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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通俗小說論 (통속소설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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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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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소설에 한해서만 아니라, 문제인 것은 현대문학 앞에 전개되는 俗文學[속문학]에의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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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日[전일] 李善熙[이선희]씨와 咸大勳[함대훈]씨의 소설을 비평하면서 金南天[김남천]씨가 이런 의미의 말로 두분을 경계하였고, 전달엔 嚴興燮[엄흥섭]씨의 소설을 비난하는데 역시 白鐵[백철]씨가 동일한 의미의 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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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壇[시단]의 형상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소설에서 씌어 있는 것과 같은, 즉 통속소설에 해당하는 개념으로써 무슨 말을 집어와야 할지, 얼른 이거라 내놓기가 어려운 일이나, 適宜[적의]한대로 글자을 마추어 보면, 詩歌[시가] 대신에 俗歌[속가]란 말을 연상할 수가 있을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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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俗家[속가]란 말은 민요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또는 俗謠[속요], 雜歌[잡가]란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속가란 말은 결코 통속소설이란 말과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곧 부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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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俗小說[통속소설]이란 例[예]하면 詩歌[시가]에서 俗歌[속가]에 해당하는 民謠[민요], 雜歌[잡가], 俗謠[속요]와 같이, 재래의 지반에서 우러난 한개의 전통을 가진 물건도 아니요, 오로지 현대문학이 발전해 온 도중에서 파생한 어디까지든지 현대적인 소설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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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詩歌[시가]에서 우리가 俗歌的[속가적]인 성격을 가지고 또한 현대성을 가진 즉 現代[현대] 詩歌[시가]의 파생물의 일종을 구한다면, 역시 유행가를 들지 아니할 수가 없다. 유행가란 정히 통속소설과 같아서 독자의 현대적인 의미의 취미를 기반으로 하고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현대문학과의 관계 가운데서 消長[소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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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문단의 예만 본다 할지라도, 예술적 시와 유행가의 구별은 순수소설과 통속소설과의 차이에 비하여 훨씬 구별이 歷然[역연]하다. 어떤 시인도 시로 부터 유행가로 옮아가기 위하여는 항상 180도의 전환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은연하나마 국적을 옮기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나 또는 남이나 전환의 과정을 문제로써 考究[고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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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純粹小說[순수소설] 혹은 藝術小說[예술소설]]로부터 通俗小說[통속소설]에의 전환이란 언제나 문제를 품고 있었다. 이것은 먼저도 언급한 바지만, 양자간의 구별이 자명한듯 하면서도 기실은 복잡하고, 불분명하였으며, 명철한 분석력을 빌기나 해야 근근히 알어볼 수 있는 한개의 과정이 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詩[시]에도 우리는 이러한 미묘한 변화를 인정할 수 없는 바는 아니나, 小說[소설]은 詩[시]에 비하여 그것이 더 규모가 크고 또한 典型的[전형적]이라 할 수 있음으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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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는 지금 考明[고명]할 장소가 아니나, 예술소설의 통속화 과정을 밝히는데 필요한 一部[일부]만을 드러내 놓으면 대체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전체로 시와 소설의 두 장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의 차이에 유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시는 유행가와 더불어 共棲[공서]하기가 심히 어려운 대신 소설은 통속소설과의 共棲[공서]가 상당히 용이한 데 있다. 시는 시인과 환경과의 조화에서 울어나왔다고 하면서 지금 반대로 그 相剋[상극] 가운데서 또한 現代詩[현대시]는 존립하고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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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하한 의미에서든간, 시는 性情[성정]의 명확성을 은폐할 수가 없음이 제 타고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시가 현대문학 가운데서 遭遇[조우]하는 비극은 실로 이 속에 胚胎[배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픽션[즉 作爲[작위]된 인물과 작위된 환경의 허구]을 통하여 작가와 환경과의 관계가 표현되는 것으로 작품 현실 가운데 작자나 환경이나 다 같이 간접으로 투영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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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차이라 