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열어젖힌 건넌방 앞문 안으로 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용동댁은 한참 바느질이 자지러졌다.
3
마당에는 중복(中伏)의 한낮 겨운 불볕이 기승으로 내려쪼이고 있다. 폭양에 너울 쓴 호박덩굴의 얼기설기 섶울타리를 덮은 울타리 너머로 중동 가린 앞산이 웃도리만 멀찍이 넘겨다보인다.
4
바른편으로 마당 귀퉁이에 늙은 살구나무가 한 그루 벌써 잎에는 누른 기운이 돈다. 바람이 깜박 자고 그 숱한 잎사귀가 하나도 까딱도 않는다.
5
집은 안팎이 텅하니 비어 어디서 바스락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집 뒤의 골목길이고 집 앞의 행길이고 사람 하나 지나가는 기척도 없다. 이웃도 모두 빈집같이 조용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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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도 답답하고, 마치 세상이 가다가 말고서 끄윽 잠겨 움직이지 않는 성싶게 하품이 절로 나오는 여름날 오후의 정적이다.
7
그 정적이 너무 지나치게 과해서 도리어 신경이 절로 놀랐음이이라. 용동댁은 골몰했던 바느질손을 문득 멈추고, 소스라쳐 한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든다.
8
이런 때에 모친이라도 옆에 있다가 보든지 하면, 젊은 홀어미의 청승맞은 한숨이라고, 그 끝에 자기 딴은 딸의 신세를 여겨 눈물을 질끔질끔하곤 하지만, 사실이 또 청상과수로서 한숨이 없는 바 아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용동댁인들 무슨 주야장천 과부 한탄이요, 숨길마다 그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9
사람이란 건 일에 잠착하던 끝이면 무심중에 한숨이 나와지기도 하는것, 그와 마찬가지로 시방 용동댁도 한숨을 내쉬기는 했어도, 오히려 아무 생각하는 것이 없이 방심한 채로 우두커니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이다.
10
단조하고 동요가 없는 주위의 풍물이나 무섭게 조용한 침정 그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듯 용동댁은 아무 생각도 없이 소리도 안 내고 그린 듯 언제까지고 그렇게 앉아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런 것을, 돌연한 한 개의 음향이, 음향이라지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요
12
앞 논에서 코머거리 소리로 우는 뜸부기의 소린데, 그놈이 여지껏 끄윽 잠기어 움칫도 않던 주위와 사람을 한꺼번에 갖다가 하잘것없이 잡아 흔들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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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부기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을 뿐 아니라 긴히 생각하는 게 있어 용동댁은 고개를 훨씬 쳐들고 이리저리 마당을 둘러본다. 둘러보아도 찾는 것이 눈에 뜨이지를 않으니까, 이번에는 바느질을 내려놓고 부리나케 마루로 해서 마당으로 내려선다.
15
근처에 어디 있었으면 고고오 한마디 부르기가 무섭게
17
대답을 하면서 쪼르르 달려왔을 닭─닭이라야 달랑 한 바리 밖에 없는 흰 암탉이 아무데도 보이지도 않고 나오지지도 않는다.
19
처음보다 좀더 크게 그리고 완구히 초조스럽게 닭을 부른다. 그러나 종시 반응은 없다.
20
용동댁은 제일에 따가운 햇볕을 견뎌내지 못해 토방으로 올라와서 마룻전에 가 퍼근히 걸터앉는다.
21
두번째에 부르는 목소리도 그러했지만, 얼굴에도 분명한 역정스러움이 드러난다. 닭이 이웃집의 장닭을 따라간 줄 이내 짐작했고,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꽤씸해하는 속상이던 것이다.
22
이 암탉이 이웃집의 장닭을 따라 난질을 간 것을 미워하는 자기의 마음을 용동댁이 만약 의식했다면, 그는 스스로 얼굴이 붉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아직 거기까지에 주의가 미치진 못했었다.
23
자웅 찌지 않은 암탉 한 마리, 그것은 무던히 희한스런 곡절이 있는 생명이었었다.
