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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작안내(自作案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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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7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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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안내(自作案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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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작품을 가지고 말하면 그만이지, 그 이상 제 작품에 대한 변명이나 설명은 필요치 않다고 흔히들 말한다. 혹은 그럴는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처럼 작품 외에 작품 수와 거반 비등(比等)한 양의 평론으로, 자기를 내세우고, 제 문학적 태도를 주장하고, 탐구과정을 명시하는 사람이 다시 자작(自作)에 대한 특별한 안내서를 쓴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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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가가 제 작품에 대하여 기회 있는 대로 여러 가지 창작상 실제를 이야기해 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최근과 같이 창작방향이 혼란하고, 창작적 신조가 상실되어 있는 시대에 있어서는 비평정신의 선양을 돕고, 우리의 문학적 성격을 찾아보려는 노력에 편의를 주는 의미로라도 작가는 일층 긴밀한 태도를 취하여 비평가와 협동하지 않으면 안될 줄로 생각한다. 작가가 침묵을 지키는 것만이 결코 미덕이 아닌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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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협동을 위한 노력이 논쟁이거나, 항의거나, 또는 제창이거나, 자작안내이거나를 막론하고 그곳에 거짓이 없고 항상 우리 문학의 진정한 길을 찾는 정신에만 의한 것이라면, 헛되이 배척할 것이 못될 줄로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편집자의 소청에 나는 지금 나의 작품에 대한 간단한 안내도를 그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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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에 대하여 - 하고 제법 큰소리를 해놓을 것 같으나 그 실은 작품이라고 몇 편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것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말할 것도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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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한다고 뜻을 세운 것이 중학 3년 때이니 12년 전의 일이다. 작문 잘 짓는 한 반 아이들이 6, 7인 모여 월역(月域)이라는 동인잡지를 가지기로 했다. 이 월역의 동인으로서 지금까지 문학을 붙들고 있는 자가 나 하나 뿐이니, 문학을 고집하기가 이즈음 세상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추상할 수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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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역(月域)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굶을 것을 각오들을 하였건만, 역시 빈궁 앞에서 뜻을 세워보려는 노력이 얼마나 고난에 찬 것인지, 다른 친구들은 각각 임의의 직업에서 생활의 안정을 구하고 나 혼자만이 문학 때문에 사사모사로 고역을 겪어가며 지금까지 생도(生道)를 세워보려고 애만 부득부득 태우고 있다. 이러면서도 어느 태평세월에 일가를 이루어볼 날이 있을는지 앞길이 망막하니 내 일이면서도 딱하기 한량없다. 내처 걷는 길이니 가는 턱까지는 가본다고 잔뜩 허리끈 조려매고 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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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에서 출발한 중학생의 문학수업이니 신통할 건 없다. ‘화가(和歌)’니 ‘배구(俳句)’니를 치르고서 석천탁목(石川啄木)으로 들어간 것만이 다행이었다. 월자(月姉), 유봉(幽峰) 등의 아호를 거쳐가며 우리가 처음 경도(傾倒) 한 것은 순수파다. 무자소로실독(武者小路實篤), 유도(有島)의 3형제의 것등을 읽어가며 일방(一方)으론 톨스토이 또 한편으로는 르노와르 세잔느 등의 그림책을 뒤적거렸다. 그 다음은 제 4차 신사조의 개천용지개(芥川龍之介) 등이다. 이 파의 것으로 내가 읽은 것은 개천(芥川) 이것뿐이다. 국지관(菊池寬)과 구미정웅(久米正雄)은 그때부터 경멸하여 전자의 것은 초기의 단편과 희곡을 읽었을 뿐이고 후자의 것은 하목수석(夏目漱石)의 딸과의 실연사건의 흥미로 「파선」을 읽어보았을 뿐이다. 개천(芥川)에게 활짝 홀려 돌아갈 때 그가 자살을 하였다. 작가를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숭배해보긴 전무후무다. 이때에 세계문학전집, 근대극전집 등 원본(圓本)이 나고 문고(文庫)가 나고 하여 외국치를 이것저것 주워보았으나 마지막으로 빠진 것이 지하직재(志賀直哉)를 거쳐 횡광리일(橫光利一) 등의 신감각파다. 