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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生命)의 유희(遊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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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5.29
채만식
1
生命[생명]의 遊戲[유희]
 
2
늦은 봄 첫여름의 지리한 해가 오정이 훨씬 겹도록 K는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가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대신 아침에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어서 항용 아홉시나 열시 전에는 일어나지를 아니하지만, 그렇다고 오정이 넘도록 잠을 잔 적은 없었다. (하기야 그는 잠을 잔다는 것보다도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만 았았을 따름이다.)
 
3
보통때라도 누구나 오정이 지나도록 드러누웠으면 시장기가 들 터인데, 하물며 그 안날 아침부터 꼬박 내리 굶은 그가 일찌기 일어나서 밥을 먹을 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만일 집안에 돈이 되었든지 쌀이 되었든지 생겨서 밥을 지었으면 알뜰한 그의 어머니가 부랴부랴 나와서 일어나라고 재촉을 하였을 터인데, 도무지 그러한 소식도 없고, 안에서도 밥을 짓는 듯한 기척이 없어 고요하기 때문에 그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민두룸히 드러누워 있었다.
 
4
K는 지금까지 밥을 굶어본 적이 없다. 스물일곱이라는 반생 동안에 처음 배고픈 때를 당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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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창자 속을 할퀴어내는 것같이 시장기가 들었다. 먹은 것이라고는 그 안안날 저녁때 즉 마흔두 시간 전에 찬밥 한술밖에는 더 뱃속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는데, 무엇인지 목구멍에서 가끔가끔 꼬르륵 소리가 청승맞게 나고, 그럴 때마다 오목가슴 밑이 끊어지는 것같이 쓰리었다. 뱃가죽은 홀쪽하게 등으로 내려붙고 허리는 힘이 빠져서 허든허든하였다. 눈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움쑥 가라앉았다.
 
6
그는 주림의 고통이 가장 심한 맨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잠이라도 자서 배고픈 고통을 잊으려 하였으나 충분한 휴식을 하고 난 그의 머리는 다시 더 쉬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담배까지 피우고 싶었다. 자고 난 입맛이 텁텁한 판에 한 개─일상 많이 피워서 맛을 잘 아는 비둘기표 고놈 한 개를 붙여 물고 푹푹 피우고 싶은 생각이 배고픈 것이나 지지 않게 간절하였다. 그러나 담배란 담자도 있을 턱이 없고 재떨이에 있던 꼬투리도 그 안날 저녁까지 없어지고 말았다.
 
7
그는 어리석은 공상의 실마리를 좇아 호화로운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공상은 어디까지든지 공상일 뿐이라, 그 공상에서 깨고 나서 목전에 육박된 현실을 의식하면 입맛이 쓰고 몸이 뒤틀리게 짜증이 났다.
 
8
그는 자기 집안을 그 지경을 만들어놓은 자기의 맏형을 원망하였다. 좀 들이껴서는 그의 집안이 호화로운 부자는 못 되었지만 그래도 그다지 남이 부럽거나 남에게 아쉬운 청을 하지는 아니하였다.
 
9
그만한 살림살이를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K의 맏형은 담만 크고 규모가 없기 때문에 어장으로 광산으로 미두로 모조리 실패를 보고 필경은 모르핀 중독자로 이 세상의 폐인, 산송장이 되어 집안에 약간 남은 전답이며 무엇이며를 모조리 팔아먹고는 끝끝내 형무소의 신세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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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속으로 그의 맏형을 실컷 미워하고 실컷 원망하다가 문득 군산형무소로 그를 면회하러 갔던 일을 생각하였다. 생지옥, 염라대왕의 석상(石像) 같은 간수들의 얼굴, 사자울 같은 면회실, 원래가 평소 약질인데다가 아편을 갓 떼고 힘에 넘치는 일─평생 호밋자루 한번 잡아보지 못한 그가 격렬한 노동에 시달려 극도로 피폐한 기분이 완연한 그의 신체, 간절한 한회(恨悔).
 
