오고 말았다. 마침 놀잇배 하나가 빈 채로 내려오는 것을 불렀다. 주암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자니까 거기는 비행장이 가까워 못 올라가게 한다고 한다. 그럼 노를 젓지는 말고 흐르는 대로 동일관까지 가기로 하고 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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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처럼 물 가는 대로만 떠가는 배는 낙조가 다 꺼져 버리고 강물이 어두워서야 동일관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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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릿집은 강물에 내민 바위를 의지하고 지어졌다. 뒷문에 배를 대고 풍악 소리 높은 밤 정자에 오르는 맛은, 비록 마음 어두운 현으로도 적이 흥취 도연해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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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줄 모르는 술이나 이번엔 사양치 말고 받아 먹자! 박을 위로해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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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 김을 데리고 와 벌써 두 기생으로 더불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의 면도 자리 푸른 살진 볼과 기생들의 가벼운 옷자락을 보니 현은 기분이 다시 한번 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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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자네두 김군처럼 면도나 좀 허구 올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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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요즘 어떤가? 우리 김 부회 의원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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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오래간만에 만나 히야카시부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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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참 늙지 않네그려! 우리 서울서 재작년에 만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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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아마…… 내 그때 도시 시찰로 내지 다녀오던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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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넨 서평양인지 동평양인지서 땅 노름에 돈 좀 잡았다데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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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이 사람! 선비가 돈 말이 하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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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게, 오늘 저녁엔 자네가 못 먹나 내가 못 먹이나 한번 해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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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옆에서 경평대항전 구경이나 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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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숩다니? 기생엔 여기가 서울 아닌가. 금수강산 정기들이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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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들은 하나는 방긋 웃고, 하나는 새침한다. 방긋 웃는 기생을 보니, 현은 문득 생각나는 기생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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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열둬― 해 됐네그려? 그때 나 왔을 때 저 능라도에 가 어죽 쒀먹던 생각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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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기생이 이름이 뭐드라? 자네들 생각 안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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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벽에 기대었던 김이 놀라 일어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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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정작 부를 기생은 안 불렀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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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박도 그제야 생각나는 듯이 무릎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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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현이 서울서 내려와서 이 세 사람이 능라도에 어죽놀이를 차렸다. 한 기생이 특히 현을 따라, 그때만 해도 문학 청년 기분이던 현은 영월의 손수건에 시를 써주고 둘이만 부벽루를 배경으로 하고 사진을 다 찍고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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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 나이 멫 살일 텐데 아직 기생 노릇을 해? 난 생각은 나두 이름두 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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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게 이번엔 자네가 제발 좀 데리구 올라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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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제일 오랜 기생, 제일 나이 많은 기생이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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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적이 으쓱해진다. 상이 들어왔다. 술잔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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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걸…… 술이야 고학할 수 있던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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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자식 가긍허구나! 허긴 너이 따위들이 밤낮 글 써야 무슨 덕분에 술 차례가 가겠니! 오늘 내 신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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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누구? 뭐래던가 동경 가 글 쓰는 사람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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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아, 잔이나 받아라. 듣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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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현은 김의 잔을 부리나케 마시고 돌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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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 다 눈두덩을 내려쓸도록 모두 얼근해진 뒤에야 영월이가 들어섰다. 흰 저고리 옥색 치마, 머리도 가리마만 약간 옆으로 탔을 뿐, 시체 기생들처럼 물들이거나 지지거나 하지 않았다. 미닫이 밑에 사뿐 앉더니 좌석을 휙 둘러본다. 김과 박은 어쩌나 보느라고 아무 말도 않고 영월과 현의 태도만 번갈아 살핀다. 영월의 눈은 현에게서 무심히 스쳐 지나 박을 넘어뛰어 김에게 머무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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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자네 눈두 인젠 무뎄네그려! 자넬 반가워할 사람은 내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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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이 정말 속으로 반가운 손님헌텐 인살 안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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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슬쩍 다시 박을 거쳐 현에게 눈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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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김이 먼저 잔을 드니 영월은 선뜻 상머리에 나앉으며 술병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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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은 지 오래나 눈 속은 그저 웃는 것이 옛 모습일 뿐, 눈시울에 거무스름하게 그림자가 깃들인 것이나 볼이 홀쭉 꺼진 것이나 입술이 까시시 메마른 것은 너무나 세월이 자국을 깊이 남기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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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드는 현과 눈이 마주치자 영월은 술이 넘는 것도 모르고 얼굴을 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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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차 일반인가 봅니다. 언제 오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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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현이 마시고 주는 잔에 가득히 붓는 대로 영월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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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엔 하―얀 나비 같은 수건을 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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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평양말을 더 또렷또렷하게 잘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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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요샌 서울말을 해야 좋아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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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놈들…… 그런데 박군? 어째 평양 와 수건 쓴 걸 볼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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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이 김 부회 의원 영감께 여쭤 볼 문젤세. 이런 경세가(經世家)들이 금령을 내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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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들아, 너이야말루 빌어먹을 자식들인게…… 그까짓 수건 쓴 게 보기 좋을 건 뭬며 이 평양부내만 해두 일년에 그 수건값허구 당기값이 얼만지 알기나 허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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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김이 당당히 허리를 펴고 나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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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원이면? 