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막상 이렇게밖에는 할 말이 없다. 또 그 밖에는 재주가 없다.
5
“우리는 참으로 좋은 소설을 아직 가지지 못했소. 바야흐로 인제는 그것을 가져야 할 때요. 소설을 잘 쓰지 않고는 그러나 참으로 좋은 소설을 가질 수가 없소.”
9
생각건대 제의(題意)가 창작방법 혹은 문단 주조(主潮)에 관한 무엇이나 새로운 논의랄 것을 제언하란 뜻이기도 한 성싶다.
10
선량한 의도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섬뻑 그렇게 내키는 줄을 모르겠었다. 세상이 모두들 일찍이 목적의식론이며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 등을 비롯하여 최근의 성격론이야 생산문학론이야 전기소설론이야에 이르기까지 실로 넓은 마당의 병아리 떼를 세기같이 까다롭고 성가시고 수많이 제창된 창작방법과 주조론 들에게 그만 정신이 오락가락 머리가 흔들릴 만큼 식상이 되었노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을, 무얼 또다시 그 경황에다가 논의네 제언이네 하여 붐배를 놓자고 드니 말이다.
11
이 식상설(食傷說)이 물론 어디까지고 가장 정당한 지탄이냐? 반대로 피상적이요 부당한 중상이냐? 즉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면 유물 변증법적 창작방법이 인간탐구면 인간탐구가 리얼리즘이면 리얼리즘이 기타 모든 그 소위 까다롭고 성가시고 수많이 제창된 창작방법 내지 주조론(主潮論)들이 과연 그때그때의 현실적인 정세에 적응하여 필연적으로 발생된 적절 당연한 주장이요 요구이었더냐? 혹은 그렇지 않고서 시대적 현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만 내지문단이나 외국의 풍문을 기계적으로 번역한 연습논몬이요 탁상공론에 불과했던 것이냐? 그리고 또 그 전부가 죄다 그러했더냐? 개중의 일부만이 그러했더냐?의 시비는 심히 거추장스런 일로 신중한 비판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간단히 그 판단을 짓는다는 것은 경솔한 거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12
따라서 이 자리에서는 차라리 불문에 우선 붙여둠이 마땅하겠고, 그러므로 하필 그러한 식상설에 부동 가담이 된 때문인 것이 아니라 아무렇든 맥락이 복잡기괴하고 말썽 많은 그 와중에다가 황차 제법 행세라도 할 수가 있을는지 어떨는지조차 모르는 변변치 못한 논의 나부랭이를 가뜩이나 남의 정신만 못 차리라고 한가지 또 들이뜨린다는 것이 우황(尤況) 전문하는 본업의 평론가도 아니면서 하니 어디로 보나 객적은 짓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모름지기 말을 삼가겠다는 소견이다.
13
하고, 그저 수수하게 그리고 말썽이 없도록
15
고나, 육담으로 사발통문식의 공론을 해볼 따름인 것이다.
19
누가 여기에 이의가 있겠으며 반대를 할까보냐.
20
또 소설을 잘 쓴 소설이면 발자끄도 도스또예프스끼도 조이스도 등촌(藤村)도 지하(志賀)도 도목(島木)도 춘원(春園)도 효석(孝石)도 모두 다 거기에 포함이 될 수가 있으니 오죽이나 편리한 말일까보냐.
21
발자끄처럼 도스또예프스끼처럼 조이스처럼 소설을 잘 쓸 것이다. 등촌처럼 지하처럼 도목처럼 소설을 잘 쓸 것이다. 춘원처럼 효석처럼 소설을 잘 쓸 것이다.
22
백만의 창작방법을 알고 있고 육조(六曹)를 속에다 배포했은들 소설을 쓰는 사람일 바이면 그리고 소설을 쓸 바이면 소설을 잘 써야망정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소설을 잘 쓰지 못하고서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인고.
23
발자끄와 마찬가지로 당시 불란서의 현실을 관찰하고 감각하고서 그 리얼을 캐치하고 한 사람이 비단 발자끄 한 사람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설로 쓰고자 한 사람 또는 쓴 사람도 발자끄 외에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은 모두 소설을 안 쓴 사람이거나 소설을 잘 쓰지 못한 사람들이고 유독 발자끄 하나가 소설을 잘 썼던 것이다. 발자끄의「인간희극(人間喜劇)」백 편이 즉 그것인 것이다.
24
만일 발자끄도 소설을 잘 못 썼다면 진실로 나뽈레옹이 검으로써 성취한 바에 비길 수 있는 그 거대한 문학적 업적이 결코 이루어졌을 이치가 없지를 않은가.
25
일반으로 도스또예프스끼와 그의 문학이 그러하고 조이스와 그의 문학이 그러하고 등촌이며 지하며 도목이며와 그들의 문학이 그러하다. 춘원과 그의 문학이 그러하고 효석과 그의 문학이 그러하다.