24
이 정생원네 집, 그러니까 용동댁의 친정은 선비의 집안이기는 하지만, 또 농사라야 밭 몇 뙈기와 논 열 마지기를 고지 주어 지어서 그 소출로 근근 일년 계량이나 하는 터라, 여느 농사하는 집과 좀 다르기야 하지만, 그래도 촌 살림이요, 아깝게 버리는 쌀뜨물이며 겨하며 솥글겡이며 흘린 곡식 하며가 노상 없는 바 아니니, 개돼지와 닭 같은 것을 응당 쳤어야 오히려 촌가답게 섭섭치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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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을 이 집안은 언제부터 난 말인지는 몰라도, 집 터전이 세다든가 무어라든가 해서 개돼지며 닭이며 하는 짐승을 쳐도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돼지는 먹이면 앙가발이가 지거나 병이 들어 죽고, 개는 기르면 비루를 먹거나 미쳐버리고, 또 닭은 치면 삵이나 도둑고양이가 물어다 먹거나 콧병이 나서 죽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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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아니라 그 전자에 몇 차례 소경사로 보면, 그러한 일이 통히 없던 것도 아니어서, 개돼지며 닭을 치는족족 재미를 보지 못한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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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해서 사오 년 이짝은 강아지새끼 한 마리도 얻어다가 기르지를 않는 참인데, 하나 집터가 세네, 상극이 졌네 하는 것도 결국 우연을 당연으로 여겨버리려는 한낱 구실이요, 실상인즉 이 집안식구가(식구라야 많지도 않지만) 누구 없이 그러한 것에는 정성과 마음을 들일 경황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옳은 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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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 집의 대주(大主) 정생원인데, 그가 요새 세상에서는 거진 다 없어지고 구경하기도 힘드는 옛 선비여서, 닭이 알로 깨는 것인지 새끼로 낳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요, 게다가 중년 이후로는 올해 나이 근 육십이니 이십 년 가까이 남의 집 훈장질을 하느라고 시방도 삼십여리 상거의 인읍에 나가 학장 노릇을 하고 있으면서, 집에는 한 달에 한번이나 다니러 올까말까, 월량(月糧:月給) 푼이나 생기면 잔 가용에 보태 쓰라고 얼마간 집에 떼어보내고는 나머지를 가지고 글장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고 풍월(風月)이나 하기로 온갖 낙을 삼는 터, 또 그러한데다가 최근 사오 년 이짝은 자식이라야 둘도 없던 딸─용동댁─이 상부(喪夫)를 한 것으로 가뜩이나 마음이 울적하여 집안의 살림은커녕 세상 만사에 도무지 흥을 잊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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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가령 한 달에 한 번이고 혹은 두 달에 한 번이고 집에를 다니러 오더라도, 모를 심었느냐 김을 매었느냐 금년 소출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등 살림 형편은 통히 알은체할 줄을 모르고, 또 외손자 태진이를 몹시 귀애하기는 하면서도, 아 저놈이 밥반찬이 어설플 텐데, 거 닭이라도 몇 마리 놓아서 알을 받아 끼니때에 쪄주질 않느냐고 등속의 농가집 가장다운 신칙을 할 주변성이 없는 영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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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용동댁의 모친인데, 바깥 대주 정생원이 그 지경으로 범연해서 살림 알은체를 안하니까, 자기가 안팎을 겸한 집안의 주장이 돼가지고, 할 수 없이 농사일이며 기타 범절을 대강대강 처리해나가기는 하지만, 그저 마지못해 하는 노릇이지 하나도 정성을 들이는 게 없고, 더구나 자질구레한 일에는 생각조차 하고 싶어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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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부터도 촌 살림에는 능란치 못한 여인이었는데, 딸이 홀몸이 되어버리자,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넋이 나가서 만사에 뜻이 없고 한 탓이기도 하지만, 역시 천품의 소지도 없지 않아, 가령 딸이 젊은 과수의 몸으로 와서 있곤 하여, 밤저녁으로 집안이 유난히 허전한 것 같아하기는 하면서도, 번연히 거기 어디 동네집에 푹 쌨는 강아지새끼나마 한 마리 얻어다가 길러서, 짖는 소리라도 들리게 하려고(누룽지가 아까운 것은 둘째로 치고서 말이다) 그만 것을 섬뻑 엄두를 내려고 하질 않는 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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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서는 어쩌면 자기가 과부나 된 이상으로, 그저 자나깨나 그렇지 않아도 안질로 육장 질척질척한 눈에 눈물이 질끔질끔 딸의 신세 탄식, 그러다가 지치면 동네로 비잉 마을 다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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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이 또 하나 셈든 어른이라는 게 용동댁인데, 열일곱 나던 이월에 이웃 솔메라는 동네의 같은 선비네 집 같은 동갑한테로 시집을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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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가자, 바로 얼마 안되어서 태기가 있어가지고 이듬해 여름에 시방 데리고 있는 아들 태진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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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아기 둘이서 아기 하나를 낳아놓은 것이지만, 오히려 손자며 외손자가 늦다고 걱정까지 하던 암사돈 수사돈 두 사돈집에서는 다같이 경사로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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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동댁은 그래서 시집의 귀염을 받았을 뿐 아니라, 본시 인심이 각박하지를 않았고, 또 새서방과는 비둘기 한쌍처럼 금실이 있어, 말하자면 어느 모로 보든지 팔자가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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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것은 잠깐 몇해요, 스물세살 때에 남편을 달칵 여의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청상과수, 그러니 시집의 인심이 너그럽다든가, 일찌감치 옥동자를 낳아서 시부모의 더한 귀염을 받았다든가, 더우기나 남편과 의초가 좋았다든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 일장의 꿈이 아니면 아득한 전설의 사실로써 단지 기억에나 처져 있을 뿐이요, 눈앞의 현실은 마음 붙일 곳도 마땅히 몸 담아둘 곳도 없는 아이 데린 새파란 과부로 나가떨어졌을 따름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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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용동댁은 친정에도 와서 있다가 시집에도 가서 있다가, 작년 늦은 여름부터는 이곳 친정집에서 이내 일년 짝이나 비교적 오래 한곳에 붙어 있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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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시집과는 인연을 끊고서 영영 친정집에 몸을 담가두자는 생각이더냐 하면 그도 아니요, 부지중 그만큼 오래게 