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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독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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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7
백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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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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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이름은 모두 돈들뺑이라고 이른다. 신작로에서 바라보면 넓은 들 가운데 백여 호 되는 초가집이 따닥따닥 들러붙어 있는데 특별히 눈에 뜨이는 것은 마을 앞에 있는 샘터에 구부러지고 비꼬아져서 제법 멋들어지게 서있는 향나무 몇 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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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신작로길로 나오려면 이 멋들어진 향나무가 서 있는 샘터를 왼 편으로 끼고 돌아 나오게 되는데 요즘은 일기가 제법 따뜻해진 봄철이라 향나무 잎사귀들이 유달리 푸른빛이 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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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이 샘이 아니면 먹을 물이라고는 한 모금 솟아나는 집이 없으므로 언제나 이 샘터에는 사람이 빈틈이 없고 더구나 요즈음은 경루보다 더 옥신각신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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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샘터에 나오는 사람은 거의 모두 여인들인데 요즈음같이 따뜻한 봄철에는 붉고, 푸르고 노란 색저고리를 입은 각시 처녀 어린 계집아이들이 훨씬 늘어가는 듯하다. 겨울 추울 때 같으면 물이나 길어 재빠르게들 돌아갈 것을 요즈음은 공연스리 해해해 쫑알거리느라고 샘터 어귀를 시끄럽게 하여 검 푸른 향나무 가지 사이로 온갖 색저고리 빛을 어른거리게 하여 길가는 짓궂은 남정네들의 춘흥을 자아내주는 풍경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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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도 기나긴 하루 해 동안 무색 저고리가 끊일 사이 없더니 이 제 햇발이 서쪽 산 저편 땅바닥까지 쑥 넘어가 떨어진 지도 한 담배 참이나 되자 겨우 샘터는 말갛게 보여 졌다. 그래서 온종일 시달리던 샘터가 이제부터는 내일 새벽까지 숨을 내쉬리, 라고 생각되었더니 어디서 총총 발걸음 소리가 나며'퐁’하고 두레박을 샘 속에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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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은 내쉬든 숨을 놀란 듯 채 걷기도 전에 두레박을 따라 조그마한 물동이 속으로 주루룩 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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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퐁’하는 소리가 샘 속에 울리며 연해 주루룩 주루룩 물동이는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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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 아이구나. 가뜩하네. 혼자 일 수 있을까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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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혼자 종알거리며 분홍 저고리 입은 어린 색시는 물동이와 씨름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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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참 간심을 주다가 물동이를 들어 샘터에 올려놓고 납작 몸을 굽히고 앉아 또아리 얹은 머리를 샘턱 아래 밀어 넣으며 두 손으로 물동이를 머리 위로 옮기려고 조심조심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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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구 한번만 길고 말까 했더니 또 한번 더 길어야겠구나." 라고 뾰루퉁한 소리로 종알거리며 다시 일어서 동이의 물을 절반이나 주루룩 부어버린 후 이제는 쉽사리 건 듯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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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젠장 또 너무 부어버렸구나." 하고 그는 다시 물동이를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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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 하고 또 한 두레박 길어서 동이에 부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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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 이번은 좀 많지나 않을까." 하고 동이를 들어 가까스로 머리에 얹어놓자 머리 위에 놓였던 또아리가 뒤로 슬쩍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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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참 원수다. 도둑년의 또아리." 하고 아주 골이 난 듯 혀를 쪽쪽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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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물 길러오지도 않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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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속이 상해 못 견디겠다는 듯 다시 동이를 내려놓으려 하자 동이는 건뜻 하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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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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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겁을 하며 동이 꼭지를 꼭 잡고 하늘로 올라가는 동이를 따라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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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까짓 이지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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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다란 사나이의 음성이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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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놀래라. 누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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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동이 꼭지를 놓고 한걸음 물러서며 그렇게 쉽사리 물동이를 머리 위로 건뜻 집어얹고 서 있는 사나이를 놀란 듯 바라보며 떨어진 또아리를 주워 머리 위에 놓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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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이여 주세요." 하며 몸을 다시 앞으로 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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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글쎄 이까짓 걸 혼자 못 여서 깽깽거려? 저 ─ 리 물러나. 내 하나 가득 길어다 갖다 줄께." 하며 사나이는 동이를 내려놓고 가득 물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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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난 싫어요. 