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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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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9
백신애
1
일여인
 
2
“마님! 마님! 도련님 세숫물 떠놨습니다.”
 
3
“오 ― 냐, 마루 끝에 가져다 놔라, 그리고 저 ― 세안크림 통도 갖다 놓고!”
 
4
“네…….”
 
5
“저 ― 아기 어마시 ― 세숫물이 너무 뜨거워선 안 되니 따뜨무리하게 손을 넣어보구! 어 ― 원, 하루에도 몇 번이나 떠 놓는 세숫물까지도 내가 입을 닳려야 되니 정말…… 조금이라도 차든지 뜨겁든지 해 봐라. 정말…….”
 
6
안미닫이가 좌르르 열리며 남치마에 흰 은주사 깨끼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가제 타올을 들고 나온다. 그의 눈썹은 반달같이 그렸고, ‘아몬 빠빠야’라나, 무엇이라는 크림을 바르고 물분을 발라 아름답게 연지로 조화시킨 갸름한 얼굴이다. 어디로 보든지 아직 서른두셋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데, 마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상하였다.
 
7
“아가 ― 이리 나와, 어서.”
 
8
여인은 대야에 한 손을 담가 보더니 온도가 마음에 맞았는지 세숫물 떠 놓은 유모에게 다시 군소리가 없다.
 
9
“아잉 ― 내가 씻을 테야…….”
 
10
방에서 뛰어나온 조그만 도련님이 트집거리며 발을 구른다.
 
11
“어서 와……. 더러운 쌍놈의 새끼들처럼 모가지에 때를 발라 가지고 그대로 갈 테야? 글쎄, 너의 학교에 가보니 사람의 새끼 같은 것이 없더구나.”
 
12
마님은 와락 도련님의 한 팔을 잡아끌어 대야 옆에 앉히고 두리번두리번 대야 근처를 살펴본 후
 
13
“아이구 이구 이 빌어먹을 인간들아! 칫솔은 어떻게 했노 응? 글쎄, 아이구 속상해.”
 
14
하고 벼락같이 꽥 소리를 지르자 부엌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툭 튀어나와 세숫간에 걸린 칫솔을 가져온다.
 
15
“이 자식아, 양치를 쳐야지, 그 놈의 개새끼 같은 놈들의 자식처럼 양치도 않고 학교에 다닐 테냐?”
 
16
마님의 호령에 도련님은 입을 벌리고 얼굴을 찡그린 채 끙끙 앓기만 한다.
 
17
양치질이 가까스로 끝나고 세안(洗眼) 크림을 찍어 도련님 얼굴과 목덜미를 냅다 문지르기 시작하자 도련님은 작은 망아지처럼 뒷발을 치켜들며, 그만 씻으라고 악을 쓴다. 온 마루는 물투성이가 되고 마님의 소매와 치마는 온통 물벼락을 맞은 듯 하다. 그래도 도련님은 크림을 발린 채 대야에 담갔던 두 손으로 마님의 두 팔을 뿌리치려고 버티고 밀고 한다.
 
18
“이 자식아, 비누로 씻느니보다 때가 더 잘 빠지니까 크림으로 씻기는거다. 이렇게 씻어야 얼굴이 윤택하고 부자집 아이 같지 않느냐. 그저 물만 찍어 바르고 가면 그 놈의 쌍놈 손들이나 다름이 있겠니?”
 
19
마님은 지독하게도 도련님 얼굴을 문지르며 씻긴다.
 
20
“일 없어, 일 없어, 잉…….”
 
21
도련님은 몸을 버티다가 기어이 대야를 박차 엎지르고 만다.
 
22
“후다닥…….”
 
23
도련님의 뺨 위에 크림 거품이 가득 묻은 마님의 손바닥이 올라 붙는다. 다시 세숫물이 떠다 놓이고 울음소리가 요란하고 마루바닥이 퉁탕거리고 마님의 고함소리가 연해 나며 하는 사이에 세수가 끝난다.
 
24
가까스로 가제 타올에 얼굴이 닦여지고 도련님은 경대 앞으로 끌려간다.
 
25
헤찌마 화장수가 도련님 얼굴에 발려지고, 크림이 발려지고 퍼프로 야금야금 누르고 하여 대청에 대령한 밥상 앞으로 끌려 간다.
 
