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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소설(現代小說)의 주인공(主人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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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7월
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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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小說[현대소설]의 主人公[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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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느 때나 인물의 예술이다. 자연과 장면과 스토리와 그 외의 모든 소설의 필요한 요소가 인물을 중심으로 배치된다. 인물이 없는 소설이란 배우가 등장하지 않은 무대처럼 공허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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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한 상식이나 ‘인물을 중심으로!’란 이것이 지금 긴요한 문제다. 인물과 인물과의 관계가 소설의 영역(넓이 ── 空間[공간])이라면, 인물과 인물과의 관계의 지속과 연장은 소설의 발전(길이 ── 時間[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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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발전 가운데 인물들의 盛衰[성쇠]와 生涯[생애]가 나타나고, 인물들의 성쇠와 생애 가운덴 인간의 운명이란 것이 비로소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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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란 것은 언제나 이러 이러한 조건 가운데서 인간은 이러 이러한 길을 걷지 않을수 없었다는 관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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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운명 가운데 함축된 관념이란 것은 그 인간이 생활하던 평생의 배경이 되었었고, 죽을 때까지 기반이 되던 사회에 대한 평가와 인식의 관념이 된다. 본격적 소설이 더욱이 장편이 어떤 개인의 평생과 그 운명을 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인물이 살던 시대의 사회는 그 인물의 生[생]에다 얼마나 편의를 제공하였는가? 이것은 인간과 환경과의 조화의 면이다. 어떠한 인간임을 물론하고, 환경이 나면서부터 그에게 제공하는 조건을 기초로 생을 영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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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그 인물은 이만큼한 정도의 욕구를 실현하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은 그것을 이렇게 저해하였다. 이것은 인간과 환경과의 상극의 면으로서, 또한 모든 인간이 환경과 이러한 부조화를 체험한다. 그러므로 질서라든가 인간의 관계라는 것은 늘 여건과 욕구의 中和狀態[중화상태]를 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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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의 생애, 일생의 운명 가운덴, 여건과 욕구의 내적투쟁이, 즉 질서나 社會[사회]의 주체적 측면이 표현되는 것이다. 바꿔말하면, 인간은 생의 실현에 있어서 부단히 여건을 초월하고 구속을 타파하나, 여건은 존재의 현실에 있어 부단히 인간을 비초월적인 것, 현실적인 것으로서 지배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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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언제나 이러한 투쟁이다. 인간의 생애라는 것은 이러한 투쟁의 부단한 체험이고 그 주체적인 표현이다. 그 결과가 운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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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명의 표현을 위하여 소설은 많은 인물들 가운데서 주요한 一人[일인]을, 혹은 幾人[기인]을 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소설이 주인공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결정적인 일이다. 만일 주인공이 없다든가, 혹은 주인공이 분명치 않다든가 하다면, 곧 소설의 중심이 없다든가, 분명치 않다든가 하는 말과 동일한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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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더욱이 중요한 인물, 그중에도 주인공을 통하여 운명이 표현되고, 운명 가운데 관념이 함축될 때,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이 결여하거나, 분명치 않다는 것은 곧 관념의 결여와 무력을 의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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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내가 世態小說[세태소설]을 비평함에 있어 無力[무력]의 시대의 一表徵[일표징]이라고 결론했음은 실로 이 때문이다. 世態小說[세태소설]이라 이름할 수 있었던 약간의 작품, 例[예]하면 朴泰遠[박태원]씨의 「川邊風景[천변풍경]」이나, 蔡萬植[채만식]씨의 「濁流[탁류]」, 혹은 洪命憙[홍명희]씨의 「林巨正[임거정]」같은 작품은 주인공이 결여되었거나, 혹은 주인공이 분산되어 있는 것으로 특징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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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들은 소설의 발전보다도, 영역의 확대에 중심을 둔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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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濁流[탁류]」의 초봉이라든가, 「林巨正[임거정]」의 임꺽정이라든가는 「川邊風景[천변풍경]」에 비하여 주인공에 가까운 형태을 띠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평가하지 아니함은, 실로 「林巨正[임거정]」에서 그 적절한 예를 찾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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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林巨正[임거정]」은 그 최초의 題名[제명]이 말하듯 賊黨[적당]의 魁首[괴수] 林巨正[임거정]의 傳記小說[전기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소위 傳記體[전기체]의 소설은 아니었다. 