하기엔 우리가 시의 언어와 소설의 픽션이 전혀 동일한 의미를 갖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나, 문제는 양자가 어떤 시기엔 실질적인 차이를 낳는데 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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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픽션을 이유로 하여 작자와 환경과의 관계가 원활하였을 때와 또는 그와 반대의 상극이나 마찰이 정확히 표현될 수 있는 때 이런 문제는 스스로 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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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현대와 같은 때 의의를 갖는 것으로 우리가 환경과의 사이에 조화를 발견치 못할 뿐더러, 不調和[부조화]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데도 또한 우리가 자유를 향유하지 못했을 때 소설이 시보다는 융통성 있는 기능을 발휘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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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풍자가 抒情詩[서정시][廣意[광의]의]의 直截性[직절성]을 간접화 하는 것과 같이 소설적 픽션의 간접성이 작자와 환경과의 날카로운 마찰을 어느 정도까지 은폐하는 것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시가 전혀 發言[발언]치 못할 때라도 소설은 아직 생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소설의 이러한 가능성은 실상 소설적 픽션의 본래의 구조를 잡어 찢으므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으로는 성격[인물]과 환경[정황]의 의식적인 分離工作[분리공작]이나, 혹은 자연적인 分裂現象[분열현상]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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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현상을 現今[현금] 朝鮮小說界[조선소설계]의 현상에서 목도하는 바이다. 例[예]하면 성격의 고독한 內省[내성] 가운데서 垂下[수하]하든지, 환경의 大路上[대로상]을 유람 자동차처럼 편력하든지, 양자 중의 一路[일로]를 불가불 골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에 본격적인 의미의 소설의 비극이[그것은 곧 작자와 환경과의 사이에 비극의 연장이다]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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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예술소설의 비극이 실상은 통속소설 대두와 발전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금일의 통속소설의 성질이라든가 지위를 다른 시대의 그것과 截然[절연]히 구분하는 標幟[표치]이다. 例[예]하면 한 시대 前[전]에 가장 인기가 있던 통속작가 崔獨鵑[최독견]씨와 현재의 가장 순수한 통속작가 金末峰[김말봉]씨와의 차이에서 이러한 구분의 실증을 얻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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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獨鵑[최독견]씨는 이제 와선 문단과의 교섭을 전혀 상실하였다 할지라도 「亂影[난영]」 「僧房悲曲[승방비곡]」 기타 일련의 작품은 오늘날 「密林[밀림]」이나 「찔레꽃」에 못지않게 독자의 환호를 받은 소설이다. 그러나 崔獨鵑[최독견]씨는 金末峰[김말봉]씨와는 분명히 다른 내용과 문학적 조류에 결부되어 있는 작자다. 崔[최]씨가 창작활동을 전개하기 비롯하였을 때는 朝鮮文學[조선문학] 가운데 아직도 청년다운 사회적 정신의 열도가 심히 팽창했던 시대요, 또한 그의 통속소설이 씌여진 문학적 환경이란 현재처럼 지리멸렬하여 전혀 시대나 독자의 정신적 욕구를 통일적으로 표할 수 없을만큼 절망적인 조건하에 들어 있지도 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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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낡은 新文學[신문학]이 疲勞[피로]하는 한편 신흥하는 경향문학이 熾烈[치열]하게 정신과 문학과의 통일을 절규하고[그것을 소설적으로 성격과 환경과의 노오말한 종합이다!] 그 궤도 위에 新様式[신양식]의 예술소설이 발전하고 있던 한 중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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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당시의 문단에서 볼 때 獨鵑[독견]은 진실로 하나의 속된 異端[이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獨鵑[독견]은 현재의 金末峰[김말봉]씨와 우리 문단의 관계보다는 더 깊이 당시의 文學思潮[문학사조]와 연관을 가졌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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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獨鵑[독견]의 소설이 전혀 그때에 아주 死[사]한 것으로 매장되어 버리기엔 아직도 새로운 시대정신[혹은 문학의식]의 한 통속적 표현이었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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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園[춘원]의 「再生[재생]」이나 「群像[군상]」 「革命家[혁명가]의 아내」등과 獨鵑[독견]의 소설이 병존하여 있던 것을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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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園[춘원]은 그때 前記[전기]의 작품 등을 이유하여 당시에 있어 가장 보수적인 정신의 대변자였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어떤 의미에서이고 사회성을 띤 정열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獨鵑[독견]은 이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春園的[춘원적] 소설의 후예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통속작가로서 발족한데 