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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금나무 동산 아름다운 옛 동산, 지금에는 찾을 수 없는 그 동산……. 타락은 하였든 말았든 간에 아담 때부터 좋아하던 능금이다. 혀를 찌르는 선열한 감각, 꿈꾸게 하는 향기로운 꽃, 그리고 그리운 옛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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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서 시작되어 경사를 지으면서 개울가까지 뻗친 능금밭. 북국의 찬 눈이 녹아 개울가 버들가지에 물오를 때 자줏빛 능금나무 가지가지에 햇빛 흘러 동으로 십리 남으로 십리 펑퍼짐한 능금밭이 기름지게 아름아름 빛났다. 들의 보리이삭 패고 마을 밖에 피리소리 고요할 때 능금꽃 푸신하게 언덕을 싸고 우거진 꽃향기 언덕을 넘고 밭을 넘고 개울 건너 들을 건너 마을까지 살랑살랑 흘러왔다. 남쪽 나라 레몬 향기 꿈꿀것 없이 이곳의 능금꽃이 곧 마을 사람의 꿈이었다. 마을의 처녀 다홍치마 입고 시집갈 때 능금나무 꽃 지고 들에 황금 파도치는 늦은 가을 서리 맞은 능금 송이송이 아지 벌게 무거웠다. 따뜻한 석양 언덕 위에 비낄 때 능금 실은 수레 마을길로 향하였다. 황금 햇발에 머리카락 물들이며 수레 위에 앉아서 능금 먹는 처녀와 총각……타락의 시초인지 몰락의 첫걸음인지 그 뉘 아리오 만은 너 한입, 나 한입 거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 있고 순진한 목가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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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흐르고 달이 흐르고 북두칠성의 위치 변하니 아름다운 이 풍경도 이지러져 버리고 고요하던 북국도 스스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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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움직이고 언덕 밑 물줄기 돌아 버리니 목마른 능금밭 점점 말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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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롱이에 남포소리 어지럽더니 논 깎아 신작로 뻗치고 밭 파고 전봇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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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이 '골로시'(고무신)로 변하고 관솔불이 전깃불로 변하고 풀무간이 철공장으로 변하고 물레방아가 정미소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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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고 열매 맺는 향기로운 능금밭! 그것을 까뭉개고 그 위에 정거장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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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금 수레 구르는 석양의 마을길. 그 위에는 두 줄기의 철로가 낯설은 꿈을 싣고 한없이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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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창고와 회관의 모난 집이 언덕을 넘어 우뚝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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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연기 아름다운 이야기를 뺏고 페인트 냄새 꽃향기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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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는 만주 속을 실어오고 이사꾼을 실어갔다. 처녀는 청루로 실어 나르고 청년은 감옥으로 실어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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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페인트, 철로, 정거장, 고장, 창고, 회관……이것이 이제 북국의 이 마을의 새로운 풍경이다. 이지러진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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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의 독기 온전히 마을의 시를 죽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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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변치 않고 아름다운 것은 햇빛과 달빛이다. 무거운 능금송이 익히던 햇빛, 밤의 능금꽃 비취던 달빛, 여전히 같은 빛으로 철로, 공장, 회관……을 비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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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마을. 우거진 산. 솟은 바위. 더운 온천. 맑은 시내. 숲 속에서 새어오는 비둘기 소리와 엎쳐서 흐르는 맑은 시내. 시내를 따라 올라가 고요하고 으슥한 푸른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청쇄한 별장. 낙천지 같은 동산. 그것이 '마우자'(로서아인)의 별장이다. 혁명이 폭발되자 도읍을 쫓겨나 멀리 동으로 달아온 백계 노인 양코스키 일족의 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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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되고 세상이 변하니 사포와 사벨만 보아도 겁내던 이 벽촌에 지금에는 코 높고 빛 다른 '마우자' 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옛적에 여진인(女眞人)이 들어왔던 옛 성터 남은 이 마을에 이제 빛 다른 '마우자' 들어와 흰옷 사이에 네 활개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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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목덜미를 드러내 놓고 거리를 거니는 아라사 미인, 온천물에 철벅거리는 아라사 미인, 마을의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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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나라의 언 살을 녹이는 뜨거운 물 그 속에 헤이는 미인의 무리, 안개 깊은 바다의 인어의 무리같이 깊숙이 물에 잠겼다가 샘 전에 나와 느릿한 허리를 척척 누이는 풍류, 옛적 양귀비의 그것보다도 훨씬 정취가 깊을 것 같다. 창으로 새어드는 햇빛에 비쳐 김 오르는 살빛, 젖가슴, 허리, 배, 두 다리 할 것 없이 백설같이 현란하다. 미끈미끈한 짐승의 무리. 하아얀 짐승의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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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별장 푸른 잔디 위에 진홍빛 초록빛 옷에 싸여 흰 테이블을 둘러싸고 마시고 웃고 아이들 잔디밭가를 뛰고 노는 광경. 경쾌한 자동차를 마을길로 몰아 거리로 해수욕장으로 드라이브하는 광경. 탐나는 정경이다. 마을의 양기로운 풍경이다. 나라를 쫓겨 가질 것도 못 가지고 삽시간에 도망해온 그들로서 오히려 이러하다. 산 깊은 이 벽촌에 와서도 그들의 호화는 오히려 다름없다. 