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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朝時代(이조시대)의 문학 ◈
해설   본문  
1933. 7
안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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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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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를 조사 연구하기는 1921년 봄에 시작하여 1922년 4월에 소책자를 발간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때에는 내가 「자각론(自覺論)」을 저술한 경우에 있어 서문으로 기록해 본 것이요, 완전히 한 책의 격식을 이룬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책에는 더러 오해한 것 또는 미흡하고 불충분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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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여가를 타서 완편을 이루고자 재료를 수집하여 그것을 조금씩 잡지에 발표하여 온바 이미 삼국시대까지 정정 보충한 것이 있거니와 이제는(고려시대일은 후일로 미루고) 이조 때만 진술코자 하는데 이 또한 전편을 구체적으로 말함이 아니라 경개(梗槪)만 발록(拔錄)하여 통속적 참고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1.1. (1) 사상(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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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치국의 대본을 세우되 언무수문(偃武修文)·유교장봉(儒敎掌奉)의 2대 정강을 고집하였다. 이 주의를 취한 그 내부의 사정은 시대적 요구로 볼 것이다. 고려조에 있어서는 무사의 전횡(專橫)으로 인하여 정국이 안일치 못하매 그 반동(反動)이 수문(修文)의 정책을 세운 것이요, 또 전대에는 불도(佛道)와 선도(仙道)에 침혹하여 민지(民志)는 크게 미망(迷妄)을 지었다. 필경 불교로 인하여 민족성은 망하였다. 이것이 조선사에 있어 천고의 유한이다. 근래 어떤 자들이 불교의 역사상 가치를 찬송하는 자가 있으나 그는 망발이다. 우리는 불교가 조선민족의 악마 되었던 것을 모르면 아니 된다. 왜냐하면, 불·선(佛仙)으로 인하여 실생활에는 비관적 타락심이 생기고 신에 굴복하여 인도적 독립심이 마비되었다. 이 사실은 역사상에 여러 차례 보이거니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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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궁전 온하늘이 어둡고 흐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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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모습 이상스런 모양으로 모두 신선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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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앞의 수레와 말 어느 시절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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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빌고 삶을 사는 모양 모두 가련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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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殿沈沈自一天[추전침침자일천], 殊形異狀盡神仙[수형이상진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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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前車馬何時節[문전차마하시절], 丐福營生總可憐[개복영생총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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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1수를 볼지라도 당시 인심이 얼마만큼 사상력(思想力)이 부패했던 것을 추측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시의 그 사상을 돌리지 못하였다면 조선족은 벌써 멸망했을 것이다. 다행히 말엽에 이르러 자각파의 운동으로서 유교(儒敎)의 정조주의(情操主義)를 진흥하게 되니, 그 신흥의 사상 활동이 드디어 이조 개혁을 달성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조가 수문 숭유(修文崇儒)의 정책을 세움은 곧 고려조 사상의 반동적 요구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일대의 국민 정신의 생활을 지배하고 또한 일반 예술도 모두 그를 배경으로 따라나온 것이다.
 
 

1.2. (2) 인쇄술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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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문학(李朝文學)이 발흥한 제1 원인은 앞에 말한 대로 문사(文士)를 등용한 것이다. 그러나 문사를 양성시키는 직접 재료가 없으면 불가한 것이다. 이의 요구로는 인쇄술(印刷術)을 발전시켜 서적을 크게 발행하게 되니 이것이 문학 발흥의 제2 원인이다. 고려조 중엽 이후부터 주자(鑄字)를 쓴 일이 있다가 이조 혁명 벽두로 태종(太宗) 3년(1403)부터 새로 동활자(銅活字)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니, 그때로부터 계속 주조하여 지금 전래(傳來)한 것은 대소 합 6천만 개가 된다. 이렇듯 발달한 것은 서양 인쇄술보다도 조선이 200년이나 앞선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적포인 교서관(校書館)을 두고 온갖 서적을 발간하게 되니, (鄭道傳[정도전]의 「書籍鋪序[서적포서]」 참조) 문학계의 비상한 편리를 얻을새 조익(趙翼)도 말하되 “본조(本朝)에서 천하의 책을 차례로 간행하여 외방 주군(州郡)에도 간각된 여러 가지 책이 없는 곳이 없으니, 선비로 학문을 원하는 뜻이 있으면 각기 그 원하는 대로 학문을 이룰새 강물을 마셔 각기 뱃속을 채움과 같다”고 하였다.
 
