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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헐벝박사 ◈
해설   본문  
1949.08.11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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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헐벝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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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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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헐벝(Homer B. Hulbert) 박사를 영결하는 식장에 미국대사 무초 씨와 미국 친구 여러분과 우리 정부 각원과 사회 지도자 제씨가 이렇게 성대히 모여서 이 식을 거행하게 된 것은 많은 위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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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헐벝 박사는 말이 미국사람이지 마음과 그의 일생 행한 일은 일편단심 한국이라는 것으로 맺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마세스츄스주(Massachusetts State)라는 곳에서 난 분이 어떻게 되어서 우리에게 온 것이며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해서 평생을 받치게 된 것인지 매우 이상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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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우리나라에 나올 적에는 한미통상조약(韓美通商條約)이 1882년에 되어 가지고 그 때 유신개화를 해서 일본에서도 개혁을 하고 서양과 통하자고 떠들고 중국도 외국과 통하자고 하자 우리 한국도 통상과 연락을 해 가지고 좀 개화를 하여 유신을 해나가야 되겠다는 정치단체가 조직되어 그 당시 개혁을 시작해 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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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때에 우리 정부에서 미국정부에 요청하여 교사 세 분을 보내달라고 해서 미국정부가 세 사람을 천거했는데 이 헐벝 박사가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 길모어(George W. Gilmore)라는 사람이 하나이고 다음은 뻥커(Dalziel A. Bunker)라는 분이었습니다. 뻥커라는 분은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여러 해 있다가 작고했고 길모어라는 분은 뉴욕(New York)에 가 있었으며 종종 나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그 때에 나와서 우리나라의 학생과 청년들에게 교수할 책임을 말아 가지고 큰 학교를 설립해서 교육을 시켜온 분인데 나종에 완고한 분자들이 정부와 세력을 잡고 임금부터 완고한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혁신 운동은 무력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요청해온 그 분들은 아모 일이 없을 만치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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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뻥커 씨와 헐벝 씨는 모다 미국 선교회의 일을 보면서 뻥커 씨는 배재학당의 교사로 있었고 헐벝 씨는 배재학당 뒤에 영어로 글을 박혀가지고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우리말을 배우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늘 공부해서 널리 세상사람들에게 한국이 어떻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글로 써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헐벝 씨가 세상에 알려주기를 상고시대 우리나라 문명이 어떠했으며 구라파 여러 나라가 어떻다 어떻다 할 적에 우리 민족이 무엇 무엇을 했다고 이분이 간명하게 들어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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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일인들이 여기에 들어와서 5조약(五條約), 7조약(七條約)을 맺게 만들 적에 이분도 다른 미국친구들과 같이 미국이 한국을 내버릴 리치가 없을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웨 그러냐 하면 1882년 한미조약(韓美條約)에 미국이 담보하기를 어느 나라가 들어와서 조선을 침략하면 미국이 도아준다는 조문(條文)이 있었고 만일 미국을 침략하면 조선이 도아준다는 약조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 미국공사 알륵(Horace N. Allen) 씨도 미국선교사들과 미국친구들은 일인이 아모리 침범한다 하도라도 미국이 우리나라를 일본에 내주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필경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과 내약(內約)해 가지고 비밀히 한국을 일인에게 양보한 뒤에 알륵 씨는 미국정부에서 불러가고 다른 사람이 다시 왔고 헐벝 씨는 그때부터 나서서 일본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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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영국사람들도 일인을 반대하고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되고 해서 헐벝 씨는 그냥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때 대황제폐하가 돈 얼마를 줄 적에 상해은행(上海銀行)에 가서 찾어 쓰도록 친필을 써 주시고 국서를 써 주시며 미국대통령에게 호소하게 하였습니다. 헐벝 씨는 그것을 가지고 상해은행으로 해서 미국에 건너가 일본을 반대해 가지고 독립회복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우리는 유력한 일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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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헐벝 씨가 미국에 가보니 이미 미국사람과 일본사람 사이에 내약이 되어 있어서 헐벝 씨가 워싱턴(Washington)에 올라가니까 벌서 국무성에서 국서(國書)를 받지 않고 이럭저럭 아모 일도 되지 못하고 말었습니다. 