26
세수한 자리를 치우는 유모는 혀를 끌끌 차며
 
27
“에이 참, 세수한 자리가 아니라, 물지랄병 하고 간 자리 같군.”
 
28
하고 입속말로 속삭인다. 한참 걸려 마루 소제가 끝나자 방으로 들어가 경대 앞을 바라본다. 크림통, 화장수병, 분통, 퍼프, 수건 등이 자욱히 뚜껑이 벗기어 구르고 있다.
 
29
“원 ― 사내새끼를 사당에 보내었나 보다…… 별꼴도 다 보네.”
 
30
하고 입속으로 혀를 찬다.
 
31
“부엌 사람 ― 커피차 얼른 가져와…….”
 
32
대청에서 고함 소리가 나자 식모는 커피 주전자를 들여다 놓는다.
 
33
도련님 상 위에는 아주 서양식으로 보리죽(오트밀) 대접이 놓였고, 바나나 두 개가 접시에 담겨 있고, 커피잔이 놓여 있다.
 
34
식모는 돌아서 나오며,
 
35
“에이, 정말 단 일곱 식구에 아침을 꼭 네 차례나 치르니 원 사람이 견디어 낼 수가 있나. 멀쩡한 아이놈에게 아침마다 죽은 무슨 벼락 맞을 죽만 먹여, 글쎄.”
 
36
하고 종알거린다.
 
37
“이 자식아, 오늘도 학교에 가거든 더러운 아이와는 놀지 말아라. 그리고 아주 선생 말을 잘 들어야 해. 그까짓 쌍놈의 선생이고 못난 자식이기는 하더라마는 부득이 배워야 되는 것이니 선생 가르치는 것은 꼭꼭 그대로 해야 된다. 그리고 오늘 체조시간이 끝나거든 선생이 야단해도 듣지 말고 너는 꼭 수도에 달려가서 손을 씻고 이 손수건에 닦아야 된다. 응? 알았니? 빌어먹을 놈의 선생이란 것이 아이들의 손도 씻길 줄 모르고…… 얘야, 너 꼭 손 씻겠다고 해라. 손이 더럽거든 꼭 씻겠다고 해. 알았니?”
 
38
마님은 도련님에게 열심으로 푸념을 하고 있으나, 도련님은 오트밀이 먹기 싫어, 바나나 먹기에 바빠 마님의 말은 귀 너머로 듣는 모양이었다.
 
39
“그리고 선생님이 묻거든 우리 집에는 목욕탕이 있어서 하루 한 번씩 꼭꼭 목욕한다고 해라. 그리고 잘 때는 꼭꼭 잠옷을 입고 잔다고 해. 잠옷이라지 말고 ‘파자마 입고 잡니다’라고 해야돼 ―. 그리고 아침에는 밥 먹지 않고 오트밀을 먹는다고 해야 한다. 알았니?”
 
40
“응 ―, 보리죽 먹는다고 그랬어.”
 
41
“이 자식 보리죽이라면 그까짓 선생이 오트밀인 줄 아니? 이제부터는 꼭 오트밀을 먹는다고 해야 돼. 알겠니?”
 
42
“알았어. 바나나하고 커피차하고.”
 
43
“그래, ‘오트밀 한 그릇, 바나나 두 개, 커피 한 잔을 먹습니다’라고 해.”
 
44
“응!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보리죽 안 먹을 테야. 밥 줘, 응?”
 
45
“이 자식이 또 보리죽이라는구나. 글쎄 이것은 보리죽이 아니라, 하꾸라이 오트밀이야, 바보같이!”
 
46
“하하하, 선생님이 내가 ‘보리죽 먹었습니다’라고 하니까, 자꾸 웃어요, ‘네가 왜 보리죽을 먹었니?’하시더라니까.”
 
47
“이 자식, 그렇기에 말이다. 너의 선생님은 비렁뱅이 자식이니까 오트밀이란 건 모른다. 그러니까 그 자식이 그렇게 얼굴이 마르고 검지 않더냐. 이렇게 오트밀을 먹고 세안크림으로 세수하고 하면 누가 보아도 아주 귀공자답게 말쑥해 보이지 않니?”
 
48
“하하하, 그 놈의 선생님이 엄마! 그 놈의 선생님이 말야. 어저께 날 보구 못난이라고 했어.”
 
