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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색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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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0
백신애
1
채색교
 
2
무지개 섰네, 다리놨네.
3
일곱 가지 채색으로
4
저 공중에 높이 놨네
 
5
뒤뜰에서 어린 학도들이 무지개가 선 공중을 바라보며 놀고 있다.
 
6
천돌이(千乭伊)는 무거움 짐을 문턱에 내려놓고
 
7
“제-길, 그놈의 하늘.”
 
8
하고 동편 하늘 높이 무지개가 놓인 것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혀를 찼다.
 
9
“그 놈의 비가 오려거든 솰솰 와 버리든지, 오기 싫거든 그만 쨍쨍 가물어 버리든지.”
 
10
하며 부엌에서 늙은 어머니가 튀어나오며 무지개가 선 하늘을 역시 원망하는 것이었다.
 
11
“벌써 두 상이나 터지게 되니 어디 살 수 있겠소.”
 
12
천돌이는 콧구멍 만한 방에다 짐 뭉치를 끌고 들어갔다.
 
13
“제-길, 꼭 장날만 골라서 비가 온단 말이야.”
 
14
그는 속이 상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푹- 한숨을 내쉬며 짐 뭉치는 방 한 옆에 밀어 놓고 자기는 방 한가운데 큰 대자로 펼치고 누웠다.
 
15
“점심은 언제 먹었노.”
 
16
하며 늙은이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17
“여태껏 점심도 못 먹었을라구!”
 
18
천돌이는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19
“글쎄, 갑자기 또 비가 오니까 장도 채 못 보았을까 해서 죽이라도 쑤었지.”
 
20
어머니는 연해 부드러운 말로 아들의 마음을 위로하듯 하며 바가지로 덕덕 소리를 내며 죽을 퍼 담았다.
 
21
“흥, 사시로 죽만 먹고 산담, 어떤 연놈은 쌀밥도 먹기 싫다고 지랄을 하는데…….”
 
22
천돌이는 연해 짜증난 소리로 중얼거리면 못 이긴 채 푸시시-일어나 앉으며
 
23
“무슨 죽이요?”
 
24
하고 부엌으로 통한 지겟문을 향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25
“무슨 죽이야, 보리죽이지.”
 
26
어머니는 벌써 방 안에다 죽 그릇을 들여 놓으며 아들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말소리에 비해서 별로 성이 나지는 않았는 것 같으므로 적이 안심하는 얼굴로 아들의 죽 그릇에 숟가락을 걸쳐 주었다.
 
27
“어서 좀 먹어봐, 점심을 먹었더라도 벌써 배가 고플 테니.”
 
28
“어디 좀 먹어 볼까.”
 
29
죽 그릇을 잡아당겨 훌쩍 훌쩍 금시에 없애 버렸다. 손등을 입을 씩 씻고,
 
30
“히 참, 어머니.”
 
31
“뭐야, 왜?”
 
32
부뚜막에 걸터앉아서 땀을 졸졸 흘리며 죽을 퍼먹는 늙은이는 아들을 쳐다보았다.
 
33
“글쎄!”
 
34
입으로는 짜증을 내면서 무슨 본 일이 있는지 싱긋싱긋하는 아들이 이상하여 재처 기색을 살피었다.
 
35
“글쎄, 뭐야.”
 
36
“어머니 솜씨는 이뿐이요?”
 
37
“자식도, 못났다. 늙은 어미 솜씨를 물어서 다시 시집을 보낼텐가 버릇없이.”
 
38
“그런게 아니야.”
 
39
“그러면 보리하고, 물, 소금만 넣어서 끓인 죽에 무슨 별맛이 날 줄 아니.
 
40
어떤 사람은 보리죽에도 꿀맛이 나게 한다드냐.”
 
41
늙은이는 일부러 샐쭉하여 보이며 비꼬아댔다. 천돌이는 대답 대신 “히힝-.”
 
42
하고 열적은 웃음을 웃으며, 눈앞에다 복순의 통통한 얼굴을 그려보는 것이었다.
 
43
“그렇게 더운 방에만 앉아 있지 말고, 뜰에 좀 나오려무나.”
 
