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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을엔 밀양 박씨가 두 집이 있었다. 방선문(訪仙門) 안 향악전 옆, 바로 길서방네 대장간 윗집에서 국수 장사를 해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집이, 이 고을서 벌써 5대째나 산다는 박리균(朴利均)네 집이다. 그의 동생 성균(성균)이네는 그곳서 다섯 집 위로 올라와서 마방을 한다. 아이들은 올숭졸숭 도야지 무리처럼 많으나, 지금 쓰고 있는 초가집 나부랭이밖에 재산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비록 마방이나 국숫집으로 살아가고 땅조각 손뼉만한 거 하나 없다고 하여도, 저는 양반이노라 재었다. 조상에 정승을 지낸 이가 있다든가, 대신이나 명신이나 명장이 난 것이 아니다. 이 고을 와서 2대째 되는 이가 아전을 다니다 청년의 몸으로 죽었는데, 그의 처 성씨(成氏)가 어린아들은 남겨두고, 남편을 따라 목을 매어 죽어 열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고을 읍지(邑誌)에도 기록되었다고, 박리균네 형제는 술에 얼근하면 그것을 한문으로도 외고, 또 풀어서 염불처럼 흥얼거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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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는 박귀성이 처니 성논산의 장녀라. 부 박귀성이 사하매, 애호하며 자액하야 사하니, 향인이 성씨의 시체를 그 부와 일분에 장하였도다. 성씨의 시년이 이십 삼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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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선문을 척 나서면 왼편에 쭈르랗게 나란히 한 많은 비각 중의 제일 초라한 것이, 성씨의 열녀비가 들어 있는 집이다. 지붕 기왓골에서 잡초가 나오고, 추녀 끝에 참새가 둥지를 틀면 박리균네 형제는 손수 풀을 뽑고 새둥지를 집어 치웠다. 그러나 비각은 바른쪽으로 찌그 뚱하니 넘어져갔다. 수선을 하든가 다시 집을 고쳐 지으려면 적잖은 돈이 들 게다. 기둥을 하나 모양은 숭하나 넘어지려는 쪽에다 버텨서 겨우 그것을 의지해 나갔다. 그것은 마치 양반이라고 으스대는 그의 환상이, 마지막으로 운명(殞命)을 기다리고 있는 거나 같이 적막하게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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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권이 같은 놈이 합체 뭔가. 밀양 박가노라 해서 남의 체면만 망쳐놓지만, 그놈이 어데매 돌 박간지 누구 알 놈이 있단 말야. 어데서 돌아먹던 놈이 도덕질이나 해서 돈푼이나 잡아가지 굴랑, 내가 밀양 박감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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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리균은 국수 먹으로 온 사람을 붙잡고 곧잘 이런 푸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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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처럼 아닌게아니라, 밀양 박가노라고 하는 또 한 집안이 이 고을에 살고 있다. 강선루( 降仙樓)에서 방선문까지 가는 중턱, 바로 구룡교(九龍橋)가 있는 데서 여남은 집 아래로 내려온, 제일 지대가 높은 곳에 큰 집을 잡고 살았다. 그 집 주인이 금년에 갓 마흔인데 이름이 박성권(朴性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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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리균이가 박성권을 가리켜 돌 박가니 뭐니 하지만 물론 그도 밀양 박씨다. 그의 조상에 아전 이상을 다닌 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따름이다. 효자문이나 열녀문 선 게 없는 걸 보면 확실히 박리균네처럼 으스대고 내벌일 건덕지는 없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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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시 이 고을 사람이 아니다. 은산(殷山) 고을서 근 20년 전에 이 고장에 왔다. 그의 조부는 아전을 다니며 창미(倉米)를 농간해서 적지 않게 돈을 모았다고 한다. 