중학졸업 임시(臨時)하여 동경서 문예전선을 얻어보고 콜론타이의 수삼(數三) 저서와 2, 3책의 정치서적의 영향으로 비로소 신흥문학에 흥미를 느끼기 비롯하여 동경으로! 의 목표를 세우고 졸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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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동안에 열 편 넘는 단편소설을 썼으나 물론 보잘것없는 아이들 장난이다. 「단오」「명절」「늦은 봄」「약자행(弱者行)」「어머니의 아해」 등의 표제가 지금도 기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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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약자행(弱者行)」은 피카레스크의 형식을 취하여 개천(芥川)의 모작(某作)을 모방한 것이오, 「어머니의 아해」는 스트린드베리의 「영양(令孃)유피에」든가의 모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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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가서는 아무것도 못썼다. 열 아홉 살 나는 해 그러므로 동경 들어가는 해 가을에 카프 지부에 들었으나, 연극이니 영화니 광범하게 손을 대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재 동경 1년이 훨씬 넘어서 200자 원고지 400매에 가까운 「산업예비군」이란 소설을 처음 썼는데, 한재덕, 김두용, 임화, 안막 등한테 합평회(合評會) 석상에서 부르주아적인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혹평을 받고 낙망하여 혼자서 그 원고를 불살라버리었다. 그 다음은 붓을 뗄 용기도 없어졌고, 딴 일에 바빠서 오랫동안 문학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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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을 지나 소화 5년(1930) 12월 마지막 날 제야의 소리를 들으면서 조그만 소설 한 편과 희곡 하나를 동경의 하숙에서 썼다. 「공제생산조합」이란 것과 「조정안」이란 것이다. 모두 평양고무 파업에서 취재한 것인데 전자는 파업 뒤 타락한 간부들의 손으로 직공의 잔돈푼을 모아서 조합형식의 고무공장을 만드는 형세 밑에서 새로운 타입의 인물이 평양에 들어와 활동을 하며 뒷일을 수습하는 것을 그린 것이고, 후자는 『조선지광』에 발표되었으니 설명할 필요도 없으나, 신간회의 간부물산장려회의 지회장, 기청(基靑) 간부들이 고무공장 사장 사택에 모여 술상을 벌리고 조정안을 꾸며대는 것을 그린 희곡이다. 후자는 실제인물이 많이 나와서 이것 때문에 평양 인사중에 후일까지 의가 상한 이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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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6년 봄에 서울로 와서 「공장신문」(『조선일보』)과 「공우회」(『조선지광』)을 썼고 카프에서 처음 조직적 생산을 한다고 「고무」제1회를 맡아 썼다. 전기 작품은 당시 카프 문학부 소설반(小說班)에서 합평(合評) 통과 후에 발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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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 약 2년간 창작생활이 중단되었다. 다시 붓을 들려고 하니 정치주의의 조류에 떠서 소설을 만들었던 당시와는 달라, 실력이 비로소 말을 하려드는 시기다. 간도(間島) 중국 군대에서 취재한 것으로 「나란구(蘿蘭溝)」라는 걸 써서 조선일보에 발표 중이었으나, 동보(同報)가 사장이 바꾸어지고 한참 분경이 많던 때라 중단이 되어버렸다. 그때에 나의 작품경향의 결함으로 자각하기 비롯한 것이 생활묘사의 부족이었다. 상부인물의 활동만을 그려왔던 나로서 무리가 아니다. 가령 이기영 씨를 두고 말하면 씨는 뭐니를 바로 맞추는 데는 약간 서툴렀을는지 모르나, 그 뒤 소설이 제법 본퀘도 로 올라설 때엔 무서운 속력으로 자기세계를 발견하였다. 나도 새 경지를 찾아보노라고 「물」과 「남편·그의 동지」를 썼으나 1회분이 중앙일보에 났을 때, 다시 「보통별」을 써보았으나 발표되지 못하고 「문예구락부」라는 지저분한 소설이 중앙일보에 게재되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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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노동자들 간에 있는 문예애호열(文藝愛好熱)의 조직화 과정을 그린 것인데 임화 군한테 톡톡히 욕을 먹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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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나의 선처(先妻)가 딸 둘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어린 두딸에게」라는 걸 써서 「우리들」에 발표하고 그 뒤 약 5편의 소설을 시골서 썼으나 하나도 발표되지 못하였다. 그 중 잊히지 않는 작품은 「감독된 사나이」와 「성(聲)」이다. 이리하여 나는 드디어 소설 쓰지 못하는 소설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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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바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과 소셜리얼리즘이 교체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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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10년(1935) 5월 상경하자 곧 카프 해산되고 나는 조선중앙일보에 기자로 들어갔으나 문학적으로 새 세계를 발견치 못하고, 타방(他方) 많은 교양을 가지고 평론이니 사설 짜박지니를 쓰노라고 소설에 붓을 대어볼 경황이 없었다. 