의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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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前記[전기]한 春園[춘원]의 소설들이나 그 외 「端宗哀史[단종애사]」, 「李舜臣[이순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신문학이 점차로 통속화의 과정으로 들어섰을 때, 결국 당시 부분적으로 春園[춘원] 이하 각 작가에게 은연히 발생하고 있던 통속화의 경향을 집대성한 것이 獨鵑[독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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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新文學[신문학]의 역사성이 상실되고 경향문학의 시대가 시작되려 할 때 新文學[신문학]이 당연히 밟아야 할 자연스런 末路[말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성격과 환경의 결렬로써 표현되는 소설 문학의 내적 위기를 통속화의 방법으로 미봉하려는 표현이 아니라 신문학의 일반적 쇠퇴의 一現象[일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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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密林[밀림]」을 들고 문단에 데뷰한 金末峰[김말봉]씨의 스마트한 맛은 결코 전자와 같은 것이 아니고, 현대소설이 何者[하자]를 물론하고 헤어나기 곤란한 고민 가운데 빠졌을 때 그런 현상을 일체 보고도 안본 체하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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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의 소설이나 문학적 성격을 가르처 대담하다고 평하는 것은 이런 데서 연유하지 않었는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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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金[김]씨의 「出世[출세]」는 돌연적이고 대담하였다. 그의 소설 가운데 현대 朝鮮小說[조선소설]의 깊은 고민이나 작가들의 심혈을 다한 懊惱[오뇌] 같은 것은 하나도 돌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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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는 자기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현대소설의 깊은 모순인 성격과 환경의 불일치를 통일하였다. 이 점이 통속적인 의미에서일 망정 金[김]씨를 좌우간 유닉크한 존재로 만들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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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여태까지 조선서 전례를 보지 못한 純通俗小說[순통속소설], 商業[상업]문학의 길의 확립이고, 그 방향에의 매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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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거로써 金末峰[김말봉]씨가 문단에 출세한 경로를 생각하면 흥미있는 바가 있다. 즉 우리 문단에서 씨처럼 최초부터 통속소설을 들고 나온 작가도 없고, 그 길에 철저한 이가 없는 것이 우리에겐 흥미 있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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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朴[범박]히 예술소설의 위기라고 하지만, 본격적 통속문학이 출현하려면 그 지반이라 할까 궤도라 할까가 오래 전부터 미리 준비되는 것으로 그것은 그전 朝鮮文學[조선문학]이 그다지 깨닫지 못하던 신문소설의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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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의 신문소설이란 것은 기실 신문에 발표되었다 뿐이지 본질에 있어선 예술소설이라 할 수 있었다. 예전 每申[매신]이나 東亞[동아]에 실리던 春園[춘원]의 소설을 비롯하여 想渉[상섭], 憑虛[빙허] 혹은 그 뒤의 諸[제] 作家[작가]의 소설이 다 신문을 장편소설 발표의 유일의 기관으로 생각해 왔었고, 사실 조선문단(내지는 출판계)의 현실이 장편을 원고채 인쇄할 능력이 없었고, 잡지가 그것을 감당해 나가기 어려웠던 만큼 실제 조선 장편 소설은 신문에 의거하여 발전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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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문이 점차 기업화에의 길을 더듬고 저널리즘이란 것이 그전과 같이 계몽성에서 현저히 상업성을 띄게 되자, 장편소설 발표의 조선적 특수성인 신문과 문학과의 관계는 일종의 모순을 呈[정]하게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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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예술소설보다는 신문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통속소설이 훨씬 더 많이 독자를 끌 수 있다는 사정 때문으로 재래의 장편소설로서는 발표 기관의 상업성과 타협하느냐, 그것과 깨끗이 분리하느냐 하는 국면에 봉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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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조선 문화계의 사정이란 것은 현재와도 달라서 신문을 떠나 제홀로 독보할 수도 없는 형편이요, 일부러라도 분리하자면 부득이 발표의 현실성을 상실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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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자연 부분적으로 상업성과 타협해 가는 길, 요컨대 절충적인 방도를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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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8년래로, 春園[춘원]이나 泰俊[태준] 기타의 작가들의 장편소설은 거지반 이런 苦境[고경]이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 