녹미를 저 당 잡고 돈을 꾸어주든가, 녹미를 싸게 샀다가 봄이나 여름에 쌀값이 오를 때 팔아서 돈을 잡았다는 게다. 물론 제 앞으로 있는 쌀이나 저당잡은 쌀을 백성에게 쌀 떨어졌을 때 주었다가, 추수 때에 엄청난 이를 불여 도로 받아서 그것으로 땅을 샀을 게다. 어쨌든 그는 적지 않게 돈을 모았는데, 성권의 아버지가 도박과 말년엔 평양 출입을 하여 이 땅에 갓 들어온 아편까지를 빨며, 주색을 겸해서 홀딱 올려버렸다. 그가 명껏 살지도 못하고 죽었을 때 재산은 얼마 남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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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고나서 얼마 안 지나 곧 갑오년 난을 맞았다. 그때에 박성권은 스물을 넘어서 서너 살, 혈기가 넘쳐 흐르는 한포락이었다. 모두가 산골 강원도로 피란들을 갈 때에, 이때야말로 대장부가 한번 활약할 시기라고, 박성권은 처자를 피란가는 친척에게 부탁하고 자기 혼자 집에 남았다. 자산, 순천, 평양, 중화, 황해도에까지 내왕하며 병대를 상대로 장사를 하였다. 농토에서 떠난 대담한 많은 농군들이 이때에 군수품 운반에 종사 하였는데, 대부분 그 보수를 은전으로 받았다. 이 은전을 성권은 살 수 있는 턱까지 염전으로 사서는 남몰래 땅속에 묻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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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서 피란에서 돌아와 보니, 박성권은 안해와 첩과 자식을 데리고 은산서 들어와 이 고장에 자리를 잡으려 들었다. 그가 어째서 은산서 살지 않고 이 고을로 이사를 하였을까. 뒷날 돌아가는 말엔 그곳에는 가난한 친척이나 푸네기들이 있어서, 돈 잡은 줄 안다면 그 치다꺼리를 일일이 섬겨 나가기가 바쁠 것이매, 전과 같이붉은 주먹 두 개밖에 아무 것도 없노라고 허통을 뽑고, 슬쩍 밥벌이 떠 난다구서 이리로 이사해버린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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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오자마자는 두뭇골에다 자그마하게 집을 세운 걸 보면, 그 말도 딴은 그럴 듯한 소리다. 몇 방 안 되는 작은 집에다 첩 큰댁을 함께 몰아넣고, 아이들 셋을 각각 제 어미를 붙여 갈라 넣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나서 피란갔던 읍사람들이 모두 돌아와서 돈에 궁한 이가 집을 팔 때, 그는 헐값으로다 지금 쓰고 있는 커다란 거릿집을 사고 장터로 나서면서, 예전 살던 집은 새로 꾸리고 늘여서, 첩과 첩의 몸에 생긴 아들을 살도록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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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권이가 행길 장터로 나서기까지는 그의 안해와 첩을 본 사람이 적었다. 그러므로 밀양 박가라는 낯 모를 녀석이 두뭇골에 와서 사는데 대담하기 짝이 없는 젊으놈이라느니, 그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는데 건방지게 색시를 둘이나 갖고 산다느니, 그가 소문에 돈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데, 그게 사실일까 하는 등류의 소문이 고을사람의 입에 오락가락 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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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궁금하게 생각해 한 건 물론 박리균네 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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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이 밀양 박가라고 하면서 행세를 해보러 드니 과연 사실일런가. 일변, 여편네들은 그의 안해와 첩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애썼다. 