11
“어머니 아버지께 근심 마시라고 여쭈어라” 하던 말…… K는 그때와 한가지로 다시 한번 애련의 정을, 피와 살을 나눈 동기 사이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순정의 비애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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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이번 기회에 그의 형이 아편을 영영 떼고 나오기를 바랐다. 아편만 아니면 원래 수단이 있고 머리가 명석하니까 다시 충분한 활동을 할 줄로 믿었다. K는 그의 형을 미워하고 원망한 것을 마음에 안되게 여겼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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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과거의 책임, 집안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책임은 설혹 형님에게 있다 할지라도 이 지경에서 집안을 구해내지 못하는 책임은 다른 형들과 한가지로 나에게 있다. 사람마다 제각기 부모에게서 유산을 물려받는다든가, 또는 속을 잘 차리는 형만 두라는 법은 없으니까 나는 애초부터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난 셈만 치고 적어도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하시는 늙으신 부모가 굶주리시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는데…… 젊은 내가 이렇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노인들이야 오죽하실까. 에잇, 내가 죽일 놈이다. 아! 주림, 배고픈 것. 배고픈 것이 극단에 이르면 죽지 않는가. 죽다니? 먹지 못해서 사람이 죽다니? 사람은 살 권리와 한가지로 먹을 권리까지도 타고나지 아니하였는가.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린 배를 훑어잡고 죽음을 기다리다니? 조선에서 해마다 몇백만 석의 쌀이 외국으로 나가지 아니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굶어서 죽다니? 지금 이 고을에도 부자놈의 창고 속에는 곡식이 늘비하게 썩어자빠져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우리는 굶어죽다니? 응? 누구의 잘못일까? 누구의 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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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이 되어서 이렇게 부르짖던 K는 그 의문의 해답이 머리에 떠오르자 그만 맥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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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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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남의 죄가 아니다. 우리는 피착취계급이 아니니까 생산 분배의 불공평 같은 것은 부르짖을 권리가 없다. 우리는 착취계급이었었다. 생산하지 않고 착취한 것을 소비만 하던 부르조아 계급이었었다. 시대의 자연적 경향을 따라서 멸망을 당하고 만 종류의 인간들이었었다. 그중에도 계급 멸망의 맨 선두에 나설 중산계급이었었다. 그러니까 누구를 붙잡고 원망도 할 수 없는 자연의 운명이다. 필연적 운명이다. 우리는 멸망하고 만다. 우리의 주림, 우리의 멸망에는 마르크스보이들도 동정을 아니한다. 도리어 자기네의 일이 덜어지니까 좋아한다. 조소한다. 아! 참담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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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마지막에 와서 자기도 모르게 비참한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부르짖는 소리는 다시 돌이켜서 그의 심경을 자극하였다. 그의 얼굴에는 비참한 빛 위에 반항의 기분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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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에 어그러지는 말이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본능적으로 먹으려 한다. 그 먹는 것을 위하여서는 자기의 전존재의 힘을 다하여 싸운다. 이 욕망과 이 힘은 인류의 어느 계급을 막론하고─ 부르조아가 되었거나 프롤레타리아가 되었거나 동일한 성질을 가진 공통의 욕망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네의 행동이나 그 욕망이 진리인 여부도 모르고 또한 반성하려고도 아니한다. 설사 반성을 한다 하더라도 알지도 못한다. 물론 이것이 모순이 아닌 것이 아니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이다. 배가 고프니까 먹는다는 데는 어떠한 진리, 어떠한 이론도 그것을 막아 굴복시킬 힘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비생산 계급이요, 전에 착취계급이었으니까 지금 와서는 굶어 죽어버려야 한다. 먹지 말자 하기에는 인류는 너무나 이기적이요 생에 대한 집착이 크다.
 