그리하여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통속소설에로 浸潤[침윤]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저널리즘의 측면에서 본 일면이고, 다른 한편에서 예술소설 자신 가운데 통속화를 촉진하는 어떤 源流[원류]가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저널리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조만간 예술소설이 걸어 갈 당연한 노정으로써 통속화의 현상이 예술 자신 가운데 실질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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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먼저 예술소설의 위기란 말을 수차 사용해 왔는데 이것을 간단히 무어라고 이야기하기엔 최근 6,7년 간의 小說史[소설사]를 분석해야 할 것이나, 도무지 손쉽게 되지 않는 일이고 一言[일언]으로 개괄하면 지금에 있어 경향소설이나 순문학계의 소설이나를 물론하고 먼저 말한 성격과 환경과를 통일시켜서 뻗어 나갈 조건이 不備[불비]한 결과로 소설들이 世態描寫[세태묘사], 心理省察[심리성찰]로 분열되어 현대문학에 대한 가장 큰 요구로서 이 分裂[분열]의 좌우간의 통일을 요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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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요망은 자연스런 방법으로 혹은 정상적인 형태로 통일되어야 할 것이고, 또 그런 작가가 나타나야 현대소설의 위기란 것도 해소되며, 문학의 수준도 일단의 높이로 상승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시 이러한 것이 가능치 않기 때문에 예술소설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이런 요망은 오히려 다른 의미로 성격과 환경의 분열을 두드려 맞출 가능성을 완전히 준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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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통속적 방법에 의한 모순의 해결이다. 요컨대 수년래의 朝鮮[조선] 小說界[소설계]는 마치 의자를 작만해 놓고 어느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한사람의 완전한 통속작가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때에 나타난 것이 「密林[밀림]」과 「찔레꽃」의 작자 金末峰[김말봉]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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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金末峰[김말봉]씨 한사람을 볶아대는 것 같으나, 우리는 金[김]씨 이전의 가장 이런 성질의 작가로 沈薫[심훈]씨를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다. 中央日報[중앙일보]에 실린 소설 두편과 東亞日報[동아일보]에 당선된 「常綠樹[상록수]」는 金末峰[김말봉]씨에 선행하여 예술소설의 불행을 통속소설 발전의 계기로 轉化[전화]시킨 一人者[일인자]다. 沈[심]씨의 인기라는 것은 전혀 이런 곳에서 유래한 것이며(金[김]씨의 인기도 亦[역]!) 다른 작가들이 신문소설에서 이 작가들과 어깨를 겨눌 수가 없이 된 것도 이 때문이고, 그이들이 一朝[일조]에 유명해진 비밀도 다 같이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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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李泰俊[이태준]씨의 「花冠[화관]」 같은 소설의 통속성은 어떠한가? 이것은 아마 신문 지면상에서 예술파 작가가 통속작가와 가장 노골적으로 경쟁한 표본이다. 또한 아주 보기 좋게 패배당한 實例[실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유독 李泰俊[이태준]씨의 「花冠[화관]」에 그칠뿐만 아니라, 현재 신문에 장편을 쓰는 대부분의 작가가 부득이 혹은 즐겨서 취하는 길(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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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물론 신문사가 작가에게 요구하는 독자에 대한 고려라는 괴로운 조건이 따르는 것이건만 그것과 별개로 현대 장편소설이 좀처럼 해서는 제 예술성을 상실치 않고 줄거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근본조건이 잠재해 있다. 줄거리란 성격과 환경, 따로 말하면 묘사와 작가의 주장이 정상한 교섭을 할 때만 그야말로 예술적인 의미의 것이 생겨나는 것으로 이것은 현재에 있어 조선문학이 장편소설을 구성할 힘이 부족한 가장 큰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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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때문에 많은 예술파 작가가 장편을 쓸땐 줄거리의 案出[안출]은 대부분 통속소설의 방법을 取[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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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世態小說論[세태소설론]’이란 문장에서 蔡萬植[채만식]씨의 「濁流[탁류]」를 이야기할 때 작자가 묘사와 주장과의 모순을 다분히 통속적인 줄거리의 발전 가운데서 해결할려고 들었다는 것을 나는 지적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前言[전언]의 好例[호례]임을 不失[불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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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론 「濁流[탁류]」의 예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例[예]하자면 朴泰遠[박태원]씨의 近作[근작] 「愚氓[우맹]」에도 나타나 있다. 白白教[백백교]의 묘사와 그것을 보는 작가의 입장이나 정신이 壯大[장대]한 사회소설로서 구성되려면, 白白教[백백교]의 一團[일단]과 청년 학수와의 관계 쯤으로는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학수란 청년이 만일 작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독자가 그 인물을 통하여 白白教[백백교]를 알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의1인이라면, (학수는 생각컨대 白白教[백백교]를 보는 인테리的[적] 눈의 하나가 아닐까?) 