된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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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란 건 어려서는 부모에게 매어 살고 자라서는 남편에게 매어 살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매어 살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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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해서 세상을 살아갈 능력이 없는 낡은 가정의 여자에게 꽤 맞는 소리요, 용동댁도 하릴없이 그러할 여인인데, 하나 이미 장성은 해서 부모에게 매어 살 시절은 지났고, 그런데 몸과 마음을 맡기고 거기 붙이어 살아갈 남편은 죽어 없고, 또 그런데 자식은 아직 어리기도 하거니와 내 자신도 너무 젊어 늙은이들처럼 자식한테 의지해 여생을 보낼 경우도 되지를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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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용동댁 같은 여자에게는, 어려서는 부모에게 장성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지를 해서 살도록 그것이 생활의 진리요 인생 된 운명이었다고 하면, 시방 청춘에 어린 자식을 데리고서 과부가 된 그는 한 일 없이 인생을 잃어버렸고, 생활로부터 두웅둥 떴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처지이었었다.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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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여의고 나서 한 일년 짝은 그새와 다름없이 착실한 새댁 노릇을 했었다. 침선 같은 것을 직책으로 맡아 해낸다든가, 시부모를 받는다든가, 손아래의 시아재와 어린 아들 태진의 뒤치다꺼리를 한다든가, 조금치도 내색을 안 내고 말치 없고 소리 없는 시집살이를 곧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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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그렇게 전과 다름이 없었지, 마음은 하나도 내키지 않은 노릇이요, 신명도 물론 나지 않고 재미도 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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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과부가 마음이 떴다고 하면 첩경 남편 그리움을 의미하는 것이겠는데, 실상 용동댁은 무슨 그다지 몸부림이나 오두가 나게시리 남편을 아쉬워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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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정다왔던 애정이며, 가고 없는 남편의 환영이 추억되고 안타깝게 그립지 않다는 것은 도리어 빈말이겠지만, 그러나 이것과 저것과는 생리적으로 계통이 다른 물건이라, 즉 용동댁은 삼십과부가 아니었고 이십과부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바람이 날 지경은 아니고, 어느 편이냐 하면, 차라리 담담한 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적어도 아직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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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가다가 몸은 젊은데 자식은 어리고 해서, 그것이 더러 생각하면 딱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기는 했지만, 그 역 일시일시 그러다가 말지, 눈썹이 타들어오도록 다급하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고, 따라서 그로 인해 마음이 뜨는 것은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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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분명 마음이 뜨기는 떴고, 그게 정체가 매우 막연해서 자기 자신이나 혹은 주위의 근친이 바로 알아내지 못하는 것인데, 생활의 중심, 이 생활의 중심을 갖지 못한 게 진실로 갖은 조화를 다 부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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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중심을 갖지 못한 젊은 과부는 물 위에서 떠도는 기름방울 같아 마음도 몸도 질정해 어디다가 건사할 바를 모르는 게 정수(定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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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동안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그처럼 마음 없이 해오다가 영영 신산하기만 하니까, 이래 보았으면 좀 나을까 하고서 친정에를 와서 몇 달지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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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친정 역시 시집 식구들이 죄다 남 같아 내 몸이 거기에 함께 섭쓸리지 않듯이 친정 부모가 또한 남처럼 데면데면한 것만 같고, 일을 해도 시집에서와 일반으로 마지못해 손에 잡기는 하나 마음은 건성이고 해서, 바라고 왔던 친정살이도 재미라고는 꼬투리도 얻어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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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집으로나 가서 있으면 나을까 하고 석 달 만에 돌아갔고, 갔으나 도로 일반이고…… 그래 또 얼마만에는 친정으로 와보고…… 이렇게 하기를 그새 몇 번 되풀이하느라 사 년 동안의 과부살이를 아뭏든지 넘기기는 무사히, 진실로 무사히 넘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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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한가지 특별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재작년 봄에 이들 태진이가 보통학교에 입학을 한 것이겠고, 그러나 그것 역시 학교가 마침 좋게 친정집과 시집의 중간쯤에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데리고 친정과 시집으로 오며가며 지내는 데 별반 구애가 되지는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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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마음이 뜨고 몸조차 뜬 용동댁이라, 더구나 친정에서고 시집에서고 마지못할 침선이나 집안 식구네의 뒷시중 이외에는 알뜰살뜰히 살림에 맛을 붙일 정성이 날 수가 없는 처지이니, 하물며 개돼지를 친다든가 닭을 놓는다든가 등사에 재미를 들일 흥이 없을 게야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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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마음 없고 경황 없는 사람들만이 억지로 끌려가듯 생활에 부지해 사는 이 집에 암탉이 달랑 한 마리 식구로 참예를 해서, 어느 편으로 보면 극진한 대접과 동정을 받고 지난다는 것이 일종의 기적이 아닐 수 없는데, 거기에 실상 재미스런 곡절이 얽혀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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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가을, 그러니까 용동댁이 시집에서 이곳 친정집으로 맨 나중번에 와서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오후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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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동댁이 