내가 이고 갈 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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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동이를 잡아당기듯 하며 자기 힘에 알맞은 만치 찔끔 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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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 왜 쏟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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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는 와락 동이를 빼앗아 제 뒤로 옮기고 동이를 잡으려는 색시의 두 팔을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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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죽이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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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는 어느 결에 색시의 어깨를 그 넓고 굳센 가슴 안에 파묻고 말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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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아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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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기를 쓰며 두 팔을 뻗대고 두 발을 동동거리며 발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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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어, 너 때문에 나 죽는 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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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 사나이는 한 손으로 색시의 어깨를 휩싸 안고 한 손은 색시의 온몸을 남김없이 정복하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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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엄마! 엄마야 도둑놈 아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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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숨이 막힐 듯 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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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지 마라. 오늘밤에야 설마…… 나는 네가 이렇게 좋은데 너는 왜 몰라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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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는 색시를 건뜻 안아다가 향나무 아래 놓인 커다란 바위에다 걸쳐 누이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미친 듯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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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이 열다섯이나 먹었으니 인제는 내 속도 알아주어야지. 그까짓 네 서방 놈이야 내가 단 주먹에 때려 죽여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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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는 연방 색시의 귀에다 가뿐 입김으로 속삭였으나 색시는 두 손과 발로 죽을 힘을 다하여 되는대로 꼬집고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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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익 물은 반동이도 못 이면서 나를 꼬집을 때는……." 하고 후 ─ 한숨을 내쉬고 일어서며 색시를 꼭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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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들어라. 내가 잘못했다. 네가 하도 내 간장을 녹이기만 하니 나는 참을 수가 없어 이렇게 너를 괴롭게 한 것이 아니냐……." 하는 사나이의 음성은 떨리며 색시를 잡은 손은 축 늘어뜨리며 간장이 녹는듯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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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당신 맘은 다 ─ 알지마는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해요. 그런 말은 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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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싹 돌아서며 물동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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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봐. 내 말 조금 들어. 글쎄 나는 아무래도 죽겠다. 꼭한번 만 내 말을 들어 주어도 내가 이 지경은 아니 될 것이 아니냐. 너도 보듯이 이렇게 내가 속을 태우다가는 아무래도 죽지 살지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내 맘대로 너를 실컷 어떻게라도 하고나면 모르겠다마는 네가 마음 좋게 내 맘과 맞아서 그런다면야 꼭 한 시간만이라도 맘이 풀리겠다마는 네가 자꾸 이렇게 내 말을 안 들으니 아무래도 나는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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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는 바위 위에 힘없이 걸터 앉으며 색시를 무리로 잡으려고 하지 않고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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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나도 당신이 싫어서 그러나요. 당신이 좋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나는 시집온 사람인데 어떻게 당신 말을 듣나요. 우리 집에서 알아보세요. 당장에 나 죽고 당신 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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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울 듯 사나이에게 반항한 것도 자기는 남편이 있는 까닭이라고 변명하 듯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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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말이야. 너의 집에서 그렇게 쉬이 너를 시집보낼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니. 나는 네가 열대여섯 되면…… 하고 침을 찍어놓고 있었더니 열네 살 먹은 너를 부랴부랴 최가 놈에게 치워버릴 줄 꿈엔들 생각했겠니. 나도 너를 잊어버리고 장가나 갔으면 좋겠지만 어디 밤낮 눈으로 내 눈을 보고있으니 다른데 장가 들 생각이 나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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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는 고개를 내려뜨리고 한숨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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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다른데 장가드세요. 나 때문에 당신이 죽게 된다면 나는 내가 먼저 죽어버릴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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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도 치맛자락으로 눈을 씻으며 음성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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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너 우는군나. 울지 마라. 내 간장이 더 녹는다. 공연히 내가 그랬지…… 나도 오죽해서 무작스럽게 달려 들었겠니. 참 잘못했다. 요즈음은 왜 그런지 자꾸만 너를 꽉 껴안고 맘대로 실컷 막 부비여주고만 싶구나. 그래서 이제도 무작스럽게 대들었지…… 용서해라.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 러마. 나는 이대로 돌아가면 네가 최서방하고 이 밤에 한 방에서 안고 누워잘 것을 생각하면 밤새도록 한잠을 못 자고 울기도 하고 화가 나서 궁글 기도 한단다.