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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생전 (兎生傳) - 경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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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설(話說). 대명(大明) 성화(成化) 년간에 북해 용궁 광택왕(廣澤王) 옹강(禺强)이 즉위하였는데, 하루는 우연히 병을 얻어 병세가 점점 심하여졌으나 백가지 약이 효험이 없어 수궁(水宮)이 몹시 당황하였다. 하루는 홀연히 도사(道士)가 이르러 말하기를,
 
2
“대왕의 병환이 비록 삼신산(三神山) 선약(仙藥)이라도 효험이 없을 것이니 육지에 나가 간(肝)을 꺼내어 환약을 만들어 잡수시면 곧 나을 것입니다.”
 
3
했다. 용왕이 도사의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하는데 한 사람이 나와서,
 
4
“소신이 비록 재주가 없사오나 인간세상에 나가 토끼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5
하여 모두 보니 거북의 이성사촌 별주부(虌主簿)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6
“그대의 충성이 가히 아름답도다.”
 
7
하고 곧 화사(畵師)를 불러 토끼 화상(畵像)을 그려 별주부를 주니 별주부가 토끼화상을 받아가지고 하직(下直)하려 하는데, 왕이 당부하여,
 
8
“그대를 인간에 내어보내는데 가장 염려하는 바는 어부의 그물과 낚시라, 내가 어려서 구경다니다가 성화수 물가에서 어부의 낚시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몸을 요동(搖動)쳐 줄이 끊어져 겨우 살아났으니 그대는 부디 조심하여 토끼를 얻어오라.”
 
9
하고 어주(御酒)를 내려주니, 별주부 하직하고 나와 처자를 이별한 후 만경창파(萬頃蒼波)를 순식간에 나와 인간지경(人間地境)에 다달아 한편 무사히 왔음을 기뻐하여 해변으로 다니며 깊은 산으로 찾아가는데 때는 바로 춘삼월 좋은 시절이었다.
 
10
별주부 갈 곳을 알지 못하여 좌우 산천을 두루 역역히 살펴 보니 산이 높지는 않으나 명기(明氣)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한 곳에 시내는 잔잔하고 절벽은 의의(毅毅)하며 짐승은 슬피 울고 기화요초(琪花瑤草)는 활짝 피어 있는 가운데 공작새 봉황새가 넘나들며 꽃향기가 풍겨나고 벌나비가 희롱하며 버들빛이 푸른 가운데 노란 꾀고리가 왔다갔다 하니 진실로 인간세상의 명승지(名勝地)였다.
 
11
별주부가 경개(景槪)를 따라 올라가니, 갑자기 산중에서 한 짐승이 풀을 뜯어 먹으며 꽃을 희롱하며 자신있고 만족한듯 내려오고 있었다. 별주부가 몸을 감추고 토끼화상을 내어보니 바로 토끼였다. 별주부가 기뻐하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12
‘저 토끼를 잡아다가 우리 대왕께 드려 병이 나으시면 내 마땅히 일등공신이 될 것이다.’
 
13
하고 긴 목을 늘이어 토끼 앞에 나아가 예(禮)하고 말하기를,
 
14
“토선생께 뵈나이다.”
 
15
하니 토끼가 자라를 보고 웃으며,
 
16
“그대 어찌 내 성명을 부르는가? 남생이의 아들인가 목이 길기도 하다.”
 
17
했다. 자라 그 곁에 앉으며 전에 보지 못한 말을 하며 성명(姓名)을 통한 뒤 토끼에게 말하기를,
 
18
“그대는 몇 살이나 되었으며 청산벽계(靑山碧溪)로 다니니 재미가 어떠한가?”
 
19
토끼 웃으며 대답하기를,
 
20
“나는 삼백년을 세세(世世)로 두루 돌아다니며 만첩산중에 백화만발하고 서운(瑞雲)은 은은하여 푸른 솔은 축축 늘어져 있고 푸른 물은 잔잔한데 향기 무성한 곳으로 시름없이 다니면서 백초의 이슬을 싫도록 받아 먹고 산림화초간(山林花草間)의 향기를 마음대로 내 몸에 쏘이며 무주공산(無主空山)에 시비(是非)없이 왕래하여 산과(山果)를 마음대로 먹으며 분별없이 천봉만학(千峰萬壑)에 때때로 기어올라 온 세상을 굽어보면 가슴 속이 시원하니 그 재미는 입으로 말하기 어렵다네. 자네도 세상 흥미를 취하겠거든 나를 따라 노는 것이 어떻겠나?”
 
