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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影論 (송영론) ◈

해설본문  1936.5
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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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宋兄[송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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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뜻하지 않은 기회를 얻어 兄[형]에게 드리는 서한을 草[초]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앞선 그것은 兄[형]과 弟[제], 그리고 우리 조선의 진보적 문학예술운동의 긴 역사의 허다한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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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켜 보건대 아즉 世情[세정]이 그 무엇인지를 모르고 오직 문학, 예술이라는 것에 대한 어렴풋한 감상을 가지고서 자기의 앞길을 공상하던 일개 弱冠少年[약관소년]이 兄[형]들의 열어 놓은 영광스러운 길을 따른 지 이미 10년이 지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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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0년 동안 우리 문학, 예술운동의 거대한 발자취와 兄[형]을 비롯한 많은 선배, 동료들의 한없이 귀중한 노력과 사업의 성과에 비하여 弟[제]가 더럽힌 그 末席[말석]의 行程[행정]은 실로 생각하기에도 등에 땀이 나고 얼굴이 확근해옴을 금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러한 비교적 우리들의 사적인 생활 국면을 이야기하고자 이러한 곳에서 부터 起筆[기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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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兄[형]이 우리 조선의 진보적 문학, 예술운동의 역사 가운데서 반드시 차지해야 할 영예있는 지위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부터 이 서한을 시작함을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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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도 아시다싶이 우리 조선의 진보적 문학, 예술운동의 역사는 아무에게도 번연히 알려진 것같이 되어 있으면서도 실은 도무지 똑똑한 과학적인 조명을 받지 못한 채 금일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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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前日[전일] 우리의 문학운동에 직접의 端初[단초]를 이룬 신경향파 문학의 역사에 관한 한 小論文[소론문]을 企圖[기도]해 본 일이 있었읍니다. 그때 내가 閲讀[열독]한 약간의 자료, 史論[사론] 등을 통하여 더욱 이感[감]을 깊이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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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투철치 못한 眼識[안식]과 菲才[비재], 薄識[박식]은 또하나 이러한 拙劣[졸렬]한 紙屑[지설]을 느렸을 뿐으로 아무 기여도 없이 그릇된 전철을 밟고 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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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점은 역시 신경향파 문학과 그 운동의 성질, 내용과 발생사에 대한 일반론의 굴레 밖을 나서지 못한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결함을 초래하는 기본의 이유는 문학사적 관찰에 있어 시민적 과학의 전통인 문제의 문학적, 진실로 표면적인 측면만을 관심하는 형식론과 또 하나는 우리 新興科學[신흥과학]이 때로 범하기 쉬운 公式主義[공식주의]를 가지고 구체적 사실을 尺度[척도]하는 태도로부터 충분히 자유롭지 못했다는 그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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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1925년 ‘카프’의 결성에 이르는 동안에 조선의 진보적 문학을 담당해 오던 신경향파의 구성적 내용에 대한 불충분한 분석이고, 따라서 신경향파 자체 내에 占[점]하고 있는 각개의 ‘크럽’과 내지 개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적당한 평가의 결여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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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시기의 역사에 관하여 가장 信憑[신빙]할 수 있고 또 상세한 기술을 가진 것은 1925년 1월 1일부 朝鮮日報[조선일보]에 발표된 八峯[팔봉]의 勞作[노작]일 것입니다. (1929년 