그러나 명절 때 소재에도 안 오르고, 그넷줄 밑에도 안 나서고, 널뛰러도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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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박성권이가 이 고을서 제일 간다는 집을 닁큼 사버리고 첩큰댁을 갈라서 두 살림을 벌여놓았다. ---시시부시한 풍설이 휙 날라가버리고, 새소문이 이어서 홍역처럼 고을 안에 퍼져 나갔다. ---은산서 온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사촌이나 육촌이 은산서 더러 산다, 그런데 피란도 안 가고 돈을 잡으려다 고생만 죽게 했지 전과 한모양으로 백수건달, 하는수 없어 남부여대하고 고향을 떠났다는 녀석이 갑자기 어인 돈이 솟아나서, 집이니 뭐니 하고 저런 치다꺼릴 하는 것일까---이게 한 가지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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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박리균네 형제가 자기네 영업을 이용하여, 국수 먹으러 오는 사람, 마방에 들어서자구 가는 사람, 또는 장돌림으로 평안도 일대를 연자매 돌 듯하는 도붓장수나 돌림 장수들에게 널리 수소문해본 결과, 그가 피란가서 아무도 없는 동안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탐지 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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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깔보려 차비를 차리던 발리균네 형제는 감칠맛이 덜해서 일이 좀 밍밍했다 뿐 아니라 은근히 그를 그렇게 볼 놈이 아니라고 두려워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와는 파가 다른 밀양 박가로서 양반이 못 된다고 술만 마시면 여전히---성씨는 박귀성이 처니 성 논산의 장녀라---만 되풀이하고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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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인네들은 부인네들끼리의 호기심이 따로 있다. 부엌문 틈으로나 바자 틈으로, 의관을 갖추고 오르내리는,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 생김새가 비범한 박성권을 본 적이 있고, 또 그의 아들도 금년에 대여섯 날지말지 한 녀석이, 자완두 두루마기에 전반 같은 영초 댕기 를 드리고, 절개(머슴)나 막서리를 따라서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으나, 아낙 두 사람의 얼굴을 영 볼 수가 없었다. 본댁은 어떻게나 생겼는가, 작은댁은 예쁘게 생겼는가, 본댁은 이 고을서 한 10리 나가있는 갱고지 전주 최씨의 딸이라는데, 작은댁은 어디서 얻어왔을까, 새 파랗게 젊은 아이 적에 대가리에 피도 채 안 마른 녀석이 어디서 첩을 맞어왔는가, 그때는 돈도 없고 가난한 때일 텐데---생각하면 할수록 꼭 고 첩년의 상판때기를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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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동서끼리 짜고, 그 옆집 음해 잘하기로 유명한 늙은 노파를 꾀어가지골랑, 두 뭇 골 위턱에 있는 선앙제터에 가노라고 길을 떠났다. 노파와 리균의 마누라 삿가지(삿갓)를 쓰고, 성 균이 처는 아직 삼십이 안 된 젊은 축이라고 시양목 장옷을 둘러쓰고서 뒷고샅으로 빠져서 두뭇골로 갔다. 선앙제터 부근에서 어물어물하다가, 처음 의논한 대로 그들은 쏜살로 박성권네 첩의 집으로 들어갔따. 밤에는 이곳 와서 자는 일이 많지만, 박성구너은 조반만 먹으면 큰집으로 가는 것을 그들은 이야기를 들어 미리부터 잘 알고 있다. 노파가 앞서서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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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아주머니 물 좀 얻어 먹으레 들랬소다. 선앙제터에 갔다가 목이 말라서……."하였 다. 셋이서 한참 앉아 집안의 가도와, 작은댁의 생김새를 눈이 뚫어지게 보고난 뒤 만족하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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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집 차림이나 가도 범절에 대한 평판은, 거의 셋이 보는 바가 일치했으나, 얼굴 ㅇ 대한 비평은 두 패로 갈라졌다. 음해 잘하는 노파와 작은동서가 일치하여, 얼굴 바로된 데 없다는 주장을 펼쳐놓고, 맏동서 다시 말하면 리균의 안해는, 여자의 생김새가 아주 놀라운 미인이라 선전했다. 그리고 노파가 저러는 건 원체 음해로 사는 이니까 다시 말할 게 없는 일이고, 작은동서가 그 여편네 얼굴 바로 된 데 없다는 건, 제가 아직 젊은이만큼 샘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게라 설명하고, 제가 보는 바가 가락꼬치 아니면 관역이라 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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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노파대로, 또 다른 소문을 퍼뜨려놓았다. 