44
하는 어머니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나아 밖으로 슬그머니 나와 앉았다. 비에 젖은 뜰은 얼마만치 시원하였다. 동편 하늘에는 아까의 그 찬탄하는 무지개는 사라지고 새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 뭉치만 뭉게뭉게 떠오르고 있었다.
 
45
“글쎄, 엄마!”
 
46
“허, 얘가 미쳤나 보구나.”
 
47
늙은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땀에 젖은 적삼을 벗어 방에 던지고 양 팔뚝에 새카맣게 밀린 때를 치마로 닦으며 뜰에 나와 앉았다.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48
“가만히 보니까 요즈음 네 태도가 야릇하더구나. 맛 없는 어미 손에 얻어먹기 싫거든 어디 가서 솜씨꾼 색시나 주워오지.”
 
49
천돌이는 매미 소리에 기울이고 있던 귀가 번쩍 틔어
 
50
“누가 장가들고 싶어 하는 줄 아오?”
 
51
하고 가슴이 뜨끔하면서도 시치미를 떼어 보았다.
 
52
“글쎄, 장가들 나이도 되기는 했지. 그리고 또 나도 나이가 먹어가니까 남의 집의 일도 예전같이 해 줄 수 없고 하니, 너만 장가를 보내면 나야 무슨 장사라도 할 터이다.”
 
53
“무슨 장사를 해요?”
 
54
“떡도 만들어 팔고, 콩나물도 놓아 팔고, 풀도 끓여 팔고, 밑천 안드는 장사가 수두룩하지. 그래도 혼자 손에 지금이야 할 수 있나. 부지런한 계집애나 며느리를 보면 웁쌀꺼리는 버리겠지. 남의 집에 늙은 것이 일해주러 다니는 이보다는 나으리라.”
 
55
“그렇기는 하지. 어디 그렇게 얌전한 계집애가 있어야지.”
 
56
천돌이는 자기의 속판을 어머니가 벌써 알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여 일부러 시치미를 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불쌍하게 커온 복순이의 얌전한 얼굴을 생각할 때 두 가슴이 터질 것 같이 기뻤었다. 뒤뜰에서 뛰며 놀고 있는 동리 어린 학도들과 같이 펄쩍펄쩍 뛰어 보고 싶기까지 하였다. 그는 천연하게 앉아 베길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 비에 젖은 밀짚모자를 장대 끝에 꿰여 첨하에 기대 세웠다.
 
57
“엄마 일 년만 꼭 참으시오. 이 집은 팔아 버리고 버린 돈을 보태여 집이나 한 칸 삽시다.”
 
58
늙은이는
 
59
“행여나 저 자식이 못난 계집애에게 반하지나 않았나!”
 
60
하는 의아한 생각을 어떻게 따져 볼 수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말귀를 돌리고 마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고 잇따라 큰아들이 죽고, 또 잇따라 딸들을 시집보내고 막내 아들 천돌이와 단 둘이서 허물어진 움막 단칸 집에서 근근히 살아왔다. 자기는 남의 집에 드나들이 일도 해주고 천돌이는 여남은 살 때부터 석양 상자를 메고 장날이면 팔러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이나마 남 먹을 때 빠지지 않고 끼니를 이어 온 것이었다.
 
61
“에 다황, 마치 석양에 석양 샀소, 다황 맛치석양.”
 
62
하고 온 장판에다 애교를 펼치며 얼마씩이라도 벌어들이기 시작한지도 벌써 근 십 년이나 되는 것이었다. 천돌이는 금년에 스물한 살이었다. 그는 작년부터 촌장에 잘 팔린 잡화를 그 동안 모은 돈을 밑천으로 제법 한 짐 장만하게 되었다. 그것을 걸머지고 가까운 이웃 장으로 몰아 다니며 파는 돌림장꾼이 되었다. 그러므로 근 십 년동안이나 이곳저곳 장터에다 밥줄을 달고 있는 천돌이였고, 누구에게든지 친절하고, 서글서글 말잘하고, 붙임성 있고, 잘 웃기고 하는 까닭에 장터마다 단골도 많고, 같은 돌림장꾼들 사이에서도 신용이 두터웠다. 그뿐 아니라 이웃장을 보려고 오고 가는 길에는 천돌이가 빠지면 섭섭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었다.
 