26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들 몰랐던 게 아니다. 소설을 잘 쓰지 못했던 때문이지. 그 시대 그 주류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못했음도 역시 그 때문─소설을 잘 쓰지 못한 때문이다.
27
인간탐구의 이론을 몰랐던 게 아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문학적으로 그것을 형상화하지 못한 때문─소설을 잘 쓰지 못한 때문이지.
28
리얼리즘이란 자의 비밀 역시 그러하고 과거의 온갖 창작방법들이 죄다 그러하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이 생겨나는 이론들도 또한 그러할 터이다.
29
그러므로 요결(要訣)은 소설을 잘 써야망정이지 소설을 잘 쓰지 못하고서는 천하 없어도 안될 말이다.
30
“대체 그러면 무얼 어떻게 해야 소설을 잘 쓰는 것이냐?”
31
이 말에 대하여나는 기교론(技巧論)의 폄(貶) 들기를 무릅쓰고 우선 “기교, 정당한 의미의 기교……”
33
과학자와 같이 관찰하고 철학자와 같이 생각하여…… 이것은 물론 기교의 영역 이외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34
그러나 그 관찰하고 생각하고 해서 얻은 바를 즉 어떤 하나의 테마를 마침내 예술(文學)적으로 형상화시키는 소임은 전혀 그의 예술가적인 솜씨, 기교에 달리게 되는 것이다.
35
테마는 현실에다가 배양을 시켜야 비로소 생명을 갖는다. 현실적인 생활을 시킨다고 말해도 좋다.
36
하되 테마와 그를 옷 해입힌 현실과가 털끝만한 빈틈이랄지 무리가 없이 꼭 얼려야 한다. 이것이 그리고 기교에 있어서의 즉 소설을 잘 쓰는 제1장 제1조다.
37
제아무리 훌륭한 테마라도 완전히 그것이 살지 못한 소설, 테마와 어긋나게 현실화한 소설, 일껏 테마는 어디로 가버리고서 현실만 사실적으로 전시된 소설, 이런 소설들은 결코 잘 쓴 소설이 못된다.
38
내지의 혹은 외국의 잘 쓴 소설로 어디 그렇게 테마가 불분명하거나 잘 살아 있지 못한 소설을 보았는가?
39
말이 아름다와야 하고 문장이 능란해야 한다.
40
아름다운 말과 능란한 문장, 대수롭잖은 듯해도 문학예술의 결정적인 한몫을 결정하는 것이다.
41
아름답지 못한 말, 능란하지 못한 말, 통틀어서 문학적으로 세련 미화되지 못한 어·문으로 씌어진 소설이 잘 쓴 소설인 소설을 본 적이 있는가.
42
경찰서 앞에 주욱 늘어앉은 대서인들이 촌영감을 위해 설유원(說諭願)을 써주는 용어와 육법전서나 면청의 공문식의 문장으로 소설을 써도 그게 소설이 될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문학강의도 있던가?
43
체홉의 제 단편은 그 아름다움이 거진 말의 아름다움에 있다고까지 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44
“거진……”토록은 과한 소리이겠지만 아마 체홉의 소설이 소설 중에서도 잘 쓴 소설인 연유가 그 3분지 1의 조건은 말의 아름다움에 있을 것이다.
45
이렇듯 지나친 혐의가 없지 못한 중기교론(重技巧論)이 만일 미덥지가 않거들랑 아무고 허실삼아 어디든지 신문사에 부탁을 해서 신춘문예를 뽑고 난 휴지통을 쏟아다가 이름하여 소설이라고 한 원고들을 좀 자세히 읽어볼 것이다.
46
그런 것은 오히려 공부하는 사람들의 내장(來將) 있는 허물이요, 그래서 적절치 못한 극단의 예라 하겠지만, 이미 제마다 제각기 한 사람 몫의 작가행세를 하고 있다는 문단 현역의 여러 작가들이 연방 써내고 있는 수많은 소설들 즉 현재 조선의 소설이라는 것이 참으로 얼마나 창피한 소설들이냔 말이다. 죄다를 쓸어넣고 “현재 조선의 소설이라는 것이……” 운운하는 게 옥석구쇄(玉石俱碎)의 민망함이 없지 않으나 중견이라고 이르는 사람 혹은 신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참으로 얼마나 많은 소설가 낙제생이 있음인고! 말이다.
47
모두들 그처럼 소설 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고 그처럼 소설을 잘 쓰지 못하기 때문에 조선문학을 유치하게 한 것은 기교를 가지지 못했음에 큰 허물이 있는 것이다.
48
이미 문학적으로 터가 잡혀 독자한 개성과 전통을 가진 문학에 있어서는 기교는 문제가 되지 않고 내용이 그의 가치─상대적 가치를 결정한다.