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을 들려 꼭 한번만 내 마음을 풀어다구 ─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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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는 색시에게로 가까이 가서 그 수그린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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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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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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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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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는 참지 못하여 색시를 다시금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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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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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색시는 고개를 들었다. 사나이는 색시는 놓고 물동이를 건뜻 들고 앞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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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집 앞까지 들어다 줄게……." 하며 걷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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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한 손에 두레박 한 손에 또아리를 들고 사나이의 뒤를 따라 샘터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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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끓는 사랑의 한 막 비극이 멋들어진 향나무 선 샘터 풍경 속에 새겨 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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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이러 가서 웬걸 그리 오래 있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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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가 사나이에게 물동이를 받아오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남편 최 서방은 꼬든 새끼를 밀쳐놓으며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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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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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잠자코 부엌으로 들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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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좀 내려주소." 하고 방을 향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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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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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은 얼른 일어나서 와 동이를 받아내려 부뚜막 위에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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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 하구나. 어두운데 웬 물을 이렇게 많이 였어?" 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색시는 덩달아 따라 들어가 콩낱만 한 등잔불이 꺼질까 살며시 윗목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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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은 일찍 해야 되니 그만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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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은 슬그머니 아랫목에 가 비스듬히 누웠다. 색시는 꼬든 새끼를 뭉쳐 놓은 후 빗자루로 방 안을 대강 쓸어 놓고 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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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끌까요." 하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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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끄고 자지." 하며 싱긋이 웃는다. 색시는 불을 끄려고 입술을 오므렸다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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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바느질할 게 있는데……." 하며 벌떡 일어섰다. 색시는 남편의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얼마나 자기의 고통이 됨을 잘 아는 까닭에 일부러 불을 끄지 않으려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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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은 무슨 오라질 바느질이야. 다 ─ 그만두고 일찍 자지." 하며 허리를 숙이어 '훅’ 하고 불을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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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고 앉았소. 어서 와서 자지는 않고. 어서 이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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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은 팔을 휘휘 내저어 어둠 속에서 색시의 치맛자락을 잡아 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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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지난해 봄 지금으로부터 꼭 일 년 전인 삼월 달에 열네 살의 어린나이로 시집을 왔다. 키가 유달리 숙성하여 나이는 열네 살이라도 그리 꼬마 색시로는 보이지 않으나 그래도 분홍 인조견 저고리에 검정을 드린 당목 치마를 입은 허리는 한 줌이나 되어 보이며 두 귓볼이 상큼한 맛이 말할 수 없이 어려 보였다. 그는 최서방에게 시집오던 날부터 무섭고 괴롭고 하여울며 이를 갈면서도 시집오면 으레이 그런 것으로만 알고 조금도 반항 하지 않고 꼬박꼬박 아내 노릇을 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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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살인 최서방의 무시무시한 성욕을 반항 없이 받아오는 색시의 가슴속은 최서방이 무섭고 다 ─ 만 키 크다고 시집보내준 그의 부모가 원망 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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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남편이 무섭다는 말은 그의 부모에게라도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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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서워?" 