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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現代評論[현대평론]〉에 ‘소설가의 시인평’이란 제목 아래 金億論[김억론]을 본 일이 있다. 그리고 연하여 조선 현대 시인 전부를 차례로 평하여 보려 하였다. 그러나 김억론을 발표한 뒤에 갑자기 나의 주위의 사정의 변화와 생활 상태의 격변 등으로 3년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다음에 때때로 계속하여 쓰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참고서의 불비로 이렁저렁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번 三千里社[삼천리사]에서 춘원, 요한, 파인 3인집을 한권 기증받고 책장 속에서 요한의 ‘아름다운 새벽’을 얻어 내어 우연히 요한의 아직껏 발표한 시 전부의 구비된 기회를 타서 이 글을 쓰려 붓을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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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나는 같은 소학교를 다녔다. 그는 나보다 한 연급 아래였었다. 그런데 내가 고등과 1학년 시대에(내 생각 같아서는) 그다지 공부를 잘못하지도 않았었는데 낙제를 하였다. 이리하여 요한과 같은 연급이 되었다. 우리가 다니던 숭덕학교가 불이 붙었다. 그 때문에 임시 교사를 사장골 어떤 집에 정하였다. 그때에 신문에는 「長恨夢[장한몽]」이며 「獄中花[옥중화]」등이 연재될 때였었다. 그때에 요한과 나는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침에 신문에서 본 소설을 서로 이야기하고 하였다. 우리가 열세 살 적에 요한은 東京[동경]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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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나던 해에 그때에 숭실중학에 다니던 나는 학년 시험 때에 성경시험에 컨닝을 하다가 선생에게 들켜서 그것을 기회로 동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요한은 明治[명치]학원 중학부 2학년생이었었다. 그리고 요한의 부친은 나에게 “요한은 장래 문학을 연구케 하련다”는 말을 자랑하였다. 나는 그때 문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몰랐다. 그리고 요한은 나보다 앞섰구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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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도 나에게 明治[명치]학원에 입학하라 하였지만 나는 東京[동경]학원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표면적 이유는 ‘明治[명치]학원은 조선 사람을 너무 優遇[우우]하므로 참 공부는 잘 안 된다’는 것이었지만 이면적 이유로는 같은 학교에서 요한보다 아랫학년에 다니기가 싫었던 것이었었다. 그러나 1년 뒤에 나도 明治[명치]학원으로 전학하였다. 조선 사람이 없는 학교는 너무 다니기가 쓸쓸하였던 것이었었다. 그러나 요한과의 교제는 그다지 없었다. 그만치 프라이드한 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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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나는 문학을 알았다. 그리고 문학의 취미와 가치를 깨달았다. 이리하여 요한과의 교제가 다시 시작되었다. 요한이 明治[명치]학원 4학년 내가 3학년 때에 요한은 동교 校報[교보]인 ‘白金學報[백금학보]’에 편집 동인으로 되었다. 요한이 잡지 편집의 경험을 얻은 것이 여기에서였었다. 요한은 그때는 소설을 목적한 듯하였다. 明治[명치]학원 4학년 회람잡지에는 요한의 소설이 있었고 3학년 회람잡지에는 나의 소설이 있었다. 〈靑春[청춘]〉의 현상 모집 때도 그는 소설을 써서 2등으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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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요한은 시인 川路柳紅[천로유홍] 씨의 사랑을 받아서 그의 문하에서 시의 연구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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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그다지 향기로운 재주를 보이지 못하던 요한은 시에서 그의 풍부한 재능을 나타내었다. 1917년 우리 몇몇(요한, 늘봄, 나 그 밖 2․3인)이 〈創造[창조]〉를 발행하려고 준비할 때는 그는 시에 대한 수양을 충분히 쌓은 때였었다. 〈學友[학우]〉에 詩作[시작]이 발표되며 〈創造[창조]〉에 「불노리」가 발표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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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연하여 발표된 그의 시는 모두가 봄날 안개와 같이 사람의 심현을 울리는 ‘고향’과 ‘유년시대’에 대한 추억, 동경, 연정 등이었었다. 