 

1.3. (3) 언문 제정(彥文製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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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숭봉하면서 조선(祖先) 숭배심은 전대보다 배나 더하여 충효(忠孝)·절의(節義)의 사상이 상하에 보급된다. 그로 인하여 민족적 정신이 공고한 동시에 언문(彥文 : 나는 ‘諺’자를 약하여 ‘彥’으로 쓴다)을 제정하여 자국어를 필사해냄에 대한 바의 편리를 얻게 되니, 이는 곧 문학 발흥의 제3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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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말한 바 이조 문학의 전개는 3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중 언문의 발생은 가장 유익한 것이, 우리들의 이로써 우리들의 감정상 내적 형상을 충실히 또는 자유로 표현하게 되며, 외국의 문명을 소화함에도 비상한 편리가 있고 자국의 활약을 언어에 주(注)하여 독특의 문화를 열게 한 것이다.
 
 

2. 2. 宮廷文學[궁정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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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의 신시대가 유교사상·문인정치로써 이미 대세를 정하니, 전일 황당무계의 미망적(迷妄的) 정신을 하루 아침에 물리치고 세태의 실상을 대상으로 하여 정조적(情調的) 기풍이 일시에 나타났는데 그 원동력은 전혀 정치제도에 있다. 정치는 곧 군주전제로 나오게 됨에 따라서 예술도 군주의 제재(制裁)에 있어 정부를 표준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전국의 문사는 모두 궁정에 집합하여 스스로 문학의 원천을 지었다. 원천이 될 뿐 아니라 초기의 문학은 궁정의 전유물로 되었다.
 
 

2.1. (1) 시가(詩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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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성공한 후 개국공신의 흉중은 희열이 만만하여 그리고 넘쳐나오는 정서는 스스로 군덕(君德)을 기리고 신도(新都 : 漢陽[한양])를 찬양하는 가조(歌調)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시가는 곧 그러한 의미를 함유한 바 「신도가(新都歌)」「정동방곡(靖東方曲)」「납씨가(納氏歌)」「문덕곡(文德曲)」「화산별곡(華山別曲」「상대별곡(霜臺別曲)」「유림가(儒林歌)」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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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곡(文德曲)의 일절(鄭道傅[정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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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궁(法宮)이 유엄심구중(有嚴深九重)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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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 만기(一日萬機) 분기총(紛其叢)하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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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왕(君王)이 요득민정통(要得民情通)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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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언로(大開言路) 달사총(達四聰)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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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언로(開言路) 군불견(君不見)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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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후지덕(我后之德)이 여순동(與舜同)하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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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으 아후지덕이 여순동하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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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별곡(霜臺別曲)의 일절(權近[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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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방배(各房拜) 예필후(禮畢後) 대청제좌(大廳齊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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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도(正其道) 명기의(明其義) 참작고금(參酌古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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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득실(時政得失) 민간이해(民間利害) 구폐조(救弊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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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장상(壯上) ㅅ경(景)긔 어떠하니이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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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명신직(君明臣直) 태평성대(太平聖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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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명신직 태평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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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종간여류(從諫如流) ㅅ경(景)긔 어떠하니이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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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시가의 율조는 다 전대의 시체(時體)로서 엄숙과 우온(優溫)을 합한 사자(詞姿)이며, 그 시상(詩想)은 독일 기사시인(騎士詩人)이 불란서 사상을 흡수함과 같이 한문학(漢文學) 사상을 본뜬 듯하다. 그 뒤를 이어서 세종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나오니, 이는 전편 125장의 장시다. 그 내용률은 선왕의 성덕신공(盛德神功)을 찬송한 서사적(敍事的) 서정시이다. 그 율조는 중국의 4자시를 직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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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언문을 흠정(欽定)하고 처음으로 이 노래를 지은 것이다. 문장은 외국문을 자국어로 용주(鎔鑄)하여 온아 유창한 음조를 띠니, 곧 한문(漢文)의 강건(剛健)과 언문의 우려(優麗)한 성질을 혼화(混和)하여 전표(全豹)의 미를 지었다. 그 사자에 있어서는 고전의 사물을 인용하고 대우(對偶)의 구를 세우니, 한 일을 서술함에는 유례(類例)를 고대 및 타국에 대조하여 독자로 하여금 고금 동서의 사례에 부앙감개(俯仰感慨)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한자의 서정시는 열왕(列王)의 시를 수집 편차한 것이 8, 9종, 군신간에 창화(唱和)한 것을 엮어낸 것이 20여 종이 있다. 이는 다 전려 화창하고 감고 도금(感古圖今)의 뜻이 있으니, 문종·성종·선조·영조·정조의 5왕은 등한히 볼 문장이 아니다.
 