49
똘스또이나 모파상의 작품에 대하여 지드나 쇼의 작품에 대하여 바투 가까이는 등촌이나 지하의 작품에 대하여 시방 뒤삐여지게 누가, 그의 용어가 어떻고 문장이 어떻고 하는 귀 안 뺀 평론가는 없다. 그들을 논 할 때의 중심은 반드시 내용이요, 기교가 좋고 낮은 것은 문제권에 넣지 않는다.
50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신춘문예를 뽑고 난 문학청년들의 습작품이나 근일 문단의 이야기거리이던 ○○○ 씨의「××」같은 소설을 써도 상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소설의 기교쯤 벌써 다 졸업을 했고 그러므로 기교에 있어서 실수를 저지를 까닭이 없고 사실로 그것을 저지르지도 않고 하기 때문인 것이다.
51
그러나 시방 조선의 문학처럼 전통이 서지 않고 그래서 독자한 성격이 이루어지지를 않아 대세계문학적(對世界文學的)으로는 아직 문청기를 면치 못한 경우에 있어서는 내용 이전에 우선 기교가 대단히 중요하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52
무릇 소설에 있어서 기교란 조각가로 치면 정을 가지고 대리석에다가 어떤 하고자 하는 바 형(型)을 쪼을 줄 아는 기술과 일반이요, 화가로 치면 채관(彩管)을 가지고 캔버스 위에다가 어떤 하고자 하는 바 상(像)을 그릴 줄 아는 기술과 일반이요, 성악가로 치면 자기의 성대를 통하여 어떤 하고자 하는 바 음을 낼 줄 아는 기술과 일반이요 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
53
그러므로 만일 되다가 못된 조각가가 있어 걷는 사람을 새긴답시고 앉은뱅이를 만들어 놓았다면!……어지빠른 화가가 있어 미소하는 얼굴을(모나리자를) 그린답시고 강짜싸움에 안면근육이 뒤틀린 히스테리의 화상을 만들어놓았다면!…… 껄렁껄렁한 음성가가 있어「페르샤의 연가」를 부른답시고 장마 때 맹꽁이 우는 괴성을 지르고 있다면!…… 그 얼마나 우리는 기절을 해야 할 것인고.
54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걷는 사람’이랍시고 앉은뱅이를 새겨놓는 조각가와 같은 소설가를, 미소하는 얼굴이랍시고 뒤틀린 히스테리 여인의 얼굴을 그려놓는 화가와 같은 소설가를,「페르샤의 연가」를 부른답시고 맹꽁이 우는 소리를 지르고 있는 성악가와 같은 소설가를 우리 문단에 가지고 있음인고.
55
그리고 한편으로 우리는 그렇듯 무서운 소설가들이 써 내놓은 무서운 작품들을 단지 자기가 제창한 이론과 들어맞는다는 것만으로 하여 ‘걷는 사람’이라는 게 앉은뱅이가 되어버린 조각 같은 소설을, 미소하는 얼굴이라는 게 히스테리 여인의 뒤틀린 상오가 되어버린 그림과 같은 소설을,「페르샤의 연가」라는 게 맹꽁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성악 같은 소설을 잘 썼다고, 좋은 소설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추앙하는 소설 모르는 소설비평가를, 마찬가지로 무서운 비평가를 더러 모시고 있음인고.
56
여태 흉을 보고 나서 생각하니 결국 제라서 저의 흉을 본 셈, 이런걸 위지 왈 공중으로 대고 뱉은 침이 제 얼굴에 가 떨어진다는 격인가보다.
57
나 역 별수 없이 앉은뱅이를 새겨놓고 ‘걷는 사람을’ 새겼소 하는 조각가, 히스테리 여인의 경련한 얼굴을 그려놓고「모나리자」를 그렸소 하는 화가, 맹꽁이 소리를 지르면서「페르샤의 견가」를 부르오 하는 성악가와 진배없는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임을 면치 못한 자이어서 말이다.
58
그러나, 그러므로 나도 공부를 하겠다. 소설을 잘 쓰는 공부를 게을리 않겠다. 장차 어느날까지가 나의 소설 쓰는 날일는지는 나는 기약을 못한다. 그러나 소설 쓰기를 고만두는 그날 그 시각까지는 꾸준히 소설 잘 쓰는 공부를 할 생각이다.
59
이렇듯 자신의 재주와 공부의 모자람을 알고 동시에 더 향상을 꾀하여 마지않는 각오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남들더러도
63
“우리는 참으로 좋은 소설을 아직 가지지 못했소. 바야흐로 이제는 그것을 가져야 할 때요. 소설을 잘 쓰지 않고는 그러나 참으로 좋은 소설을 가질 수가 없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