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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
이효석
1
일 요 일
 
2
잡지사에서 부탁 온 지 두 달이 되는 소설 원고를 마지막 기일이 한 주일이나 넘은 그날에야 겨우 끝마쳐 가지고 준보는 집을 나왔다. 칠십 매를 쓰기에 근 열흘이 걸렸다. 그의 집필의 속력으로는 빠른 편도 느린 편도 아니었으나 전날 밤은 자정이 넘도록 책상 앞에 앉았었고, 그날은 새벽부터 오정 때까지 꼽박 원고지와 마주대하고 앉아서야 이루어진 성과였다. 그런 노력의 뒷받침이라 두툼한 원고를 들고 오후는 되어서 집을 나설 때 미상불 만족과 기쁨이 가슴에 넘쳤다. 손수 그것을 가지고 우편국으로 향하게 된 것도 시각을 다투는 편집자의 초려를 생각하는 한편 그런 만족감에서 온 것이었다. 더욱이 그날은 일요일이다. 일요일의 한가한 오후를 거리에서 지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3
십일월이 마지막 가는 날이언만 날씨는 푸근해서 외투가 휘답답할 지경이다. 땅은 질고 전차는 만원이다. 시민들은 언제나 일요일의 가치를 잊지들은 않는다. 평일을 바쁘게 지냈던, 놀면서 지냈던, 일요일에는 일요일대로의 휴양의 습관을 가짐이 시민생활의 특권이라는 듯도 하다. 치장들도 하고 어딘지 없이 즐거운 표정들로 각각 마음먹은 방향으로 향한다. 전차 속의 공기가 불결하고 포도 위의 군중이 답답하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의 허물도 아닌 것이다. 준보는 관대한 심정으로 찻속 한구석에서 원고를 펴들도 있었다. 붓을 떼자마자 가지고 나온 까닭에 추고는커녕 다시 읽어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촉박한 시간의 탓으로 까다로운 그의 성미로서도 어쩌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체면불구하고 한 손에 붓을 쥔 채 더듬어 내려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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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일건을 적은 소설이었다. 두 사람의 연애에 대해 세상이 얼마나 무지하고 부질없는 번설을 일삼았던가, 그런 상식과 악의에 대한 항의, 사랑의 자유의지의 옹호─그것이 이야기의 테마였다. 어지러운 소문과 비방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뜻은 더욱 굳어가서 드디어 결혼을 결의하게 되었다는 것, 여주인공이 잠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마치 육체의 일부분을 베어나 내는 듯 남주인공의 마음은 피가 돋아날 지경으로 아팠다는 것을 장식 없이 순박하게 기록한 한 편이었다. 세상에 사랑을 표현하는 맘은 천 마디 만 마디 되고 준보는 기왕에 사랑의 소설을 많이도 써왔지만 그 한 편 같이 진실한 것은 드물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런 문학적인 자신이 그날의 만족을 한 겹 더해 준 것도 사실이었다.
 
5
국에서 서류 우편으로 원고를 부치고 나니 무거운 짐이나 내려놓은 듯 마음은 상쾌하다. 다음 일이 생길 때까지 당분간 편하게 쉬고 조바심을 안해도 좋다는 기대가 한꺼번에 마음을 풀어준 것이다. 가벼운 마음에 거리는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것으로 보인다. 땅 위에 벌어진 잔치다. 그 어디서인지 횃불이 타오르고 웃음소리가 터져 오르는 것이 들리는 듯도 하다.
 
6
혼잡한 네거리의 표정은 화려하고 야단스럽다.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감정을 치장하고 그 분위기에 맞추어 걸음도 가볍다. 오늘 이 지구의 제전에 먼 하늘에서는 축하의 사절을 보내렴인지 구름 사이로 푸르게 개인 얼굴을 빼꼼히 기웃거리고 있다. 준보도 초대객의 한 사람인양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 속에 휩쓸린다. 사랑의 소설을 쓰고 사람들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는 그야말로 누구보다도 가장 즐거운 한 사람일지 모른다. 사람들의 그 기쁨의 비밀의 열쇠나 잡은 듯이 자랑스런 표정이었다.
 
7
꽃가게에는 온실에서 베어 온 시절의 꽃들─카네이션, 튤립, 난초, 금잔화의 묶음과 동백꽃의 아람이 봄같이 피어 있다. 꽃묶음은 그대로 일요일의 상징이다. 꽃가게는 잔칫날 만국기를 단 장식장이다.
 
8
영화관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어 잔치마당의 특별관이라고 할까. 그 훈훈하고 어두운 굴속은 꿈을 배는 보금자리다. 현실과 꿈의 야릇한 국경선을 헤매이면서 사람들은 벌겋게 상기되어 문을 밀치고 드나든다.
 