 

2.2. (2) 산문(散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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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은 세 방면으로 볼 수 있다. ①은 세종이 언문을 흠정한 즉시로부터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각종 한적(漢籍)을 번역 또는 해석하니, 편찬법이 이로부터 발달하고, 한편 사민(士民)의 독서력을 증진하였다. 세종으로 부터 정조(正租)까지 해석한 한문 전적이 근 60종에 달하였다. 이는 마치 서양 고트족이 자국 문자를 만들어 『성경』 전부를 역출(譯出)한 사업과 같은 느낌이 있다. 저서로는 세조의 자부인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술한 『내훈(內訓)』 3책이 있으니, 이는 성종 6년(1475)에 출판한 것이다. 내용은 여자의 수신 교과서로 된 것이나 산문문학으로는 둘도 없는 것이다. 그 문자 사용법도 재래식과는 달리 신기축을 이루어 뒷날 민간의 모범이 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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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문학 중에 대서특필할 것은 내시(內侍) 및 궁녀를 일단으로 하여 한문 소설을 번역한 문단(文壇)이니, 이 번역 출판한 소설은 내전(內殿) 및 궁녀들의 소일거리로 된 것인바 그 수가 매우 많다. 이는 평민문학(平民文學)의 개시가 될새, 다 인각(印刻)이 아니요 사본(寫本)으로서 그 쓰는 방법도 크게 발달하여 궁체(宮體)라는 별명이 있어 민간 서법(書法)의 법첩(法帖)이 되었다. 그 밖에 재자(才子)를 발탁하여 칙찬(勅撰)으로 편집한 한자 산문은 볼 만한 것이 많으니, 각 왕의 실록(實錄)이 1700여 권, 기사(紀事)·일기(日記) 등이 550여 권이요, 또한 형식적 정제를 숭상함에서 나온 바의 역사적으로 수집한 거질(巨秩)의 서적이 10여 종이 되니, 이는 다 중국 한학풍을 본받은 것이나, 일체 궁정으로부터 나온 문학물은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서 문학과 국가를 동일시함에 이를새, 나라 사람들이 책을 읽음에는 부지불식간에 문학과 국가 또는 조선(祖先)과 고대를 연상하여 국민적 종교심과 평등적 일치심을 각성함에 도달하였다.
 
 

3. 3. 山林文學[산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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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문학이 그 범위를 확장해서는 한번 변하여 산림문학(山林文學) 곧 재야(在野)에 있는 인사의 문학을 발흥시켰다. 원래 유교로 사회질서를 정리하고 한학으로써 인재를 뽑아 써오매 유교의 연구를 연장한 한학의 문교(文敎)는 전고무비의 성황을 띤 것이다. 이럼으로써 국민교육은 경사(經史)에 통하여 정치 재간을 양성함에 모두 있었다. 이것이 산림문학을 낳은 장본이다. 그러나 산림문학이 궁정문학보다 특별한 색채를 띠고 나온 것은 그 원인이 2개 조목이 있다. ① 문사는 이중의 이상(理想)을 품으니 곧 전반생은 관로에 나아가 이름을 드날림을 목적함이요, 후반생은 산수간에 은퇴하여 편안한 생활을 목적함이다. 그러므로 퇴로(退老) 관리는 산림에 서식하는 자가 많고, ② 정계 세력에게 쫓겨나서 몸을 자연의 품을 던지고 낙천 생활을 이룬 자가 많은 것이다. 이 두 원인으로 하여 산림에서 음풍농월하는 소리는 점점 궁정문단을 압도하는 풍기가 발생한 것이다.
 
 

3.1. (1) 사상(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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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파(山林派)의 도학적(道學的) 원조는 윤상(尹祥)이 될 것이요, 문예로는 유방선(柳方善)·조수(趙須) 등 2인이 원조라 할 것이다. 그 사상에 있어서는 자유한정(自由閑靜)을 꿈꾸고 낙천쇄락(樂天灑樂)을 좋아하매 그 은퇴적 안락 생활은 스스로 신선(神仙)의 풍격을 지어 소위 유선(儒仙)이란 칭호를 낚으니, 그 사상의 원조는 세조 때 사람 선암(仙菴) 유창(劉敞)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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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劉敞)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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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정(山自靜) 수자동(水自動) 천지지성(天地之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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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발(花自發) 조자제(鳥自啼) 만물지정(萬物之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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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성(菴自成) 선자호(仙自號) 자가지취(自家之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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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처유인 시방래(何處遊人時方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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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조 일대의 문사 문집이 수천 종이 되나 오직 유창의 「산수가(山水歌)」 1수를 확장함에 불과하다.
 