마루에 앉아서 풋콩 꺾어온 것을 저녁밥에 두어 먹으려고 모친과 더불어 까고 있노라니까, 학교에 갔던 태진이가 사립문 밖에서부터 어머니이 할머니이 불러 외치고, 씨근버근 달려들더니, 불룩한 책가방 한쪽 고비에서 난데없는 병아리를, 그나마 한 마리도 아니요 둘 셋 넷 다섯, 다섯 마리나 주르르 털어내놓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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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계란만큼씩밖에 않고, 하늘하늘한 노오란 털이며 토실토실 이쁜게 바로 엊그제 깬 한배어치들이요, 마침 제철이 당한 서릿병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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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하게 갇혀 있다가 내놓아 주니까 제각기 삐약삐약 울면서 제각기 그 간드러진 다리로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병아리를 이놈 잡아올라 저놈 못 가게 할라, 태진이는 미처 이야기를 할 겨를도 없이 바빴고, 용동댁과 그 모친은 뜻밖이라 콩 까던 손을 멈추고 앉아 잠깐 동안은 무어라고 말 낼 바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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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건 어디서 났어? 응? 태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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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용동댁이 나무라는 말조로 다잡아 묻는다. 아이가 지나다가 길옆에 나와서 노는 것을 보고 재롱스러우니까 장난삼아 잡아가지고 온 것이나 아닌가, 그렇더라도 한 마리나 두 마리 같으면 모르지만 다섯 마리씩이나 잡아오다니, 이렇게 지레짐작과 의혹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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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이는 얼핏 돌려다보고는 도로 병아리들을 ‘통제’시키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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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내버린 것 얻어왔어 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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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버린 걸 얻어오다께? 어디서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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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이는 성가시다고 내쏘는데, 그만하면 짐작할 수가 있고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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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는 인공부화기(人工孵化機)를 설비해두고서 춘추로 계통 좋은 알을 깨어서 농회원들에게 나누어주는데, 깬 병아리 가운데 병이 들었다든지 발가락 같은 것이 상했다든지 한 놈은 죄다 추어 내보리곤 해서, 그놈을 아이들이 얻어오는 수가 더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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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불 태진이가 시방 얻어 온 다섯 마리도 네 마리는 저마다 발가락이 오그라붙었거나 부러진 놈이요, 한 마리는 조속조속 조는 게 병이 들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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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에 뜻이 없는 노인과 생활을 잃어버린 젊은 과부와 철없고 무료한 소년과 이 세 식구밖에 없던 흥 없는 집안에 내력이야 어찌 됐든지 또 미물이기는 할값에 아무려나 다섯 개의 새로운 권솔이 갑자기 참예를 했으니, 우선 주의와 재미의 대상이 되기에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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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들은 방에서 사람들과 같이 놀고 자고, 밥상에서 흘리는 밥알을 쪼아먹곤 했다. 소년 태진이가 병아리들을 끔찍이 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용동댁이며 그 모친도 고놈들이 방 아무데나 똥을 싸고 밥상에를 뛰어오르고 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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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태진이의 소중한 노리개요 동무라는 때문이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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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가 세니 상극이 졌느니 하는 구실로 개돼지며 닭 같은 것을 칠 마음의 여유가 없기는 했었지만, 막상 어떻게 되었거나 병아리가 몇 마리 생겨 몸 가까이 두고서 길러보니까는, 삐약삐약 우는 소리 하며 뛰어다니고 눈에 알찐거리는 형상 하며가 적지 않은 심심파적일뿐더러, 겸하여 태진이가 학교로부터 돌아와 오후와 밤으로 병아리로 더불어 놀곤 하면, 가끔가끔 생각지 않은 웃음과 이야기거리를 빚어주곤 해서 더우기나 좋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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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는 얻어온 지 이레 만엔가, 그중 병이 들어 원기가 없던 놈이 마침내 죽었고, 다시 열흘쯤 돼서는 태진이가 잘못 한 마리를 밟아죽였고, 또 며칠 있다가는 쥐가 한 마리 물어갔고 해서 다섯 마리를 얻어온 것이 두 마리가 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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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한 마리 없어질 적마다 태진이와 또 용동댁이며 그 모친의 섭섭함은 대단했었다. 그러나 수의 많고 적은 데 낙의 대소가 달릴 성질의 것이 아닌지라, 두 마리만 남았어도 위안과 재미거리에 부족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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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이 가고 겨울도 섣달 정월로 깊자, 병아리는 완구히 자라 제법 중닭 푼수나 되었고, 한데 더욱 희한한 것은 단 두 마리뿐인 병아리가 같은 암놈이나 같은 수놈이 아니고, 한 마리는 수놈, 한 마리는 암놈, 이렇게 자웅이 맞은 한쌍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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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은 자웅이 다 같이 하얗고 레구혼인데, 수놈은 바른편 뒷발톱이 암놈은 왼편 가운데발톱 한 토막이 각기 병신이나, 물론 그만 것이 그리 험 될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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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그러니까 바로 올 오월에는 암탉이 첫알을 낳았다. 당자들인 닭 내외가 얼마큼이나 기뻐했는지 그것은 모르겠으되, 오히려 놀랐기가 십상이요, 태진이가 신기해서 알을 쥐고 날뛰며 좋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용동댁과 그 모친은 마치 아들이나 시집간 딸이 첫아이를 난 것처럼 신통해하고 반가와했었다.