부르주아와는 어디를 가든지 간에 생활을 윤있게 할 줄 알고 향락할 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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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온천의 '마우자' 탐나는 정경이요, 아니꼬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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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줄로 뻗친 철로 등날 싸늘한 촉감을 주고 단 위의 코스모스 간들 바람에 회촌회촌 흔들리는 고요한 촌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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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시간이 가까웠는지 앞마당에 소학생의 지껄이는 소리 요란히 나고 대합실 안에는 '갱개' (감자) 함지 인 '안깐' (여인네) 두어 사람 장에서 산동전을 절렁절렁 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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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들 지껄이는 소리, 역부들 떠드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동안을 두고 터지는 웃음소리 바람결같이 불어 오고 그 속에 섞여 무엇인지 고함 높이 부르짖는 소리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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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둘씩 모이는 사람 개찰구 밖 플랫폼 위에 무엇을 둘러싸고 실내기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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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숲으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나발나발 남루한 늙은 여인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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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시’ 는 외짝만 끌고 포기포기 찢어진 치맛자락이 헙수록하게 끄스른 머리카락과 함께 바람에 펄렁펄렁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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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죄죄한 눈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돌려다보면서 여인네는 호소하는 듯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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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킥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여인네의 눈을 피하여 사람들은 수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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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원들은 귀찮은 듯이 그의 팔을 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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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복색한 마우자들이 당신 아들 데리고 갑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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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인네는 그 자리를 움직이려고도 아니하고 구슬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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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리 눈 오는 날 밤 고개 너머 길떠난 내 아들 어째 끝내 돌아오지 앵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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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관하러 공부간 내 아들 이 에미 혼자 두고 어데를 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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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떠날 때마다 차 들어올 때마다 정거장 플랫폼에 와서 구슬피 ‘내아들’ 을 외치는 이 여인네. 그는 ‘미친 여자’ 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 마을의 가엾은 여인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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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공부시키러 떠내 놓은 외아들, 칠년이 되어도 팔년이 되어도 ‘도장관 따가지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하늘에 별을 따러 갔어도 이미 돌아왔을 날에 ‘도장관 따러간 아들’ 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불쌍한 외어머니를 배반하여 버릴 ‘불효막심’한 자식은 아닌지라 나날이 여위어 가는 몸을 삽작문에 의지하여 마을 앞을 바라보면서 청기 홍기 앞세우고 의기 있게 돌아올 아들의 금의환향을 꿈꾸었다. 앞을 가리는 눈물을 찬란한 환영으로 억지로 씻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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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십년이 넘어 마을 앞에 철로가 깔려도 바라는 그림자 안보이고 요란한 소문만 귀에 잦았다. 주의자가 되어 신문에 났느니, 감옥에 갔느니, 붉은 기 든 ‘마우자’ 와 같이 아라사로 들어갔느니, 뒤를 잇는 어지러운 소문에 그의 어머니 까마귀만 짖어도 애태우고 달빛만 흐려도 속 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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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이 넘어 두 해가 가고 세 해가 가고 마침 열세 해 되는 봄이었다. 마을에 개 짖고 나무의 갈가마귀떼 유심히 요란한 하루아침 눈물에 잠긴이 오막살이 안에 조그만 소포 한 개를 체전부가 가져왔다. 나무로 네모지게 싼 괴상한 통 ─ 아! 그것이 그의 아들일 줄야 어찌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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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관’ 을 꿈꾸게 하고 의문지망에 그를 늙게 한 그의 아들일 줄야! 바라고 바라던 그의 아들 조그만 나무통 속에 쪼그리고 앉아서 열세 해만에 돌아왔다. 무명보자기 집어내니 굵게 추린 뼈 두어 개 어머니 무릎 위에 앙크렇게 흩어졌다. 해외에 나가 싸우다가 객사한 그의 시체, 동무가 뼈 추려서 고국에 멀리 장사지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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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도 입안의 생각뿐 너무도 큰 놀람에 어머니는 그 자리에 기절하여 버렸다. 그날이 새어서야 비로소 이 집에서는 통곡소리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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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부터 어머니는 나날이 실성하여 갔다. 옛날의 멀쩡하던 그 어머니는 아니었다. 날이면 날, 밤이면 밤, 마을을 돌아다니며 처량히 울고 정거장을 헤매면서 ‘내 아들’ 을 외쳤다. 비오는 날이나 눈 오는 밤이나 차 떠날 때마다 차 들어올 때마다 정거장 플랫폼 위에 ‘내 아들’ 찾는 소리 구슬피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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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밤 고개너머 길떠난 내 아들 이 에미 혼자 두고 어데메 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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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모롱이에 기적소리 나더니 기차가 들어왔다. 