하고 물으면 그 이유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서방에게도 그 무섭고 슬픈 뜻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당장 쫓아 보내든지 때리든지 할까봐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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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색시는 혼자 속으로 꼬게꼬게 앓으며 입술만 깨물어 왔으므로 나이는 한 살 더 먹어도 몸과 얼굴은 점점 골아지듯 말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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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 가지 색시가 골아지듯 말라 들어가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김갑 술이란 총각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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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갑술이 총각은 색시의 친정인 옥천동에 사는 사람이었다. 색시와 앞뒤 집에서 자랐으며 그가 커서 남의 집에 머슴살이로 돌아다니면서도 이 색시에게는 마음을 두고 왔었다. 색시 나이가 열대여섯 되면 그 동안 돈을 알뜰이 모아서 장가를 들려니…… 하고 바랬던 것이 그가 석골이란 동리서 머슴살이하고 있는 동안에 색시는 시집을 가고 말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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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이 총각은 기가 막혀 얼마 동안은 바람이 들어 살던 머슴살이도 집어던지고 핑글핑글 놀다가 나중에는 그의 홀어머니를 데리고 색시를 그려 이돈들 빵이로 이사를 와서 그 동안 모았던 돈으로 말 한필과 구루마를 사서 품삯 짐을 어서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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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벌써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니 장가도 들어야 할 것이고 또 말 구 루마를 부리게 되니 돈벌이도 상당하니 아무래도 장가를 들 때가 꼭 되었는데 그는 색시만 그리워하였다. 최서방이 낮에 일하러 나가면 색시를 찾아와서 멀끔히 바라보다간 눈물이 글썽글썽하여가지고는 핑 달아나고 하니 색시 역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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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남편에게 시달릴 때마다 갑술이를 눈앞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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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오던 전 해인 여름에 어느 밤 색시는 뜰 한 옆에 있는 샘가에서 동생들과 발가벗고 목욕을 감는데 갑술이가 쭉 들어오다가 싱긋 웃고 돌아서 나가던 일이 생각나며 그때 최서방이면 반드시 자기를 안아다가 못살게 굴었 을 것이려니…… 갑술이는 점잖고 그런 몹쓸 짓은 하지 않으려니…… 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봄철이 되면 산에 가서 참꽃을 꺾어 다 나눠주며 단오날마다 뒷산에 그네도 매여 주던 것도 갑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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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색시는 시집올 때는 갑술이 생각을 할 줄 몰랐다. 시집온 후 어느 날 혼자서 바느질한다고 앉아 있는데 갑술이가 쭉 들어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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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줄 몰랐다. 나는 죽겠다." 하며 한숨 쉬고 눈물 짓고 하다가 돌아간 그 후부터 갑술이 생각이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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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갑술이의 정열은 점점 조르어 붙이듯 뜨겁게 불태우고 최 서방의 요구에 대하여서는 반비례로 점점 더 싫은 정이 더 하여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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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이 날 밤 갑자기 갑술의 폭발된 열정에 휩싸여 정신을 잃을 번 까지 한 뒤에 최서방의 억센 요구에 색시는 참다못하여 눈물이 좌르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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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최서방에게 안기어 잘 것을 생각하며 나는 이 밤을 자지도 못 하고울며 궁글며 한단다.’ 하던 갑술이 말이 생각나며 비로소 처음으로 최서방에게서 몸을 빼내며 반항하 듯 허리에 감긴 커다란 손을 잡아떼듯 휙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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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것이 왜 이래." 최서방은 징그러운 웃음을 씩 웃으며 색시의 조그마한 몸뚱이를 내려 누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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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일찍 최서방은 일터로 나갔다. 그는 제 이름으로 논이 닷 마지기나 있고 밭도 열두어 마지기나 있어 농사만 짓더라도 단 두 내외의 생활이야 넉넉하겠지마는 그래도 농사에 틈이 있는 대로 날품팔이라도 하여 잠시도 놀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착실하다는 칭찬을 받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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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남편이 일터로 나가자 얼마만치 마음이 거뜬하여진 듯하며 갑술이가 오면 실컷 울고 싶기도 하고 일변은 갑술이가 와서 또 못 살게 괴로워하는 모양을 보이기만 하면 차마 어찌 보리요 하고도 생각되어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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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열다섯 살 밖에 되지 않는 소녀인 색시로서는 견디어내고 판단 해내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어려운 사랑의 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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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침 뒤치움이 끝나자 방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홀짝홀짝 울기만 하였다. 울다가 들으니 삽짝문밖에 엿장수 가위 소리가 책각책각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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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느 때부터 엿 사먹으려고 주워두었던 헌 생철물통이 생각나서 두 눈을 얼른 이리저리 닦으며 뛰어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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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 장수!" 하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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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 이 이 집이요? 색시 엿 사시오. 많이 주지요. 깨어진 그릇이나 헌 누더기나 무엇이든지 가지고 오소." 하고 엿장수는 혼자 지껄대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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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줄게. 엿 많이 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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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조금 전까지 울던 일은 깜박 잊어버리고 헤헤 웃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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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 ─ 생철통이로구나. 어디 엿 많이 드리지 ─." 하고 엿장수는 엿을 다섯 가락 종이에 싸 주었다. 색시는 한 가락 입에 넣어 딱 부질러 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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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보소 엿장수. 저 ─ 사마귀 빼는 약 있소?" 하고 물었다.
110
"네 ─ 있고말고. 구리무 분, 비누, 온갖 것 다 ─ 있소다."
111
"아 ─ 니 사마귀 빼는 약 정말 있어요?"
112
"있다니까. 이거 아니요 이거 ─."
113
엿장수는 샛노란 물이 든 병을 치켜 들었다. 색시는 웅크리고 앉으며 그 병을 들여다 보았다.
114
"병 한 개 가져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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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는 색시가 그 사마귀 빼는 약을 사기로 작정이 된 것 같이 말 하였다.
