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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화(壁畵) ◈
해설   본문  
1953.8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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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벽화(壁畵)
 
 

1. 1

 
3
지금의 훈에게는 향이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없다. 정말 무엇을 위해서 인생의 삼분의 이 이상을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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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인생 칠십이 고래희라니 따지고 보면 오분의 사는 벌써 살아버린 셈이 된다.
 
5
그래도 마음은 아직 젊다. 의욕도 있다. 욕심도 있었다. 패기도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나이란 도리가 없었다. 작년 올로 이마에 그어진 주름살은 한결 굵어졌다. 눈가가 분명히 쪼그라졌다. 기름을 발라본 일이 없건만 윤이 잘잘 흐르던 그 까아만 머리도 땀에 전 것처럼 거세어졌다. 흰 털도 정녕 늘었다. 새치가 아니라 분명한 흰 털이다. 특히 콧수염에 그것이 더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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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되도록 한 것이 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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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은 이렇게 생각해본다. 다방 ‘청춘’. ㄱ자진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모로 비치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면서의 생각이었다.
 
8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한 일도 없었다. 얻은 것도 없었다. 한 해 한 해 주름살이 늘어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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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뭘 위해서 살아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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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은 또 한번 자기한테 물어보고 있다. 벌써 두어 시간 전에 다 마시어버린 빈 찻잔 손잡이를 쥐었다놓았다 하며 생각이다. 찻잔 손잡이에서 손을 떼기가 무섭게 잔을 날라가는 것이 부산의 풍속처럼 되어 있건만 훈의 습성을 아는지라 마담도 레지도 힐끗 힐끗 생각이 나면 훈을 바라다볼 뿐이다. 정말 무엇때문에 인생의 오분의 사를 살아왔던지 모르겠다. 누구를 위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딴에는 민족을 위해서 살아가노라 해왔었다. 그러나 그것도 허튼 수작이었다. 이 민족은 훈 때문에 덕을 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성싶었다. 오직 덕을 본 것이 있다면 이 민족이 이천만으로 불리어졌을 때나 삼천만으로 불리어지는 오늘날에나 훈이 없으면 일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 명이라고 해야 할 수고를 덜어준 정도에 그칠 것이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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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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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생각해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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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림만 해도 그렇다 . 훈의 그림이 이 나라 민족예술에 플러스가 되었더니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그 자신만이라도 그렇게 믿는다면 한 사람은 있는 셈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당자인 그 자신이 첫째 그런 배짱이 못 되는 것이다. 아무리 정상적인 물건의 형체도 그의 손에 가면 마치 값싼 거울처럼 변형을 시키는 것이다. 형체가 일그러지지 않으면 색의 조화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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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번 개인전을 한 경험도 그에게는 있었다. 삼십대에 한 번과 사십대에도 한 번 했었다. 그가 개인전을 한다고 할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들 웃었었다. 그 그림으로 개인전 운운하는 것도 웃음거리가 되었었지만 이 나라에서의 개인전에는 먼저 그만한 사교가 필요했었다. 패트런이 하나 붙어 있어야 했다. 악착같이 돈 있는 사람을 쫓아다니어서 강매를 해야 하는 세상에 그는 바위처럼 고독한 사람이었다. 비위도 없었다. 전후 두 번의 전람회에서 그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첫 전람회로 해서 진 빚에 십 년간은 목이 돌아가지 않았었다. 두번째가 해방 다음해였다. 그 빚이 지금 피란살이에까지 꼬리를 물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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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은 글도 썼다. 아니 아직도 쓰고 있다. 예술 평론이란 것이다. 