여기에 현대 독자의 흥미가 끌린 것이다. 그러나 소설 「林巨正[임거정]」은 주인공 임꺽정의 운명을 중심으로 구성된 작품은 아니다. 어째서 林巨正[임거정]은 叛逆兒[반역아]가 되지 아니할 수 없었으며, 어째서 그는 또한 叛徒[반도]의 賊名[적명]을 쓰고 헛되히 일생을 끝막지 아니할 수 없었는가? 가혹한 운명의 鐵[철]의 필연성! 이것의 표현없이 소설의 인물은 주인공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른바 주인공과 환경과의 유기적 일관이란 것도 성립되지 아니한다. 소설 「林巨正[임거정]」을 읽으며 느끼는, 連絡[연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무수한 에피소오드의 출몰도 전혀 이런 곳에 원인한다. 주인공의 운명적 발전의 동력도 아니되고, 장해도 아니되는 듯한 에피소오드는 당연히 독자의 눈에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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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운명을 중심으로 소설이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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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력의 充溢[충일] 대신에 구성력의 부족을 「林巨正[임거정]」에서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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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최근 朝鮮小說[조선소설]의 고질이 된 결함으로, 世態小說論[세태소설론]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묘사 기술의 진보는 이 과정에서 기대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사고력의 쇠퇴는 은폐할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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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병풍을 펴듯, 혹은 파노라마를 보이듯 작가는 될 수 있는대로 생활의 여러가지 면을 풍부히 묘사하여 전개하면 그만인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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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은 일찌기 우리가 본격소설이라고 동경하던 19세기적 소설에서는 인물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행동의 무대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世態小說[세태소설]에 와서 主客[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사고 없는 묘사, 그것은 두려운 결과를 예상할 수 있지 않을가? 그것은 기술만의 문학이다. 기술만의 문학이란 周知[주지]와 같이 工藝[공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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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또한 내가 世態小說[세태소설]을 絵画[회화]가 아니라, 모자잌이다고 말한 所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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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최근 朝鮮小說[조선소설]에서 볼 수 있는 無思考[무사고]의 기풍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는 金南天[김남천]씨의 「大河[대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주지와 같이 「大河[대하]」는 최근 朝鮮小說[조선소설] 가운데 그 중 구성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작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強固[강고]히 구성력을 弛緩[이완]치 아니하겠다고 苦鬪[고투]한 데 구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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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 환경은 작자가 의도한 만큼 작품의 메카니즘 가운데 용해, 조화되어 있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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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작자도 ‘내 作品[작품]을 解剖[해부]’ 함이란 短文[단문] 가운데서 ‘風俗現象[풍속현상]의 公式的[공식적] 配置[배치]’라 인정하고 있는 바로, 단지 풍속이 공식적으로 점철되었을 뿐만 아니라, 풍속이 인물의 의상이 되어 있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아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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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과 성격, 이렇게 나누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통털어 정신의 풍속을 묘사한다는 태도로 역사적 主題[주제]는 形象化[형상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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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가 같은 短文[단문] 가운데서 자기 비판한 ‘심리의 현대화’라는 염려도, 또한 내적, 외적 풍속을 동시에 그 시대 인간의 운명을 통하여 그려 보리라는 열정 가운데서 비로서 소멸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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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써 오래전 작품이지만 民村[민촌]의 「故鄕[고향]」이라든가, 春園[춘원]의 「그 女子[여자]의 一生[일생]」이라든가는, 우리가 현대소설의 번뇌와 비교하여 다른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거기엔 한 시대 전반의 정신적 풍속이라는 게 작가가 무엇이라 했든지 간에 표현하려던 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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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로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물과 환경이 아무래도 일치되지 아니하려는 시대, 결국 여기에 「大河[대하]」같은 野心作[야심작]이 고민하는 초첨의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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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학이란 더욱이 소설이란 것은 부단히 구성되려 하고, 환경과 인물이 단일한 메카니즘 가운데 결부하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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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물과 환경이 조화되지 않고 상극하고, 기타는 