9
이날 유난히도 복작거리는 백화점은 여흥의 추첨장이라고 함이 옳을 듯싶다. 여자들의 인기를 독점한 듯 치장한 그들의 뿜는 향기가 가게 안에 욱욱히 넘친다. 준보에게는 그들이 모두 아름답고 신선해 보인다. 세상 인류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이 반쪽들은 남은 반쪽들의 한평생의 가장 큰 희망의 대상으로 조물주가 작성해 놓은 모양이다. 희망과 포부와 야심과 광명의 근원을 이 반쪽에게서 찾도록 마련해 놓은 듯하다. 각각 한 사람씩을 잡아서 그 작정된 반쪽들을 서로 찾아내면 그만인 것이나 그릇된 숙명의 희롱으로 말미암아 간간이 비극이 꾸며지곤 한다. 준보가 아내를 잃은 지 이미 일년이 된다. 어쩌다 이 비극의 제비를 뽑게 된 그에게는 일시 세상에서 태양이 없어져 버린 듯 온실의 보일러가 꺼져버린 듯 커다란 고독과 적막이 엄습해 왔었다. 그러나 사람은 비극으로 말미암아 자멸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정보하는 수밖에는 없다. 각각 반쪽을 찾아내는 술래잡기에서 상대자를 잘못 잡아서 생긴 비극이라면 필연코 예정된 배필은 또 달리 있을 것이 아닐까. 그 예정된 판도라를 마음속에 그리면서 두 눈을 싸맨 채 한정 없는 인생의 술래잡기를 계속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내를 동반했을 때에는 거리의 여자들이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준보였만 이제 외로운 눈에 그들은 새로운 뜻을 가지고 등장하는 것이었다. 인간생활의 마지막의 성스러운 표지를 한 몸에 감춘 듯 보이는 화려한 그들 앞에서 자랑스럽고 교만하던 준보도 초라하고 시산한 심정을 어쩌는 수 없었다. 다구지게 마음을 벋디뎌 보아야 흡사 꽃밭에 선 거지와도 같아서 한 몸의 외로움이 돌려다 보일 뿐이다. 백화점은 꽃밭이었다. 준보는 욱욱한 파도 속에서 몸을 헤어내면서 전신의 감각과 감정을 한때 찬란하게 장식해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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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니발의 자극에서 벗어나서 준보는 찻집에서 피난처를 발견한다. 조용한 가게 안은 잔칫날의 사교실이다. 웅성웅성하는 말소리와 놀 같은 담배 연기에 섞여 야트막한 실내악이 방안의 분위기에다 독특한 한 가지의 성격을 준다. 그 성격 속에 화해 들어가는 동안에 준보는 차차 꽃다발 같이 열렸던 관능의 문이 조개같이 옴츠러 들어가고 그 대신 정신의 문이 열리기 시작함을 느낀다. 음악은 정신의 문을 열어 주는 신기한 요술쟁이다. 마음속에 조그만 우주의 신비를 자유자재로 계시해 보이는 기막힌 요술쟁이다. 땅 위의 생활에서 판도라의 다음가는 행복은 음악이라고 준보는 생각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천재는 바로 조물주의 천재의 버금가는 것이다. 음악은 참으로 잔칫날의 반주로는 행복되고 즐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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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상의 초대를 준보는 가장 점잖은 자리로 받아야 한다. 호텔로 전화를 걸어 식사의 준비를 분부해 놓고 찻집에서 아무나 마주앉을 동무한 사람을 잡아내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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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무얼 제일 진미로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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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일꾸, 제일 먹구 싶은 것, 오래간만에─버터, 그래 버터나 먹었으면 하네, 가짜말구 진짜말야. 모두가 가짜의 세상이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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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버터를 대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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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식탁은 희고 정결하다. 꽃묶음이 놓이고 상 옆에 등대하고 섰는 깨끗한 여급사─이건 또 하나의 덤이요 우수리인 꽃이다. 알맞은 절차와 예의─이건 일요일의 또 하나의 덤이요 우수리인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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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와 빵과─이 두 가지의 만찬의 원소 위에 수프와 고기와 과실과 차가 더함은 열두 제자의 절도 위에 현대의 행복을 더함이다. 준보들은 확실히 엣사람들의 희생의 행복보다도 현대적인 문화의 혜택 속에 사는 보다 행복된 후손들이다. 오늘 일요일의 행복은 호텔의 식탁에서 그 마지막 봉오리에 다다른 셈이다. 오찬으로는 늦을 정도의 이른 만찬의 식탁에서 그 차려진 반날의 절차를 준보는 즐겁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주 거리에 나오지 않는 그에게 사실 그 하루는 특별히 신선한 인상과 즐거운 감동을 주라고 마련된 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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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포도주로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할 줄만은 알았지 옛사람들은 버터로 지방과 비계를 상징할 줄은 몰랐나 부지. 활동의 연료요 원동력인 비계를. 난 버터를 먹을 때같이 행복을 느끼는 때는 없네. 구라파 문명의 진짜 맛이 여기에 있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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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도 그날의 만찬에는 저윽이 만족해 하는 눈치였다. 소태를 씹어 머금은 것같이 일상 쓴 표정을 하고 있는 시니컬한 그 동무로서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었다. 세상의 어둠 속밖에는 보고 살아오지 못한 듯한 그에게까지 일요일의 행복을 나눈 것이 준보의 만족을 두 겹으로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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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건─아무렴 버터를 먹을 때, 자네 얼굴의 주름살이 펴지는 걸 보면 사실 행복이라는 건 바로 그것인가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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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을 먹을 때의 어린애의 표정을 주의해 본 일이 있나. 그것은 행복의 표정이라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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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입안에 가뜩 머금을 때─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들을 때─하늘의 비늘구름을 우러러볼 때─아름다운 이의 시선을 받을 때─청받은 소설원고를 다 썼을 때─이런 것이 행복이라면 난 어느 날보다도 오늘 그 모든 행복을 한꺼번에 맛본 듯두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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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가가 단두대에 오를 때─예수가 십자가에 오를 때─그런 것은 행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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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서. 오늘은 땅 위에 행복을 말하는 날이네. 정신주의자들의 가시덤불의 행복은 내 알 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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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잃을 때의 불행─나두 사실 반생 동안 그 수많은 불행으로 얼굴의 표정까지 이렇게 되고 말았네만, 오늘 자네의 이런 행복의 날에도 내겐 또 한 가지 불행이 기다리구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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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는 식탁의 행복에서 문득 그날의 현실로 돌아가면서 소태를 씹어 머금은 것 같은 일상의 쓴 표정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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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당할 때같이 맘 성가신 노릇이 없는데, 왜 사랑과 함께 죽음이 마련됐는지 모를 노릇이야. 난 오늘 죽음을 기다리구 있다네. 좀 이따가 내게로 올 죽음을 맞이해야 된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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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자넨 나까지 불행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야 말 작정인가. 왜 하필 오늘 이 식탁에서 그런 불길한 소리를 해야 한단 말인가. 죽 죽음이라니 무슨 죽음을 맞이한단 말인가.”
 