21
하니, 자라가 대답하기를,
 
22
“선생의 말이 좋아서 인간세상의 경치를 그토록 자랑하지만, 나는 본래 인간 세상에 머물러 사는 바가 아니라 북해 용왕의 신하로 주부(主簿) 벼슬하는 자라로서, 수궁(水宮)에 벼슬을 하다가 마침 동해 용왕이 수연(壽宴) 잔치를 한다 하고 사신(使臣)을 우리 궁중에 보내어 왕을 청하였는데, 우리 대왕이 우연히 오줌소태를 하여 성하지 아니하시어 못가시게 되자 왕의 태자(太子)께서 날 보고 인간세상에 나가 해변가로 다니며 어부들이 어디서 낚시질하는가 탐지하여 오라 하시기에 세상에 와서 탐지(探知)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 화초가 만발한 것을 보고 잠깐 구경할 즈음에 선생을 만났으니 마음에 기쁨을 헤아릴 수 없네 그려. 선생이 인간세상의 경치를 자랑하는데 나도 용궁의 승경(勝景)을 잠깐 자랑할 테니 자세히 들어 보게나.”
 
23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24
“수궁이란 곳은 집을 짓되 호박(琥珀) 주춧돌에 산호(珊瑚)기둥이며 밀화(蜜花) 들보에 청강석(靑剛石) 기와를 이었으며, 수정(水晶)발을 드리우고 백옥난간(白玉欄干)을 순금으로 꾸몄으며, 오색 구름으로 산도 만들며 물색(物色)을 희롱하고 각색풍류로 밤낮으로 연이어 즐기고, 칠보단장한 시녀들이 유리잔에 호박대를 받쳐 천일주(千日酒)를 권할 적에 그 흥이 어떠하며, 아침에는 안개를 타고 저녁에는 구름을 잡아타고 온 세상을 잠깐 사이에 왕래하며 옥저(玉笛)를 빗겨 불어 공중으로 마음대로 다니니 한 몸의 맑은 흥취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선생이 요란한 세상의 녹녹한 풍경을 자랑하니 그 생각이 작네 그려. 만일 풍운이 사면을 두르고 급한 소나기가 함지박으로 담아 붓듯이 오며 천둥 번개 진동할 때 그대 몸을 피하며 바위 틈에 의지하였다가 그 산이 무너지면 그대의 작은 몸이 가루가 될 것이네.”
 
25
하니 토끼 그 말 듣고 놀라 말하기를,
 
26
“그런 요사한 말 두 번 마시오.”
 
27
한다. 자라 또 말하기를,
 
28
“삼동(三冬) 극한(極寒)에 백설이 건곤(乾坤)에 가득하여 두렁도 없을 때 그대 바위 틈에 겨우 의지하여 처자(妻子)를 어찌 구하며, 그댄들 기갈(飢渴)을 어찌 면하겠는가? 동삼삭(冬三朔)이 지난 후 음곡(陰谷)에 봄기운이 발양(發揚)할 때 돌구멍 찬 자리에 일어나서 시원한 데를 보려고 산 위로 바삐 갈 때 사냥 포수의 총이 머리 위로 넘어갈 때 일신 간장이 어떠하며, 매 받은 사람은 사냥개를 몰아 사면으로 다닐 적에 그대 마름 어떠하며, 평지로 내려가니 목동들은 새 낫을 어깨 위에 들러메고 아우성 소리 지르며 에워싸고 들어올 때 그대 없는 꼬리 샅에 끼고 작은 눈을 부릅뜨고 짧은 발을 자주 자주 노려 천방지방(天方地方) 자빠지며 엎어지며 달아날 때 가슴에 불이 나고 정신이 아득할 적에 어느 겨를에 화초를 구경하며 어느 코로 향기를 맡겠는가? 그대는 생각하여 나를 따라 용궁에 들어가면 선경(仙境)도 구경하고 천도(天桃)라도 얻어 먹고 천일주를 장취(長醉)하며 미인을 희롱하여 평생을 환락할 것이오, 또한 부귀를 모두 갖출 것이니 재삼 생각하게나.”
 