 

3.2. (2) 시가(詩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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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파는 한시(漢詩)를 오로지 숭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본디말의 시가를 짓는 풍조도 있으니, 이 작가(作歌)의 풍조는 어떠한 의사로 한 것이냐 하면, 문사는 옛날부터 한시의 악부(樂府)를 지음에 대하여 많은 고심을 더하였다. 그러나 동방인은 언어가 같지 않아 한악부(漢樂府)를 짓기 불능함을 깨닫고 감정을 직접으로 표현하는 영언(永言)은 우리 나라 말로써 지어냄이 본색이라 함을 해득하니, 연산군 때 사람 이종준(李宗準)의 『용재유고(傭齋遺稿)』「조산악부서(造山樂府序)」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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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말은 중국의 어음(語音)과 매우 다르다. 이른바 중국 악부(樂府)라는 것은 소리를 내어 곡조를 노래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평측과 구절의 장단만 분별하면서 운(韻)만 맞추려고 하는데 그것은 모두 이른바 시로써 사(詞)를 만드는 것이다. 마음은 받들면서 찡그리고 그 시골에선 다만 속되고 천한 것만 보일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큰 문장가도 모두 감히 억지로 악부를 지으려 하지 않으며, 재주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중국인으로 하여금 정과정(鄭瓜亭)의 소당계(小唐鷄)를 짓게 하거나 해석하게 할 것 같으면 그들도 반드시 또한 짓거나 해석하지 못하고 손바닥을 비비고 갓끈을 끊을 것이다. …… 비록 악부를 알지 못하더라도 또한 우리 나라의 문장에 누가 되지 않는다. 내가 이 말을 왼 것이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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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고 또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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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부(樂府)는 구절이나 글자마다 모두 음률에 합치해야 하기에 옛날에 시를 잘 짓는 자도 더구나 악부를 짓기는 어렵다. 우리 나라의 말과 소리는 중국과 같지 않아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 대간(大諫) 이인로(李仁老), 목은(牧隱) 이색(李穡) 같은 큰 문장의 대가들도 모두 일찍이 손을 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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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이런 설명들에 의하면 족히 저간의 소식을 알 것이다. 그런 생각이 있음으로써 산림파는 간혹 가사(歌詞)를 지었는데, 여러 문집 중에서 산견(散見)하는 가사를 사출(査出)하면 그 수가 적지 아니하다. 그런데 그 가사의 율조는 고려의 경기체(景幾體) 곧 한림별곡조(翰林別曲調), 신라에서 처음 나온 장편체, 고려말경에 일어난 시조체 등 3종의 체로 되고, 그 내용률은 한정(閑情)의 묘사도 있거니와 태반은 도의적으로 지은 것이니, 산림파는 대개 유가(儒家)이다. 그러므로 도덕과 문장을 혼동시하니, 그 도의적 분자는 이의 이유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육곡가서(六曲歌序)」에도 “우리 나라의 노래는 대저 음란함이 많아 족히 말할 것이 없고 군자가 마땅히 숭상할 바가 아니다” 라고 하고, 장경세(張經世)의 『사촌집(沙村集)』에도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작가(作家)로 유명하기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자암(自菴) 김구(金絿),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송강(松江) 정철(鄭澈)등 6대가이다.
 
 

3.3. (3) 산문(散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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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파 문학에 있어서는 산문을 발견할 수 없다. 이들은 본래 시부(詩賦)를 주장하고 산문에는 힘을 쏟지 아니하니, 이는 이미 『지봉집(芝峰集)』에서도 설파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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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사람들은 시학(詩學)를 배우기에 공들이는 자가 많다. 그리고 산문에는 모두 힘들이지 않기 때문에 볼 만한 작품이 드물다. 용재(容齋) 이행(李荇),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같은 이도 또한 산문을 잘 짖지 못하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우리 나라의 거벽(巨擘)이라고 부르나 속되고 천한 문자를 많이 썼으니 그 밖에는 어찌 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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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소설(小說)은 중국 작품을 애독한 일이 있는데, 그는 일종의 소한재(消閑材)로 함이요, 유가(儒家)의 본래 주의로는 소설 같은 것은 기피하니, 정부에서도 이를 한결같이 금단(禁斷)할새, 태종 17년(1417)부터 이단괴서(異端怪書)와 패문잡설(稗文雜說) 등은 엄금에 엄금을 가하여 온 것이다. 김춘택(金春澤)의 『북헌잡설(北軒雜說)』에 보면, 숙종 때 사람 김만중(金萬重)이 소설을 많이 지었다 하나 현재에 당해서는 『구운몽(九雲夢)』만 전하는데, 이는 한문소설(漢文小說)을 효칙(效則)한 것으로서 신통할 것이 없다. 후세에 소설이 많이 나온 바를 보면, 혹시 한학자로서도 소설 등을 저술하여 전한 일이 있었을 듯하나 원래 그를 낮추 보는 습관에 따라 작자 이름을 숨겨온 까닭으로 한결같이 소설의 유래를 알 수 없는 동시에 어떤 것이 산림파에서 나온 것인지 분간하기 곤란하다. 어쨌든 산림문학에 있어 산문이 일어나지 못한 것은 유치하던 것을 고백함이니, 본래 문학은 운문(韻文)이 먼저요, 산문은 최후 발달한 시기에 나오는 것이다.
 