116
"빈 병이 있어야지…… 그 병에 든 약도 얼마 되지 않는데 그 병째 모두 팔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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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 이거 아주 비싼 약인데…… 이것만해두 모두…… 보자, 병 값 이삼 전이고 약값이 오십 전이라…… 그렇지만 오십 전만 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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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전? 아이구 비싸라! 사마귀가 꼭 빠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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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꼭 빠지구 말구."
120
"옛수! 오십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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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치마끈에 매어두었던 오십 전 짜리를 풀어 엿장수를 주고 그 약 병을 받아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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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팔과 발과 목과 가슴에 걸쳐 무사마귀가 많이 나있으므로 그것을 빼 없이하려는 것이었다. 그 어느 때 보니까 이러한 사마귀 빼는 약은 아주 꼭 사마귀 위에다 조금만 찍어 발라 두던 생각하고 성냥 알맹이로 약물을 적시어 우선 발에 난 사마귀에다 조금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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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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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깜짝 놀라 성냥 알맹이를 동댕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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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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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갑술이가 방 안으로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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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 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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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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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나는 밤새도록 잠 한숨 못 자고 너 까닭에 이 모양인데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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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이는 말과는 딴판으로 얼굴은 조금도 색시를 원망하는 빛이 없었다.
131
"나는 뭐…… 잘 잔 줄 아나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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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도 입이 뾰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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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 너도 내 생각 좀 해야지…… 또 사마귀는 빼서 무엇에 쓰려노, 이보다 더 예뻐지면 또 누구를 죽이려고."
134
갑술이는 문턱에 걸터앉으며 약병을 들고 보았다.
135
"그 약 참 몹시도 독해요. 여기 조금 찍어 발랐더니 불이 펄쩍나게 따가웠어요."
136
색시는 발등을 치마로 덮으며 아직 따갑다는 듯이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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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 그약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한 모금만 마시면 당장에 죽는 무서운 약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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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이는 약병을 한 옆에 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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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그러면 비 ─ 상인가?"
140
"비 ─ 상? 그래 ""나는 사마귀 빼는 약이라고……."
141
"조금씩 찍어 바르기만 해도 사마귀가 빠지니까. 제법 한 모금 마시기 만하면 목이 송두리째 빠져 버리지……."
142
"아이구머니 목이 빠지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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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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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죽을까……."
145
"암…… 죽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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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그러면 어디 감춰 버려야지! 행여 누가 잘못 알고 마시면 큰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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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벌떡 일어나 병을 들고 밖으로 나와 툇마루 밑에 꿍쳐 박아둔 새끼 뭉치 옆에 끼워 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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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좀 봐! 내 말 들어. 너의 남편만 죽고 없으면 나하고 살지? 너도 최 서방보다 나를 더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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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갑술이가 색시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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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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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무서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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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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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니요. 날 보구 그런 말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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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온몸이 떨렸다. 자기가 아무리 갑술이를 좋아한다고 하나 이미 최 서방의 아내가 되었으니 이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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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이는 색시의 이밖에 더 다른 생각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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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어느 날 늦은 아침때가 되어 들로 나물 캐러 나갔다. 최서방은 오늘은 일자리도 없고 하여 집에서 가마니칠 새끼를 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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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줄 모르는 갑술이는 이 날도 색시를 보러 이 집에 쑥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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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 갑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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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은 반갑지 않게 인사를 하였다. 이미 두세 번이나 갑술이가 일 없이 자기 집에 놀러 온 것을 보고 아는 터이라 속으로 짐작이 되는 바가 없지 않았던 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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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 오늘은 일터로 안 가시오? 새끼는 꼬아 무엇에 쓰려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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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의 대답은 어색한 빛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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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좀 앉아서 내 말 좀 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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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은 새끼 꼬던 손을 멈추고 담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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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가요……." 하고 대답하는 갑술의 가슴은 뭉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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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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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의 입술도 떨렸다. 갑술이는 이미 최서방의 속판을 알아차리며 이제까지 참고 견뎌오던 증오감이 불쑥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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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먹을 단단히 쥐어보다가 말고 방 한 옆에 있는 목침을 노려보다가 문득 그 어느 날 색시가 툇마루 밑에 숨겨두던 초산병(硝酸)이 언뜻 머리에 떠오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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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가요. 천천히 합시다. 내 술 한 잔 받아올 터이니 한 잔 잡숫고 말씀하서요." 하고 신을 고쳐 신는 척 하고 마루 밑에 들어박힌 초산병을 얼른 빼고 밖으로 휭 나갔다.