그가 알아낸 거는, 열 일곱에 시집와 서열 여덟에 첫아들을 낳았다는 것뿐인데, 그는 활짝 늘리고 부연해서, 박성권이가 한포락 적에 투전판에서, 남의 갓 시집온 색시를 도적질해 업어왔다고 훼방을 놓았다. 이 이야기는 사실과는 엄청나게 동떨어진 소리지만, 원체 조작된 말이 재미나서 마치 사실인 거나처럼 퍼져 나갔다. 다른 두 동서의 당자의 입에서 그렇게 들었노라고 허설대었다. 이 소문은 오랫동안 이 고을에 잦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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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성권네 후간, 토굴처럼 으슥하고, 바윗돌처럼 굳은 담벽으로 둘러 지은, 그다지 크지 않은 두 칸에, 한 절반씩 땅을 파고 들여놓은 커다란 독이, 3개가 있는 것을 아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이것을 손수 들어다 파묻은 절게가 두 사람 있기는 있으나 무엇 하려고 그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독 속에 대원 일화 은전이 그득그득 들어가 있는 것을 아는 이는 더욱 없었다. 갑오란에 엽전 몇 냥씩과 바꾸어서 모은 그 은전을, 그는 이렇게 깊게 간직해두었던 것이다. 집안에서나 혹은 절게나 먹서리들이 하는 말엔, 그 후간 토굴에는 특별한 대감님을 모셔두었다고 한다. 물론 한편 구석에 선반을 매고 백지 조박( 조각)을 늘인 당지기가 몇 개 올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소문을 퍼뜨려놓은 것은 도적을 방지하기 위한 박성권 자신의 계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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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밭이나 논이 날 때마다, 은값이 센 것을 보면 조금조금 은전을 팔어서, 남의 눈에 들지 않게 토지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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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돈놀이를 무섭게 하였다. 기일에 들여놓지 못하면 집이고 토지고 사정없이, 다 꿰어 들였다. 집 시세는 얼마 보잘 게 없으므로 대개 토지를 잡았다. 세간이 아직 넉넉하고 땅덩 어리나 가지고 있는 집이라면, 1년 만에 이자를 꼬아 매고 꼬아 매고 하여, 2,3년 안팎에 원금보다 이자가 몇 곱이 되게 만들었다. 그의 재산은 눈 위에 굴리는 눈덩어리처럼 불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이 바닥에서 갑부라는 것을 아는 이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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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그를 박성권이라고 부르는 이는 없어졌다. 언제 누가 부르기 시작 했는지, 세상 사람들은 그를 박참봉이라 존대해서 불렀다. 그의 집에 드나드는 앞에 나선 녀석들이 아첨하느라고 지어바친 존칭인지 모르나, 박리균이더러 물어볼라치면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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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여보게. 참봉 참봉하니 그게, 머, 제법 배슬이나 같애 뵈나, 돈으로 산 차함( 借銜) 참 봉이라네, 돈으루 산 거." 하고 등골에 꽂았던 담뱃대를 쪽 뽑아선, 천동 같은 화풀이를 하느라 곤지 애꿎은 담배만 푹푹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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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러나 그는 박참봉이다. 앞으로 사십을 잔뜩 치어다보는 서른 일곱 살 될 때 그는 벌써 다섯 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때까지 아들을 부르기를 큰놈이니, 또 은산서 난놈을 은산놈이니, 셋째니 뭐니 하고 불러왔는데, 집의 격식을 갖추기위하여 당당한 행렬을 지어 붙일 생각을 했다. 물론, 그의 부친은 박순일(朴淳逸)이요, 그의 이름은 박성권이니, 금수 목화 토( 金水木火土) 로 제법 행렬이 섰던 것이 분명한데, 맏아들을 낳았을 때, 박순일은 주색과 아편에 취해서 바른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큰놈이니 장손이니 하다가 죽고 말았다. 