역원들, 차 탈 사람들, 플랫폼 위에 모인 사람, 제각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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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네는 객차의 창을 차례차례 엿보며 두 팔로 창을 두드리면서 애닯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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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으로 고개 내밀던 사람들 침 뱉으며 창을 닫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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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과 양복에 섞여 온천을 찾아가는 듯한 ‘마우자’ 두 양주 차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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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네는 두 주먹을 쥐고 부리나케 그리로 달려가 두 양주를 붙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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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 데려간 마우자, 날래 내 아들 찾어 놓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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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을 모르는 두 양주 멍하니 한참 섰다가 양 짖는 소리로 무어라 지절대며 앞을 뿌리치고 개찰구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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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인네는 두 팔로 양주의 옷을 붙들고 뒤따라가면서 여전히 소리 높게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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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 쥐어짜 쏟아 놓은, 만지면 물들 듯한 새파란 북국 창공을 비행기 쌍쌍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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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발에 하얗게 빛나는 날개 해발 수천 척의 첩첩한 산맥을 넘어 가볍고, 경쾌한 음향 무거운 공기를 진동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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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넘고 물 건너 비행기 구경 오는 사람 새벽부터 거리에 빽빽이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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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장 모래언덕 위에 흰옷의 파도 울렁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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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장 큰 벌판에 칼자루 번쩍번쩍 노란 복장 ‘우쭐’ 하며 벌떼 같은 노란 군사 들 복판에 진을 치니 기동연습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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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총소리, 속사포소리 콩볶듯 토닥거리고 천지를 삼킬 듯한 대포 소리에 산과 들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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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쌍쌍이 흰옷 위를 얕게 스치자 폭탄덩이 뒤를 이어 모래언덕 깎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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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구경왔던 사람 고개 넘고 물 건너 꽁무니가 빠지게 줄행랑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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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지 않은 비행기 등쌀에 이 밤의 마을 사람들 불안에 잠 못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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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리아를 불어오는 억센 바람과 두만강 기슭을 스쳐 내리는 눈보라의 모진 겨울을 가진 반면에 회령은 미인과 참외의 신선한 여름을 가졌다. 물 맑은 두만강을 끼고 난 곳이기 때문인지 회령에는 살빛 고운 미인이 많다. 미인과 참외 ─ 그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모르나 미인 많은 회령에 참외 또한 많다. 회령을 중심으로 북으로 들어가는 철로 연변이 거개 다 참외의 명산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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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길바닥에 산더미같이 쌓인 회령 참외의 잇사이에 살강살강 갈리는 조막만큼씩한 노랑 참외, 신선한 북국의 멜론, 여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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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문 너머로 탐스럽게 보이는 서늘한 적삼 속의 미인, 한 가지 꺾고 싶은 울 너머의 앵도송이 ─ 또한 여름의 향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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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살 향기, 거리에는 멜론 향기, 여름의 회령은 향기의 고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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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한 폭의 회령풍경 있으니 역시 미인과 참외의 산뜻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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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을 스치고 들어오는 열차의 기적이 요란히 울리자 정거장 앞마당에 국경경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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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김을 뿜으니 넓은 마당에 승객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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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 양복, 게다, 중국 군인, 쿠리, 마우자, 국경의 도시에는 이제 국적을 달리한 뭇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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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에 색달리 눈을 끄는 일점홍이 있다. 단발하고 양장한 현대적 미인, 한 의지의 표현인 반듯한 콧날, 자랑 높은 눈맵시, 꼭 다문 입, 범하기 어려운 엄숙한 얼굴 ─ 평범치 않은 교양 있는 모던 걸이다. 