28
준보는 찻숟가락을 접시 위에 내던지면서 적지 아니 불유쾌한 어조였다. 하루의 행복이 동무의 그 한마디로 금새 사라지는 것과도 같았다. 사랑의 소설을 끝마치고 거리의 행복을 잠겼던 그의 마음에 다시 우울의 그림자가 덮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같이 그것은 모르는 결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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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라면 자네두 앎 직한 미인으로 이름 높은 음악가가 있잖았나. 동경서 돌연히 세상을 떠나서 그 주검이 오늘 이곳에 도착된다네. 나두 그것을 맞으러 나가야 할 사람의 하나란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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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사모해서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사람은 열 손가락에도 남았다. 연은 땅 위의 태양이었다. 가까이 가서는 스스로 몸을 태워 버리는 것이 사람들의 작정된 운명이었다. 수많은 희생을 요구한 태양은 스스로 자멸 할 때가 왔던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꺼지는 법─꺼지는 것만을 아름다운 것으로 작성해 놓은 제우스의 당초부터의 법칙이었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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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도 연을 사모해온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가, 혹은 자진하고 혹은 실성해지고 혹은 도망가고 한 중에서 동무는 그 태양체를 멀리다 두고 오로지 한 줄기의 고요한 심회를 돋구어 온 것이었을까. 그는 주검을 맞이하려 함을 고요히 말하면서 그것이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호텔에서 준보와 같이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의 슬픔도 그와 같이 고요한 것이었던가.
 
32
“앞으로 몇 시간만 있으면 아름다운 주검을 실은 검은 수레가 바로 이 앞길을 고요히 지낼 테구, 나두 그 뒤를 따르는 한 사람이 될 것일세.”
 
33
“자넨 결국 자네 할말을 다한 셈이지. 나의 오늘 하루를 완전히 밟아 버리구 부셔놓았단 말이지. 하필 자네를 고른 것이 오늘의 내 불찰이구 불행이었었네. 어서 주검이든지 무엇이든지 맞으러 가게나. 자, 오늘 자네와는 작별이네. 행복의 파괴자, 불길한 그림자.”
 