49
“왜? 그 벼락 맞을 놈이.”
 
50
“내 짝놈이 막 때려서 내가 울었어.”
 
51
“그래! 네 짝놈이 널 때렸어? 어디 보자 그 놈의 아귀 같은 놈의 땅꾼의 새끼, 그래 너를 때린 놈은 장하다더냐?”
 
52
“으응! 그 놈 아이는 아주 선생님께 맞았어. 그리고 나는 운다고 못난이래!”
 
53
“울면 못난인가? 아프니까 울지.”
 
54
마님은 금방 노발대발이다. 그 사이에 도련님 아침 식사가 끝난다.
 
55
도련님은 다시 끌려 방으로 들어가 란도셀을 둘러 메워 체경 앞에서 마님이 한 바퀴 돌려 보고
 
56
“자 ― 인제 가거라.”
 
57
하는 명령을 쫓아 내려선다.
 
58
“놈아! 도련님과 학교에 가.”
 
59
마님이 부엌을 보고 소리 지르자, 상노 아이 놈이 뛰어나왔다.
 
60
“야 이놈아. 오늘 또 도련님의 어깨에 손을 댔단 봐라. 영 죽여 버릴테니. 아무리 너보다 나이가 어려도 도련님에게 네 마음대로 손을 대지 말아.”
 
61
“네? 누가 손을 댔어요. 도련님이 자꾸 한눈을 파니까 그러지 말라고 팔을 잡고 왔지요!”
 
62
“그래도 안돼…… 창피하게.”
 
63
마님은 방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64
조금 후 이 젊은 마님의 아침 식사가 시작된다. 보리쌀 섞은 밥과 장찌게와 간청어 꽁지 뿐이다. 한 통에 육십 전 하는 오트밀을 먹는 아들의 식사와는 영 뚝 떨어진 밥상이다. 마님의 진지상이 나오자 부엌에서 식모 유모 침모들의 아침이 시작된다. 이들은 보리밥에 장찌게 뿐이다.
 
65
그리고 열 시나 되어서 이 댁 나으리 영감님의 식사가 시작된다. 역시 보리쌀이 약간 섞인 밥에다 김치 장찌게, 명태국이 상에 올랐다.
 
66
이리하여 아침 일곱 시에 시작하여 아침 열 시 반에 가서야 비로소 끝이 난다. 마님은 안방에서 식전에 한 화장을 고치기 시작하는데,
 
67
“종식이 어머니 계십니까?”
 
68
하는 소리가 뜰에서 나며,
 
69
“그래, 마님 계시다.”
 
70
하는 식모의 대답소리가 들린다. 마님은 자기를 종식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요망스런 년이 누군가 하여 내다본다.
 
71
“아 ― 너로구나. 왜 왔어?”
 
72
뜰에선 김 참의 댁 계집애 하인이 생긋 웃으며
 
73
“건너 오시랍디다. 얼른 오시래요.”
 
74
하고는 핑 돌아간다.
 
75
마음은 일변 기가 나면서도 그 조그만 계집애 년이 요망스럽게 종식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괘씸하기도 하고 집안 하인들에게 꼭 마님이라고 부르라고 한 자기의 위신이 손상된 듯 불쾌하다.
 
76
“그 년의 집안에는 하인들에게 말버릇도 가르치지 않는가 보다. 빌어먹을 년, 급살맞을 년.”
 
77
마님은 궁청궁청 욕을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장롱문을 열고, 옷들을 끄집어 내어 놓고 이제까지 정성들인 화장을 다시 씻어 곱게 화장을 하고 모양을 잔뜩 내어서 마루에 나선다.
 
78
주머니를 뒤져 보니 도련님에게 내일 아침 바나나 사 먹일 돈 밖에 없어 이윽히 망설이다가 집을 나서 김 참의 댁으로 갔다.
 
79
“아이 잘 왔소 ―.”
 
80
김 참의댁은 반겨 맞았다. 이 마누라는 사십이 넘어 보인다.
 
81
“아 ― 그 요망스런 계집애가 종식이 어머니 있냐고 소리치는 바람에 놀라 깨서.”
 
82
하고 말 속에 뼈를 묻어 하느라고 이러게 거짓말을 한다.
 
83
“아 ― 그 때까지 잤던가?”
 