 

4. 4. 漢文學界[한문학계]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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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일대는 한문학의 황금시대라 일컬을 수 있다. 위로는 궁정, 아래로는 궁벽한 향촌까지 한문학을 숭상치 아니한 데가 없다. 그러므로 사족(士族)은 물론 소위 천인계급의 사람이라도 한시(漢詩)에 능한 자가 많이 나오니, 최근 사람으로 정수동(鄭壽銅)·배차산(裵此山)·정방순(鄭邦淳)·김건우(金鍵宇),상인(常人) 여자인 이임당(李任堂) 등은 유명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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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장(祭服匠) 유희경(劉希慶)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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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비 기운을 머금고 물은 안개를 머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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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는 사람들이 해당화 아래로 가네.
68
푸른 풀 돋아난 호수가엔 백로가 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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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설이 가득찬 가지 꺾어 채찍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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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含雨氣水含烟[산함우기수함연], 路人海棠花下去[로인해당화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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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草湖邊白鷺眠[청초호변백로면], 滿枝香雪落揮鞭[만지향설락휘편].
 
72
시노(侍奴) 백대붕(白大鵬)의 시
73
취하여 수유를 꽂고 홀로 스스로 즐기니
74
밝은 달은 산에 가득찬데 빈 술병을 베개삼고 누웠다.
75
곁엣사람이여 내가 어떤 사람인가 묻지를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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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진 세상 겪은 흰머리의 전함시 종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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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插茱萸擉自娛[취삽수유착자오], 滿山明月枕空壺[만산명월침공호].
78
傍人莫問何爲者[방인막문하위자], 白首風塵典艦奴[백수풍진전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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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서 대가로 셀 자는 성현(成俔)·서거정(徐居正)·최립(崔岦)·장유(張維) 등 10여 인을 지적할 것이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학가의 저술로 명색을 가진 문집은 실로 2천여 종의 다수를 내었다.
 
 

4.1. (1) 문집(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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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오는 다수의 문집에 대하여 그 내용을 심사하자면, 먼저 근래 문사의 학풍을 관찰해야 한다. 그 학풍은 지방적 습성의 이동(異同)에 따라 기호파(畿湖派)·영남파(嶺南派) 2종이 있다. 기호파는 유교 철리상 기(氣)를 주장하는 주기파(主氣派)로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두목으로 하여 관리 생활을 많이 지낸 자요, 영남파는 이(理)를 주장하는 주리파(主理派)로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 이황(李滉)을 두목으로 하여 은퇴 생활에 칩복(蟄伏)한 자이다. 서로 주의에 따라 투재이 심하여 오매 그 학설 그 생활이 서로 자별(自別)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파든지 그 문학의 내용상 풍격에 있어서는 하등의 이상(異狀)이 없고 오직 유학(儒學)의 종지(宗旨)를 불변하여 조금도 창의와 신설(新說)이 없이 도의적 일관(一貫)의 사상으로써 계도고계(系圖古稽)와 연기유래(緣起由來)를 존중한바 집주(集註)·훈고(訓詁)를 능사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 문화란 것은 양적 종류는 비록 많으나 그 질적 정신은 천편일률이고 하등의 변화가 없다.
 