조선일보 신년호 「10년간 조선문예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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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논문에서도 역시 우리는 ‘카프’결성까지의 간단한 문학적, 사상적 경로에 대한 평범한 기술과 실제 운동과 현실 정세의 併存的[병존적] 因果[인과]를 공식적으로 대치한 것 밖에 그 이상 무엇을 찾을 수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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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불행히도 신경향파 문학을 구성하는 양대의 예술적, 조직적 부분의 하나이고, 이곳 문화영역 안에 가장 일찌기 경향성의 깃발을 올린 兄[형]과 李浩氏[이호씨]를 중심으로 한 焰群社[염군사] ‘크럽’의 임무와 위치는 아무데서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금일에 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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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兄[형]이 잡지 「文學創造[문학창조]」1호에 당시의 회상을 술회하시기 몇해 전 벌써 수차 兄[형] 자신의 입으로 이때 사실과 우리들의 평론이 史實[사실]에 정통치 못하다는 나무램을 들은 기억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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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무엇보다도 焰群社[염군사]의 역사상 위치는 懐月[회월], 八峰[팔봉] 등의 「파스큐라」의 앞에 정해져야 할 것이며, 어떠한 의미에서 보면 「파스큐라」그것을 가능케 한 문화적, 사상적인 요인으로서의 역할을 演[연]한 것이라 보아져야 할 것입니다.(「파스큐라」는 金基鎭[김기진], 朴英熙[박영희], 安碩柱[안석주], 金石松[김석송], 李益相[이익상], 金復鎭[김복진] 외 數人[수인]이 조직한 예술단체로 구성원의 성명 英文頭字[영문두자]를 따서 종합하여 만든 명칭이라 한다. 八峰[팔봉]은 상기 논문에서 ‘파스큐라’는 焰群社[염군사]와 함께 1923년 창립이라 하나 사실은 焰群社[염군사]는 ‘파스큐라’보다 1년전인 1922년 창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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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증명하는 흥미 있는 史料[사료]로서 兄[형]의 술회의 일부를 끌어옴을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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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浩[이호]는 赤焼[적소]와 나에게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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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君[군]들은 문학을 할려느냐?’는 말을 물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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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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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至高[지고] ․ 至嚴[지엄] ․ 至純[지순]한 감정의 전달일 뿐이다. 그러니까‘누구’나 ‘무엇’에 매어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술 자신의 황홀한 존재를 위하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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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浩君[이호군]은 웃었다.(1934년 6월 잡지 「文學創造[문학창조]」소재 宋影[송영]의 「新興藝術[신흥예술]이 싹터 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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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조선의 사회운동이 최초의 계몽시대를 지날 때 兄[형]이 자기의 예술적 방면을 돌릴 즈음에 부딪친 현실이 이곳에 나와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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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兄[형]으로부터 들은 數多[수다]의 교훈 깊은 회화 가운데서 대단히 중요한 다음의 一句[일구]를 다시 인용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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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전인가 겨울 兄[형]이 교편을 잡고 계시던 녹번이고개 넘어 사립학교에서 兄[형]을 도웁고 있는 數週[수주], 어느날 밤 兄[형]은 焰群社[염군사] 時代[시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하시면서 赤焼[적소][군]인가와 더부러 八峰[팔봉]을 방문했던 말을 들려 주신 일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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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아마 八峰[팔봉], 懐月[회월]이 순수예술에 회의를 품고, 白潮[백조]‘크럽’과 결별한 때인가 봅니다. 