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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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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추장(酋長) 조영(祚榮)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선천(先天) 연간(年間; 현종玄宗의 임자년壬子年)에 비로소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일컬었다. 개원(開元) 7년(己未)에 조영(祚榮)이 죽자, 그 시호(諡號)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世子)가 대(代)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명황(明皇)은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海東)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땅에는 오경(五京)·십오부(十五府)·육십이주(六十二州)가 있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초년에 거란(契丹)이 이것을 쳐서 깨쳤다. 그 뒤로는 마침내 거란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의봉儀鳳 3年, 고종高宗 무인년戊寅年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그 여당餘黨을 모아 북으로 태백산太伯山 밑에 의지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개원開元 20年 경에 당唐의 명황明皇이 장수를 보내서 발해渤海를 토벌했다. 또 성덕왕聖德王 32年, 현종玄宗 갑술甲戌년에 발해渤海·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당唐나라 등주登州를 침범하자 현종玄宗은 이를 쳤다." 또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구장舊將 조영祚榮의 성姓은 대씨大氏이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太伯山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위의 여러 글을 상고하건대 발해渤海는 바로 말갈靺鞨의 별종別種이다. 다만 그 갈라지고 합한 것이 서로 같지 않을 뿐이다. 또 <지장도指掌圖>를 상고해 보면 발해渤海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동북東北 모퉁이 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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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탐(賈眈)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발해국(渤海國)의 압록(鴨綠) ·남해(南海) ·부여(扶餘) ·추성(추城) 등 사부(四府)는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옛땅이었다. 신라(新羅) 천장군(泉井郡; <지리지地理志>에는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에 천정군泉井郡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湧州이다)에서 추성부(추城府)에 이르기까지 도합 39역(三十九驛)이 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三國史)>에는 "백제(百濟)의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고 했다(이 말에 의하면 발해는 또 나뉘어서 두 나라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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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사람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倭人)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의 해가 된다"고 했고, 또 "말갈은 땅이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연접되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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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기(東明記)>에는, "졸본성(卒本城)은 땅이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東眞이라 함)에 연접되어 있다. 신라의 제6대 지마왕(祗摩王) 14년(丑乙)에, 말갈의 군사가 북쪽 국경으로 크게 들어와 대령(大嶺)의 성책(城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로 지나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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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위서(後魏書)>에는, "말갈은 바로 물길(勿吉)이다"고 했고, <지장도(指掌圖)>에는, "읍루(읍婁)와 물길(勿吉)은 다 숙신(肅愼)이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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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黑水)와 옥저(沃沮)에 대해서는 동파(東坡)의 <지장도(指掌圖)>를 보면 "진한(辰韓) 북쪽에 남북의 흑수(黑水)가 있다"고 했다. 상고하건대, 동명제(東明帝)는 왕위(王位)에 선 지 10년만에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고, 온조왕(溫祚王) 42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집이 신라(新羅)에 투항(投降)했다. 또 혁거세(赫居世) 52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東沃沮)란 땅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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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도(指掌圖)>에, "흑수(黑水)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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