미술 평론도 썼다. 그러나 그에게 원고를 조르러 다니는 사람은 신문사나 잡지사가 아니다. 작자 자신들이었다. 소위 신간평이니 전람회 관람기니 하는 종류였다. 돈 안 들이는 광고에 이용만 당해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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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림을 그렸다고? 내가 죽은 다음이면 역사란 놈이 코방귀를 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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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은 이런 자기 모멸에 빠지는 것이 일쑤다. 최근에 와서 훈은 이런 자조의 정에 더욱 견디기 어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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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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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도 해본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인간이 이 이상 더 이 세상에 살아있어야만 한다는 논리를 발견할 수가 없다. 인간은 반드시 사는 목적이 있어야 할 것이요, 사는 보람이 있어야 할 것이었다. 현재는 보람없는 생을 영위하고 있더라도 그런 희망만은 갖고 싶었다. 또 가져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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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막처럼 그의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론 이러한 그의 절망은 그 자신의 지나친 겸허에서 오는 절망이기는 하다. 그 자신 자기의 재능에 대해서 못생길 만큼 겸손한 탓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의 그림 ─ 예술을 무가치하게 인정하느니라 단정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는 오직 그의 재능이 일반 대중들의 감상안과의 거리에서 오는 차이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 자신은 모를 수 있으되 그의 예술적 천재에 질시를 느끼는 몇몇 동료와 선배도 있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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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이 그의 생활에 보탬이 못 되는 것은 그의 예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사교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전람회는 그림보다는 팔 공작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이 나라 실정이요 이 민족의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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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훈은 그런 것을 싫어하는 ─ 아니 못하는 사람이었다. 현재 그는 약 일년 전부터 붓을 꺾고 있다시피 하고 있거니와 이 동기란 것도 훈다운 것이었다. 한 친구가 있어서 그의 그림을 어떤 고관에게 팔아준 일이 있었다. 그것은 공산군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어떤 빌딩 거리를 그린 것이었다. 그 폐허 위에서 오히려 민족의 새싹인 어린 소년 소녀가 돌에 짓눌린 풀싹을 가꾸는 그림이었다. 남이야 뭐라든 훈은 그 그림이 좋았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바라다보며 즐기던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판 후 달포나 되어서다. 훈은 그 「생」이라는 그림이 그지없이 보고 싶었다. 물론 고관과는 초면이었다. 그러나 몇 번 전화로 연락을 해도 관청에서는 회의였고 사택에서는 파티였다. 일요일을 택해서 아침 저녁에 사택을 찾아갔더니 간밤 동래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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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날이었다. 훈은 공원 같은 정원을 돌아나오다가 기가 막힌 장면을 목도했던 것이다. 자기의 그림을 가지고 아이들이 소꿉을 놀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아이들의 소꿉질 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훈은 그림을 빼앗아서 발로 확확 족이고 말았었다. 그후 훈은 일체로 캔버스 앞에 앉아본 일이 없다. 물론 그 무슨 잘못에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었다. 고관만 해도 돈을 주고 산 물건이니 그림을 모르기로니 아이들 장난감을 하라고 주었을 리는 만무였다. 훈의 결벽을 알면서도 친구에 대한 호의로서 친구가 고관을 졸랐을지도 몰랐다. 졸리다 못하여 거지 돈 한푼 주듯 수표 한 장을 내던졌으니 그림을 돈 주고 샀다는 의식조차 없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이 어떤 경우든 훈의 자존심이 꺾이게 하는 데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훈이가 자기 예술에 대해서 자신을 잃은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그는 자기가 예술가라는데 일종의 증오까지를 느끼었던 것이다. 예술이 나의 생애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졌다면 나는 뭣때문에 살았고 또 살 것인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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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록에 그것은 허무한 일이었었다. 훈은 목을 놓고 울고 싶었다.
 
 
 