川路[천로]씨의 문하에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島崎藤村[도기등촌]씨의 감화를 많이 받은 그림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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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한의 ‘복사꽃이 피면’과 소월의 ‘萬里長城[만리장성]’을 비교할 때에 우리는 두 시인의 차이를 똑똑히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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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애끓는 사정을 나타내는데 한 사람은 객관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한 사람은 주관적 태도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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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요한의 시의 심경이었었다. 아름다운 未知物[미지물]에 대한 동경과 애타함, 이것이 그때의 그의 시의 전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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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많으시고 무서운 한아버님 안 계신 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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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년시대와 고향에 대한 이만한 순정이 어디 또 다시 있으랴. 그리고 그러한 순된 동경을 이렇듯 여실히 그려 낸 문자가 어디 또 다시 있으랴. 나는 여기 요한의 유년시대의 환경과 그의 생장을 좀 써 보려 한다. 그는 외롭게 길러난 아이였었다. 지금은 그의 집에 수만의 재산이 있다 하나 그는 아주 빈한한 가운데 길러난 아이였었다. 처음 그가 東京[동경]으로 갈 때에도 창이 다 떨어져서 너덜너덜하는 모자를 쓰고 출발할이만치 가난하게 길러난 아이였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도 아무러한 명망이며 세력이 없는 집안에서 길러난 아이였었다. 재산이 없고 세력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비위’라도 좋아야 하는 것인데 요한은 비위도 없는 아이였었다. 그때에 숭덕학교에는 세 가지의 세력이 있었다. 나를 주장으로 한 어린아이들의 한 그룹과 완력을 자랑하는 큰 아이들의 한 그룹과 공부를 전심으로 하는 한 그룹의 이러한 세 가지의 세력이었었다. 요한은 당연히 제 3의 그룹에 참가할 것이었겠지만 교제성이 없고 소심한 요한은 개밥의 도토리와 같이 혼자 떨어져서 부러운 듯이 우리들의 노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에 요한은 ‘쥐’라는 별명을 듣고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성 ‘주’에서 나온 별명이지만 그의 태도도 쥐와 흡사하였다. 혼자서 몰래 소근소근 장난하다가는 남이 보면 얼른 피하고 소심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것이 마치 쥐와 같았으며 그의 身形[신형]까지 화가에게 감정시키면 쥐와 같은 점이 많았다. 그러한 외형과 성격과 배경(사회적으로와 재산상으로의)과 태도는 저절로 친구가 없이 지내는 외로운 아이로 만들었다. 그는 집안 사람에게밖에는 사랑이며 존경을 받아보지 못하였다. 그의 동무라고는 그의 아우 ‘요섭’군뿐이었었다. 그가 동경으로 가서도 학비 관계 때문에 기숙사에 꼭 들어박혀서 나다니지를 않았다. 그가 교제하는 동무라고는 기숙사의 舍生[사생]뿐이었었다. 그는 마땅히 친근하여야 할 조선 유학생들까지 피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가슴에 사무쳐서 무르익은 바가 망향심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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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에 대한 아름다운 동경이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모두 對人的[대인적]이 아니요 對我的[대아적]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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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 가운데 향토미가 많은 것도 또한 그 원인이 여기 있었다. 평양이라 하는 도회에 길러났지만 그는 평양을 무대로 길러난 아이가 아니고 평양시외의 자기 집 뜰과 그 근처 일대뿐을 무대로 길러난 아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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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사건 뒤에 요한은 상해로 건너갔다. 만리타향에서 고향을 생각하는 詩作[시작]은 연하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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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상해서 춘원을 알았다. 두 외로운 혼의 주인은 서로 공명하였다. 춘원은 요한에게 그 ‘쥐’와 같은 성격 가운데서 사람의 사회에 대한 동경을 보았고 요한은 또한 요한으로 춘원에게서 백 가지의 공격을 받는 춘원에게 내심에는 인도주의에 대한 진실한 동경이 있음을 보고 서로 공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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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요한을 사회에 소개하였다. 이리하여 쥐가 사람의 사회에 들어왔다. 