82
이때는 닭의 내외가 그전에 벌써 집 모퉁이에 얽은 저희네 둥우리로 분가를 했을 때였지만, 첫알을 난 그날 저녁밥은 특별한 방으로 불려들어와서 미역국 대신 새하얀 입쌀의 대접을 배불리 받았다. 하기야 분가를 했어도 그들은 어린 적의 흉허물 없던 그 버릇 그대로 아무때고 방이며 마루에 올라와서 밥상의 밥을 쪼아먹고 함부로 똥을 누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품에 안기고 어깨에 올라가고 하기를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으니까, 첫알을 낳았다고 방으로 불려들어왔다거나 하얀 입쌀을 대접받은 그것이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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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부터 태진이의 벤또에는 달걀을 삶아서 저며 둔 반찬이 별반 끊이지 않았고, 닭의 내외에게는 전과 다름 없이 호강과 평화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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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행복과 평화가 영원한 저의 것은 아니었든지 뜻하지 못한 비극이 마침내 빚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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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한참 성해오는 칠월 초생의 어느날 밤이었었다.
86
이슥해서 식구들이 모두 곤히 잠이 들었을 땐데, 별안간 꼬꼬댁 꼬꼬댁 닭의 놀라 외치는 소리가 고요하던 밤을 요란히 들렜다.
87
세 식구가 일제히 놀라 깨어, 그러나 삵인 줄을 짐작하고 와락 닭의 둥우리께로 달려가지는 못하고서 소리소리 고함만 치느라니까, 그때는 벌써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가느라고 ‘꼬옥 꼬옥’ 주검의 비명이 뒷산으로 향해 차차로 멀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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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불을 해 잡고 닭의 둥우리를 살펴보니, 물려간 것은 장닭이요, 암탉은 한편 구석에 가서 숨도 쉬지 못하는 양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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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을 방으로 안고 들어와서 태진이는 어엉엉 울었다. 마치 초상난 집처럼 노인도 추렷해 혀를 차싸면서 가엾다고 눈물을 질끔질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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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중에 아무 말도 않고 울지도 않는 용동댁의 가슴 아파함은 아들이나 모친의 슬퍼함에 비길 바가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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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혹히 삵의 밥이 된 장닭을 불쌍해하지 않음은 아니나, 그 가엾은 암탉─홀어미가 된 암탉─에서 지극한 슬픔을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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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들 자거라. 그리 된 걸 생각하니 소용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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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위로 겸 단념하듯 중얼거리면서 맨먼저 자리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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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터전이 그렇대두! 닭을 노면은 병들어 죽거나 짐승 입이 닿구…… 개돼지를 치면은 미치거나 앙금발이가 지구…… 원 무슨 짝의 집터가 그렇게두 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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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인의 뒤삐어진 집 터전에 대한 불평쯤 쓸데없는 구느름이요 태진이에게나 용동댁에게나 조금도 위로거리가 되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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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곧 읍내의 장에 들어가는 동네 인편에라도 부탁을 해서 장닭을 사다가 다시 자웅을 맞춰 주었어야만 그동안 그대도록 닭을 사랑하던 정의 도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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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인으로 말하면 애초에 닭 같은 것은 놓을 경황이 없었던 것을 이왕 생겨서 심심치 않으니까 그런 대로 마음을 한 가닥 거기 붙였던 것이나 암탉이 혼자면 혼자요, 혼자 내놓았다가 잃어버리면 잃어버렸지 와락 서둘러 없는 돈을 마련한다 장닭을 사온다 하게까지는 까맣게 내키지 않는 노릇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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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이는 물론 이웃이나 동네의 장닭에게 닭을 빼앗길까 보아 하루바삐 장닭을 사놓고 싶어서 저의 모친을 조르곤 하지만, 제 재주로 닭을 사올 수는 없었다.
99
용동댁도 암탉을─사람 하나 몫만큼이나 소중하고 정이 도타운 그를─잃어버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앞이 아찔한 노릇일 뿐 아니라, 닭의 외로운 신세가 가슴 아프게 측은하고 해서, 부디 장닭을 사놓아 주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하기는 할 요량이었었다.