84
“잤지. 일찍 일어난들 할 일이 있어야지.”
 
85
마님은 거짓말이 능하다. 그러나 참의 부인은 이미 그의 속판을 훤히 들여다본다.
 
86
“그래서 그 요망스런 년이 버릇없이 종식이 어머니라고 했어? 에 ― 망할 년.”
 
87
하고 웃는다. 이 말에 마님의 불쾌하던 감정은 풀리고 말았다.
 
88
“이리 들어와요.”
 
89
참의 부인을 따라 두 칸 건너 방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유한마담이 들어찼다.
 
90
“잘 오셨어요, 왜 이제 오시오?”
 
91
하고 모두들 인사를 하는데, 마님은 대답 대신에
 
92
“아이그 걸어 왔더니 덥네, 늘 타고만 다녀 놓으니 오늘 산보 겸해 걸어 봤더니, 고까짓 것 걸었는데도 막 덥고 다리가 아프다니까.”
 
93
하고 방 안에 들어앉는다.
 
94
“암 ― 사람은 걸어 다녀야 해. 타고만 다니면 쓰나?”
 
95
참의 부인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마님을 추켜 준다. 마님은 웃음이 만면하다. 자기 주머니에 단 이십 전 밖에 없는 것은 잊어버린 듯 하다.
 
96
조금 후 요리상이 들어온다. 모두들 우 ― 하고 상 옆으로 둘러앉으며
 
97
“오늘 이 댁 주인 마누라 생신이라네. 많이 먹어보자…….”
 
98
하고 술도 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님은 홀로 물러 앉아 담배를 찾는다.
 
99
“아이 ― 이거 ‘피죤’ 이구료. ‘해태’ 없소?”
 
100
하며 답배갑을 팽개친다.
 
101
“요즈음이 어떠한 때라고, 아무것이나 피울 일이지.”
 
102
누군가 농담같이 대답한다.
 
103
“아이 ― 우리야 아직 ‘피죤’ 은 피우지 않는다오. ‘해태’도 요즈음이지 꼭꼭 ‘쓰리캇숀’ 을 피웠는데.”
 
104
마님께선 이런 거짓말은 예사다. 과연 그의 장롱 서랍에는 그 어느 때 넣어 둔 ‘쓰리캇숀’ 의 빈 곽이 함께 들어 있기도 하지만.
 
105
“귀부인이 담배는 무슨…… 그러지 말고 이 맛있는 진수성찬이나 잡숫구료.
 
106
누군가 권한다.
 
107
“아이 ― 음식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야, 그까짓 날마다 먹는 걸 무엇이 그리 먹고 싶어 야단이야. 그만 먹고 이야기나 합시다.”
 
108
이렇게 말한 마님은 핑 ― 하니 현기증이 날 것 같다.
 
109
예전 시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천 석이나 하다가 그 시아버지가 죽고 말자 일조에 폭삭 망해 버리고, 겨우 백 석 남짓 추수하는 것을 그 남편이 밤낮 먹고 놀기만 하니 고생함을 가히 알 수 있는 것이고, 또 남에게 업신여김 받기 싫어 쓸데없는 유모, 침모, 식모, 상노 아이를 부리게 되니, 온 식구 셋(남편과 마님과 도련님)에 부리는 사람이 넷이다.
 
110
그러므로 여간 곤란한 처지가 아닌 까닭에 늘 먹는 것도 말이 못 되므로 비위병이 생기기도 일쑤라, 바로 말하자면 그 중에 누구보다도 먼저 그 요리를 먹고 싶은 사람은 마님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참는다.
 
111
이윽고 요리가 끝나자 그는 과자쪽이나 집어 먹다가 일어선다.
 
112
“오늘은 아마도 서울서 손님이 오실 것 같아 그만 가야겠어.”
 
113
마님은 천연스럽게 말한다.
 
114
“서울서? 누가 오시나?”
 
115
“아마도 그 저 ― 유명한 ×××란 그이가 오시겠다고 벌써 언제부터 편지가 왔어.”
 
116
이것도 생 엉터리다. 그러나 마님은 기어이 그 집을 나왔다.
 
117
“아이그 참 우스워 죽겠어! 젊은 년이 마님은 무슨 마님이야 글쎄.”
 