19
이렇게 K는 반항으로써 변명을 하고 나서는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독백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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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우리는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서 편하게 앉아 먹고 살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목전에 주림과 죽음이 육박하였으니까 그것을 면하고, 또 그 다음에는 그만한 안정이나마 연장을 하여 나가겠다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금 러시아로 가시더라도 젊은 노동자에게 지지 않도록 활동을 하신다. 실상 러시아에서 같으면 그이들은 당당한 국가의 부양을 받아야 할 것이다. 또 우리 집안의 여자, 즉 형수들도 집안 살림살이를 하여가는 노동능률로 보아 결코 비생산 계급은 아니다. 온전한 비생산 계급, 착취계급, 고등유민은 우리 다섯 형제뿐이다. 그런데 아무 죄도 없고 당당히 살 권리가 있는 그들이 우리와 운명을 같이하다니? 우리가 죄다. 내가 죄인이다. 나는, 난 골동품이다. 거만한 기생충이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가족적으로도 그렇다. 그들은 지금 나와 한가지로 아사(餓死)에 직면(直面)하고 있다. 안된다. 그들이 죽어서는 안된다. 나는 그들을 구해낼 의무가 있다. 꼭 구해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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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열에 뜬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넋이 나간 듯이 멍하고 앉았다가 풀없이 다시 드러누웠다. 그의 입엔 탄식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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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아무 힘도 없다. 아무 힘도 없다. 누구나 나를 두고 빚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 단돈 십원이라도 받고 월급장이 할 곳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 달 후가 아니면 내 수중에 돈이 들어오지 아니한다. 하루에 점심만 먹여 주고 십 원씩 주는 막벌이 노동은 나는 할 수가 없다. 그러면 무엇으로? 현재의 나에게는 한 가지 수단밖에는 없다. 도적질을 하는 수밖에는 없다. 도적질, 도적질, 내가 도적질을 해? 내가? 말만 해도 창피하다. 나는 차마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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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자포자기가 되어버린 듯이 마지막 말을 하고 까막까막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의 얼굴에는 냉소의 빛이 떠오르며 자신을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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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도둑질이 창피하다고? 프루동은 무어라고 했는데? 그래도 장발잔이 유리창을 부수고 빵 한 덩이를 훔치는 것을 보고 그때 감상이 어땠었노? 흥, 도둑질이 창피하다고, 차마 못한다고? 노동도 못하고 월급자리는 구했자 보나 안 보나 그저 두어 달 있다가 나와버릴 것이고, 도둑질은 창피해서 못하고…… 에잇, 못된 부르조아 근성. 망해가는 부르조아의 유물이라고 배나 드윽 갈라서 소금을 쟁여가지고 박제표본(剝製標本)이나 만들어서 박물관에다 진열해 둘 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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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진저리가 나도록 자기 자신이 한껏 미운 듯이 독살스럽게 비웃고는 싹 돌아누웠다. 흥분되었던 사이에 잠깐 잊었던 시장기는 다시 침노를 하였다. 온 전신이 노그라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먹고 싶은 생각이 그의 의식의 전부를 점령하였다.
 
26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하얀 쌀밥을 연한 상치에다 싸서 달콤한 고추장도 놓고 노릿한 마늘장도 쳐서 한 보퉁이씩 입에 밀어넣고 우물우물 씹어서 꿀떡꿀떡 삼켰으면, 그리고 목이 멜 테니까 흔한 갈칫국이나 미나리 잎새를 넣고 고추장을 듬뿍 넣어서 얼큰하게 끓인 국물을 떠먹어 가면서, 그 하얀 등성이살을 입에 넣고 가시만 옴쏙옴쏙 빼어놓으면서 실컷 좀 먹었으면 금시에 산을 불끈 집어들 기운이 날 듯하였다. 그의 양편 어금니에서는 신침이 괴어 꼴깍꼴깍 목으로 넘어갔다.
 