그의 존재 내지는 행동이 소설 전개에 일정한 영향을 줄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학수의 존재는 「愚氓[우맹]」 진전상 거의 영향을 주는 바 없는 인물이고, 오히려 여분의 인물과 같은 감이不無[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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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的[적]인 감상으로선 白白教[백백교]란 너무나 현실적이고 너무나 큰 존재다. 그러므로 교주 全龍海[전용해]와 관계하는데 일개 소녀와 기생(?)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범속한 애정관계의 域[역]을 못넘었다. 학수와 교주가 父子[부자]라는데 작자는 그 추잡함이라든가 심각미를 예상할는지는 모르나, 白白教[백백교]는 그보다 더 큰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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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많은 에피소오드의 통일이 명백히 굵은 줄거리를 형성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없고, 학수 一家[일가]의 亂倫[난륜]이란 것이 어째 대단원의 매듭이 되어 들어가는 듯 싶음은 早計[조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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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談[여담]일지 모르지만, 감히 愚見[우견]을 피력하자면 白白教[백백교]와 그 배경과 학수 일가 등 세 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어느 일점상에서 통일될 때 비로소 우리는 소설의 구성이란 것을 문제삼게 되어지는 것이 아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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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여태까지의 「愚氓[우맹]」을 보건대, 교단에 대한 독자의 흥미라는 것을 과신하여 일종 스릴을 가미한 서술(단연! 묘사는 적다!)과 학수의 비극, 두개로 이 소설은 형성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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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의 윤리적 비극이 아니라, 학수 일가의 비극으로서, 또는 타잎으로서의 教徒[교도]와 간부들의 묘사를 통해야만 소설은 주체화하고, 본격적 줄거리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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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소설은 題材[제재] 그것에 대한 작자의 소위 ‘祭物的[제물적]’ 흥미와 가정소설 같은 스토리의 삽입으로 통속성과 타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밖에 마음놓고 줄거리를 풀어 나가는 장편작가들을 보면 거개가 처음부터 테마 자체가 진부하거나, 혹은 테마를 애써 통속적 안목에서 보아 가지고 출발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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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소설들이 金末峰[김말봉]씨 만큼 독자의 흥미를 끌지 못함은 그것들은 통속소설이라기보다 더 많이 퇴화한 純粹小說[순수소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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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純粹小說[순수소설]의 퇴화문제가 났으니 말이지, 이런 성질의 현상이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기는 단편소설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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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 문단에서 단편소설의 부패라고 할 것 같으면 곧 예술소설, 더 나아가서는 순수문학 일반의 부패현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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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李源朝[이원조]씨가 단편소설의 옹호란 것을 우리 문학에 있어 예술성의 옹호에 대신할 만큼 중시한 것은 這間[저간]의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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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단편소설은 우리 작가들의 가장 본격적인 활동 영역이라 간주하여 무방하고, 또한 단편소설 자체의 질적인 消長[소장]은 곧 우리 문학의 예술성의 高低[고저]를 알아내는 바로메터로 생각하여 족한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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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정은 물론 아직 朝鮮文學[조선문학]이 大長篇[대장편]에다가 자기의 사상적, 예술적 운명을 택할 만큼 성장하지 못한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통속소설의 방법이나 영향이나가 단편의 영역을 범했다할제, 우리는 옷깃을 고치고 생각을 가다듬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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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편 가운데 통속문학의 방법이 들어오는 계기 내지는 경로가 장편 소설의 그것과 비길 때 무슨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면, 우리는 작가들의 실지경험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전혀 동일한 것임을 용이하게 인정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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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南天[김남천]씨가 어느 논문에서 말한 창작 道程[도정] 중에 있어서의 자기 분열에 관한 고백은 그러한 好例[호례]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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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에 철저하는가, 자기 주장에 철저하는가는 우연히 현재 단편소설의 十字路[십자로]다. 