169
그는 바른길로 술집에 가서 술 한 되를 받아 술집 주전자에게까지 도로 넣어 가지고 최서방의 집 문앞에서 술은 거의 다 부어버리고 한 잔 만치 남겨가지고 약병을 거꾸로 들고 부어 넣었다.
170
술주전자를 들고 들어간 갑술이는 부엌에 가서 조그마한 양재기 대접한 개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171
"술은 받아와도 나는 먹지 않겠다. 내 말이나 들어라."
172
최서방도 이제는 갑술이의 모양이 수상하여 아주 도사리고 앉았다.
173
"아 ─ 니 그러지말고 한 잔 마시고 말하서요. 내가 모두 잘못했으니 그만 다 ─ 무시하고 속을 푸서요. 무엇 그러실 것은 있는가요. 나도 내일부터는 멀리 만주나 대판으로 갈 작정이니 그러지 마소." 하고 주전자에 술을 따라서 최서방 앞에 내밀었다.
174
최서방도 그렇게 안먹겠다고 뻗쳐대기에는 너무나 술에 대한 욕심이 많은 터이라 못 이긴 체 받아들고 한 입에 쭉 들어 삼키다가 조금 남았을 때 술잔을 척 띠며
175
"이 술맛이…… "하고 갑술이를 바라보았다.
176
"아 ─ 니 그 술이 어떠한가요?"
177
갑술이는 일어섰다.
178
"아이구! 이것 술이, 술이 아니다. 이 놈이 날 죽이는구나."
179
최서방은 두 손으로 목을 쥐여 뜯었다.
180
"이 놈의 새끼……."
181
갑술이는 왈칵 최서방에게 달려들어 방바닥에 넘어뜨린 후 두 손으로 목을 힘껏 눌렀다.
 
182
들에서 돌아온 색시는 그대로 부엌에 들어가 점심상을 차려가지고
183
"점심 먹겠어요." 하고 소리쳐 보았으나 대답이 없으므로 그는 혼자 부엌에서 점심을 먹은 후 물동이와 이제 캐 가지고 온 나물 소쿠리를 끼고 샘터로 나갔다.
184
나가다 사립거리에서 갑술이를 만났다.
185
"오늘은 집에 있는데……."
186
색시는 갑술이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187
"……."
188
갑술이는 두 눈이 새빨갛게 되어 허둥지둥하였다.
189
"왜 그래요?"
190
색시도 놀라 멈춧하였다.
191
"……."
192
갑술이는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말문이 막힌 듯 손만 내렸다가 휭 ─ 하니 달아가 버렸다.
193
색시는 어리둥절하여 그대로 샘터에 가서 나물을 씻고 물을 길러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아직 잠이 깨지 않은 모양이였으므로 방 안에 들어가 보았다.
194
"일어나 점심 먹어요."
195
색시는 두세 번 불러 봐도 대답이 없음이 이상하여 그제야 자세히 넘겨다보았다.
196
"아이구 왜 저래……."
197
색시는 이상함을 못 이겨 가까이 가 보았다. 그제야 가슴이 선뜻하여 총알같이 방을 튀여 나와 툇마루 밑을 들여다보고 약병이 없음에 벌떡 일어서자 갑술의 얼굴이 번개불같이 혼란하게 눈앞에 어른거렸다.
198
"아이고 엄마……."
199
그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치며 두 귀와 눈을 꼭 막듯이 가리며 푹 고꾸라졌다.
 
200
"아이그 무서워라. 암창굿기도 하지."
201
"글쎄 말이지 열다섯 살 밖에 안 먹은 계집년이 사나이를 죽이다니!"
202
"아 ─ 니 갑술이 놈하고 언제부터 붙었는고…… 서방질을 하다니…… 고런 죽일 년이 어데 있소."
203
"아이구 무섭고 독한 년."
204
"년놈이 의논하고 죽인 게지 어린 년이 어찌면……."
205
동리는 물 끓듯 소란한 가운데 색시는 갑술이와 함께 꽁꽁 묶이여 순사 두 사람에게 끌려 그 멋들어진 향나무 서 있는 샘터를 왼편으로 끼고 돌아 주재 소로 갔다.
206
이리하여 간부와 공모하여 남편을 독살한 십오 세의 독부가 생겨났다.
 
 
207
─《조광》(1938. 7).
【원문】소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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