27
K는 무엇 잡힐 것이나 없나 하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머리맡 책상 위에 놓인 일원짜리 예약 전집 몇 권과 다리미와 휘발유의 힘으로 겨우 누더기를 면한 양복때기 한 벌이 걸려 있을 뿐, 그 밖에는 그나마도 값이 나감직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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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을 군산으로 가지고 가서 책은 헌책전에 팔고 양복은 잡힐까? 책은 한 권에 오십전 씩만 받아도 일곱 권이니까 삼 원 오십 전 하고, 양복은 잡히면…… 잡히면 삼 원? 그렇지 삼 원밖에 더 아니 주렷다. 육 원 오십 전, 육 원 오십 전이면 우리 식구가 닷새는 살아가렷다. 닷새, 닷새, 닷새 후에는 또 무엇을 먹나? 에잇, 그야말로 참 생불여사(生不如死)다. 이렇게 되고 보면 산다는 의의가 전혀 없어진다. 닷새를 더 살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앙바등이냐? 그러잖으면 목전의 주림만을 면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렇지만 위선 먹어놓고 보아야 할 일이니까 저것을 가지고 가서 팔고 잡히고 해야 할 텐데, 군산으로 가면? 가서는 발가벗고 양복을 벗어 잡히나? 조선옷이나 좀 있었으면 이런 때는 좋겠지. 책만 팔아? 아차, 군산까지 갈 찻삯이 있어야지. 이 지경을 하고 걸어가다가는 십리도 못가서 죽을 것이고. 아니 군산까지 갈 찻삯이 있으면 위선 그놈을 가지고 쌀을 팔아(買)다가 죽이라도 쑤어 먹겠다. 어떻게 하나.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에, 망했다. 내가 지금 자살을 하면 생활난으로 자살했다고 하렷다. 창피해라.”
 
 
29
K가 배고픈 것을 잊으려고 억지로 눈을 감고 누워서 엉겨붙는 파리떼와 싸우면서 이몽가몽하다가 다시 잠이 깨기는 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때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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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여덟 시간, 꼬박 이틀 동안을 굶은 그는 주린 고통의 절정이 거의 넘어가고 신경이 마비가 되었는지 찌르는 듯한 시장기는 없으나 그대신 정신이 어리어리하였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우세두세하고 가끔가다가 소댕 여닫는 소리며 그릇 마주치는 소리는 틀림없이 밥 짓는다는 소식이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수건을 집어들고 방문을 열었다. 정신이 좀 휘지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먹겠다는 욕망에 힘을 얻어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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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식구들은 모조리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죽, 아욱죽 한 그릇씩을 차지하고 앉아서 훅훅 불어가며 생청보다도 맛있게 숟갈질을 하고 있었었다. K어머니는 K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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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깨우러 가렸더니 일어났구나. 어서 세수하고 오니라. 오직이나 시장히였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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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숨을 쉬었다. K는 우물가로 가서 세수를 하고 안마루로 가서 앉았다. 그의 앞에도 소담한 죽대접이 올라앉은 상이 놓여졌다. 죽이라서 먹기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좀 섭섭한 것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죽을 먹다 말고 그의 상머리로 와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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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먹어라, 어서. 오직이나 시장히였겄냐? 꼿창(고추장) 풀어서 먹어라. 먹구 더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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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고추장을 떠 죽에 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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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어디서 났어요?”
 
37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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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뿌라나물 팔았단다.”
 
39
“할아버지 산소 앞엣 거요?”
 
40
“그렇단다. 늬(너의) 아버지가 그새 그렇게 돈이 아쉬워두 그것만은 안 팔구, 재미루 두구 보시더니 헐 수 없이 팔았단다.”
 
41
K의 어머니는 방금 울음이 터질 듯하였다. K는 자세한 이야기를 더 물어보기가 안되어서 그만두려고 하다가 그래도 궁금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42
“다섯 그룰 다 팔았었요?”
 
43
“그렇단다.”
 