2. 2

 
26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 뭣때문에 살았던가 싶다. 앞으로 남은 그 생애는 단지 오분의 일이었다. 그 오분의 일이나마 뭣을 목표로 살아야 할지 모르는 오늘의 훈이었었다. 훈은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어느덧 테이블들은 꽉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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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훈 자기만이 초라해 보인다. 옷들도 쪽쪽 빼뜨렸다. 벌써 흰 파나마 모를 쓴 사람도 있었다. 손님의 팔구할이 마카오 양복이었다. 이 피난민의 옷이건만 훈이가 일찍이 단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감들이었다. 아니, 감히 입어보고 싶다는 엄두도 내어본 적이 없는 옷들이었다. 훈은 자기도 모르게 옷을 통한 자기의 일생을 회고해보는 것이었다. 일본 가서 공부한 동안에도 그는 고물상에서 고른 옷이었다. 새 양복도 몇 번은 입어보았지만 대부분이 월부였었다. 월부를 물 생각에 질려 옷감이고 빛깔이고 보다도 먼저 값에 정신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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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통해 본 그의 일생도 그림을 통해 본 그의 일생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옷뿐이 아니었다. 오십 평생 훈은 밥 한 끼를 사먹게 되었을 때도 영양과 맛을 본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영양보다도 양, 맛보다도 값에 먼저 신경을 썼었다. 여행을 갔을 때만 해도 그랬다. 정갈한 일류 여관에 깨끗한 침구 욕탕이 있고 어여쁜 계집들이 있는 그런 여관보다도 훈이가 머릿속에 그리는 여관이란 삼류 사류였다. 타고난 운명은 천격이면서도 몸만은 귀골이었다. 빈대가 단 한 마리만 있어도 꼬박 앉아서 새우는 훈이다. 그러면서도 되도록은 빈대 있는 여관을 골라온 훈이기도 했었다. 옷이 그랬고 여관이 그랬고 음식이 그랬다. 어느 모로 통해 보나 훈의 일생은 정말 구질구질한 것이었다.
 
29
훈은 여행을 즐긴 사람이다. 언제나 여유 있을 리 없지만 무슨 돈이든지 손에만 들어오면 먼저 여행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여행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언제나 손에 들어온 돈의 액수가 보유해왔었다. 쌀값과 아이들 학비만 떼어놓고는 액수에 따라서 경주고 의정부고를 결정하던 것이었다. 전혀 여유가 없을 때는 훈은 십전 한 닢만 넣고서 한강 건너 잠실로 향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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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향이라는 여성을 뒤늦게 알았을 뿐 그의 일생은 여성과도 인연이 없는 일생이었다. 오십 평생 여성한테 편지 한 장 써본 일도 없고 또 받아본 일도 없다. 사무적인 ─ 원고 청탁이나 여학교에서의 시간 교섭 같은 일 이외로는 여성을 만난 일도 없었다. 물론 찾아가 본 일도 없는 훈이었다. 이렇게 말한다면 현대 사람으로서 곧이들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사실 그대로다. 지금의 아내와는 벌써 이십 년이나 같이 살아오거니와 여자 일건으로서는 말다툼 한 번 한 일이 없는 터였다. 아내 진숙이와도 순전한 중매 결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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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훈이는 도학자가 아니다. 오는 기회를 피한 것도 아니었다. 온 기회를 물리친 것도 아니었다. 그 수많은 이 나라의 여성들은 급행차가 간이역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듯이 그의 앞을 휙 지나가고 말았었다. 모든 아름다운 여성은 개가 닭 쳐다보듯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멀리 여행을 할 때면 훈은 유달리 고독을 느끼었다. 애인이 아니라도 좋았었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좋았었다. 또 반드시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라도 좋았었다. 반드시 젊은 여성이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성이 지루한 기차나 배 여행에 말동무만 되어준다면 족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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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 한 번 ─ 거짓말처럼 단 한 번도 그런 인연조차 없었던 것이다.
 
33
훈은 긴 여행을 떠날 때마다 혹시나 하고 바랐었다. 혹시나 그 어떤 여성이 있어서 자기 옆에 자리를 잡아주지나 않나 실로 절실히 기대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할 만큼 섰으면서도 빈 자리에 앉지를 않던 것이니 그럴 때면 이쪽에서,
 
34
“자리가 비었으니 앉아 가시지요. 어디까지나 가십니까?”
 