그리하여 兄[형]들이 八峰[팔봉]에 대하여 전일 兄[형] 자신이 李浩氏[이호씨]한테서 詰問[힐문][당]한 그것과 똑같은 의미의 말로 경향문학의 옳음을 말하고 「焰群[염군]」과 협동, 합작하자는 제의를 했다가 예기한 바 성과를 못얻고 실패했다는 말씀을 하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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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兄[형]들이 焰群社[염군사]와 八峰[팔봉]들의 「파스큐라」가 합하여 예술동맹이 탄생한 것을 생각할 제 우리는 비로소 기성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운동의 창시자 八峰[팔봉], 懐月[회월]들이 아직 「白潮[백조]」적 한계를 완전히 뛰어 넘지 못했을 1925년 10월 ‘本社[본사]는 해방문화의 研究及運動[연구급운동]을 목적으로 함’이라는 강령 밑에서 조선 최초의 경향적 예술잡지를 편집한 兄[형]들의 의의를 옳게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 이때 「焰群[염군]」은 나오지 못했고, 또 사실은 희미해저서 兄[형]의 작품을 독자가 읽을 수는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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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兄[형]의 표면으로 나타난 문학적 활동은 웬일인지 八峰[팔봉], 懐月[회월]이 數多[수다]힌 ‘엣세이’소설 등으로 신경향파의 화려한 길을 닦어 놓은 뒤의 일입니다. 이 가운데 사정에 대하여서는 아직 나는 직접 兄[형]과의 談話[담화]에서도 또 기타 발전된 文書[문서]를 통하여서도 수긍될 해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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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파스큐라」에 비하여 焰群社[염군사] 사람들이 문단적으로 뒤늦게 표면화 하고 또 혹은 전자보다 화려치 못했음은 약간의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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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八峰[팔봉]도 前記[전기] 논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파스큐라」가 문단 자신 내의 한 사실인 대신 兄[형]들의 「焰群[염군]」은 文壇圏[문단권] 외에 섰었던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러한 현상의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그 ‘크럽’이 갖는 질적인 상이점이 있다. 그것은 一言[일언]으로 말하라면 「焰群[염군]」이 비교적 높은 사회적 관심과 좀 얕은 문화적 교양을 가지고 있던 대신 「파스큐라」는 사회적 관심에서 전자에 未及[미급]했고 문화교양에 있어 얕었다고 볼 수 있어, 후자가 곧장 문학의 大道[대도]를 매진한 대신 전자는 그대로 정치생활로 진출했거나 일부는 다른 생활을 거처 다시 문학에 돌아온 때문에 생기는 시간상 또 現象上[현상상]의 차이라고 볼수가 있읍니다. (우수운 것 같으나 「파스큐라」同人[동인]은 대개가 이미 동경유학으로부터 돌아왔었고 「焰群[염군]」同人[동인]은 그 뒤에 외지로 떠났었다는 裏面事實[이면사실]은 간과치 못할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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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 사실은 문화영역 그것에 비하여 다른 사회적 정치적 부분이 문화문제, 그것에 대하여도 자각과 관찰의 度[도]가 정확하고 빠름을 이야기하는 바가 있습니다. 실로 「焰群社[염군사]」의 탄생은 문화적 자각을 통하여서보다도 사회적 자각을 통하야 문화를 살펴 본, 즉 노동운동 그것의 높은 문화적 관심을 표시하는 사실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던 것이 兄[형]의 회상에도 있는 바와 같이 「焰群社[염군사]」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큰 희망을 키우려던 同人[동인]들은 혹은 神戸[신호]로(赤焼[적소]) 혹은 中國[중국]으로(世永[세영]) 혹은 실제운동으로(李浩[이호]) 兄[형]도 그 뒤 동경으로 건너갔던 모양입니다. 요컨대 焰群社[염군사]를 구성했던 諸兄[제형]은 육체적으로 조선을 떠났을 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문화로부터 일반 사회생활로 몸을 옮겼을 동안에 兄[형]들의 고향에서는 八峰[팔봉], 懐月[회월]을 중심으로 한 신경향파의 운동이 燎原[요원]의 火[화]처럼 전진했던 것인가 합니다. 兄[형]이 다시 돌아와 몇개의 작품을 들고 문단에 등장하였을 때는 이미 「開闢[개벽]」「朝鮮之光[조선지광]」을 무대로 八峰[팔봉], 懐月[회월], 抱石[포석], 曙海[서해], 民村[민촌]이 기라성과 같이 창작적 활동을 전개했던 한 중간이 아닌가 합니다.