문화 가치를 모르는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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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이 글 쓰는 녀석들은 세상을 모르구 산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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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넘은 자식…… 조선 여자들이 뭘 남용을 해? 예펜네들 모양 좀 내기루? 예펜넨 좀 고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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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그래 집안에서 죽두룩 일해, 새끼 나 길러, 사내 뒤치개질해…… 그리구 일년에 당기 한 감 사 매는 게 과하다? 아서라, 사내들 술값, 담뱃값은 얼만지 아나? 생활개선, 그래 예펜네들 수건값이나 당기값이나 졸여 먹구? 요 푼푼치 못한 경세가들아? 저인 남용할 것 다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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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자식, 말버릇 좀 고쳐라…… 이 자식아, 술이란 실사회선 얼마나 필요한 건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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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술만 필요허냐? 고유한 문환 필요치 않구? 돼지 같은 자식들…… 너이가 진줄 알 수 있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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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도오 바가니 수르나 고노야로(사람 우습게 보지 마라 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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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이 따윈 좀 바가니시데모 이이나(깔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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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닌 다 뭐 말라빠진 거냐? 네 술 좀 먹기루 이 자식, 내 헐말 못 헐 놈 아니다. 허긴 너헌테나 분풀이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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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 고걸 먹구 벌써 취했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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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 이쑤시개를 놓고 다시 잔을 현에게 내민다. 김은 잠자코 안주를 집는 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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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해먹어서 손님들 기분에 눈치빠른 영월은 보이를 부르더니 장구를 가져오게 하였다. 척 장구채를 뽑아 잡고 저쪽 손으로 먼저 장구 전두리를 뚱땅 울려 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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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따 조오쿠나 이십―오―현 탄―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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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불러 내기 시작한다. 현은 물끄러미 영월의 핏줄 일어선 목을 건너다보며 조끼 단추를 끌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상머리를 뚜드려 본다. 그러나 자기에겐 가락이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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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헹―에― 헤이야―하 어―라 우겨―라 방아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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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받는 사람은 김뿐이다. 현은 더욱 가슴속에서만 끓는다. 이런 땐 소리라도 한마디 불러 내었으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랴 싶어진다. 기생들도 다른 기생들은 잠잠히 앉아 영월의 입만 쳐다본다. 소리가 끝나자 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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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영월에게 술 한잔을 권하더니 가사를 하나 부르라 청한다. 영월은 사양치 않고 밀어 놓았던 장구를 다시 당기어 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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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 낸다. 박은 입을 씻고 씻고 하더니 곡조는 서투르나 그래도 꽤 어울리게 이런 시 한 구를 읊어서 소리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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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안― 산―진 수궁처…… 임―정― 가고옥― 역난위를…….”
136
박은 눈물이 글썽해 후― 한숨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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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는 다시 찬비가 지나간 듯 호젓해진다. 김은 보이를 부르더니 유성기를 가져오라 헀다. 재즈를 틀어 놓더니 그제야 다른 두 기생은 저희 세상인 듯 번차 김과 마주 잡고 댄스를 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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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넬 또 만날 줄은 몰랐네, 반갑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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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가 한 곡조 끝났다. 김은 자리에 앉으며 현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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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출 줄도 모르네. 기생을 불러 놓고 딴스나 하는 친구들은 내 일찍부터 경멸하는 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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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처럼 마게오시미 스요이(고집이 센)한 사람두 없을 걸세. 못 추면 그냥 못 춘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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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지기 싫어서가 아닐세. 끌어안구 궁댕잇짓이나 허구, 유행가 나부랭이나 비명을 허구, 그게 기생들이며 그게 놀 줄 아는 사람들인가? 아마 우리 영월인 딴슬 못 할 걸세.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할걸?”
160
“아이! 영월 언니가 딴슬 어떻게 잘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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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다른 기생이 핼깃 쳐다보며 가로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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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쩝니까? 이런 손님 저런 손님 다 비윌 맞추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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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일수룩 제 돈이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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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는데? 돈 많은 사내헌테 가면 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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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사내가 변심 않구 나 하나만 데리고 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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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처나 되면 아무리 남편이 오입을 해두 늙으면 돌아오겠지 하구 자식낙이나 보면서 살지 않어요? 기생야 그 사람 하나만 바라고 갔는데 남자가 안 들어와 봐요? 뭘 바라고 삽니까? 그리게 살림 들어갔다 오래 사는 기생이 멫 됩니까? 우리 기생은 제가 돈을 뫄서 돈 없는 사낼 얻는 게 제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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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언즉시야라 거 반가운 소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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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푼 없는 놈이다. 직업두 인젠 벤벤치 못하다. 내 예펜네라야늙어서 바가지두 긁지 않을 거구, 자네 돈 뫘으면 나하구 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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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돈 가진 기생이나 얻는 수밖에 없네 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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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아니라 자네들 이제부턴 실속 채려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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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너이가 아무리 꼬장꼬장한 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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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니 현은 술을 깨려고 마시던 사이다컵을 김에게 사이다째 던져 버린다. 깨지고 뛰고 하는 것은 유리컵만이 아니다. 기생들이 그리로 쏠린다. 보이들도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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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 되나 안 되나 우린 우린…… 이래봬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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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현의 두리두리해진 눈엔 눈물이 핑― 어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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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데서 뭘…… 이 사람 취했네그려, 나가 바람 좀 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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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박이 부산한 자리에서 현을 이끌어 낸다. 현은 담배를 하나 집으며 복도로 나왔다.
193
“이 사람아? 김군 말쯤 고지식하게 탄할 게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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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취했나 보이…… 내가…… 김군이 미워 그리나?…… 자넨 들어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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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한참 난간에 의지해 섰다가 슬리퍼를 신은 채 강가로 내려왔다. 강에는 배 하나 지나가지 않는다. 바람은 없으나 등골이 오싹해진다. 강가에 흩어진 나뭇잎들은 서릿발이 끼쳐 은종이처럼 번뜩인다. 번뜩이는 것을 찾아 하나씩 밟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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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에 있는 말이 생각났다.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란 말이다. 현은 술이 확 깬다. 저고리섶을 여미나 찬기운은 품속에 사무친다. 담배를 피우려 하나 성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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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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