 

4.2. (2) 수필(隨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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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 이외의 저작으로 말하면 영남파의 성정은 골짜기 새나 산제비같이 어리석고 졸렬하여 통하지 못해서 문집 이외에는 한푼도 가치 있는 저작이 없다. 그러나 기호파의 성격은 혹시 야심이 있고 영리한 재치가 있어 문집 이외에도 다소의 필적을 연출한 것이 있으니, 그는 곧 여러 수필(隨筆)에 의하여 알 것이다. 그 수필은 『계서야담(溪西野談)』『해동잡록(海東雜錄)』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등인데, 특히 『대동야승(大東野乘)』은 인조(仁祖) 이전 무릇 250년간에 걸쳐 제가의 저술 중 57종의 만록(漫錄)을 채집하여 72권의 거질(巨秩)을 이룬 것이다. 이런 필영(筆影)은 다 유교의 연역적 사학(史學) 정신으로 나온 것이나 얼마만큼 도덕 세계를 벗어나 문학적 정생활(情生活)에 노닐음을 취한 것이다.
 
 

4.3. (3) 그 정서(情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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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이든지 수필이든지 다 유교의 수구적 정신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은 한갓 고어(古語)로 보철(補綴)하여 교훈의 자료로 제공한 것이다. 그 문장도 고어와 고례(古例)를 인용하여 사구(詞句)의 조탁(彫琢)을 능사로 삼았다. 한학자는 일체로 옛법 비전(祕傳)의 권위로써 사회를 지배코자하매 그 비사(祕事)의 지식이 있는 자는 더욱더 현학적(衒學的)으로 되니, 일반 수필에 나타난 정서는 곧 고래 상하의 이문 기사(異聞奇事)를 수록하여 담소의 재료를 삼는 동시에 저자의 문장을 과장함에 불과한 것이니, 다시 그 각색을 자세히 살피면 셋이라 할 것이다. ①일기·사록(事錄) 등으로서 『석담일기(石潭日記)』『정사비(政事非)』『소대수언(昭代粹言)』『창의록(倡義錄)』『징비록(懲毖錄)』『남정일기(南征日記)』등은 교훈적 의미를 가지고 사변(事變)의 정사(正邪)와 천운 순환의 이치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② 한록(閑錄)으로서 『필원잡기(筆苑雜記)』『청파극담(靑坡劇談)』『용재총화(慵齋叢話)』 등은 비밀의 사전(事傳)을 이야기한 것일새, 휼괴 기계(譎怪奇計), 아혹 명철(訝惑明哲), 소인 군자, 요망 웅량(妖妄雄量) 등의 담쇄(譚瑣)로써 기쁨·놀람·즐김·슬픔을 종횡하는 가운데 사람의 도리를 올바로 잡아 굳게 이루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③ 배해(俳諧)· 기절(奇絶)한 한담은 한번 굴러 골계(滑稽)로 나아가니, 수필 가운데 대부분은 언어 행동의 회해 희롱의 일을 이야기한 것이 이것이다. 이는 만착(瞞着)·희롱·우탁(愚濁)·전도 등의 우스개 이야기로서 한편 풍자적 의미를 띤 것이다. 이상 수필의 사상은 점차 발전을 열어 가구적(假構的)으로 흐름이 있었으니, 『잠곡필담(潛谷筆譚)』『선언편(選諺篇)』『파수록(罷睡錄)』등에 나타난 필치는 연문학(軟文學)의 각색으로 화하여 소설계(小說界)의 진보를 재촉하였다.
 
 

4.4. (4) 서간문(書簡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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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문은 최후에 발달하였다. 인조 이후에 와서는 권문세가가 발호하니, 인재 등용은 없어지고 아첨의 풍습이 흘러넘쳤다. 문학 강습이 무력하여졌다. 그로 인하여 문사는 실력을 구할 필요가 없이 오직 일용문자(日用文字)를 통함에 그치니, 서간문은 곧 여기서 발달한 것이다. 이는 자기 의사를 타인에게 잘 통하면 되므로 기묘한 문자로써 동정을 사기 위주함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명을 존속 또는 확장하는 지취(志趣)는 넘쳐서 문학과 인격을 혼동함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속용속문(俗用俗文)을 하는 것이 인격상 제1표준이 되니, 그 서간문의 풍격은 요지(要旨) 이외에 인사를 늘어놓아 예의의 말이 분명하니, 한 장의 통신이 스스로 교정(交情)의 극미(極美)를 묘출(描出)하였다.
 