동보(同報) 정간 뒤 상당한 각오를 하고 소설을 써보았으나 잘 되지 않아 여러 번 중단했다가 소화 12년, 바로 작년에 「남매」(『조선문학』) 하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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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처럼 힘들게 쓴 소설은 전무후무일 게다. 이럭저럭 겨우 내 세계를 발견하면서 타방(他方) 고발의 에스프리를 제창하였다. 「남매」에 용기를 얻어 「소년행(少年行)」(『조광』)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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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의 옛날 전통을 좇아 처음 구성에 유의하였으나 꼭 세공품처럼 된 감이 없지 않았다. 좀 지나서 처음 자기고발의 문학적 실천으로 「처를 때리고」(『조선문학』)을 썼다. 이것을 쓰는 도중에 작은 것을 하나 쓰고싶어 한 서너 시간 걸려서 「춤추는 남편」(『여성』)을 썼다. 전자는 무척 힘들어 「한우(寒雨)」라는 제목으로 80매를 쓰다가 찢어버리고 다시 고쳐서 쓴 것인데, 오히려 장난처럼 쓴 후자 만큼 평판이 좋지 못한 것은 나로서는 이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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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제퇴선(祭退繕)」과 「요지경(瑤池鏡)」(모두 『조광』)을 동시기에 썼으나 자기고발의 문학론과 어울려서 많은 말썽을 일으킨 듯싶다. 이곳에서 새로운 경지를 찾아보노라고 「생일 전날」을 썼으나 그다지 시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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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동안 나는 숨어서 중편 하나를 쓰다가 중지한 것이었다. 「창민(蒼民)」이란 제(題)로 읍(邑) 사람의 생활을 그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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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에서 취재하여 이번에 단편 두 개를 만들었다. 「누나의 사건」(『청색지』)과 「무자리」(『조광』)다. 속으로 겨우 나는 일생생활의 묘사에 손을 붙이기 시작했노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떨는지 모르겠다. 이것을 쓰는 전후, 나는 ‘모랄’론을 평론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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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하룻밤이나 또 몇 시간 걸려서 써내친 작품이 두 개나 있다. 「가애자(可愛者)」(『광업조선』)과 「선담(羨談)」(『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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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광산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는 주문이 있길래 대광업가(大鑛業家)의 비서로서 지금 시대의 지식계급의 새 타입을 그린 것이고, 후자는 착실한 모범농을 그린 것이다. 풍자적 효과적 역설을 의식하고 써본 최초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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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갱생 1년 동안에 대소 단편 11개를 썼다. 『여성』에 연재중인 「세기(世紀)의 화문(花紋)」은 편집자의 모든 주문을 받아들이고 써보는 최초의 통속소설인데, 처음엔 4회를 쓰라기에 아무 사건도 없이 청년남녀 수삼인(數三人)을 데리고 이럭저럭 산보나 시키던 중 그 뒤에 길어져서 다시 상(想)을 좀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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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작가가 편집자의 주문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데에는 호개 (好箇)의 한 작품인가 한다. 통속소설의 일보전진을 항상 염두에 두기는 하나 잘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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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최재서 군이 주재하는 인문사의 전작장편소설총서의 의뢰를 받아 처음으로 제약 없는 장편에 붓을 드는데 어떻게나 될는지 무시무시하고도 또 한편 기운이 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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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나 또 다른 비평가들이나, 작가로서 김남천에 대하여 말할 날은 역시 금후(今後)라고 생각한다.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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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공론』1938. 7]
【원문】자작안내(自作案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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