朴泰遠[박태원]씨가 「仇甫氏[구보씨]의 一日[일일]」과 「川邊風景[천변풍경]」사이에 걸은 노정이나, 金南天[김남천]씨가 「男妹[남매]」와 「鐵領[철령]까지」의 사이에서 더듬은 길이나, 玄民[현민]이 「T教授[교수]」와 「어떤 夫婦[부부]」와의 사이에서 보인 입장의 이동이 나가 모두 이 사실의 산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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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두운 주관과 內省世界[내성세계]에의 깊은 침잠이나, 不然[불연]이면 현실생활과 市井世界[시정세계]에의 지향 없는 편력의 유행이 오늘날의 대부분의 작가를 사로잡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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困難[곤란]은 장편의 그것과 같이, 현실의 一斷面[일단면]을, 혹은 시정의 一小事[일소사]를 어떻게 하면 주관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 수가 있으며, 창작 정신의 光芒[광망]을 받으므로 사상으로서, 예술로서 조화된 귀금속과 같은 광채를 발할 물건이 될 수 있느냐 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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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면 우리 현대문학의 능력의 부족때문에 성취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으나, 더 많이 우리의 정신적, 물질적 외부의 조건이 하나의 桎梏[질곡]이 되어 있음은 모든 작가가 알 수 있는 간단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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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성실한 문학은 제 머리 위에서부터 한일자로 내리비껴 白刄[백인] 아래 분열과 부조화로 번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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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조건 가운데서도 아직 어떠한 의미에서이고 首尾一貫[수미일관]한 스타일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를 볼 수 있음은 어인 일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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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타잎의 작가에 있어 이것은 가능하다. 하나는 明日[명일]의 문학의 주인공이 될 재능 있는 작가이고, 다른 하나는 곤란을 회피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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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잘라 말하면 우리 문학은 아직 현재의 대다수의 작가가 괴로워 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작가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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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감이나 심각한 곤란의 해결 대신에 안일한 조화를 취하는 작가를 가지고 있다. 例[예]하면 咸大勳[함대훈]씨와 같은 작가의 소설을 그렇게 봄이 나의 誤見[오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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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暴風前夜[폭풍전야]」로부터 近刊[근간]된 「無風地帶[무풍지대]」 또는 「純情海峽[순정해협]」이나 그 외의 씨가 발표한 단편이란 솔직히 말하거니와 테마로부터 작자의 題材[제재] 처리법과 양식, 수법에 이르기까지 純然[순연]한 통속화의 길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용이히 지적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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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가 年前[연전] 「自己[자기]의 藝術[예술]을 말함」이라는 小論[소론] 가운데서 현대인의 고민이라든가, 작가의 비애라든가를 말한 듯 싶은데, 이 고민과 비애가 조금도 현실의 단면과 기구를 통하여(이것은 필연적으로 소설에 있어 묘사를 이룬다!) 검증되지 않고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고, 그 반영이 작품을 형성함에 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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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 작품 속에 誠実[성실]한 독자가 들어 갈 수 없으며, 그 고민, 그 비애가 우리에게 실제로 공감을 요청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씨의 작품의 感傷主義[감상주의]라 지적하였는데 이 感傷[감상]은 현실이나 예술상의 곤란을 처리하기에 원래는 부적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가장 안일하게 처분하기에도 아주 적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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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씨의 적지 않은 작품이 우리 문단(성실한 의미의)과 도무지 교섭하지 않는 것이다. 