63
“똑똑한 놈이야, 늙은이한테 볼거요.”
 
64
하고 동리 사람들까지 천돌이의 어머니를 보고 칭찬하는 것이었다.
 
65
“천돌이 요사이 소고기 값이 왜 그렇게 비싼가?”
 
66
하고 장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장꾼이 말끝을 내는 것이었다.
 
67
“허 참, 그것도 모르오? 소 값이 오르니까 소고기 값도 오르는 게지.”
 
68
“소 값은 왜 오르나?”
 
69
“아따 그 양반, 그것도 몰라?”
 
70
“그래 모르는데.”
 
71
“그러면 나도 모르지!”
 
72
그들은 일제히 웃는 것이었다.
 
73
“그렇지만, 금년은 너무 가물어서 어디 살 수 있겠나. 못자리가 모두 갈러져서.”
 
74
하고 생강 장사 박첨지가 또 말끝을 찾아내었다.
 
75
“영감, 염려 마오, 비에 못 견딜 날도 멀지 않았소.”
 
76
“어째서 그러냐?”
 
77
“허 참, 왜 초여름에 벼룩이 무척 많지 않았소.”
 
78
“그래 벼룩이 비온다든가?”
 
79
“모두들 헛나이를 먹었나보우.”
 
80
“그래 어떤 해 여름은 벼룩이 없었나?”
 
81
“글쎄 다른 해보다 유별나게 많더란 말이야, 그러니까 물것이 많으면 비가 많이 온단 말이지.”
 
82
“그 또 참, 자식 웃기는구나. 벼룩이 많으면 비가 많이 온다?”
 
83
“그럼, 오구말구, 비가 많이 오면 당신네 딸을 날 주겠소? 내기 할까?”
 
84
그러면 다른 장꾼들도 못내 웃는 것이었다. 박첨지도 지지 않고,
 
85
“그래, 내기 하자꾸나. 비만 오면 딸뿐이겠나. 내 목이라도 바치지…….”
 
86
하고 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아무 의미없는 그저 씨물거리기 위하여 떠들며 주고 받는 농담만 하는 천돌이였으나 이 생강 장사 박첨지를 보고 하는 말에는 아무도 어떻게 해석 못 할 무엇을 통담에 싸가지고 씻둑 서 보는 것이었다. 박첨지 역시 요즈음 짐작하는 바가 있는 터이라 천돌이의 이런 농담을 다른 사람같이 웃고 흘려버리지는 않았다.
 
87
지난번 어느 날이다. 그 날은 산 넘어 매동골 장을 보고 돌아온 이튿날인데, 그 장에 웬일인지 박첨지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천돌이는 오래 맘 먹어오던 무엇이 있는 까닭에, 어디로 볼일 보러 가는 척하고 물 건너 박첨지 집을 찾아갔다. 천돌이의 사는 동리 앞으로 흐르는 큰 냇물 나리를 건너면 얼마 안 가서 박첨지의 움막이 있다. 그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냇가에 내려가 다시 얼굴을 씻고 밀짚모자를 멋있게 재껴 썼다.
 
88
“그 놈의 첨지가 그만 밤사이 죽어 버렸으면.”
 
89
하고 행여나 첨지에게 자기의 속이 내다보일까 겁을 내었다. 그래도 내친 걸음이라 다시 돌릴 수 없이 그대로 담장도 없는 벌판의 외딴집 즉 박첨지의 집 앞에 당도했다. 금방 앞으로 쓰러질 것 같은 그의 집 방문은 열어 재낀 채 인적이 없었다.
 
90
“영감, 집에 있소?”
 
91
하고 소리를 쳐 보았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열린 방문 앞까지 다가가서
 
92
“영감, 왜 어제 장에 안 왔던가요.”
 