그러나 급기야 들어와서 보니 사람의 사회도 별것이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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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로서 사람의 사회를 바라보고 자기의 환경을 돌아볼 때에 생겨나던 그 모든 아름다운 꿈은 그가 사람의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때부터 삭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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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가 사람의 사회에 뛰쳐들어 온 뒤엣 詩[시]였었다. 아름다운 열정과 동경은 다 없어지고 거기는 재간과 개념 밖에는 찾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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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이 글을 쓰는데 순서를 그릇하였다. 열정의 시인 요한에서 문자의 才人[재인] 요한으로 변하기까지에 그의 중간 시기가 있었음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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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상해서 자연과학을 전공하였다. 예술과 과학의 교섭에서 생겨난 몹시 침착한 시풍이 그에게 한동안 있었음을 또한 잊을 수 없다. ‘황혼의 노래’, ‘아기의 꿈’, ‘조선’ 등등 몇 편의 몹시 노블리티하고도 우아한 시는 그가 과학을 전공하는 몇 해에 생겨난 시였었다. 그러나 그가 조선으로 건너오며 춘원의 주선으로 사회인이 되고 동아일보 학예부장, 일전하여 同[동] 평양지국장, 재전하여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는 몇 해에 그에게서 나온 시는 대개 열정의 灰燼[회신]뿐이었었다. 다만 ‘영혼’과 그 밖의 몇 편이 있었으니 ‘영혼’은 그의 몹시 사랑하던 누이동생을 잃어버린 뒤에 마음에 일어나는 비상한 감회를 적은 것이며 그 밖 몇 편은 또한 그와 비슷한 근거가 있을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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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3년 전 어떤 겨울날 요한이 太白[태백]상점이라고 고무신 장사를 할 때에 거기서 나는 요한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마작 이야기가 나서 나는 “사람의 운명이라 숙명이라 하는 것은 몰각할 수가 없으니 마작도 손이 잘 드는 날이 있고 안 드는 날이 있다”고 하매 그는 정색을 하면서 “그것은 운이 아니고 챈스(기회)라” 대답하였다. 여기 요한의 파탄이 있다. 남의 그것이 챈스라 할지라도 ‘운’이라고 정정을 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그에게는 정당한 일일 것이다. 그것을 자기가 먼저 챈스라고 정정하는 데 시인으로서의 요한의 파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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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사회인이 되며 과학생이 되면서부터 그의 詩境[시경]을 잃어버렸다. 휘트만은 백만의 발을 가진 뉴욕의 거리에서도 시를 발견하였지만 고향과 가정 밖에는 다른 아름다운 대상을 여태껏 가져 보지 못하고 외로이 일어난 요한에게는 ‘과학’에 쏠린다는 것과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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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사회인으로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회인으로의 성공이 크면 클수록 시인으로서의 요한의 그림자는 엷어 간다. 이것이 조선문학을 사랑하고 조선 문학 건설에 힘을 쓰는 우리에게는 분하고도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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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가 요한에게 드리는 가장 큰 권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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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이 되면 문학의 학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생장과 성격에 미루어 사회인이 되면 될수록 그의 詩園[시원]은 반비례로 줄어질 종류의 사람이다. 단순하고 동심의 시인 요한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종류의 사람이니 그런지라 나는 거듭 요한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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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의 권고인 동시에 조선 문예 애호가를 대표한 나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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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요한의 ‘연꽃’이라 하는 시인 동시에 지금의 요한을 설명하는 적절한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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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조선일보], 1929.11.2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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