100
그러나 그는, 이제 쉬이 그렇게 하기는 할 터로되, 다만 그동안 조금만 더 닭을 과부인 채로 두어두고서 그것을 불쌍해하고 살뜰히 귀애를 하고, 이걸 하고가 싶었다.
101
장닭을 사다가 새로 자웅을 맞춰주어, 그래서 암탉의 외로움과 불행이 씻은 듯이 스러져…… 이렇게 되기 전에 단 며칠 만이라도 좋으니, 그를 가엾고 불쌍한 그대로 두어두고서 그의 불쌍함을 맘껏 불쌍해해 주고, 그의 고적함을 실컷 위로해 주고가 싶은 용동댁의 간절한 심정……
102
용동댁은 장닭 사오기를 미룸미룸 미뤄나갔다.
103
노인은 그것저것 아로새기지를 않았지만, 태진이는 매일같이 조르는 것을 돈이 없다는 핑계로 한 장 두 장 자꾸만 미뤄나갔다.
104
돈만 있으면 장닭을 한 마리 사오기만 하면, 닭은 과부가 되었어도 곧 짝이 채워진다는 것, 이 평범하고도 알기 쉬운 사실에 퍼뜩 자극을 받아 용동댁은 과부가 된 지 사년 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장차 팔자를 고치느냐 수절을 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골똘히 생각을 해보았다.
105
그러나 닭의 일처럼 만만한 게 아니고, 용동댁의 소견을 가지고는 암만 생각을 해보아야 시원한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106
가령 개가(改嫁)를 간다고 하면, 제일 첫째 아들 태진이를 대체 어떻게 하느냐? 두고 가자니 정을 차마 어찌 끊으며, 그렇다고 데리고 간다면 의붓자식일지니 더욱 못할 노릇이다.
108
이미 헌 몸뚱이니 남의 조강지처는 바랄 수 없고, 다직해야 막지기 아니면 첩인걸, 그게 또한 못 당할 일이요, 황차 막지기나 첩이란 건 자칫 잘못하면(남을 두고 보아도) 이 손 저 손으로 넘어가기가 쉬운데, 영영 신세를 망치기 십상이 아니냐.
109
그리고 또 시집이며 친척─모친은 모른 체할 테지만, 부친은 해괴하다고 부녀지간의 의를 끊을 테니, 그 말림을 부득부득 어기고서 갈 수도 없는 것이 아니냐?
110
그러나 그것이고 저것이고 죄다 뜻대로 되고 말썽이 없고 해서 개가를 할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당에 이르러 섬뻑 나서겠다는 담보가 우선 시방 있느냐?
111
있을 성부르지도 않고, 되레 죽으면 죽었지 어떻게 시집을 갈꼬? 하는 공포가 앞을 서곤 한다.
112
이렇게 두루 생각하면 도저히 팔자를 고칠 수는 없을 것만 같다. 더구나 여읜 남편의 면영이며 그의 알뜰하던 정을 돌이켜 생각하면, 어떤 깨끗한 자랑을 더럽히는 노릇 같아, 차마 딴 남자를 맞이하는 게 심히 옳지 않은 짓이거니 싶어진다.
113
하니 그러면 이대로 수절을 하고 늙겠느냔데, 그것을 생각할 때는 또한 무거운 짐을 지고서 높은 고개 밑에 다다른 것처럼 아득하니 위가 올려다보여 그것 역시 겁이 더럭 나곤 한다.
114
그래 생각만 골똘히 했었지 좌우 양단간에, 가령 행동은 이제 종차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에나마 결단을 지은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대로 아무 요정이 없고 말았다.
115
실상인즉 그 결단은 아무려나 서서 있어야 할 것이었었다.
116
가령 팔자를 고친다고 작정을 했으면 생활의 방향을 모두 그리로 틀어놓고 나아갈 것이고.
117
또 수절을 하기로 작정을 했으면 늙밭에 걱정이 없을 염량을 차려야 할 것이고.
118
친정집이 비록 가난은 하다지만 밭뙈기와 논이 열 마지기는 있겠다, 한데 그만 가산일망정 장차 다른 데로 갈 바 없으니, 여자에게는 한밑천이 되지 않진 않는다.
119
또 시집은 친정집보다도 좀 더 유족하니까 비빌 언덕이 넉넉하다.
120
그러니까 친정이면 친정, 시집이면 시집 어디든지 가서 마음과 몸을 가라앉혀가지고 치산을 해야만 할 것이다.
121
한푼도 없는 과부도 손수 적지 않은 가산을 장만한 예가 하고 많다. 하니 그만큼 기댈 거리가 있으면야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을 테다.
122
가령 큰돈을 모으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 잠착을 할 수 있으니 그게 어디며, 또 수절을 할 바이면 오직 하나 믿을 것은 아들 태진이니, 그를 충실히 교육시킬 준비를 하는 게 무엇보다도 긴한 일이다.