35
이렇게 말을 거는 것이 예의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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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훈은 그런 용기 한 번 내어보지 못한 채 일생 동안의, 청춘의 전부를 포함한 오분지 사를 살아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다시는 되돌아와 볼 수 없는 그의 청춘의 전부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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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란 인생은 뭣때문에 살았던가? 민족을 위해서도 아니요, 생을 향락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호의호식은커녕 하룻밤의 여관비에도 지기를 펴지 못했었다. 친구와 함께 마음놓고 술 한잔 나눈 기억조차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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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허무한 일생이었다. 자기 아내 이외에는 손 한번 만져본 적이 없는 일생이기도 했었다. 연애는 아니더라도 그 많은 화류계 여성과도 입술 한번도 대어본 기억이 없는 자기의 일생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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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양화가 박훈한테 달갑게 쫓아다니는 향이랑 여성이 나타난 것이었다. 비록 나이는 이십 년이나 차이가 있는 딸자식 같은 여성이었을지라도 그의 인생이 뒤늦게나마 환해진 것은 실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향이와 만나 이야기하는 시간 이외의 그의 인생이란 오직 어두운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한 시간 가량씩 향이와 만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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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이를 만나서 향이와 헤어진 뒤의 일주일을 훈은 이 ‘청춘’이란 다방ㄱ자진 모서리 테이블에 마치 이 다방의 벽화인 양 앉아 있는 것이었다. 순간순간 창작욕이 머리에 떠오르는 일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훈은 그럴 때마다 고관집 아이들의 소꿉질 상이 된 「생」이란 그림을 생각함으로써 그의욕을 억제하는 훈이기도 했다.
 
41
“아니, 선생님은 정말 우리집 벽화셔!”
 
42
큰 마담이 이렇게 말한 데서 훈은 벽화가 되었었고, 훈도 또 이 벽화라는 별명에 그리 노엽지도 않았었다. 도리어 마담의 센스에 미소가 띠어졌던 것이다. 마담으로 보면 하루에 차 한 잔을 놓고 온종일 테이블 하나를 독차지하다시피 하고 있는 훈이기는 했지마는 훈을 아는 사람도 많았고 또 훈과 같은 예술가가 자기 다방을 사랑방처럼 써주는 데 일종의 호의도 느끼는 눈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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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만 걸려 있는 벽화라면 마담한테 폐가 안 될지 모르지만 온전히 한 자리를 독차지하는 벽화니 반가울 게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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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천만에요. 선생님 같으신 분은 와주시는 것만도 고마워요. 원래 다방의 유래가 문화인들을 위해서 생겼다는데 모리배나 탐관오리한테 독점되어버리는 데 반감이 가서 견딜 수가 없어요. 다방에선 소설이고 시고 그림이고 조각에 음악 ─ 이런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 할 텐데 맨 고기잡고 금광하고 무역하고 ─ 정말 우리 나라에선 텅스텐도 다방에 앉아서 캐고 고기도 여기서 잡지 않아요? 조금도 거북해하시지 마셔요.”
 
45
상해로 하르빈으로 십여 년을 돌아다녔다는 마담다운 이야기다. 속으로야 뭐라든 어쨌든 말만이라도 그렇게 하니 훈의 마음은 편했다. 이것저것 눈치도 못 채는 듯이 그리 벽화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3

 
47
훈은 오늘도 열한시에 청춘 바로 그 자리에 나와 앉았다. 금세 누가 앉았었던지 빈 찻잔이 그저 놓여져 있다.
 
48
“이 자린 선생님 벽화 선생 지정석인 줄 다 아는 모양이죠. 선생님이 들어오시기가 무섭게 손님이 일어나시구. 계집아이두 이 테이블에서는 손님이 일어나셔야만 찻잔도 치운답니다.”
 
49
마담이 웃는다. 잇속이 박속같이 희다. 입술에 칠을 않는 것도 소탈하지만 상해에서 굴렀다면서도 댄스홀이라면 외면을 하는 데도 친근미를 느끼게 한다. 나이 마흔을 셋이나 넘었다건만 덜 익은 복숭아처럼 솜털이 송송 난 것이 아직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다.
 
50
“선생님, 오늘 인생이 밝아지는 날이시군요? 그러시죠?”
 
51
“제잔데 뭘. 딸 ─ 아니 손녀 같은 나이구?”
 