29
하니, 토끼 귀를 기울여 한참동안 듣고나서 말하기를,
 
30
“별주부의 말을 들으니 두려운 마음이 들거니와 나도 이왕 팔자가 기박하여 중년(中年)에 아내를 잃고 외아들마저 잃은 후 혼자 살 수 없어 지난해 섣달 새 아내를 맞았는데 그 용모가 뛰어나 서로 정이 쪽박으로 가득 함박으로 가득하여 한 때도 떨어질 줄 모르고 살고 있다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바로 용궁에 가게 되면 집에 가서 말하고 올테니 여기 앉아 잠깐 기다리게나.”
 
31
하니 별주부가 속으로 기뻐하여 생각하기를,
 
32
‘이 놈이 제 집에 가면 틀림없이 아내가 말릴테니 붙잡은 김에 잡아가리라.’
 
33
하고 말하기를,
 
34
“그대는 대장부라 어찌 여자에게 쥐여 판관사령(判官使令) 아들처럼 그만한 일을 가지고 허락을 받으려 하는가?”
 
35
하니, 토끼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거북하였으나 판관사령이란 말이 걸리어,
 
36
“그렇다면 그냥 갑시다마는 돌아올 날짜가 언제쯤이며 길이 다르니 어떻게 가겠는가?”
 
37
하니, 별주부가 크게 기뻐하며,
 
38
“그대가 가려 한다면 물 걱정은 말게나.”
 
39
했다. 이에 토끼가 별주부와 함께 물가에 내려와 그 등에 업히어 눈을 감으니 별주부 물에 떠 만경창파를 순식간에 들어가 용구에 이르렀다. 토끼가 눈을 떠보니 채색 구름이 어리어 있는 가운데 삼층누각 위에 ‘북해용궁(北海龍宮)’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수문졸(守門卒)들이 벌려 있었다.
 
40
별주부가 자라에게,
 
41
“잠깐 다녀 나올테니 기다리게.”
 
42
하고 용궁에 들어가 용왕에게 토끼를 유인하여 잡아온 사연을 말하니 용왕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왕좌에 앉아 태자와 종실(宗室) 문무(文武)를 좌우에 세워 놓고 나졸(羅卒)에게 토끼를 바삐 잡아들이라 명령한다. 이에 나졸들이 일시에 내달아 잡아들이라 명령한다. 이에 나졸들이 일시에 내달아 잡아들인다. 토끼가 잡혀들어와 좌우를 둘러보니 전상시위(殿上侍衛)며 전하하졸(殿下羅卒)들이 벌려 있어 위엄스런 모양이 엄숙하였다.
 
43
용왕이 토끼에게 명령하기를,
 
44
“내가 뱃속에 깊은 병이 들어 백약이 효과가 없었는데 뜻밖에 도사의 말을 들으니 너의 간을 먹으면 효험을 보리라 하여 너를 잡아왔으니, 너는 조그만 짐승이오 나는 수궁 대왕이라 너의 뱃속에 든 간을 내어 나의 골수(骨髓)에 든 병을 낫게 함이 어떻겠는가?”
 
45
하고 토끼를 동여매라 명령한다. 이에 좌우 나졸들이 달려들어 결박하니 토끼가 몹시 놀라 어쩔 줄 모르다가 가만히 생각하기를,
 
46
‘내 별주부에 속아 사지(死地)에 들어올 줄 어찌 알았는가?’
 
47
하고 애통(哀痛)하여,
 
48
‘이런 일을 당할 줄 알았으면 아무리 용궁이 좋다한들 어찌 들어왔으며, 내 몸이 편하고 인삼 두루마기에 천도 감투와 수정 지팡이를 하여준들 용궁을 엿볼 개아들놈이 있겠는가? 고향을 이별하고 수로(水路) 천만리를 들어와 죽을 몸이 되었으니 애닯고 통분하다. 내 집에서는 이런 줄을 전혀 모르고 있겠지.’
 
49
하고, 한참 앉아 있다가 문득 한 꾀를 생각하고 앙천대소(仰天大笑)하니 용왕이 묻기를,
 
50
“네 무슨 경황에 웃느냐?”
 
51
토끼 얼굴 빛을 고치지 않은 채 여쭙기를,
 
52
“소생(小生)이 웃음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별주부가 한 일에 대하여 웃습니다.”
 
53
용왕이 말하기를,
 
54
“무슨 일인가?”
 