작자는 자기에 대한 이 문단적 냉담을 재삼 생각할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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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嚴興燮[엄흥섭]씨의 近作[근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작품 감각과 시대 감각의 불일치, 작품 현실과 시대 현실의 어긋남으로 결국 돌아가는 것인데, 이런 작품은 우리 독자에게 조금도 공감을 주지 않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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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인물들이나 그들이 만들어 내는 현실이란 것이 우리들의 실생활에서 볼제 실로 동떠러진 딴 세상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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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이란 본래 현실의 일단면을 그리는 것으로 파노라마와 같이 생활의 全幅[전폭]에서 독자를 움직이지 못하는 대신, 한 귀퉁이를 강하게 때리고 부딪침으로 독자를 소설 가운데로 끌어 들이는 것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절실한 감정이나 필요한 문제를 슬쩍 지내친 다음에는 단편은 생명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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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성이란 이런 의미에서 더욱이 단편에는 금물이요, 또 그 결과가 실로 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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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단편이 擧皆[거개] 묘사를 갖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단편으로선 도저히 처리되기 어려운 엄청난 기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이런 무책임성 내지는 안일한 생각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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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시 이야기를 돌려 순수문학과 통속소설의 구분이라던가 혹은 통속소설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할제, 우리는 다시 최초의 이야기로 붓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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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속소설 대두의 기초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술소설의 위기, 내지는 그 표현으로서 성격과 환경의 분열에 있다고 하였는데, 前言[전언]한 바와 같이 통속소설은 그것을 自己流[자기류]로나마 현재 그 분열을 조화시킬 거의 유일의 문학적 방법인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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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유한 문학적 방법이란 것은 자연 한개의 고유한 사상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사상성이란 소설의 정신이라고 할 묘사의 문제를 사이에 놓고 비교적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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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의 정신이란 과학에 있어 분석의 정신이다. 분석은 필연적으로 종합을 전제하는 것인데, 이 종합을 전혀 주관적으로 하느냐 분석의 자연적 결과에 의하느냐 하는 데서 아이디얼리즘이나 리얼리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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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精緻[정치]한 묘사라는 것은 최후의 어떠한 정신이 그것을 통합해 가든지 간에 우선 소설로서의 성질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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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思辯的[사변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것일지라도 정확한 분석은 과학적 가치를 갖는 것과 같이…… 그러나 최초부터 묘사 대신에 서술의 방법을 중시하는 것은 분석하지 않은 과학처럼 항상 상식에서 출발하여 상식에서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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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로지 상식적인데 통속소설로서의 특징이 있는 것으로 묘사란 묘사되는 현상을 그 현상 이상으로 이해할려는 정신의 發現[발현]이고, 상식이란 현상을 그대로 사실 자체로 믿어 버리려는 엄청난 肯定意識[긍정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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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통속소설은 묘사 대신 서술의 길을 취하는 것이며, 혹은 묘사가 서술아래 종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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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통속소설이 줄거리를 중시하고, 혹은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곳에서 용이하게 줄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묘사를 통하여 그 줄거리와 사실의 論理[논리]와를 검증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俗衆[속중](그것은 사회의현상적 部面[부면]이다)의 생각이나 이상을 그대로 얽어 놓아 조금도 책임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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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
【원문】통속소설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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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화(林和) [저자]
 
  193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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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