52
“그래두 즐겁지 않으셔요? 그러시죠? 그 제자 이름이 뭐라셨지? 참 향이랬죠. 향, 꼭 중국 여자 이름 같아요. 상해에 정말 향이란 처녀가 있었어요. 양귀비처럼 예쁜 여자였어요. 대학생이었죠. 향이는 저두 잘 아는 대학교수하구 열렬한 연앨 했었어요. 그러다가 일본이 막 쳐들어오니까 향인 지원병으로 나가고 말았어요. 향이한테 감동이 되어 대학교수도 교수를 집어던지구 향이를 따라 지원병이 되었구요.”
 
53
한 달 내내 개가 닭 보듯 하는 마담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생각이 내키면 한두 시간씩 훈을 붙들고 조잘대는 마담이기도 했었다. 장마 제비처럼 조금도 힘이 안 들어 보이게 잘도 조잘거리는 여성이었다.
 
54
“저 봐, 또 시계만 보시지. 향이 올 때가 되잖았어요, 정말?”
 
55
향은 작년 예술대학을 나와서 미군 기관에 취직하고 있었다. 근래에 드물게 분도 잘 안 바르는 여성이었다. 아버지도 도학자처럼 완고한 학자다. 대개는 토요일 오후면 청춘으로 훈을 찾아와서 한두 시간 놀다 간다. 둘은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 향이가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침절에 청춘에 들리어 다섯시에 다시 올 테니 늦더라도 기다려달라는 전달을 마담한테 하고 갔다는 것이었다. 다섯시가 다 되어간다. 훈은 즐거운 정도가 아니다. 소년처럼 가슴이 뛰는 기쁨이었다. 향을 만나는 것은 역시 훈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 인생의 오분의 사를 살아온 전생애를 통해서 오직 유일한 환희였다. 오랫동안 집어던져둔 화필을 들고 싶은 충동을 받는 것도 향이를 위해서였다.
 
56
“전 싫어요 뭐!”
 
57
향은 곧잘 토라졌다. 소녀들이 빼쪽할 때처럼 왼쪽 볼따구니에 옴팡 우물이 되어진다.
 
58
“제작을 하셔야지. 날마다 벽화처럼 예 와서만 앉으셨구 뭐. 선생님, 아마 마담을 사랑하시나봐, 벽화가 여성을 즐기듯이. 그러시죠?”
 
59
시선 끝이 까우롱해진다. 여성들의 시샘을 할 때의 눈이었다. 훈은 향의 그런 눈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이었다.
 
60
“그러시죠?”
 
61
“벽화가 무슨…”
 
62
“호호호호.”
 
63
향은 간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벌써 한 달포 전이었다. 훈은 향의 제안으로 신선대로 드라이브를 한 일이 있었다. 차를 버리고 그들은 해변으로 나갔었다 집채만한 바위 . 밑에 자리를 잡고 멀리 바다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해군 쾌속정 한 척이 살처럼 달리고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시속 오십 마일의 PT란 배였다. 쾌속정은 하이얀 선을 바다에 그으며 지평선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그 쾌속정이 그어놓은 흰 선이 마치 꿈의 길처럼 느껴졌었다. 그때였다. 훈은 얼결에 키스를 도둑맞았던 것이었다.
 
64
“아이, 고와라!”
 
65
분명 향은 이런 말을 했었다. 그 말과 함께 향은 쪽 소리가 나게 그의 볼에 키스를 했던 것이다. 정말 전광석화적이었다. 훈은 얼마 후에야 키스를 당한 줄 알았었다. 그것을 깨달은 때는 향은 완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 있었다.
 
66
“꿈길이 저렇겠죠, 선생님?”
 
67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68
“찰박찰박 저 흰 물길을 타고 가면 용궁일 거야.”
 
69
오직 그뿐이었었다. 향은 옷의 티를 떼어주기나 했던 것처럼 그런 내색도 않았었다. 훈도 그랬었다.
 
70
‘귀여운 아이야.’
 
71
훈은 이렇게 생각한다. 귀여운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나이보다도 마음이 용납치 않았다.
 
72
그 향이었다.
 
73
‘오냐, 오늘은 향이를 기쁘게 해주지! 나도 그림을 그린다고!’
 