 

5. 5. 平民文學[평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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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최초에 궁정 또는 산림 곧 귀족계급의 소유로 행하여졌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귀족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다. 그리하고 과거(科擧)곧 문관 시취(試取)에도 평범한 문벌 상인(常人)으로는 응시할 권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상인 보통 계급에는 문사 반열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더니, 학술을 장려하며 또는 하급 인민도 사교상 사령(辭令)과 응수문자(應酬文字)의 필요를 깨닫게 되어 그로부터 평민 사이에도 한학(漢學)을 강습하며, 위안과 소한(消閑)의 필요로써 요구하는 문학은 점차 발전하여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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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민문학(平民文學)의 발흥은 선조 때 임란(壬亂) 이후에 더욱 촉진된 것이다. 임진 난리가 발생해서는 일시의 감정이 아래위에 충동되는 중에 하층계급은 본시 의협(義俠)의 미덕이 있는바 이 위급의 시기를 당하여 의를 장려하고 절조를 다투는 풍속이 천하에 흘러넘치니, 이로부터 폭발하는 정서는 실로 평민문학을 타개함이 되었다. 그 정신으로 나온 읽을거리는 『통색촬요(通塞撮要)』『규사(葵史)』 2종이다. 이는 서얼을 해방함에 마땅한 것이다. 곧 서파(庶派) 평등에 대한 사실 및 장주(章奏) 등을 촬록(撮錄)하여 서자 중 현인의 약전(略傳)을 부록하여 평등의 인격을 인정함을 목적한 것이다. 『해동유주(海東遺珠)』는 홍세태(洪世泰)가 10년 동안 공들여 옛날부터 치지도외한 상인(常人)의 시를 수집한 것, 『소대풍요(昭代風謠)』 『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등은 세조 이후의 상인 문장 600여가의 시를 편차한 것이다.
 
 

5.1. (1) 가사(歌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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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한시(漢詩)를 편집하는 동시에 가사(歌詞)를 수집하는 일도 일어나니, 『해동가요(海東歌謠)』는 숙종 때 사람 김수장(金壽長 : 常人[상인]) 김천택(金天澤)과 같이 힘써 자고 이래 시조(時調) 568수를 수합하니, 여기는 실로 남녀·반상(班常)을 불문하고 그 시를 1책에 합편하니, 문학 평등의 정신은 이 책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정조 때 사람 장우벽(張友壁)의 『가집(歌集)』, 순조 때 사람 오희상(吳熙常)의 『금보(琴譜)』, 광무(光武) 초기 사람 안민영(安玟英)의 『해동악장(海東樂章)』(『歌曲源流[가곡원류]』의 다른 이름-편자) 3, 4종이 나오니, 그는 시대를 따라 대대로 나온 시를 붙여 『해동가요』를 보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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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형은 용장우미(冗長優美)한 언어로써 가급적 긴축하여 언외(言外)에 여미(餘味)를 머금으니, 구형(句形)은 길지 않으나 그 천지는 광대한바 조선문학의 가치는 실로 이에 결성(結成)하였다. 문장으로 말하면 수사법(修辭法)이 크게 발달하여 20여의 사자(詞姿)를 갖추고 있는데, 혹은 기경(奇驚)한 단어로써 재담·희학을 나타냄이 있으니, 그는 이상(理想) 없이 자유의 경역에 나아감을 드러낸 것이다. 또 그 내용률에 있어서는 부귀·영리를 초월하여 낙천쇄락(樂天灑樂)으로 한적한 유루(幽樓)를 기뻐한 취미가 있으니, 이는 민족성의 활달한 기풍을 문학 가운데 나타낸 것이다. 혹은 음란하고 외설스런 언사를 과감히 써서 골계의 웃음으로써 미를 이룸도 있으니, 그는 비열한 풍격이 아니라 노래의 도가 연애의 성취자 되지 않기 불가한 중에서 불기쇄락(不羈灑落)한 금회(襟懷)를 발휘함에 불과한 것이다.
 
 