123
이렇게 해서 무엇에서고 생활을 발견하게 되면 그새까지 떴던 마음은 절로 안정이 될 수가 있을 것이었었다.
124
그러한 것을 좀처럼 강단을 내지 못하는 소치는, 거기 어디 많이 볼 수 있는 구태의 젊은 여인들과 일반으로 용동댁도 독립할 줄을 모르는 영원한 아기─ 어려서는 부모에게, 장성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자식에게 그때마다 매여서만 살도록 마련된 때문이지 별다른 게 아닐 것이다.
125
과부가 된 암탉은 과부만 되었을 뿐이지 식구들의 전과 다름 없는 가축과 또 용동댁의 한결 더 은근해진 동정이며 사랑을 받으면서 그날 그날을 보냈다.
126
알도 여전히 낳았고, 또 식구들이 걱정하던 바와는 달리 이웃집의 장닭이 미처 몰라서 그랬던지 아직은 후려가지를 않았었다.
127
한데 불행은 언제고 대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첫번의 비극이 있은 지 한 달이 채 못되어서 두번째의 불행이 생겼다.
128
장마비가 축축히 오는 낮인데. 방이 눅눅해서 용동댁이 건넌방 아궁이에다가 보릿대로 불을 지피고 있노라니까
130
가느다랗게 닭의 신음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닭이 아궁 속으로 들어간 줄을 대번 알아차린 용동댁은 가슴이 더럭 내려앉고 수각이 황망하여 허둥지둥 불을 긁어내고 두드려 끄고, 통째로 아궁 속으로 기어들어갈 듯 엎드려 굽어다보면서 고고오 고고 닭을 불러댔다.
131
분명 거기서 여전히 꼬옥 꼬옥 하기는 하는데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긴 고무래를 찾아가지고 와서 구들 속을 긁어보았다.
132
그다지 깊이서 나는 소리도 아니거니와, 긁어 내보아야 닭은 긁혀 나오지도 않는다.
133
닭의 신음소리는 점점 더 졸아들고 마음이 다뿍 급한 용동댁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없어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어느덧 이편의 흙으로 봉창을 한 구들에 눈이 띄었다.
134
그리로 주의가 가자마자 용동댁은 횡허케 달려가서 괭이를 들고 뛰어와서는 봉창한 구들을 파기 시작했다.
135
건넌방 아궁은 전에 솥을 걸었던 것을 부뚜막을 헐어 임시로 함실을 만드느라고 구들 세 골 중에 가운데 한 골만 남겨놓고 양편의 두 골은 흙으로 봉창을 해두었었다.
136
닭은 알자리가 없던 게 아니지만, 어쩌다가 고양이가 얼찐거리든지 하면 건넌방 아궁이에다가 알을 낳곤 하는데, 그래 오늘도 알을 낳으려고 아궁으로 들어가 앉은 것을 불을 지피니까 그걸 피해 속 깊이 들어갔었고, 그 다음에는 연기에 쫓겨 뚫린 대로 몰려나간 것이 썰골로 돌아 이 편 봉창한 골 앞까지 나와서는 앞이 막히니까, 그런데 그동안 벌써 연기는 실컷 들이켰겠다, 그만 쓰러져서 죽어가느라고 신음을 했던 것이다.
137
구들 막은 것을 파헤치고 꺼내놓은 닭의 꼴은 매우 참담했다. 그 하야니 곱던 털이 연통장이가 돼버렸고, 모가지와 죽지와 두 다리는 힘없이 축 처지고, 그래도 아직 숨은 붙어 있어 꼬로록꼬로록, 사람으로 치면 마지막 담 끓는 소리와 같았다.
138
용당댁은 눈물이 뚜욱뚜욱, 어머니를 부르며 찾으며, 그러나 모친은 없었고, 물을 떠다가 닭의 입으로 흘려넣는다, 부채질을 해준다 사뭇 납뛰면서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139
용동댁은 정성도 보람도 없던 것은 아니지만, 요행 연기를 그다지 오래도록 쏘이진 않았기 때문에, 한 십 분 지나니깐 펼쳐 누웠던 마루에서 발딱 일어서서 비틀거리고 걷기까지 했다.
140
아마 죽은 남편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용동댁은 이보다 더는 반가와할 반가움은 없었을 것이다.
141
무사히 살아난 닭은 더 한층 용동댁의 동정과 사랑 속에서, 그러나 아직도 과부로 며칠 더 지내왔고, 그런데 역시 인간의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든지 엊그제부터는 이웃집 장닭과 연애가 얼렸고, 오늘은 필경 그를 따라가기까지 했던 것이다.
142
이렇듯 그는 사람으로도 그다지 흔치 않을 곡절 많은 생애를 겪어온 한 마리의 흰 암탉인 것이다.