74
속이 울렁댔다. 역시 환희였다. 물을 켜다가 목이 칵 메이는 때와도 같다. 훈의 나이에는 벅찬 환희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것은 마치 늙은 말이 벅찬 짐 앞에서 질리는 것과도 같았다. 뽀도독 소리가 나도록 포동포동한 뺨과 주름살 잡힌 훈의 볼과의 차이일 것이었다. 훈은 향과 같이만 있으면 가슴이 빠근하니 아파지는 것이었다.
 
75
“향이두 결혼해야지?”
 
76
“결혼요? 선생님을 두구 결혼을 하면 선생님 우시게?”
 
77
이런 향이기도 했었다.
 
78
다섯시가 삼십분이나 지났다. 또 십분 또 삼십분이 지나서 시계 단침은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다. 또 반시간이 갔다. 그때서야 향이는 청춘에 들어왔었다.
 
79
“미안!”
 
80
향은 군대식으로 경례를 하고 납신 자리에 앉는다. 무섭게도 그 동작이 빨랐건만 잠자리처럼 잔존해 보인다. 아래위로 엷은 단색 초록으로 차렸다. 집에를 다녀 나온 모양이었다 . 오늘은 분기도 좀 짙다. 훈은 달포 전 신선대 일을 연상하며 발그레한 향의 도톰한 입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향은 오렌지 주스를 청했었다. 훈은 아직도 신선대의 꿈길을 더듬고 있었다. 이 한 달 동안 좀처럼 깨일 수 없는 꿈속이었다.
 
81
“향.”
 
82
“네?”
 
83
향은 밀짚으로 주스를 쪽 빨아마시고는 갸웃이 쳐다본다.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다는 듯싶은 미소가 약간 보이는 이틀 사이를 배앵배앵 돌고 있다. 역시 향은 ‘귀여운 아이다’ 했다.
 
84
“향, 우리 오늘 어디 바닷가에나 갈까? 송도라두?”
 
85
훈은 용기를 내었었다. 옆에 빈 자리가 있으면서도 서서 짤짤매는 여자한테 앉기를 청해볼 용기를 내어보지 못한 훈으로서는 위대한 발전이었었다. 인생의 오분의 사를 살아온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맨 처음으로, 그리고 오직 한번 낸 용기였었다.
 
86
“안 돼요, 오늘은.”
 
87
향은 새새거리듯 뱅긋이 웃는다. 그러더니 금세 웃음기를 싹 씻고서 또 한번,
 
88
“안 돼요!”
 
89
하는 것이다.
 
90
“오늘은요, 제 일생에 가장 중대한 일이 있는 날예요, 선생님. 그래, 벽화 선생님을 좀 모시구 갈려구 왔어요. 저 오늘 어쩌면 약혼을 할지도 몰라요. 선생님두 잘 안대요. 선생님 제자래요! 중학교 때 도화를 배웠다던가? 네, 가주시죠, 선생님? 아무두 없어요. 아버지하구 어머니, 그이, 그이 형님 되시는 국회의원, 저, 그리구 벽화 선생님뿐예요. 그 사람두 선생님을 십오 년 만에 뵙는다구 여간 기뻐하지 않아요. 일곱신데 일어나셔요?”
 
91
“나?”
 
92
훈은 벼락 키스를 당한 때보다도 더 어이가 없었다. 훈의 얼굴은 향이 앞에서 처음 일그러졌었다. 순간 훈은 십 년 하나는 더 늙어 보였다.
 
93
“나? 안 돼. 벽화가 벽에 걸려 있어야지 가긴 어딜 가.”
 
94
훈은 후렴도 없었다.
 
95
“어서 가보오, 향이나… 여기서 벽화 노릇 하는 것두 슬픈데 그런 자리까지 가서 벽화 노릇을 할까. 어서 가보라우. 어서 ─”
 
96
벽화 선생의 눈은 흐려져가고 있었다.
 
97
〈단편집 「벽화」, 1948년〉
【원문】벽화(壁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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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벽화(壁畵) [제목]
 
  이무영(李無影) [저자]
 
  1953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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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화(壁畵)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4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