55
토끼 또 웃고 말하기를,
 
56
“별주부 국록(國祿)을 먹고 임금을 섬긴다면 마땅히 온 힘을 다해 충성해야 할 것을 벽계수(碧溪水) 가에서 소생을 만났을 때 왕의 병환 말씀을 하였으면 조그만 간을 아끼지 않았을 것인데 그런 말을 조금도 하지 않고 오직 용궁 자랑만 하기에 소생이 생전에 용궁 구경할 뜻이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세상 인심이 극악(極惡)하기에 이를 피하고자 들어왔더니 일이 이렇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 일은 비유컨대 급한 곽난에 청심환(淸心丸)사러 보냄과 같습니다.”
 
57
용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58
“너의 말이 극히 간사하구나. 지금 간을 내라 하는데 무슨 딴 말을 하는가?”
 
59
하고 호령이 추상(秋霜)같으니, 토끼 망극하여 방귀를 잘잘 뀌며 반쯤 웃으며 아뢰기를,
 
60
“세상 사람이 소생을 만나면 약에 쓰려고 간을 달라 하기에 소생이 이루 입막음을 할 길이 없어 간을 내어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고 다녔던 바 마침 별주부를 만나 별주부를 만나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저 들어왔습니다.”
 
61
하고 별주부를 돌아보며 꾸짖기를,
 
62
“이 미련한 것아. 이제 용왕의 기색을 보건대 병세가 매우 위중하거늘 어찌 그 말을 하지 않았는가?”
 
63
하니 용왕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64
“간이라 하는 것이 오장(五臟)에 달려 있거늘 어찌 임의로 넣었다 꺼냈다 하겠는가? 끝내 나를 업신여기려 하는구나.”
 
65
하고 좌우에 명하여,
 
66
“저 놈을 바삐 배를 따고 간을 꺼내라.”
 
67
하니, 토끼 망극하여 아뢰기를,
 
68
“지금 배를 가르고 보아 만일 간이 없으면 누구더라 달라하며 죽은 자는 다시 살 수 없어 후회막급(後悔莫及)이니 소생의 명을 살려주시면 간을 갖다가 바치겠습니다.”
 
69
왕이 더욱 분노하여 좌우를 재촉하자 무사가 칼을 들고 달려 들어 배를 가르려 하니, 토끼가 얼굴을 끝내 변하지 않고 급하게 아뢰되,
 
70
“소생이 간을 내어 두고 다니는 표적이 분명하오니 감하여 보십시오.”
 
71
하니 용왕이 말하기를,
 
72
“무슨 표적이 있느냐?”
 
73
토끼 말하기를,
 
74
“소생의 다리 사이에 구멍이 셋이 있어 한 구멍으로는 대변을 보고 한 구멍으로는 소변을 통하고 한 구멍으로는 간을 출입하오니 살펴보십시오.”
 
75
하니, 왕이 이상하게 여겨 좌우에게 명하여 토끼를 자빠뜨리고 사타구니를 살펴보니 과연 틀림이 없었다. 용왕이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하기를,
 
76
“그러면 간을 넣을 때는 어느 구멍으로 넣으며 어찌하여 너의 간을 약이 된다 하는가?”
 
77
토끼 그제서야 마음을 진정하여 아뢰되,
 
78
“간 넣을 때는 입으로 삼키옵고, 소생은 다른 짐승과 달라 춘하추동 음양오행(陰陽五行)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모든 정기를 다 쏘이고 아침 이슬과 저녁 안개와 새벽 서리를 받아 먹어 오장육부의 맑은 기운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까닭에 약이라 하나이다.”
 
79
용왕이 이 말을 듣고 그럴 듯하여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이 아뢰되,
 
80
“그 놈의 말이 모두 간사하오니 배를 갈라 보도록 하소서.”
 
81
용왕이 또한 옳다 생각하고 토끼에게 말하기를,
 
82
“네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하다마는 혹 도로 넣고 잊었는지 모르니 배를 갈라 보는 것이 제일 낫겠구나.”
 
83
하고, ―원본의 내용 중 중간 탈락된 듯― 봉(封)하여 삼공위(三公位)로 하니, 토끼 말하되,
 
84
“산중의 조그만 몸이라 대왕의 후대(厚待)를 입어 벼슬까지 봉하오시니 불승황감(不勝惶感)하는지라 청컨대 별주부와 함께 세상에 나가 간을 가져 오겠습니다.”
 