스물 전후의 박성권---아니 우리도 세상 사람들의 호칭을 따라, 이제부터 가끔 그를 박참봉이라 불러주자--- 그 박참봉이 삼십을 넘기까지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아니하였다. 원체 어려서 소시적부터 아들이 흔했으니까 대를 못 이을 염려도 없고, 또 쇠운에 처하여 돈을 잡느라 갖은 모험을 다 치러나는 통에, 통히 처자에 대한 애착을 붙여볼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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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겨우 서른 일곱 살 될 때에, 아들의 이름들을 지어주게 된 것이다. 죽은 아버지가 '순(淳)’ 자로 삼 수 변이고, 자기가 '권(權)’으로 나무 목 변이니, 이제는 불 화자 드는 자를 생각해내야 한다. 수생목(水生木)이요, 목생화(木生火)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해를 보내며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가, 빛날 형(炯) 자를 생각해내었다. 자기 이름이 마지막 자에 행렬이 들었으니 이번에는 형 자를 가운데 넣어서 지어야 한다. 그래 지어내인 이름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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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炯俊)이, 형선(炯善)이, 형걸(炯杰)이, 형식(炯植)이, 딸이 하나 있으나 재석에 팔았다고 재석네라부르던 걸 고쳐서 보패(寶貝)라 하고, 그대로 행렬에 넣지는 않았다. 형 선이와 형 걸이는 동갑인데, 형선이가 한 달 먼저 났다. 형걸이가 첩의 소생, 그러므로 서열에 드는 때문에 그를 셋째라고 부르지 않고, 금년에 두 살 난 형식이를 셋째라고 불러왔다. 여태껏형 걸이는, 자산서 저의 어미가 낳아갖고 은산으로 왔다고 자산놈이라 부르고, 이와 구별 하여 형선이를 은산놈이라 했다. 큰놈 혹은 장손이가 형준이로 되고, 은산놈이 형선, 자산 놈 이형걸, 셋째가 형식으로 되고, 재석네가 보패로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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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다 지어놓고, 그는 아들 셋을 죽 불러 앉히고 이것을 발표하였다. 표면에 나타내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제일 반가워한 것은, 셋째는 자기인데도 불구하고 어린 형식이를 셋째라고 부르는데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자산놈, 다시 말하면 형걸이었다. 그는 첩 소생이라서 받는 갖은 차별 중에서, 남에게까지 그대로 내밝히는 이름 위에 있는 모욕을 가장 꺼려 왔다. 그 밖에 다른 아이들도 무슨 놈, 무슨 놈 하고 그 '놈’하가 귀에 거슬리던 차이라, 대개들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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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구서 제석네의 이름은 보패라고 고쳤다. 보배 보 자 조개 패자. 그러니 보패라 구들 불러라. 식구에게나 절개에게나, 막서리에게나, 또 작인이나, 종들에게 전부 일러둘 게니 너희들두 서루 새 이름으로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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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셋을 내보낸 뒤에 마누라를 불러서 가르치고, 종들에게 이것을 말해두라고 명령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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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 형준이는 그때 열 아홉 살이어서, 제 방이 따로 있고 또 안해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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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일찌감치 자리에 누워서, 젊은 안해가 등잔불 밑에서 물레질을 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붕붕, 붕붕 찌그덕, 붕붕, 붕붕 찌그덕, 하는 단조로운 물레질 소리가 기름조는 소리와 어울려서 그의 귀에 자장가처럼 숨어들었다. 그는 졸림이 오는 것 같아서, 낑하고 돌아 엎들여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안해는 실토리(실톳)가 불룩하니 배가 불러지면, 가락꼬치에서 뽑아내고 새 것을 꽃았다. 