(저는 兄[형]의 귀향 년월을 잊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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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운동 초기를 장식하는 佳作[가작]「鎔鑛爐[용광로]」「印度兵士[인도병사]」「群衆停留[군중정류]」「石工組合代表[석공조합대표]」등과 八峰[팔봉]의 「붉은 쥐」, 抱石[포석]의 「低氣壓[저기압]」 曙海[서해]의 「異域寃魂[이역원혼]」, 民村[민촌]의 「天痴[천치]의 倫理[윤리]」, 懐月[회월]의 「사냥개」「徹夜[철야]」등이 쏟아저 나온 신경향파의 화려하던 當年[당년]이었읍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兄[형]도 아시는 바와 같이 신경향파 문학 내에는 曙海[서해], 民村[민촌]을 대표로하는, 보다 사실적인 경향과 抱石[포석], 懐月[회월]을 중심으로 하는 보다 낭만적인 경향으로 가를 수 있는 약간의 경향상 차이가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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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서 兄[형]의 당시 작품들이 占[점]하는 위치에 대하여는 물론 경솔한 단정을 불허하는 바이며, 또한 前記[전기] 兩個[양개] 傾向[경향]이라는 것도 일찌기 八峰[팔봉]도 말한바와 같이 曙海[서해], 抱石[포석], 懐月[회월]에게서 겨우 그 특징적인 것을 발견할 뿐으로 속단할 바 아니나, 대체로 나는 兄[형]의 諸作[제작]이 보다 낭만적인 부류에 든다고 봅니다. 이 예로는 1925년 4월에 발표된 曙海[서해]의 소설 「朴乭[박돌]의 죽엄」과 兄[형]의 26년「開闢[개벽]」6월호에 발표된 「鎔鑛爐[용광로]」를 비교해 보면 가장 명료할 것입니다. 曙海[서해]에게서는 ‘朴乭[박돌]의 母[모]’, ‘의사 金[김]초시’, ‘그의 妻[처]’등의 명확한 성격과 生活苦[생활고]의 리얼한 묘사가 있는 대신, 兄[형]에게는 主觀[주관]으로 말미아마 類型化[유형화]된 典型[전형]‘金尙悳[김상덕]’, ‘今村[금촌]’, ‘群衆[군중]’이 理想[이상]의 방향으로 사건과 더불어 조작한 흔적이 농후하지 않습니까? 「印度兵士[인도병사]」「群衆停留[군중정류]」, 그리고 「石工組合代表[석공조합대표]」에 있어서도 前記[전기]「鎔鑛爐[용광로]」와 더불어 兄[형]의 초기작품 가운데서 가장 리얼한 경향의 것임에 불구하고 ‘꼭 이 시간이다. 서울 구리개 광무대 안에서는 대회를 원만히 마첬다는 최후의 만세소리가 난다’는 一句[일구]를 가지고 小作權[소작권]을 빼앗긴 그의 老父[노부], 또 직공의 조직생활 등의 구체적 묘사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조선의 운동은 결론이 급하고 구체적 실천에 粗[조]했던 그것의 반영으로서 신경향파가 문학적으로 가지고 있던 낭만주의적 결함에 속하는 것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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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소위 ‘절망의 폭발, 개인적 반항의 直時鬪爭[직시투쟁]’이라는 당시의 일반경향에 비하여 兄[형]이 항시 조직적인 그것의 高處[고처]에 올라 있었던 것은 아마 兄[형]만이 가젔던 것인가 합니다. 이리하여 兄[형]은 그 시대 우리 문학운동의 몇개의 기념비적 작품을 생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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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1927년 이후 「白色女王[백색여왕]」「交代時間[교대시간]」「午前[오전] 九時[구시]」등 數多[수다]의 소설과, 「正義[정의]와 칸바쓰」「일체 面會[면회]를 拒絶[거절]하라」「護身術[호신술]」등의 풍자적 희극을 가지고 충실한 창작적 활동을 전개한 오랜 동안을 기억코자 합니다. 이동안에 兄[형] 개인의 생활상에도 그러며, 문학상에도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고, 갈수록 충실, 확대되어 가는 ‘藝術同盟[예술동맹]’의 길과 함께 民村[민촌],雪野[설야] 등과 더불어 우리 창작활동의 무거운 초석이 되어 왔읍니다. 兄[형]은 이 6,7년 간을 市外[시외] 恩平面[은평면] 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창작의 붓을 달리고 世永[세영]이 편집하는 「별나라」를 중심으로 새로 싹터나는 이곳 소년문학의 굳은 초석을 놓아온 것으로 아마 후자의 영역에서의 兄[형]의 공적은 世永[세영]의 그것과 더불어 「焰群[염군]」의 그것에 못지않게 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동안에 兄[형]을 괴롭힌 말할 수 없는 빈곤에 대하여 한 없는 미움과 그것을 不死身[불사신] 같이 뚫고 나간 兄[형]의 高邁[고매]한 정신에 대하여 옷깃을 바로 잡습니다. 그러나 창작적 行程[행정] 가운데 兄[형]은 이 시기를 통하여 몇개의 실패를 거듭한 것을 저는 묵과코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로 소설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白色女王[백색여왕]」의 기억은 兄[형]에게 있어서나 또 저이에게 있어서나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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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안 ‘카프’작가 속에서 나타난 현상은 초기에 있어 曙海[서해], 民村[민촌][대] 懐月[회월], 抱石[포석]이 각각 대표하고 있던 寫實[사실], 낭만의 경향이 曙海[서해]가 뒤떨어지고, 懐月[회월]이 소설의 붓을 놓고, 抱石[포석]이 멀리 간 뒤부터는 民村[민촌]의 寫實[사실]과 형은 극도의 ‘浪漫[낭만]’을 가지고 전형적으로 대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兄[형]이 가지고 있던 초기의 낭만적 경향이「白色女王[백색여왕]」에서 보는 바와 같은 허황한 관념세계로 승화한 것은, 아무래도 발전하는 현실에 대한 兄[형]의 뒤떨어진 관심과 兄[형]이 문학수업 초기에 읽는 많은 로맨틱한 작품이 나쁘게 영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宋影氏[송영씨]는 「文學創造[문학창조]」1호에 「正當[정당]한 繼承[계승]」이라 題[제]한 修業談[수업담]에 많이 읽은 작품으로 「子萊公傳[자래공전]」「曹氏三代錄[조씨삼대록]」「水滸誌[수호지]」「西遊記[서유기]」「三國志[삼국지]」「紅樓夢[홍루몽]」「琵琶記[비파기]」「西廂記[서상기]」등의 고대중국 소설과 ‘트르게네프’와 ‘고리키’‘짹그 ․ 런던’ ‘졸라’등에게서 온 문학상의 영향이 이야기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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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안 兄[형]의 사생활은 ‘카프’의 조직적인 일상생활과 멀어졌었고 생활의 핍박으로 인함인지 昔日[석일]과 같이 문학의 길에 부즈런하지 못하셨던 듯 싶습니다. 