5.2. (2) 소설(小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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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선조(宣祖) 이후로 크게 발달할새, 곳곳에 개인 영업적으로 개설한 도서관, 이른바 세책가(貰冊家)가 있으니, 상류인 및 노동자를 물론하고 한가한 틈이 있는 자는 그 소설을 대출하여 낭독회를 여니, 4, 5인이 합석하여 한 사람이 낭독하면 다른 사람은 그를 청취하여 소한(消閑)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 습속은 지금까지 유행하는데 그 세책가에 비치한 소설을 조사하면 1백 수십 종이다. 그것은 한소설(漢小說)을 번역한 것도 많으니, 『임화정연(林花鄭延)』『서상기(西廂記)』『수호지(水滸志)』『삼국지(三國志)』 『아녀양웅전(兒女兩雄傳)』『하진양문록(河陳兩門錄)』 등도 있거니와 대부분은 은사(隱士)의 저작으로 된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저자의 씨명을 숨긴 까닭으로 그 유래를 고찰 조사하기 어려우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작자는 천문학자(賤文學者)로 자처함에서 나온 것이요, 혹은 독일 호르트가 벨기에인의 차명(借名)으로 소설을 지어 문품(文品)의 미를 한층 창달케 함 같은 의사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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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소설에 나타난 사상은 첫째 인생의 목적을 국민적 발현(發現)에 오로지 둔 것이니, 『임진록(壬辰錄)』『소대성전(蘇大成傳)』『여장군전(女將軍傳)』『이대봉전(李大鳳傳)』등은 인물 및 사건의 발전이 다 전장에 나가서 적과 싸우고 백성과 나라를 안정시킨 것이다. ② 연애는 신의 가호를 받아서 성취할새 『삼설기(三說記)』『저마무전(猪馬武傳)』『옥루몽(玉樓夢)』 『구운몽(九雲夢)』『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등이 그 예다. 귀자(貴子)를 낳음도 신의 인감(引感)을 받으니, 이것은 다 고대 사상을 부흥하여 조선(祖先)숭배의 국민적 사상 등을 묘사한 것이다. ③ 가정소설은 그 종류가 매우 많다. 그는 형제간 갈등보다 계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이 많으니,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양풍운전(楊風雲傳)』『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등이 그것일새, 이는 당시 가정의 실정이었다. ④ 사회소설로는 『홍길동전(洪吉童傳)』이 유명하다. ⑤ 소설 중의 주인공은 어느 사람이든지 불우의 곤경을 맛보다가 후일에 목적을 달성하니, 이는 교훈적 성질로 된 것으로서 인간 일생의 이상(理想)을 실현한바 조선인의 근본 도덕이라 할 것이다. ⑥ 내면의 묘사보다 외면의 묘사를 중시하여 감정의 내용을 이야기함은 심히 약하다. 요컨대 서양의 통(桶) 이야기, 표류기 등과 같이 고대의 각색은 동서양이 동궤(同軌)라 할 것이다. ⑦ 갈등은 복패(複稗)가 많으나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순전한 비극은 없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소설 자체의 목적이외에 도덕과 교훈의 극치를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말하여 둘 것은 근일에 발행된 김태준(金台焌)씨의 『조선소설사』를 참고함이 좋다고 하였다.
 
 

5.3. (3) 희곡(戱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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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운데 골계적 율어(律語)로써 주관·객관을 이야기하여 하나의 별천지를 연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희곡이다. 『별주부(鷩主簿)』『두껍전』 등은 고대 전설을 근세화한바 사회의 반면(半面)을 묘사한 것이다. 『춘향전(春香傳)』은 기생의 정사(情事)를 기술한 바로서 사정을 극미(極美)하게 사출(寫出)한바 정치 및 사회의 불건전한 모습이 지면 위에 약연(躍然)하니, 이는 이조 멸망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춘향전』은 망국소설이라 할 것이다. 『심청전(沈淸傳)』은 효녀의 일로서 도시인은 비인도(非人道)를 행하나 하층 및 촌락에는 대단히 착한 도덕이 보존되어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흥부전(興夫傳)』은 경제와 도덕의 충돌을 묘사하니, 이것도 이조 말기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희곡은 희작적(戱作的)·풍유적(諷喩的)으로서 최초 작자의 원고는 단편적에 불과한 것이나, 그것은 극계(劇界)에 나와서는 배우의 구조(口調)를 더하여 화려하고 교묘하게 윤색된 것이다.
 
 

6. 6.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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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이조 일대의 문학 취미는 귀족보다 평민문학에서 취할 것이 많다. 그러나 평민문학도 도의적·교훈적으로서 유학 세계의 낙인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일체로 이조 일대는 유교·한학(漢學)을 근본하여 거기서 일어났다가 거기서 망하였다. 인민의 자유를 눌러 없애고 사상력을 마비시켜 국민의 정신과 이상을 아주 지옥에 떨어지게 하니, 수천년의 건전한 민족성은 제1차 불교로 망하고, 제2차 유교로 망하였다. 물론 그 사이에 있어 유·불의 좋은 영향이 없지 아니하나 그것은 너무 빠져들어 믿은 결과 도리어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가중(加重)하였으니, 이럼으로써 우리들이 신문학(新文學)을 진흥함에는 결코 유·불 사상을 격퇴치 아니하면 안된다 하겠다.
 
101
朝鮮[조선] 제189호, 1933. 7
【원문】이조시대의 문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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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