118
“서울 손님이라니! 손님도 서울 손님이 온다고 해야 버젓해지는 건가?”
 
119
“글쎄 그 여편네가 학교 다닐 때는 그러지 않더니 시집간 후부터는 아주 미친 것 같이 뽐내어요.”
 
120
모두들 마님의 치마 끝이 사라지기도 전에 흉을 보느라 법석이다.
 
121
그러나 마님은 저의 집으로 달려와서 보리 섞인 점심밥을 간청어 꽁지와 맛있게 먹었다. 이것이 도리어 옳은 일인지도 모른다.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122
마님의 점심이 끝나자 도련님이 학교에서 돌아온다.
 
123
“이 자식 배고프다. 어서 먹어…….”
 
124
마님은 도련님이 학교에 갈 때 그처럼 치켜들고 법석을 하던 것에 비하여 돌아올 때에는 언제든지 냉담하다.
 
125
“싫어 잉 ― 엄마는 꼭 날 보고 이 자식이라고만 해! 왜 욕해! 내 이름은 종식이가 아녜요?”
 
126
도련님은 공연히 성이 나서 란도셀을 벗어 방구석에다 둘러메친다.
 
127
“이 자식이 미쳤어? 왜 야단이야. 글쎄 또 선생놈에게 야단맞은 게로군. 이제 겨우 1학년이요, 학교에 다닌 지 겨우 두 달 남짓한 어린애들을 그 빌어먹을 놈이 왜 자꾸 성화를 한다더냐 글쎄?”
 
128
마님은 화풀이할 건더기도 없건마는 죄 없는 선생님을 냅다 욕질한다. 사랑하는 아들의 장래에 얼마만한 영향이 미칠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129
“저 ― 도련님이 다른 아이와 공부 시간에 장난했다고 한 번 꾸지람 맞고 또 조선어 시간에 ‘저 모자’라는 말을 쓸 줄 몰라서 또 야단 맞았어요.”
 
130
도련님을 데리고 학교에 갔다 온 상노 아이가 설명을 한다. 그의 귀에도 마님이 선생님을 욕하는 것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131
“그러기에 봐! 어서 밥 먹고 공부하자!”
 
132
식모는 벌써 도련님 상을 가지고 온다. 간청어와 아침에 나으리가 먹고 남은 명태국 찌꺼기, 김치가 상에 올라 있을 뿐이다.
 
133
이만하면 보통으로 먹는 반찬으로 그리 남부러울 건 없으련마는 마님은 도련님에게 이렇게 먹이는 것을 누가 볼까봐 두려워하고, 자기도 차마 보기가 싫어서, 아침에 오트밀을 먹일 때는 같이 데리고 먹여 주지만, 점심 저녁은 영 돌보지 않는다.
 
134
도련님은 맛있게 밥을 먹는다. 그는 그 곤궁한 오트밀보다 이 보리 섞인 밥을 간청어하고 먹는 것이더 맛있는가 싶다.
 
135
“이 자식, 이리 와 공부해.”
 
136
마님은 베개를 돋우어 베고 누워서 소리만 빽빽 지른다.
 
137
“엄마는 또 이 자식이야? 싫어 난.”
 
138
도련님은 먹던 밥숟갈을 집어던지고 방으로 들어와 란도셀을 끌러 그 안에 든 책을 모조리 끌어내 놓는다.
 
139
“이 구두, 그 모자, 저 보자기, 엄마 이것 나, 다 ― 쓸 줄 알아, 그리고 ‘らみに ふね(바다에는 배), ふねに ほ(배에는 돛), ほぼしに はた(돛에는 깃발), 이것도 다 ― 쓸 줄 알아.”
 
140
도련님은 방 끝까지 책들을 늘어 놓는다. 마님은 잠이 사르르 들었다. 도련님은 제 혼자 창가를 불러가며 잡기장에다 제 멋대로 마구 써 댄다. 쓰다가는 말고 고무로 북북 닦고, 닦다가는 잡기장을 찍 ― 째곤 한다.
 
141
그래도 마님은 무관심하고 잠만 잔다. 도련님은 나중에 꾀가 나니까 독본책에다 마구 그림을 그리고, 그리다가는 또 북북 닦고, 그리다가는 찍 잡아 찢고…….
 