물렛줄이 닿는 가락꼬채에, 나무 꼬챙이로 기름을 묻혀서 바르고 흘낏 남편 있는 쪽을 바라본다. 남편은 담배를 다 빨고, 그의 옆구리 있는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안해의 힐끗 보는 눈초리를 받아 씽끗 하니 웃는다. 안 해는 부끄러워 물레를 아까보다 더 빠르게 돌려댔다. 남편은 줄을 올리느라고 벙긋 왼손을 들 때마다, 높이 잘라 매인 띠가 끌러져서 흰살이 젖통 있는 옆으로 희게 번뜩번뜩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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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드끄런데 고만두구 이전 자." 하고, 털썩 베개 위에 머리를 눕히었다. 밝은 데서 말을 주고받기는 아직 서로 부끄러운 시절이다. 젊은 안해도 남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곧 일어나서 불을 끄고 옷을 끄르기가 부끄러웠으나, 남편의 명령이니 감히 뉘 말이라고 거역할 게냐고 제 자신에게 나이르면서, 인차( 이내) 물레질을 그만두었다. 물렛줄을 벗겨놓고, 입을 모두어 동그랗게 구멍을 만든 뒤에, 그 구멍으로 숨을 훅 내뿜어서 그는 등잔 불을 껐다. 캄캄한 밤이다. 옷 벗는 소리가 살랑살랑 들려온다. 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벗어서 윗목으로 둘러친 평풍에, 남편의 옷이 걸린 옆을 손으로 더듬어서 걸어놓는다. 다시 앉아서, 손으로 곰곰이 누벼놓은 누비 허리띠를 젖가슴과 허리로부터 끌러놓고 삼성 바지를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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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한 가지 한 가지 안해의 몸에서 벗어지는 것을 안타까이 기다리다가, 여기까지 와 서는 나직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안해는 마지막으로 버선을 뽑고, 무명 속옷 하나만 입은 채 가만히 이불을 들친다. 안해는 긴 원앙침---시집올 때 해가지고 온 베개 한 옆에 머리를 눕히고, 곱게 밋어서 따아 얹었던 머리코를 가만히 끌러서 머리 맡에 풀어놓고, 남편 있는 쪽을 등을 돌리고 모로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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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하는 남편의 말에 자칫하면 웃을 뻔했다. 낮에 시어머니한테 들은 말이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캄캄한 속에서 처음 입을 생끗이 열고 마음 놓고 웃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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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있더니 남편은 안해 있는 쪽으로 몸을 돌이키고, 다리로 약간 안해의 무종아리를 새려 감듯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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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이 형준이다. 빛날 형 자 준걸 준 자. 형준이. 이 댐부턴 그렇게 불러라." 하고 얼굴로 그의 등골을 부빈다. 이번에는 남편의 하는 말이 진정 우스웠다. 대체 자기가 어디다 남편의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 시집온지 2년이 되건만, 여보 하고, 남편을 불러본 적도 한두 번이 되나마다하다. 그런 자기를 보고 이 담부턴 형준이라고 부르라는 건, 과시 어처구니없는 장난의 말이 분명하다. 장손이든가 큰놈이든가 남이 부르니, 그것은 남들이 부르는 이름인 줄만 알았지, 여편네가 입 밖에 내일 이름이 아닌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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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등골에 얼굴을 부비는 것이 간지러워, 온몸에 오싹하니 소름을 돋히면서 안해는 홱 돌아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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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름은 형선이, 두뭇골 자산놈 이름이 형걸이, 애기 이름 이형식이, 그리고 재석네는 보패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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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내 이름은 박형준’하더니 한 팔을 북 안해의 목 밑으로 넣어 그의 머리를 끌어안는다. 