그 분은 더욱 분개해서 글과 말로써 어떻게나 일인들을 공격했던지 이 분의 글을 신문사에서 받지 않고 뉴욕 타임스(New Times)가 몇 편을 실려준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어서 이 분이 나가 연설을 하기 시작했는데 뉴욕에서 순서를 정해 가지고 날마다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고 같은 날에 한 군데서 몇 번씩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몇 푼씩 돈을 걷우어서 가족을 벌어 먹이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국을 위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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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진주만사건(眞珠灣事件)이 난 뒤에 미국 오하요주(Ohio State)에서 우리 한국 친구들끼리 회담을 할 적에 헐벝 씨가 오셔서 말을 했는데 한국사람들은 몇 마디 말을 하다가 그만 목이 메어서 말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이 분의 감정을 알었었지만 미국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분의 연설하는 것을 드러 보면 한국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오 불상한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어서 서름을 당하고 고난을 받는다고 울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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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그 자리에서 가락지를 내어 보이면서 한국의 기생들이 가락지를 모아 주며 자기에게 미국에 가서 한국독립을 위해서 써달라고 했다는 말을 하며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그 후에 이 분의 소원이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에 가서 한국사람들과 이야기라도 한번 했으면 한이 없겠다고 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 날이 있을 것이라고 늘 말했던 것인데 급기야 해방이 되어가지고 정부를 세웠다니까 그 분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나에게 편지하기를 한국에 와서 양화진(楊花津)에 묻치는 것이 한 가지 원(願)이라고 해서 우리가 곧 나오라고 그랬습니다. 그 가족들은 어떻게 가느냐고 걱정을 하는 것을 기어히 자기는 가야 한다고 하면서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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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이번 나오는 중에 한 가지 큰 욕심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여기 나와야 자기에게 맡겨둔 돈을 일본에서 배상금으로 찾아서 우리 정부에다 주어야 자기의 떳떳한 직책을 다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 나하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때에 그 돈을 다 찾을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말고 평안한 마음으로 살어나기만 하며 우리 동포들이 얼굴을 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가치 놀고저 고대하고 있으니 살어만 나시라고 했더니 좋아하면서 어서 나가 보고 싶은 친구들을 만나야 되겠다고 하였는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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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과거로 보아서 우리 한국에 나와서 돌아가시게 된 것으로써 그 분이 원은 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즉 한 달이나 두 달이라도 우리 한국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우리 청년회나 교회에 다니면서 이야기라도 하였으면 그분의 평생에 원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인데 그것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니까 우리가 많은 유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인들이 몽매한 사람들이 아님으로 그의 은혜를 깨닫고 이만치 모여서 엄숙히 영결식을 행하는 것은 우리를 아는 사람으로는 다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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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평생을 우리를 위해서 받친 친구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일이 쉽고 편리하고 히망이 있어서 잘 되려고 하는 경우에 친구도 있고 어떤 친구는 일이 되고 안되고를 막론하고 우리를 위해서 싸우려고 하는 친구가 참 귀한 친구인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께 이 사정을 진정해 가지고 그 돈을 찾어다가 그 유족에게 얼마를 주어서 이 분의 평생 공로를 유족이 누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분의 평생의 공로를 생각하고서 동상이라도 세울 것입니다. 이 분이 우리나라에 몇재 안가는 친구인 것을 알고 오늘 이와 같이 영결식을 행하는데 대해서 여러분에게 대단히 치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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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양화진에다 장례를 지내는데 내가 그 묘지를 가서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비석을 세워서 우리 한인들이 우리 친구를 친구로 안다는 표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찬송가에 있는 구절과 같이 예수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들은 다 각각 이런 친구들과 또 우리 선열들의 정신과 성심을 이어가지고 우리 친구들이 사랑하는 나라 우리가 사랑하는 나라를 한층 더 긴절히 옹호하고 받들어서 싸워 나가야 이런 분의 공적이 들어날 것이오 우리 선열들이 좋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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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珖燮 편, 『이대통령훈화록』, 중앙문화협회, 1950)
【원문】고 헐벝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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