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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역(井邑驛)을 지나서야 날은 차창 밖에서 부윳이 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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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이윽고, 옛날엔 열아홉 살 먹은 과수가 스물한 살 먹은 딸을 데리고 기러기로 더불어 울며 넘었다는 장성 갈채를 마침, 낙향하는 여급과 귀성하는 의학생(醫學生)의 도란도란 재미있는 한담을 싣고, 씨근거리면서 기어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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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다가 필경 지쳐서는 굴을 뚫고 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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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蘆嶺) 터널을 빠져나오니 남북의 분수령이라, 가느다란 실개천이 선로를 따라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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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꽝꽝 얼어붙은 것을 보았는데, 동지에 영 위의 개천물이 그대로 흐르고 있고, 역시 남방 풍물인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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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해하느라니까, 옆에 와 앉았던 상인태의 텁수룩한 나그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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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뻐억뻑 골통대를 빠는 사이사이, 설명이 구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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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짐장이 한참이고, 아그(아이)들이 맨발로 학교를 댕기지라우. ……제주는 또, 가시면 겨우내애 배추가 밭에서 새애파랗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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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라우면서도 다뿍 늘어진 발음, 워너니 차 안은 어느덧 호남 사투리가 판을 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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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가을, 추수가 시원치 않았던 들판의 논에는 군데군데 논보리만 벌써 두세 치나 자라, 아직도 먼 4월의 양식을 약속하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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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에 걸음을 주던 새벽 농군이 손을 멈추고 우두커니 차를 바라다보고 섰다. 무얼 생각하는 것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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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 건너로, 아침 안개가 자욱히 마을을 싼, 신흥 뒤꼍의 방장산(方丈山)의 높고 큰 덩치가, 솟아오르는 조양(朝陽)을 가득 받아 단풍철인 듯 누르붉게 불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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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리역(四街里驛) 구내엔 산더미 같은 장작 눌이 몇 개고 쌓여 있는 게 보기만 해도 푸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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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을 말끔 한꺼번에 불을 땠으면 꽤 뜨뜻하렷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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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궁이 불탈 때처럼, 상제도 무둔왈(撫臀曰) 열(熱)타 하실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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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은 어떤 상인들이 큰 이문을 보려고 드뿍 매점을 해둔 것인데, 그통에 경성 방면의 장작시세가 턱없이 더 올랐고, 한 것을 얼씨구나 좋다고, 마침내 수송을 하자니까는, 지사영감이 영을 내려 덜컥 금지를 시켰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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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난 데 도적질이란 속담도 있지만 원체 너무들 하더라니, 거저 잘 꾸사니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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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리에서 광주로 갈아 타느라고 차를 내리는데, 밤새껏 동행을 한, 예의 저편쪽 양장 여급군이 자꾸만 내 두상에 주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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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서 광주까지 천리길을 무모(無帽)로 가는 줄은 모르고서, 저 나그네가 모자를 잊고 내리거니 하여, 보기에 딱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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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되어 그만침 꼼꼼하니, 팔자가 저렇지 않고 진작 누구네 집 며느리가 되었더라면 엔간한 시어머니한테는 눈치밥은 안 먹었을걸 싶어 애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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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 ․ 조(曺) 두 벗의 권을 사양타 못해, 술은 먹지도 못하는 주석엘 나아갔더니, 요정은 여기도 잔치집같이 풍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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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는 웬만한 풍류객이 웬만큼 벼르고 모은 자리가 아니고서는, 위지왈 ‘벙어리’와 ‘파아마넨트’를 초화(草花)로 구경하거나 그 알량한 유행가 토막을 얻어듣기가 고작인데, 역시 제바닥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각시들이(맵시는 촌스러도) 개개일자로 뽑는 남방노래가 멋들어져 모처럼 하룻밤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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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대구두’라는 별명에 꼭 맞도록, 덜퍽 커가지고는 털털하게 생긴 각시가 들어오더니, 뒤미쳐서는 그 십분지 일도 못되는 애기가 들어와서 괴상한 콤비를 이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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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가 하도 작길래 물어보았더니 열여섯 살이라고, 그런데 고놈이 노래로는 좌중을 압두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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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잘하는 그 노래에 흥이 나기보다는 액색해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이튿날 밤에는 애저찜을 먹다가 문득 그 애기각시가 더불어 생각이 나서 저깔을 놓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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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미처 신(辛)이 참석을 했고, 조(曺)와 둘이서 북을 들여다놓고 번갈아 장단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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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曺)는 북으로 명인급에 드는 활량이요, 신은 거저 아마튜어라는데, 내 눈으로야 잘 치고 못 치는 것을 분간할 길이 없지만, 한갓 그 둘이가 다 같이 북채를 들고 앉아 일종 기이한 관이 있을 만큼 도취상태에 빠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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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차차로 진행함을 따라, 더우기 멋들어지게 목이 넘어갈 때면 팔을 높이 들었다 내렸다, 고개를 꾸뻑거리는 것이며 “좋오타!” 추는 소리며, 모든 제스처가 평상시의 그들의 몸짓과는 딴 사람인 듯 훨씬 억양이 크고, 그러하되 전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썩 자연스러운 품이 당자네 자신도 모를 사이, 절로 그래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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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이면 양악에서는 피아노에 의한 반주이겠는데, 가수 말고 반주자까지도 역시 그와 같이 도취가 되어 몰아(沒我)의 경지에로 젖어들어갈 수가 있는 것임을 비로서 알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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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창작을 할 때에 작중 인물의 생활에 동화가 되어, 어느덧 나 자신도 모르는 동안, 그의 감정의 변화를 따라, 혼자서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하고 노하기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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