142
이것이 모두 선생 욕 먹일 밑천이다. 내일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보고 야단하실 것은 정한 이치니까. 야단맞는 걸 보게 되면 상노 아이가 마님에게 고자질할 것도 틀림없을 것 같고 그 말을 들으면 마님이 도로 선생님을 선생놈이라고 욕을 또 내놓을 것이니까.
 
143
아예 당초에 마님을 낮잠 자지 말고 아이 공부를 감독했으면 내일 선생님에게 꾸중 들을 턱도 없고 그걸 따라서 마님이 선생님을 욕할 건덕지도 없어지는 것이련마는…….
 
144
마님은 맛있게 잔다.
 
145
“엄마, 그만 쓸까? 이것을 한 장 써 오랬지만 이따 쓸 테야……. 엄마 써 줘!”
 
146
도련님은 마님을 뒤흔든다. 마님은 성가시다는 듯, 꽥 소리를 지르며
 
147
“이 자식 저리 가 ― 시끄러워 잠 못 자겠다.”
 
148
라고 하며 돌아누웠다.
 
149
“엄마 욕쟁이…….”
 
150
“네 이 ― 이놈의 자식, 엄마 자는데 왜 이래!”
 
151
마님은 발칵 성이 났다. 그러나 도련님은 어느 사이엔지 엄마 주머니 속에서 내일 아침 바나나를 살 그 이십 전 중에서 십 전을 발라내 가지고 핑 ― 밖으로 달아났다.
 
152
마님은 그래도 모르고 다시 잠들기에 애쓰며
 
153
“이따 내가 다 써 주마, 어서 밖에 나가 놀아.”
 
154
한다. 마님은 도련님의 숙제를 대신 해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155
그 이튿날 학교에서 돌아온 도련님과 상노 아이가 이구동성으로
 
156
“선생님이 집에 가서 제 손으로 쓰지 않고 엄마가 썼다고 야단해요.”
 
157
라고 고해 바친다. 마님은 잠잠하고 도사리며 앉더니 이윽고
 
158
“그래 그 놈의 쌍놈의 선생이 뭐라 그러든?”
 
159
하고 묻는다.
 
160
“꼭 내 손으로 써야 된데요. 엄마 쓴 것은 선생님이 안 보신데!”
 
161
“응?”
 
162
마님은 얼굴이 금시에 시뻘겋게 되며 입술이 바르르 떤다.
 
163
“이 놈의 자식, 어디 보자.”
 
164
마님은 그만 벌떡 일어나더니 치마를 뚝 따 입고 와르르 툇마루로 나오다가 갑자기 생각난 말이 있는지 경대 앞으로 돌아와서 화장을 고친 후, 이제는 바른길로 거리로 내닫는다. 그는 지금 학교로 달려가 선생을 여지없이 퍼붓고 올 작정이다.
 
165
그리하여 이윽고 걸어가다가 문득 삼정오복점 쇼윈도에 걸려 있는 옷감에 눈이 팔려 잠깐 발이 멈춰진다.
 
166
“빌어먹을 도적놈…….”
 
167
하고 심중에 선생 얼굴을 그려 본다.
 
168
선생의 박박 깎은 머리와 쾌활하고 성글성글하게 생긴 얼굴이 떠오른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가무잡잡하고 쥐어짜 놓은 행주 같은 자기 남편의 얼굴이 생각나며 입에 생긋 웃음을 떠올린다.
 
169
자기가 쓴 글씨를 그 선생이 본다…… 하는 그 사실을 엉뚱한 데로 연상시켜 본 까닭이다.
 
170
“그 놈의 자식…….”
 
171
마님은 또 한번 속으로 웃고, 귀부인 앞에 무릎을 꿇어 사랑을 애걸하는 젊고 거만한 기사를 생각해 본다.
 
172
그리고 다시 한 번 미소해 보며 스스로 만족하여 어깨를 뒤로 젖히고 오복점으로 들어간다.
 
173
물론 주머니에 돈이라고는 동전 한 푼 없지마는 몇 천 원어치라도 마음에 드는 물건만 있으면 다 ― 살 것 같은 태도이다.
 
174
그는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던 일인지를 잊어버렸다.
 
 
175
― 《사해공론》(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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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여인 [제목]
 
  백신애(白信愛) [저자]
 
  # 사해공론 [출처]
 
  1938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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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