안해는 가슴이 벅차서 한참 막혔던 숨을 푸--- 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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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름부텀 애기 아버지라구 그럴 테애요." 하고 간신이 말하고는, 엉겹결에 왼손으로 남편의 등을 안았다. 형준은 비로소 다섯 달 뒤에는 그가 아버지가 될 것을 생각하고, 안해의 약간 두둑한 배를 속옷 위로 가만히 만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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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하고 3년이 지났다. 박참봉 성권이가 갓마흔에 난다. 아들의 이름을 애명 이름으로 부르는 이는 하나도 없어졌다. 오직 보패만은 금년에 열 두 살에 나건만, 모두 재석네라고 부르지, 좀처럼 보패라고 부르는 이는 적었다. 그러나 그까짓 계집애 이름 같은 건 아무렇게 부르거나 계관할 게 없다. 이 밖에 맏아들 박형준이가 벌써 일남일녀를 갖고 있다. 손자 놈이 네 살에 난다. 그리고 금년에 갓 낳은 딸년이 있다. 손자 이름은 성기(成基)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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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되어도 박참봉의 포학하고 아구통 센 성격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원체 사십이 인생의 한창이니 정력은 더욱 왕성하여갔다. 큰댁 최씨(崔氏)는 마흔 두 살인데 가끔 영감 이한방에 들건만 금년 다섯 날 나는 형식이를 막내둥이로 하고, 단산이 된가보다. 형걸이 어머니, 다시 말하면 박참봉의 작은댁 윤씨(尹氏)는 서른 일곱이니 아직도 한창인데, 어찌 된셈 인지 열 여덟에 날 때 자산서 형걸이를 낳은 뒤, 그 아이가 금년에 열 아홉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니, 그도 또한 단산이 된지 오랜가보다. 서른 일곱이라도, 생산이 적고 바탕이 이쁘던 윤씨는, 얼굴에 주름 하나 없이 젊은이 같았다. 두뭇골집 뒤뜰 안에다 돌로 칠 성 탑을 모아놓고, 생산이 있게 해 달라고 치성을 들이고, 영감이 젊은 작첩을 않게 해 달라고, 후간에 대감을 모셔놓고 날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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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마음을 쓴 탓인지, 아직 눈에 띄게 박참봉은 몸을 달리 갖지는 않았다. 염려될 것까지는 없어도 그 대신 그는 술을 몹시 좋아하였다. 큰집에 있을 때나 작은집에 있을 때나, 무시로 술상을 청하므로, 안사람들은 항상 술안주를 준비해두었다. 포육이니, 명태니, 과일이니, 건조구니, ---이런 것은 언제나 벽장에서 떠나지 않았고, 육질도 어교 같은 걸 끊지 않았다. 고기 사냥 잘하는 영감을, 평양서 하나 데려다가 큰집 사랑 뒷방에 두어 전념 하여 물고기를 낚게 하고, 겨울에는 젊은 축들을 시켜서 매〔鷹〕를 갖고 꿩사냥을 시켰다. 소시적부터 잘하는 술인지라, 이즈음은 한포락 때처럼 폭음은 하지 않으나, 술을 몸에서 떼는 날이 적었다. 손수 술은 양조해 쓰고, 가끔 배와 새앙을 담거서 이강주를 만들고, 살구를 넣어서 술맛을 돋우어도 보고, 때로는 살모사나 구렁이를 독한 술에 녹여서 보약으로 마시기도 하였다. 술 탓에 다소 위장이 상한 것도 사실이겠으나, 원체 기운으로는 무엇게게나 져 본 적이 없는 강인한 분인지라, 그런 건 조금치도 괘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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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취하여서도 돈과 밭과 집안 가도와 자식들은 잊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상의하는 적이 없는 그는, 술이 얼근해서 혼자 사랑에 누운채, 노 이것저것 궁리하고 있었다. 무엇을 한번 결정하면 무엇이든지 해놓고야마는 괴팍한 성질이 있다. 자신만만하여 묵묵히 실행 하는 그 의 꿋꿋하고 훨 수 없는 성격은, 그의 생각한 바가 한 번도 그릇된 적이 없는 데서 오는 자신에 의하여 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돈의 위력을 누굽다도 확신하는 날카로운 선견의 명을 갖고 있다. 그는 아직 문벌이나 가문이 행세를 하는 세상인 줄 알건만, 이런 것이 자 기의 돈 앞에 궤배(跪拜)할 날이 머지 않아 올 것을 확신한다. 