93
하고 소리를 크게 질러보았다. 그제야 방 한 옆에서 숨박꼭질이나 하는것 같이 박첨지의 딸 복순이가 고개만 쑥 내밀었다.
 
94
“어디 가고 없는데!”
 
95
복순이는 자라목같이 다시 쑥 들어가며 생긋 웃었다. 천돌이는 그제야 기운이 났다.
 
96
“히힝, 첨지가 어디 가고 없단 말이지. 안성맞춤이로구나. 그 놈의 계집애 누구를 죽이려고 웃기는 또…… 어디보자, 오늘은 천하 없어도 기어이 한번 따져 보리라.”
 
97
하는 건질건질한 생각이 나며, 조금 머뭇거려지는 다리에 힘을 주어 문 턱에 가 척 걸터 앉았다.
 
98
“어디 갔나?”
 
99
“몰라”
 
100
복순이는 싹 돌아 앉았다. 떨어진 것을 집어 모으는지 바느질 그릇을 앞에 놓고 만지막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가난한 그 살림 속에서라도 계집애답게 비록 낡은 무명이나마 살구꽃색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숱 많고 긴 머리를 되는 대로 충충 땋아 늘이고 돌아 앉았는 것이었다. 천돌이는 기다리고 별러 오던 이 좋은 기회 웬일인지 말문이 닫히고 평소같이 술술 말문이 터지지 않았다. 공연히 가슴만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101
“그래 왜 어제 장에 안 왔어?”
 
102
겨우 또 한마디 붙여 보았다.
 
103
“에익, 사나이 자식이 못나게.”
 
104
그는 아래윗니를 한번 꽉 물어 기운을 내어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105
이러다가 만일 첨지 부부가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몹시 가슴이 갑갑하였다.
 
106
“조 놈의 계집애…….”
 
107
역시 가슴 속만 후다닥거리고 온 몸뚱이는 문턱에 천근만근 들어 붙여 버렸다.
 
108
“얘야, 이리 좀 보렴. 대답 좀 해라.”
 
109
“무슨 대답?”
 
110
복순이의 말소리가 우레 소리같이 고막을 울려 그는 다시 말문이 턱 막혔다.
 
111
“얘, 날 좀 보렴. 네게 할 말이 있다.”
 
112
“…….”
 
113
“날 좀 보렴.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죽어도 꼭 너에게장가를 들 터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마음속에 먹고 왔다.”
 
114
“…….”
 
115
천돌이는 말문이 확 터진것 같았다. 그래서 재차 복순이의 곁으로 궁둥이를 들어 놓으며
 
116
“너는 내가 보기 싫으냐?”
 
117
“얘야, 대답 좀 하렴. 싫다면 그만이지. 너의 아버지나 엄마가 오면 어찌하겠느냐.”
 
118
“아직 오지 않는데…….”
 
119
복순이의 말소리는 의외로 똘똘하였다.
 
120
“그래 그러면 됐구나. 날 좀 보렴.”
 
121
천돌이의 가슴은 금방 터질 것 같았다.
 
122
“얘 대답 좀 하렴. 사람 죽겠구나. 난 여기서 죽어 버릴테야…….”
 
123
“…….”
 
124
“그러면 너두 내가 좋으냐?”
 
125
천돌이는 날쌘 사자와 같이 달려가 복순의 허리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그 후부터 오늘까지 거의 밤마다 서로 만나는 것이었다. 속히 돈냥이나 벌면 잔치를 할 작정인데. 양편 부모에게 어떻게 해서 허락을 얻나 하는 것이 만날 때마다 의논하는 산더미같이 큰 문제이었다. 그러다가 요즈음 와서는 원래가 꼼꼼스럽지 않는 성질인 천돌이였으므로 박첨지와 농담을 할 때마다 갑갑한 자기의 심정을 슬쩍 내어 보이는 것이었다.
 
126
“그러면 영감 딸 날 주려오?”
 