34
준보는 동무를 버려둔 채 휭하니 호텔을 나섰다. 흡사 뒤를 쫓는 불행의 마수에서 몸을 빼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시늉이었다. 식탁 위의 진미도 꽃도 여급사도 등뒤에 멀어졌다.
 
35
동무가 말한 몇 시간 후에 그 앞길을 지날 검은 수레가 눈앞에 오는 것 같아서 몸서리를 치면서 호텔 앞을 잰 걸음으로 떠났다.
 
36
가버린 아내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마음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그 하루의 거리의 현실은 벌써 먼 옛일같이 멀어져 가는 것이었다. 가장 아픈 상처인 아내의 기억을 들치는 것같이 무서운 노릇은 없어서 일상에 조심하고 주의해 오던 것이 그 우연한 시간에 동무의 말로 말미암아 다시 소생될 때 마음은 도로 저리기 시작했다. 저리기 시작하는 마음에 즐겁던 하루의 인상은 종적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만찬의 기쁨도 음악의 신비도 백화점의 관능도 꽃묶음의 사치도 한꺼번에 줄달음질치면서 비누거품 같이도 허무하게 꺼져 버리는 것이었다.
 
37
두 달 장간을 병석에 누웠던 아내는 마지막 시기에는 병원 침대에서 호흡조차 곤란해 갔다. 산소 탱크를 여러 통씩 침대맡에 세우고 그 신선한 기체를 호흡시킨다고 했댔자 단 돌에 한 방울 물만큼의 효과도 없었다. 가슴을 뜯으며 안타까워하는 동안에 육체의 조직은 각각으로 변해갔다. 운명한 후 육체는 한때 말간 밀같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초조도 괴롬도 불안도 없이 고요한 안식이었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영혼은 금시 어디로 도망해 버렸는지 남겨진 육체만이 흰 관속에서, 어두운 무덤 속에서, 영원한 절대의 어둠 속에서 차차 해체되고 분해될 것을 생각할 때 준보는 무딘 쇠몽둥이로 오장육부를 푹, 푹, 찔리우는 것 같아서 그 아프고 마비된 감각 속에서는 아무것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왜 그런 마련인구─생명과 함께 왜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하는구─그 허무한 죽음 앞에서 이 현실이란 대체 무엇인구─현실과 죽음과 어느편이 참이구 어느편이 거짓인구─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진정으로 라사로의 기적을 믿어 보려고 아내의 차디찬 몸 앞에 우두커니 앉아 보았으나 참혹하게도, 가혹하게도, 기적은 종시 일어나지 않았다. 어두운 날을 둘러싸고 일월성신의 운행만이 전날과 같이 계속될 뿐이었다. 발버둥을 치고 통곡을 해보아야 까딱 동하지 않는 무심하고 냉정한 우주의 운행 이었다.
 
38
이때부터 준보에게는 우주의 운행에 대한 커다란 불신이 생기기 시작 했으나 너무도 위대한 우주의 의지 앞에 그 불신쯤은 아무 주장도 가지지 못하는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한 줄기의 회의는 여전히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아내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아내와 동무의 애인 연이와 그들 이전에 현실을 버린 수많은 영혼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만이 꾸미고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이 현실의 등뒤에 커다란 제이세계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왜 그른 것일까. 그렇다면 현실의 세계는 그 제이세계의 단순한 껍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지금 가령 지구의 표피를 한 꺼풀 살며시 벗겨서 드러내 버린다면 그 뒤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광막한 황무지에 여전히 사랑이며, 야심이며, 만족이며, 행복이며 하는 것이 남을 것인가. 잔칫날같이 번화한 거리의 행복이─꽃묶음이, 백화점의 관능이, 음악의 신비가, 만찬의 기쁨이 남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대체 무엇 하자는 것인가. 얼마나 허무하고 하잘것없는 것인가. 지구의 제전의 허공 위에 널쪽을 깔고 그 위에서 위태한 춤을 추는 광대의 놀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인생이란 너무도 속절없고 어처구니없고 야속한 것이다. 무엇을 믿고 무엇에 의지하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랴.
 