요컨대 적게 공부하시고 많이 쓰신 흔적이 이 시대의 작품에는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희곡의 영역에서 兄[형]이 공헌하는 바는 실로 컸습니다. 초기에 있어 우리의 유일의 극작가이었던 永八[영팔]이 없어진 뒤 兄[형]은 ‘카프’유일의 희곡 작가이었습니다.(永八[영팔] 외에 신경향파에는 시인 抱石[포석]이 일찍부터 「金英一[김영일]의 死[사]」등 로맨틱한 희곡을 썼으나 전환한 뒤로는 주로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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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초기의 소설과 큰 차이가 없던 幼稚[유치]한 「불이야」(金永八作[김영팔작])같은 신경향파 희곡을 분명히 일단의 高處[고처]로 끌어 올리신 세력은 크다 아니할 수 없읍니다. 1928년 5월 「朝鮮文藝[조선문예]」에 발표하던 희곡「正義[정의]와 칸바쓰」는 兄[형]의 극작가로서의 등장을 뜻있게, 또 확연하게 만든 것으로 意義[의의]있는 것이며, 또 우리 희곡이 초기의 그것으로부터 그 뒤의 것으로 転移[전이]해 오는 과도적 작품이었습니다. 兄[형]도 아시는 바와 같이 永八[영팔]의 희곡은 기실 경향으로 보아 曙海[서해]의 소설과 같이 보다 사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兄[형]의 희곡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낭만적 抱石[포석]의 뒤를 이어 永八[영팔]의 그것을 부정하여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일체 면회를 拒絶[거절]하라」(잡지「朝鮮講壇[조선강단]」30년) 「護身術[호신술]」(잡지「時代公論[시대공론]」32년) 등 혁혁한 喜劇[희극]이 곧 그 산물로서 이곳에서는 일찌기 兄[형]의 어느 소설에서 발견할 수 없던 놀랠만한 풍자적 수완이 발휘되었읍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우리 문단이 가지고 있던 예술에 대한 多分[다분]의 공식적 태도와 粗朴[조박]한 政治主義[정치주의] 등은 兄[형]의 喜劇[희극]을 ‘고고리’의 그것에까지 발전케 못하고 말았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인물은 분명히 作者[작자]의 개개의 관념을 體現[체현]한 유형이 되고, 사건은 너무나 劇的[극적] 목적으로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을 招致[초치]한 요인 가운데는 소설에서 보는 다분히 개념적인 낭만주의가 이롭지 않게 작용했으므로 나와 더불어 兄[형]도 잊지 말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護身術[호신술]」은 고고리의 「檢察官[검찰관]」과 비길만치 뿌르조아 생활과 그 문화(스포츠)를 놀랠 만한 수완으로 폭로한 것으로 ‘카프’희곡 중 快作[쾌작]임을 부정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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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兄[형]의 희극은 「新任理事長[신임이사장]」(「形象[형상]」34년 4월)의 노련한 경지를 지내 벌써 「어서 幕[막]을 닫어라」(35년 8월 中央日報[중앙일보])에 와서 그 결함을 명확히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年前[연전]「新建設[신건설]」에서 兄[형]의 作[작]「山上民[산상민]」의 연출 (羅雄君[나웅군])을 구경하면서 兄[형]!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읍니다. 아마 戯曲上[희곡상]에서 이만치 생활의 사실적인 묘사를 성취한 것은 우리 조선문학상에 드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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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곳에 있는 兄[형]의 아직도 잔재한 개념적 遺痕[유흔](끝場面[장면]!)과 함께 兄[형]이 그 前[전]의 낭만주의와 반대로 자연주의로 흘러 가지나 않는가 하는 느낌을 가졌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 경향(객관주의!)은 兄[형]의 소설 「福順[복순]이」(36년 말 朝鮮日報[조선일보])를 읽은 뒤 더욱 그러하였고, 兄[형]의 출감 후의 최초 감상 「朝鮮[조선]말 文學[문학]의 世界的[세계적] 樹立[수립]」(36년 1월 朝鮮日報[조선일보])을 읽은 뒤 역시 이것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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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세계관, 사상성, 교육적 역할의 부정! 이 오늘날 수난기의 우리 작가 일부를 사로잡고 있는 좋지 못한 경향이 혹시 兄[형]의 예술에 미치려고 머뭇거리지 않는가 하는 저의 기우를 兄[형]의 今後作[금후작]이 일소해 주실 것을 외람히 확신하면서 이 붓을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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