127
하고 말끝을 맺게 된 것도 요사이는 거의 천돌이의 의례히 하는 문자가 되고 만 것이다. 박첨지도 자기 처지에 천돌이만한 사위도 구하기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가난한 살림, 더구나 담장조차 없는 길가 움막에다 다 큰딸을 두기도 걱정인 터인고로 혼자 내렴에 가을쯤 해서 사위를 삼아보리라고 생각하여 왔다. 이 해는 오월 초생부터 유월달이 거벅거벅 닥쳐오는데도, 한 방울 빗발도 내리지 않았으므로 못자리는 말라 터지고 사람들은 찌는 듯한 더위에 허덕이면서도 기우제를 지낸다, 상굿을 한다, 모두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더니 유월도 초생이 거의 지내려 할 때 오고가는 빗줄기가 가끔 조금씩 오기는 하는데, 하필 장날만 골라서 오게 되므로 벌써 두 장이나 보지 못한 천돌이는 몹시 짜증이 났다. 어서 돈냥이나 모아서 장가를 들려는 비상시인데 속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8
“엄마, 목욕하고 올게요.”
 
129
하고 천돌이는 집을 나섰다. 냇가에서 박첨지의 소똥뭉치만 한 움막을 바라보며 어둡기를 기다려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실금실금 다리를 건너 복순이와 만날 장소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다리를 건너다가 천돌이는 움짓 발을 멈추었다.
 
130
“휴!”
 
131
그는 코웃음을 치며 돌아서서 지금 건너온 다리를 다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아주 신기하다는 듯이 어깨를 움찔하고는 빨리 다시 가려던 길을 걸어갔다.
 
132
“무지개 났네. 다리놨네.”
 
133
그는 입속에서 낮에 듣던 학도들의 노래를 되씹어 보았다. 어느 사이에 냇물의 상류에 있는 포풀라 숲에 당도하였다. 복순이는 어느 사이에 왔는지 벌써 포풀라 둥치에 기대서서 머리꽁지를 야금야금 씹고 있었다.
 
134
“얘, 이심이 무섭지 않더냐.”
 
135
천돌이는 달려가 복순의 허리를 한 옆에 끼고 토실토실한 복순의 뺨을 꼭 물어주었다.
 
136
“무섭기는 무엇이!”
 
137
그들은 나란히 주저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포풀라 잎사귀를 딸랑딸랑 흔들어 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포풀라 숲 근방은 땅버들이 우묵하니 서 있어 낮에 보아도 움숙하여 사람들의 발자취가 드문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근방에 ‘이심이’라는 큰 물뱀이 있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동리 사람들은 이 근방을 무척 주의하고 오는 터이었으나, 천돌이와 복순이에게는‘에덴’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138
“복순아, 내 말 들어봐라.”
 
139
“그래─.”
 
140
“너도 칠월 칠석 이야기 아냐?”
 
141
“알고 말고. 견우 직녀 만나는 밤이지.”
 
142
“옳지, 그런데 얘야, 지금 내가 다리를 건너오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데, 우리가 꼭 견우와 직녀 같단 말야.”
 
143
천돌이는 웃지도 않고 복순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144
“글쎄, 보려무나. 저기 저것이 은하수지? 그리고 은하수 동편에 셋이 있는 별, 그것이 바로 직녀별이야. 그리고 이편에 있는 솟발 모양으로 된별. 그것이 바로 나란 말이야.”
 
145
“응? 그 별이 네 별인가.”
 
146
“너도 좀 생각을 해보렴. 그 별이야 견우성이지마는, 나와 마찬가지란 말이야.”
 
147
“그러면 저 직녀별은 나란 말이지.”
 
148
“그래. 우리는 은하수 대신 이 냇물이 사이에 있단 말이야.”
 
149
“다리 건너며 그것 생각했나?”
 
150
“그래 말이다. 견우 직녀 만날때는 오작교를 타고 건넌다든가. 그러니까 나는 오작교보다 좋은 일곱 가지색 무지개를 타고 너에게 장가들 터이다.”
 
151
“해행─.”
 
152
복순이는 좋아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천돌이의 다리를 꼭 꼬집었다. 둘은 이같이 어린애 모양으로 꿈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헤어질 때 복순이는 무척 쓸쓸한 얼굴이었으므로
 
153
“너 왜 그러니? 집에 가면 꾸중을 들을까 겁이 나나?”
 