44
“얼마 받구요?”
 
45
“십 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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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그는 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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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원이요? 도둑놈들 같으니, 아름으로도 한 아름씩이 넘는 그 나무를 한 그루에 이 원씩이라니요? 어떤 놈이 사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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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사는 최가가 사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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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다 찾구요?”
 
50
“웬걸이야. 우선 일 원 오십 전만 주고 남저지는 내일 저녁때 가져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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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일 원 오십 전으로 쌀을 팔었구먼요?”
 
52
“쌀 한 말 팔었다. 한 말 팔어서 닷 되는 작은 집(K의 둘째형의 집)에 보내구 닷 되는 우리가 먹구……”
 
53
“아버지 진지는?”
 
54
“작은집에서 갖다 드리라구 히였다. 너두 있구 히여서 밥을 헐라구 히였더니 내일 저녁까지 먹기가 모자라게 생겨서 우리는 죽을 쑤어 먹구 작은집은 식구가 적으닝께 세 끼니 밥을 히여서 먹을 만허길레 그렇게 허라구 히였다.”
 
55
K는 죽 한 숟갈을 떠서 먹어보았다. 오래 시장하였던 끝이라 맛이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마흔여덟 시간 만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도시 맛을 분별할 여부도 없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죽을 먹었다. K는 한참 동안 말없이 먹다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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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언제 베어간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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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저녁때 돈 남제기(나머지) 갖구 와서 베어 간단다. 늬 아버지는 뽀뿌라나무 밑에 앉아 울으시더라.”
 
58
이 말을 듣는 K는 그렇지 아니하여도 마음이 걸려서 조마조마하여 물은 것인데, 그 말을 듣자 대번에 목이 콱 메이는 듯하였다. 그의 눈앞에는 자식을 잘못 둔 탓으로 말년에 모진 고생을 하는 노인─그 선산 앞에 유일한 기념으로 남겨둔 나무를 팔고 안타까와서 그 나무 밑에 가 앉아 우는 여윈 노인─그 아버지의 환영이 석연히 떠올랐다.
 
59
“기름 다한 등잔에서 꺼져가는 불 같은, 이 하루하루 쇠진하여 가시는 아버지. 앞으로 몇해를 더 살아 계시지 못할 아버지신데……”
 
60
K는 속으로 탄식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체홉의 「벚꽃동산」을 상상하였다. K가 죽 한 대접을 다 먹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주발에 담은 죽 한 그릇을 더 가지고 와서 더 먹으라고 권하였다.
 
61
“더 먹어라. 이틀이나 굶어서 오직이나 시장히였겄냐. 이따가 시장허잖게 나수 먹어라…… 늬덜을 이날 이때까지 배는 안 곯리고 키워오다가 이 지경을 당허닝게 눈이 캄캄하다.”
 
62
K는 먹은 한 그릇도 과한 셈인데 더 먹을 수가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에 몇 숟갈을 더 덜어서 놓았다.
 
63
“어머니. 육신이 멀쩡한 자식들이 부모를 공양해야 옳소? 아모 짝에도 쓸데없는 자식들이 굶는다고 부모가 고생고생하시면서 먹여 살려야 옳소?”
 
64
“그래두 부모 된 맘은 그렇냐?”
 
65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를 너무 귀여하시기만 하셨지 못된 버릇을 잡어주시잖기 때문에 오늘날 모두 이 지경이 된 것을 지금도 모르시우? 자식이 다섯이나 된다는 것이 모두 잡아두 못 먹을 감이 아니어요?”
 
66
“암만 그리두 부모 된 맘은 그렇잖니라.”
 
67
“그렇잖기는 무엇이 그렇잖어요? 한 집안에 아편쟁이가 둘씩이나 되고, 그란하면 번들번들 놀면서 부모 고생이나 되시게 허구…… 그런 자식들을 나 같으면 돌아다도 안 보겠읍니다.”
 