85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대연(大宴)을 배설하여 토끼를 대접할 대사간(大司諫) 벼슬하는 자가사리가 아뢰기를,
 
86
“토끼의 말을 믿을 길 없사오니 토끼를 용궁에 머무르게 하고 별주부만 보내어 간을 가져오게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되옵니다.”
 
87
하니, 토끼 내심(內心)에 자가사리를 소리없는 조총(鳥銃)으로 쏘고 싶던 중 용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88
“이미 정한 일에 네 무슨 잡말을 하는가?”
 
89
하고 금부(禁府)에 내리라 했다. 토끼 종일 대취(大醉)하여 즐기며 말하기를,
 
90
“대왕의 병세를 볼진대 염라대왕(閻羅大王) 삼촌이요, 불로초(不老草)로 두루마기를 하고 우황(牛黃)감투를 하였어도 황당(荒唐)하오니, 바삐 나가 간을 가져오겠나이다.”
 
91
하니, 왕이 별주부를 불러 교유(敎諭)하여,
 
92
“토끼 말이 근리(近理)하니 공연히 죽여 쓸 데 없고 함께 가서 간을 가져오는 것만 같지 못하니 네 나가 속히 간을 가져오라.”
 
93
하고, 각처에 공문을 보내었다.
 
94
각설(却說). 토끼 별주부 등을 타고 물 밖으로 향하여 나가며 마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95
‘내가 처음 너에게 속아 죽을 뻔 한 것은 나도 지각 없었거니와 저 용왕도 어림없어 내가 살아나게 되었도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세상에 간을 내었다가 넣었다 하겠는가? 아무려나 별주부를 잘 달래어 빨리 나가리라.’
 
96
하고, 자라에게 일러 말하기를,
 
97
“자네가 나에게 용왕의 병환 말씀을 하여 간을 가져왔더라면 이번 공행(空行)도 없고 용왕의 병도 나았을 것을 자네가 미련하기 짝이 없어 헛수고를 하게 되니 내가 간을 가져다가 상을 타면 자네와 같이 나누겠네.”
 
98
하니, 자라 그 말을 듣고 그 간이 밖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하는 말이,
 
99
“과연 용왕의 병을 위하여 그대를 유인한 것이니 어찌 간 출입함을 생각하였으리오. 진실로 그럴진대 피차 다 좋았겠으니 한번의 수고를 어찌 아끼지 않겠는가?”
 
100
하고 물가에 내려놓으니 토끼 그제야 살아난 듯 엎어지고 자빠지며 제 굴을 향하다가 잘못 그물에 걸려 살겨를이 없게 되었다. 마침 그 때 쉬파리가 눈가에 앉았다. 토끼 생각하기를,
 
101
‘쉬파리로 하여금 나에게 쉬를 많이 쓸라 하면 그물친 사람이 반드시 썩었다고 던져 버리면 살아날 수 있으리라.’
 
102
하고 파리를 꾸짖어 말하기를,
 
103
“너는 소인이라 씨를 없애겠다.”
 
104
하니, 파리가 토끼의 씨를 없앤다는 말에 저의 무리들이 말하기를,
 
105
“토끼 그물에 걸려 장차 죽을 것이 오히려 나를 위협하여 욕을 보이니 이런 놈은 편히 죽지 못하도록 모두 가서 저를 빨아먹으며 털끝마다 쉬를 쓸리라.”
 
106
하고, 일시에 모여 빨아먹으며 시를 쓰니 토끼 괴롭지만 오직 쉬를 덜쓸까 하여 몸을 굴리면서 꾸짖기를 마지 아니하니, 파리가 분하여 토끼가 말하는 대로 빈틈없이 쉬를 쓸었다. 마침 그물 친 사람이 왔다. 토끼가 거짓 죽은 체하고 있으려니 그 사람이 쉬 쓴 것을 보고 썩었다 하여 던져 버렸다.
 
107
토끼가 제 집에 가서 암토끼를 만나니 암토끼가 몸에 쉬를 보고 놀라 말하기를,
 
108
“어찌 이 지경을 당하여 살아올 줄을 생각하였으리오.”
 
109
하니, 숫토끼가 전후의 사연을 다 말하니, 암토끼 이 말을 듣고 자라 있는 곳에 가서 자라를 꾸짖어,
 
110
“이 끔찍하고 무서운 놈아. 전생의 무슨 원수로 남의 백년해로(百年偕老)할 남편을 유인하여 간을 내려 하였으니, 우리 남편이 꾀가 없었더라면 죽을뻔 하였다. 네 심술이 그러하니 가다가 긴 목이나 뚝 부러져 죽거나 대가리나 터져 죽을놈아. 간 먹고 살기는 커녕 새로 병이 심해져 곱게 죽지 못하리라.”
 