그 위에 눈을 끄는 새빨간 윗저고리, 단발 밑으로 가늘게 휘인 목덜미, 은초록색 스커트 밑으로 밋밋한 다리, 현대 미인의 제일 조건인 고운 다리 ─ 향기 높은 회령 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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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패가 되든지 쿠리가 되든지 간에 어떻든 호복 입은 사나이나 그렇지 않으면 루바슈카 입고 더벅머리 한 청년이면 모조리 취조를 하거나 몸을 뒤지거나 그럴듯한 일이지만 아름다운 미인 교양 있는 모던 걸에게야 몸 뒤지고 취조할 아무 혐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문가이라 평범한 우리로는 도저히 생각지 못할 만큼 날카로운 그들에게는 무슨 의미로 어떻게 비취었든지 간에 그들은 거룩한 이 모던 걸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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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속과 남루한 이불 보따리 속을 넓은 마당에 속속으로 풀어헤치면서 몇 사람의 호인의 취조를 마친 후 그들의 순서는 초조히 기다리는 미인에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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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수첩에 무엇인지 기록하면서 잠시간 심문을 하더니 나중에 그들은 미인이 휴대한 조그만 바스켓을 열라고 명령하였다. 미인의 상자 속! 그 속에 설마 아편이 들었을 것인가, 폭탄이 들었을것인가, 귀여운 젊은 여자의 비밀상자가 이제 이 대로상에서 마치 수술대에 오른 여인의 나체같이 함부러 열리려 함을 슬퍼하여선지 여자의 얼굴은 일순간에 흐렸다. 그러나 그것도 국경이니 관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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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바스켓을 조심스럽게 열고 속을 들여다보았다. 경비순사는 호색적인지 경계적인지 가느다란 눈초리로 속의 것 집어내기를 강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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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부끄럼인지 불안스럼인지 말없이 한 가지 두 가지 속의 것을 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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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한참 주저하다가 계속해서 비단양말, 새빨간 드로어즈를 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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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하여도 유혹적인 새빨간 드로어즈, 살 냄새나는 비단양말을 큰 행길 위에서 순사는 휙휙 털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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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진 미인은 황급하게 그것을 도로 상자 속에 쑤셔 넣으려고 하였으나 순사의 손이 그것을 막으면서 상자 속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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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집어낸 것은 실망태에 넣은 참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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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 사 넣은 것인지 생기와 신선미를 잃은 참외 그물 속에 두어개 쪼글쪼글 시들었다. 조막만큼씩 하고 노란, 역시 회령 참외의 종자임에는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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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보다 유다른 그 무엇을 기대하였던 경관은 고개짓을 하면서 또 한번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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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 것을 다 보았으니 미인은 주섬주섬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그 자리를 일어섰다. 애매한 모던 걸, 그의 상자 속에 들었으면 무엇이 들었단 말인가. 공연히 대로상에 양말을 흔들며 속옷을 내보이며 수치만 당한 것이 분한 듯이 미인은 의기 넘치게 거리를 향하여 정거장 넓은 마당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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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들은 머리를 한데 모고 검은 수첩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인지 의론이 분분하였다. 전문가이니만큼 그들의 눈치는 뭇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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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생각지 못할 만큼 날카로운 눈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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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마당을 다 건너간 미인의 등 위에 날카로운 시선이 가자 그들은 미인을 다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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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간에 두말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 국경이다.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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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열 번 열어도 백 번 열어도 그 바스켓이 그 바스켓이지 그 동안에 신기한 기적이 일어났단 말인가, 다른 무엇이 또 들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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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수건, 화장품, 오페라백, 양말,드로어즈, 참외 망태가 길바닥에 쏟아져 나왔다.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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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 많은 회령바닥에서 그래도 참외가 탐나는 듯이 경관은 망태 속에서 참외를 하나 집어냈다. 시들어 쪼그라진 참외 그것이 그다지 탐나는가. 하기는 길거리의 싱싱한 것보다도 시들었을망정 미인의 수중에 저장한 것이니 탐도 날 것이다. 금방 입에다나 넣을 듯이 탐을 내면서 그들은 시든 참외의 향기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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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별안간 참외를 그들의 손에서 뺏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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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내기를 치는 판에 ─ 가엽다! 손에 들었던 참외 하나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져 부서진 참외 ─ 그 속에서 한 자루의 새까만 무기가 나왔다. ‘브로닝’ 식인지 ‘콜트’ 식인지, 혹은 ‘모젤’ 식인지 퍽도 귀여운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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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또 한 개 떨어트린 참외 ─ 그 속에서는 새까만 콩알이 우수수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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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 넓은 마당에 근대적 역학미를 띠운 푸른 총신과 검은 콩알이 국경의 석양을 받아 무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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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석양을 받아 반짝이는 경관의 시선이 평범치 않은 모던 걸의 얼굴을 날카롭게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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