68
“그럴래서야 부모 자식 새에 좋달 것이 무엇 있겄냐. 좋아도 자식 나저도 자식, 잘나도 자식 못나도 자식…… 자식한테 가는 정은 일반이지…… 자식이 잘 벌어다가 호강스럽게 먹여살린다구 더 사랑허구 불효헌다구 미워허구, 날노릇(돈벌이) 못 헌다구 안 돌아본대서야 그게 어디 부모냐. 너는 아직 모른다. 너두 남의 부모가 되어 보아야사 그런 것 저런 것을 알지. 인제 두구 보아라만 자식이 잘못될수록 애처럽구 불쌍한 맘은 더하느니라.”
 
69
K의 어머니의 하는 말은 조금도 가식과 과장이 없이 마치 물이 얕은 곳을 따라 저절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그 자애로운 품은 예수가 창생에게 대한 그것이나 질 바가 없이 깊었다. K는 다른 때와 한가지로 불평을 겉으로 내어뿜기는 하나 역시 마음으로는 고개를 숙이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말을 잠깐 그치고 담배를─담배가 아니라 뽕잎사귀 말린 것을 담뱃대에다 넣어가지고 불을 붙여 서서히 빨면서 말을 이었다.
 
70
“그러닝게 너나 어서 속을 채려서 돈을 벌어갖구 잘 살어라. 이렇게 굶주리구 고생허던 일을 일러가면서 잘 살어라. 그러면 늬 아버지하구 나하구 찾아가마. 늬 아버지나 내나 인제 살면 십 년인들 더 살 것이냐만, 그래두 막내둥이가 벌어다 주는 것을 단 하루 이틀이라두 편허게 앉아 먹다가 죽으믄 다시 원이 없겠다.”
 
71
K는 방금 눈물이 터져나올 듯하였다. 그는 조금 남은 죽을 얼른 긁어먹고 일어서서 문밖 길거리로 나갔다. 오래 주린 끝에 배불리 먹은 터라 뱃속이 거북하고 기운이 착 가라앉아서 움직일 힘이 나지를 아니하였으나 그는 누워 있기가 싫어서 억지로 밖으로 나간 것이다.
 
72
K는 단지 일념이 어떻게 무슨 짓을 하여서라도, 설사 자기 앞길의 전부를 희생하여서라도 그의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 있을 동안만 편안하게 봉양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하여도 묘연하였다. 그는 어느 편으로든지 극단으로만 나아가면 그 만만한 방법이야 없지가 아니할 터인데, 그 극단을 향하여 나아갈 용기가 없고 안전한 중용의 길만 취하려고 애쓰는 자기가 저주스러웠다.
 
 
73
배가 부른 뒤에는 자연의 아름다움도 눈에 띄었다. K는 집앞 들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는 거의 석양이 가까왔다. 봄내 두고 물이 실렸던 무논에는 노란 물빤드기꽃이 아담하게 피어 가는 봄을 마지막 장식하였다. 먼 봇논에서 석양 햇빛을 받아 일어나는 게으른 반사는 저물어가는 하루해의 쇠잔한 힘을 도우려는 듯이 한심스러웠다. 한창 우거져가는 짙은 숲에 싸인 골 안에서는 곳곳에서 저녁 연기가 솟아올라왔다. 밭마다 가득가득 들어선 보리목은 노르스름하게 익어서 보릿고개를 바라보고 후유후유 올라오던 사람들에게 안심의 신호를 보이는 듯하였다. 남산은 푸르렀다. 산속에서 우는 짤막한 뻐국새 소리도 푸르게 들렸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흰 그림자는 아직도 그치지 아니하였다. 풀언덕에 매인 하얀 염소만이 해가 저문 것이 걱정스러운 듯이 매매하고 울었다. 논 귀퉁이를 조금씩 차지한 못자리판도 파란 우단을 펼쳐놓은 것같이 귀인성있게 자라났다. 모든 것은 질탕한 환락의 봄꿈에서 깨어 줄기차고 무게있는 활동을 하는 기분이 완연히 떠돌았다.
 