143
용동댁은 더 불러야 오지도 않을 것이고, 또 온다고 하더라도
144
밉살스럽기나 할 테라, 얼굴이 새침해서 그대로 마룻전에 가 걸터앉았는데, 마침 태진이가 짱이채를 둘러메고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 사립문으로 들어섰다.
146
태진이는 휘휘 둘러보면서 마당을 달려 토방으로 올라선다.
149
용동댁의 대답 소리는 새침한 안색대로 뾰로통한다.
150
“이잉! 어디 갔어?…… 구구 구구.”
151
태진이는 돌아서서 마당으로 대고 닭을 부른다.
152
그때다. 마치 그 소리에 응하기나 하는 듯이 이웃에서, 이웃도 바로 옆집이 아니고 한 집 더 건너, 엊그제부터 몽니 사납게 생긴 장닭이 지붕을 타고 넘어와서는 암탉을 얼러대곤 하던 그 장닭이 있는 집인데, 무엇에 쫓기는지 닭이 화닥닥 풍기면서 질겁해 다급히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153
태진이는 눈이 둥그래가지고 저의 모친을 본다. 용동댁도 놀란다.
154
모자는 꼭같이 같은 무엇을 직각했던 것이다. 우리 닭이나 아닌가? 하는 불길스런 예감이다.
155
닭은 우짖던 소리에 뒤이어 꼬옥 꼬옥 두어 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도로 조용해진다. 그때에 태진이는 벌써 사립문께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156
용동댁은 아직도 아까부터 토라진 속이 가시진 않았으면서도, 그러나 설레는 가슴으로 초조해 기다리노라니까, 미구에 태진이가 한 손으로 닭을 안고 한 손으로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사립문 안으로 들어섰다.
157
닭은 멀리서 보아도 왼편 다리가 너벅다리께서 피가 시뻘겋게 흰 터럭 위로 흐르고 힘없이 축 처진 게. 보나 안 보나 개한테 물린 속이다.
159
태진이는 저의 모친을 보더니, 농아워라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뒤를 힐끔힐끔 돌려다본다.
160
“……하준네 개가, 이잉 이잉, 이것 봐, 어머니 어머니.”
161
용동댁은 하준네라는 이웃집의 개를 분해해야 할지 그대로 닭을 미워해야 할지 모르겠고 눈만 더 샐룩해졌으나, 필경 닭이 노엽고 말았다. 미운 것이 아니고 저렇듯 피투성이가 된 것이 원망스러워 그래 노엽던 것이다.
163
쏘아붙이는 음성은 한결 더 쌀쌀하면서도, 그러나 어디라 없이 풀기가 없다.
164
“이잉, 난 병원에 갈 테야, 가서 약발르구 붕대루 매구 해주어예지! 어머니, 이잉, 어떻게 해! 이 피 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랑 병원에 가아.”
165
“별소리를 다 듣겠구나! 닭이새끼 좀 상했다구 병원에 가는 놈두 있다더냐? 방정맞게 싸아다니다가 잘꾸사니지, 머……”
166
용동댁은 재우쳐 쏘아붙이고서 못본 체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167
태진이는 어찌할 줄을 몰라, 닭을 안고 앉아 어엉엉 울다가, 문득 울음을 그치더니, 토방 바닥의 가루흙을 쥐어다가 닭의 다리 상한 자리에 발라주고 발라주고 한다.
168
손을 베든지 해서 피가 나면 흙가루를 쥐어 바르면서
169
“흙하고 피하고 바꾸자, 흙하고 피하고 바꾸자.”
171
닭의 다리에 흙을 발라주느라고 자지러져 있는 아들을 가만히 내다보면서 용동댁은 제발 닭의 다리가 병신도 되지 말고 물론 죽지도 말고 무사히 나았으면 하고 속으로 축원을 해 마지않는다.
172
그는 아까 태진이가 병원 소리를 내기 전에 자기도 병원 생각을 하기까지 했고, 시방도 마음 같아서는 단걸음에 병원으로 안겨가지고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173
그러나 자기 말대로 닭이 좀 상했다고 병원으로 안고 간대서야 남한테라도 욕을 먹을 짓일뿐더러, 태진이를 것질러 나무란 끝이니, 열적어서도 차마 못한다.
174
아뭏든지 낫기만 낫게 되면, 이제 오는 장에는 부디 장닭을 사다가 자웅을 맞춰주려니, 그러자면 이따가라도 이웃에 나가서 돈을 한 오십 전이고 우선 취해다가 두려니, 이런 염량까지 하면서 용동댁은 자주 토방의 동정을 살핀다.
175
흙가루를 바라주어서 피가 멎었는지, 소년은 닭을 두 손으로 안고 볼비빔을 하면서 무어라고 쏭알쏭알 닭과 이야기를 쏭알거린다.
176
용동댁은 어디 보자고, 이리로 안고 오라고 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느라 내키지 않는 바느질을 집어든다.
177
주위는 방금 일어난 조그마한 풍파는 알지도 못한 듯 부레풀같이 찐더분한 침정이 도로 그득히 잠겨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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