39
준보는 사실 아내와 함께 자기도 세상을 버렸으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랑 없는 생활은 너무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고 고독은 엄청나게 정신을 메말리는 것이었다. 고독은 사람을 귀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지로 만들었다. 쓸쓸하고 초라한 거지의 신세로 살아서는 무슨 일을 칠 수 있을꾸 생각되었다. 잠들 때에나 잠을 깰 때 눈물이 자꾸만 줄줄 흘러서 배개를 적시는 것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자기 혼자만이 아는 노릇이었다. 목청을 놓아서 울래도 넉넉히 울 수 있는 노릇이었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울 때에나 커피 냄새를 맡을 때 문득 아내의 생각이 나면서 목이 막혀 느끼곤 한다. 다시 두 번 결코 해도 달도 볼 수 없는 아내의 처지를 생각할 때 지구가 여전히 돌고 세상일이 여전히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불측하고 교만하고 이상스런 일이었다. 가는 날 오는 날 아내가 부활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막막한 고독만이 허무한 행운만이 남을 뿐이었다.
 
40
이날은 또 하루 그런 쓰라린 적막심을 품고 준보는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모처럼 즐겁게 시작된 날이 우연한 실마리로 인해 불행한 추억 속으로 뒷걸음질쳐 들어가서 일껏 느끼기 시작한 행복감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이제 되 걸어나가는 거리는 몇 시간 전 들어올 때와는 판이한 인상을 가지고 비치기 시작했다. 아내의 추억과 연이의 죽음 앞에서 거리는 응당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것이다. 잔치가 끝난 뒷마당가의 너저분히 어지러운 행길은 허분허분하고 쓸쓸하다. 이 거리의 껍질을 다시 한꺼풀 살며시 벗겨놓는다면 참으로 얼마나 더 쓸쓸할 것인가. 준보는 마음속으로 그 쓸쓸함을 족히 느끼는 것이었다.
 
41
차 속 사람들은 화장이 지워지고 웃음을 잃었고 포도 위 걸음에는 어딘지 없이 풀이 빠져 보인다. 하늘은 흐려 눈이라도 내릴 듯 어둡고 답답하다─일요일의 오전과 오후는 성격이 이렇게도 알려졌다. 사랑의 소설로 시작된 오전은 우울한 불행의 오후로서 끝나라는 것이었다.
 
42
밤은 조용하고 괴괴하다.
 
43
준보는 방에 불을 지피고 아이들을 데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44
마루방 난로에 불을 피우고 음악을 들을까 하다가 별안간 기온이 내리며 방이 추워질 것 같아서 온돌에 불을 때기로 했다.
 
45
따뜻한 방바닥에 몸을 붙이고 어린것들과 동무하고 앉으니 평화로운 마음에 한 줄기 고요한 빛이 솟기 시작했다. 예측하지 않았던 이것은 또 하나 다른 행복이었다.
 
46
풍로에 우유를 끓여서 사탕을 넣고 어린것이 그것을 입안에 머금은 그 행복스런 표정을 살피노라니 준보의 마음에도 점점 그 따뜻한 감정이 옮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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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신통하게도 간 엄마를 찾아서 보채지 않는 것이 준보에게는 큰 도움이었다. 준보는 도리어 자기가 눈물을 흘리게 될 때 아이들에게 들킬까 겁이 나서 외면하고 살며시 눈을 훔치고 한숨을 죽이는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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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마시고 나더니 그림책을 들척거리고 색종이와 가위를 내서 수공을 시작하고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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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등불 아래에서 재깔거리는 그 무심한 양을 바라보면서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준보에게는 낮에 거리에서 느낀 것과는 또 다른 행복감이 유연히 솟아올랐다. 어른의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아이들 세상의 행복이었다. 어린 혼들의 자라가는 기쁨을 바라보는데서 오는 맑은 행복감이었다. 흠 없고 무욕하고 깨끗한 행복감이었다. 어느결엔지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지면서 차차 그 어린 세상 속에 화해 들어감을 느꼈다.
 
50
“옳지, 이것을 쓰자. 아이들의 소설을 쓰자. 어린것들의 자라는 양을 그리자.”
 
51
책상 위에는 원고지와 펜이 놓였다. 때묻지 않은 하아얀 원고지가 등불을 받아 눈같이 희고 눈부시다. 그 깨끗한 처녀지 위에 적을 어린 소설을 생각하면서 준보의 심경도 그 종이와 같이 맑아갔다.
 
52
“일요일의 임무는 또 한 가지 남았던 것이다─어린 세상을 그리는 것이다. 인류에 희망을 두고 다른 행복을 약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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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사랑의 소설을 쓴 준보는 이제 또 다른 행복을 인류에게 선사하려고 잉크병 속에 펜을 잠뿍 담았다. 흰 원고지 위에 까맣게 적히울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등불은 교교히 빛나고 있다.
 
54
조용한 밤 적막 속에 어린것들의 재깔거리는 소리만이 동화 속에서나 우러나오는 듯 영롱하게 울리는 것이었다.
【원문】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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