74
K의 머리속에는 가지각색의 명상이 두서를 차릴 수 없이 샘물 솟듯 솟아올랐다. 그는 기울어지는 해를 바라보고 탄식을 하였다.
 
75
“서산낙일, 서산에 지는 해 하루를 두고 정해진 운명.”
 
76
마침 멀리서 기적 소리가 한 마디 웡하고 우렁차게 들렸다. K는 기차를 연상하고 서울을 연상하고 그리고 서울, 과거의 서울생활이 모두 연연하게 그리운 자태로(지나간 그때 당시에는 싫던 것까지라도) 눈앞으로 어릿어릿 지나갔다.
 
77
“D와 B, 정다운 친구, 너무나 오랫동안 서로 무신하게 지내왔다. 그리고 R…… R……”
 
78
K는 불현듯이 서울이 가고 싶었다. 가고 싶은데 갈 수 없음을 생각할 때에 더욱 가고 싶었다. 그는 발길을 돌이켰다. 자기 집이 눈에 보이매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생각에 마치 못 먹을 것을 먹은 것처럼 마음이 꺼림칙하고 두서없는 계책이 시끌덤벙하게 머리속으로 드나들었다. 그는 자문자답을 하였다.
 
79
“나는 대관절 무엇일고?”
 
80
“배고픈 신사, 양반거지, 거만된 기생충, 양서류(兩棲類)의 냉혈동물.”
 
81
“옳다, 그렇다. 모두가 사실이다. 나는 현대생활에 적응성이 없다. 사회도태 원칙으로 나 같은 인간은 멸망할 운명을 타고났다. 나는 생물계에 있어서 군더더기이다. 필요가 없는 존재이다. 그뿐 아니라 내 스스로도 명색 없고 긴장미가 없는 이 생활에는 염증이 난다. 가버려야 한다. 그곳으로 가버려야 한다. 전에 무심코 세워둔 계획이 지금 와서는 대단히 필요하게 쓰인다. 어머니 아버지께는 안된 일이지마는 뭐 어쩔 수 있나. 그리고 형님들이 아무리 무엇하기로니 내가 간절히 부탁을 하면 그래도 마음이 움직여서 지금처럼 어머니 아버지가 고생을 하시도록은 않겠지. 더구나 큰형님이 이번에 감옥에서 나와서 다시는 아편을 하시지 않고 집안일을 보살피면…… 그러면 이제는 나는 자유다. 아무 미련도 없다. 유희가 남았을 뿐이다. 아무데도 쓰잘데없는 이 생명을 가지고 한번 불이 번쩍 나게 통쾌한 유희를 하여 본다. 붉은 피가 뎅겅뎅겅 듣는 유희다. 유희다, 생명의 유희다.”
 
82
K는 살기를 머금은 미소를 띠고 입을 악물었다. 그의 얼굴은 참담하기는 하나 일종의 가벼운 빛이 번쩍였다.
 
 
83
석 달이 지난 뒤에 K에게서 그의 집으로 한 장의 편지가 왔다. 어디라고 주소는 쓰지 아니하였고, 다만 간도(間島) 어느 우편국의 일부인이 찍혀 있었다. 편지는 그의 어머니에게로 “끝으로 자식 하나를 아니둔 세음만 잡고 헛되이 기다리지 말면 불효의 죄는 지하에 가서 갚겠다”는 것과 또 한 장은 그의 맏형에게로(형무소에서 일 개월로 역형을 마치고 출옥하여 집에 있었다) “마음 고쳐 먹고 자기를 대신하여서라도 부모를 잘 봉양하여 달라”는 사연 밖에는 더 아무 말도 쓰이지 아니하였다.
【원문】생명(生命)의 유희(遊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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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유희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1928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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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4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