154
“으응.”
 
155
“그러면 왜 내일은 자현골 장이니까 만나지 못하더래도 모레 저녁에는 또 만날 걸.”
 
156
“그렇더라도.”
 
157
“그러지 말어, 이번 장만 보고나면 인제는 너의 아버지께 막 들이댈 터이다. 칠석이 오기 전에 잔치를 하게 될 터인데 그래…….”
 
158
“어쩐지 오늘은 집에 가기 싫어. 여기서 죽고 싶어.”
 
159
“그러지 말아. 그러면 내일 장에서 혼수감으로 저고리 치마감을 모두 바꾸겠다. 하루라도 속히 주선할테니 응.”
 
160
웬일인지 그 날 밤은 복순이가 몹시 돌아가기를 싫어했다. 전에는 천돌이가 도로 복순이를 놓치기를 싫어했었는데 오늘 밤 복순의 태도를 보고 천돌이는 한층 더 가슴에 불이 붙었다. 그 이튿날 새벽에 천돌이는 동편 하늘에 몹시 험악한 구름이 덮여 그쪽은 비가 오고 있는 것 같았으나 짐을 지고 기운 좋게 집을 떠났다. 자현골 장터까지 삼십 리나 되는 까닭에 이렇게 일찍 나선 것이었다. 천돌이가 장판에서 늘 자기가 짐을 벌여 놓은 장소에다 짐을 내렸을 때는 벌써 이른 장꾼이 달 밝은 밤벌같이 이곳저곳 흥성드뭇하게 나타났을 때였다. 오랜 가뭄이라 장판의 재미가 별로 없었으나 천돌이는 자기 장사는 뒤로 보내고 복순에게 줄 혼수감 장만하느라 분주했다. 세 끼 점심때쯤 해야 장이 한창 어울리게 되자 빗방울이 뚝뚝 듣기 시작하여 비바람이 몰아 때렸다.
 
161
“아이고, 비님이 오신다. 인제는 좀 흐북이 와주어야 될 덴테…….”
 
162
장꾼들은 모두 하나 둘 헤어지기 시작하였다. 천돌이는 비록 인조견이나마 저고리 세 감, 치마 두 감, 광목 스무 자, 동양저 한필을 혼수턱으로 비에 젖지 않도록 꼭꼭 싸가지고 짐 뭉치를 한데 싸 지고 집으로 향하였다. 중로에서 몹시 비가 오므로 주막에 들려 쉬엄쉬엄 집까지 왔을 때는 거의 황혼이었다. 그는 비에 젖은 짐 뭉치를 풀어 제치고 비에 젖은 것을 골라 말리며 혼수감은 어머니를 보이지 않으려고 그대로 묶어두었다. 그럭저럭 밤이 되므로 천돌이는 비만 오지 않으면 복순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몹시 피곤한 까닭에 그대로 뒹굴어 잠이 들었다. 꿈결에 몸시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도 눈이 떨어지지 않아서 산란한 꿈자리를 흘처 깨지 못했었다. 꿈에 그는 복순이와 잔치를 하고 무척 기뻐하면서도 복순이의 얼굴이 몹시 못나게 보여서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할 즈음에 그는 눈에 떠졌다. 잠이 있는 꿈이 깨인 것인지 몹시 서운하여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계속하려고 돌처 누웠다.
 
163
“어 애야, 잠은 그만 자고 밖에 나가 보아라. 아마 큰물이 졌나보다.”
 
164
하고 늙은이가 일어나 앉았다. 과연 그의 귀에는 요란한 빗소리에 섞여 경종소리가 울려오는 것이 들렸다. 그는 부리나케 일어났다. 금방 차디찬 독사가 가삼우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이 불길한 예감이 몸서리가 날 만치 번쩍하였다.
 
165
“만일에…….”
 