111
하니, 자라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112
“요년아 말을 그치고 내 말을 들어보라. 계집이 아무리 요사한들 그토록 매섭게 구느냐? 암상스럽고 발칙하다.”
 
113
하더니, 숫토끼가 내달아 와서 자라에게,
 
114
“네가 나를 업고 만경창파에 왕래하였으니 수고하였거니와 네게 정표할 것이 없으니 낯이 없네 그려.”
 
115
자라 말하기를,
 
116
“너희들이 우리 용궁을 욕만 하고 간도 안주고 빈 손으로 들어가라 하는가?”
 
117
토끼 앙천대소(仰天大笑)하여,
 
118
“아무리 미련한 것인들 내 간을 못 얻어 저토록 애를 쓰는가? 만일 우리 친척과 친구들이 알면 틀림없이 네 잔등이를 분질러 두 동강이를 낼 것이니 바삐 들어가라.”
 
119
하며, 암토끼와 둘이 토녀(兎女)를 업고 숲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별주부 할 일 없이 탄식하며,
 
120
“간특한 토끼에게 속고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왕을 보겠는가?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121
하고, 글을 지어 바위 위에 붙이고 머리를 바위에 땅땅 부딪히어 주었다.
 
122
이 때 용왕은 자라를 보낸 후 소식이 없자 이상하게 여겨 거북을 보내어 그 자세한 사정을 알아오라 했다. 거북이 즉시 물가에 이르러 살펴보니, 바위 위에 글을 지어 붙이고 그 곁에 자라의 시체가 있었다. 거북이 불쌍히 여겨 통곡하고 그 글을 거두어 돌아와 왕에게 사실을 아뢰니 왕이 불쌍히 여겨 비단을 내려 안장(安葬)하였다.
 
123
이 때 약방제조(藥房提調) 문어와 대사간(大司諫) 자가사리, 외시평 붕어, 외상 홍어, 승지(承旨) 전복과 옥당(玉堂) 은어등이 반열(班列)에서 나와,
 
124
“산중의 조그만 토끼가 우리 군신을 죽일뿐더러, 또 욕을 줌이 많사오니 산신(山神)에게 청하여 토끼를 급히 잡아 보내게 하여 엄한 형벌로 박살을 내도록 합시다.”
 
125
하거늘, 영의정 고래, 좌의정 숭어, 우의정 민어 등이 아뢰되,
 
126
“산신으로는 토끼를 잡지 못할 듯하오니 수궁정병(水宮精兵)을 내어 토끼 있는 산을 둘러싸고 잡거나, 큰 비를 내리게 하여 토끼 있는 산을 함몰(陷沒)시켜 족속을 씨가 없도록 함이 마땅할까 합니다.”
 
127
왕이 말하되,
 
128
“경(卿)등의 말이 불가(不可)하다. 한고조(漢高祖)는 인간의 임금이로되 병이 들자 인명은 재천(在天)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과인(寡人)은 신명(神明)이라 일컬으며 망녕되이 도사의 말을 듣고 저렇듯 하였다가 토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또 조그만 분(忿)을 참지 못하여 다른 행동을 하게 되면 이는 한번 잘못을 더함이라, 과인이 하늘 뜻을 모르고 조그만 토끼를 원함이 어찌 어리석음이 아니리오. 그대들은 다시 말을 말라.”
 
129
말을 마치고 일성장탄(一聲長歎)하더니, 태자와 좌우정승을 불러 안에 들어와 유지(遺志)를 받게 하고 즉시 죽으니, 이때 나이 일천팔백 년이요 재위는 일천이백 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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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가 문무백관을 거느려 머리를 풀고 우니, 모든 수족(水族)이 통곡하는 소리가 물끓듯했다. 오일성복(五日成服)한 후 태자 즉위하여 천세를 부른 후 동서남북해 용궁에 고부사(告訃使)를 보냈더니, 남해 광리왕(廣利王) 충륭(沖隆)과 동해 광연왕(光淵王) 하명(河明)과 서해 광덕왕(廣德王) 거승(去乘)이 모두 친히 와 위문하는 위의(威儀)가 장하였다.
【원문】토생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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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8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