무엇 보다도 20년 전에 사 두었던 은전이 이즈음 행세하게 되는 것을 은근히 믿는 때부터 그의 자신은 더욱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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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은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킨 후엔 신식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 그는 집을 물려 지킬 장남이니, 그만 공부면 충분하다 하였다. 돈놀이하는 것과, 추수하는 것과, 집안 일 전체를 감독하고, 사람을 부리는 재주만 배워두면 그만이라 하였다. 또 아들 자신도 제 동생 놈들이 기독학교가 생겼다고, 서당을 집어치우고 그리로 들어갈 때에, 함께 몰려갈 염을 내지 않았고, 서당을 집어치우고 그리로 들어갈 때에, 함께 몰려갈 염을 내지 않았고, 3년 만에 이것이 없어지고 군수가 주해서 동명학교가 설립될 때에도 새 학문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하기는 동생들이 대번에 심상과 삼년생이 되고, 이듬해에는 고등과 일년이 될 판인데, 지금 겨우 일학년 학생이 되는 것이 부끄러워서 안가겠다고 했다는 말도 지어내인 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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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혼인에도 박참봉은 머리를 썼다. 맏아들 형준은 이미 삭명(朔明) 경주 김씨와 혼사를 지내, 벌써 장손과 손녀를 보았고, 또 보아 하니 가도 범절이 옳아서, 며늘아이의 하는 품이 상냥하고 손 쓰는 법도, 맏며느리 되기에 흠잡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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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들 형선이는 한고을 안 상부((上部), 강선루 뒤에 있는 연일 정씨와 혼사를 작정 하여, 편지도 붙였고 선채도 보냈다. 오래지 않아 장갓날이 올 것이다. 정씨 집안 일은 한고을안이니 손에 끼어들게 잘 안다. 지금은 그만두었으나 벼슬도 높았고, 또 재산도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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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가 된다면 형선이와 동갑되는 형걸이가 다소 문제거리가 된다 하겠다. 서자인 때문에 좀처럼 좋은 혼처가 생길 성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어디 상당한 집안에 규수가 있는 줄만 알면야, 못 될 일이 세상에 있으랴 하고, 그것도 별반 마음에 언잖게 새겨두지는 않는다. 형걸이 놈이 성질이 왈패스럽고, 키도 한 달 먼저 낳은 형선이보다 훨씬 큰 것은 그렇다 쳐놓고, 제 맏형 놈보다두 닷 분 가량이나 커 보이는 것이 좀 못마땅하였다. 크는 키는, 안 자라는 키와 함께 인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 쳐놓아도, 심술이 짓궂은 것만은 딱 질색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서당에서나, 학교에서 남의 아이를 상처가 나도록 때려서 말썽을 일으키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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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댁이 귀하다고 밸을 길러 그런가 하면 또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박참봉 자기가 어렸을 때 그렇게 포학스런 말성꾼이던 것을 그는 형걸이 놈이 일을 저지를 때마다 가끔 생각 해보고, 혼자 속으로 빙그레 웃어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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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쨌건 박참봉 성권네 가운은 활짝 뻗칠 대로 올라 뻗친 셈이다. 그가 만족할 뿐 아니라 온 가족이, 그리고 표면으로 보기는 종이나, 절개나, 막서리나, 작인이나, 모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때때로 뒤꼍에 나가 십이봉 밑으로 유유히 흘러 대동강을 이루는 비류 강의 강물을 만족하니 바라보았다. ---20년 가까운 동안 저 강물은 나와 함께 노력과 공포와 기쁨을 일시에 휩쓸어 삼키면서, 몇 천 년 한날처럼 대동강으로, 황해 바다로 흘러가는, 그의 걸음을 멈춘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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