166
그는 밑도끝도없는 외마디 고함을 치고 우장도 쓰지 않고 냇가를 향하여 달음박질쳤다. 거리에는 도랑물이 넘쳐 덮혔고 사람들이 길가에 아우성을 치고 오락가락을 하는 것이 남의 눈으로 보는 것 같이 무감각하게 비칠 뿐이었다. 어느 사이에 새었는지 날은 벌써 새벽이었다. 그는 바른 길로 냇가에 다달았다.
 
167
“아하─.”
 
168
그의 두 눈은 깜깜하여지며 정신이 싸늘하여 몸이 꼼짝하지 않았다. 모두가 물 천지, 시뻘건 바다로 변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물이었다. 오작교 대신이라던 그 냇물 다리,‘이심이’가 있는 포풀라 숲. 그리고 소똥만 하던 복순의 집. 모두가 한 낯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들리는 뭇 악마의 신음소리같이 벌건 물은
 
169
“웅.”
 
170
하는 소리를 내며 굽이쳐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171
“저 건너 있는 생강 장수 박첨지 어찌 됐소.”
 
172
천돌이는 누구라 지정 없이 소리를 쳤다.
 
173
‘참 그래. 박첨지 식구는 어찌됐나…….”
 
174
물구경하는 사람, 천지를 물에 덮히고 두발을 구르는사람. 모두가 박첨지 소식에는 까막이었다.
 
175
“아마 물에 떠내려갔지…….”
 
176
하는 말소리를 듣자 천돌의 두 눈은 새빨간 불이 켜졌다. 그는 냇가 아래위로 복순의 그림자를 찾으려고 헤매었다. 그러나 아무데도 보이지도 않고, 그들의 존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177
“행여나 저 물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은가.”
 
178
하는 안타까운 생각에 그는 순사 한 사람의 앞에 달려갔다.
 
179
“나으리 소방서에 있는 보트 하나 빌려줍소.”
 
180
“뭣하려나?”
 
181
“저 건너 가보겠어요.”
 
182
“왜? 물귀신이 청해드리나. 죽고 싶으면 혼자 뛰어들지 구태여 소방서
 
183
보트와 정사를 하려구.”
 
184
하며 비웃었다. 천돌이의 가슴은 절망에 어두운 회오리바람이 우루룩 일어났다. 그는 풍덩 물을 향하여 뛰어 들려고 몇 번이나 빠질 뻔하였다.
 
185
비가 점점 그치자 때는 늦은 아침때가 지났다. 그러나 그가 찾던 그림자는 종시 보이지 않았다.
 
186
이번 홍수는 하나 천돌이뿐 아니라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가뭄 끝이라 여간 비가 와서는 좀처럼 큰물이 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보다도 오랜만에 오는 비라 모두들 기뻐 밤늦게까지 놀다가 첫잠이 든 사이에 냇물 상류에서 내린 비가 불과 삼사 시간에 막았던 물이 터지는 것 같이 갑자기 그렇게 큰물이 올 줄은 모르고 막 잠이 든 사이에 귀신도 모르게 물귀신이 되고 만 것이었다. 천돌이는 혼 빠진 사람 같이 물 저편을 바라보며 질벅거리는 언덕에 주저앉았다. 그때 그의 머리에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187
“참 그래, 이런 멍청이.”
 
188
그는 혼자 꽉 소리를 치고, 침에 찔리운 사람같이 자기 집을 향하여 달음박질하였다. 그는 복순이와 잔치를 하던 꿈을 꾼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지금 이렇게 큰물이 지고 자기가 복순이를 찾아 헤매는 것은 아무래도 꿈이다. 복순이는 우리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는 착각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그는 집을 향하여 달음박질 치면서 이제까지 자기가 안타깝게 헤맨 것이 우습기도 한 것 같고 원망스럽기도 한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가슴속 한편은 몹시 얻어맞은 벙어리 속 같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뭉텅이가 얼얼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무지개. 복순이에게 장가들 때 타고 가려는 일곱 가지색 무지개 그 찬란한 다리를 하룻밤 사이에 내린 몹쓸 비까지 휩쓸어 영원히 흘러가버리고 만 것을 깨닫기는 얼마 후이었다.
【원문】채색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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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신애(白信愛)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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