소설의 美[미]까지를 희생할려고 들제, 소설이 근본에서 포기되지 않는 한 변칙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가량, 주인공이 환경을 격파한다든가, 혹은 무시한다든가, 영웅적인, 혹은 낭만적인 소설의 길을 밟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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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환경이 주인공을 압박하던 나머지, 주인공을 환경의 조건에 부합하도록 개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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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두개의 경우가 양식상으로 보면 환경과 인물의 不一致[불일치]로 번뇌한 소설의 부득이한 귀결이라 하면, 그 변천을 밑받히고 있는 정신과 시대의 성질이란 것도 상상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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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제일]의 경우는 물론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세의 시대적 현상일 것이요, 第二[제이]의 경우는 또한 환경에 대한 인간의 劣勢[열세]의 표현일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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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一轉[일전]하여 약간의 구체적 작품의 예로 가저온다면 흥미있는 해답을 구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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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항용 轉向小說[전향소설]이라고 부르는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지하듯이, 현재의 인물에겐 지나치게 화려한 과거를 가진 인간들의 고뇌로 일관한 문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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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단에서 이 주제를 요리한 방법은 대략 2종인데, 하나는 민촌의 「寂寞[적막]」이나 「追悼會[추도회]」같은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변천된 세태에서 느끼는 적막감과 양심의 고독함을 그린 세계요, 둘째는 동료 가운데서, 혹은 자기 가운데서, 새 시대가 가저 오는 독소를 제거하자는 방어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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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南天[남천]의 고발문학이다. 단편집 「小年行[소년행]」 가운데 수록된 全[전]작품이 거의 이 주제를 위하여 작자가 苦鬪[고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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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의 문제를 세우는 방법을 심리화 하면, 하나는 静寂[정적]의 세계요, 하나는 狂亂[광란]의 세계다. 물론 静寂[정적]이란 자기에 대한 과신에서 있는 것이요, 狂亂[광란]이란 자기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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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과 불신, 두者[자] 중 어느 것이 더 옳고 글타든가, 혹은 현명하고 아니한 것은 지금에 평가할 문제가 아니나, 이런 것은 밝혀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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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은둔자에 가까운 인간의 심리요, 후자는 벌써 변한 조건 가운데 생활하는 인간의 심리라는 것, 이 차이는 문학에서 간주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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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새 세계 앞에 다못 경탄할 따름이고, 한 사람은 새 세계의 두려움을 체험했다. 그러나 경탄하고, 恐畏[공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들은 새세계 자체의 인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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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寂寞[적막]」의 주인공이나, 「祭退膳[제퇴선]」의 주인공이나 다같이 그들 앞에 이미 死[사]한 인간으로 변한 인물에게 혈연를 느끼고는 있지 아니했다. 그들의 思考[사고]는 한가지로 고독했고 결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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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만 현대의 인물은, 고독하고 결백한 주인공들이 아니라, 비속하고 추악한 市井人[시정인]들이었음을 작자들은 또한 부정하고 있지 아니했다. 그러나 思考[사고]의 중심은, 그 주인공들에게서 이미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연히 그들의 두 어깨 위에 질머지어서 처리될 바를 아지 못하는 과거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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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화려한 과거를 가진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이 추악한 市井人[시정인]이 되리라고는 아직 생각하고 있지 아니했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를 회상하고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현재가 언제나 생의 마당이요 源泉[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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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天[남천]의 소설 「鐵領[철령]까지」에서 주인공인 내가 느끼는 감상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가? 독자는 「祭退膳[제퇴선]」가운데 젊은 의사가 중독자 기생에게 피력하는 휴매니스틱한 동정과 이 감상의 공통점을 기억하고 있을지? 이 소설의 작자는 「祭退膳[제퇴선]」의 속편이라고 볼 「瑤池鏡[요지경]」가운데서 곧 「祭退膳[제퇴선]」에서 중독자에게 동정하던 똑같은 남주인공 자신을 참혹히도 중독자로 만든 사람이다. 그 동정을 작자 자신이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했음은 이 두 소설을 보아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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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자를 동정하고 구하려던 젊은 의사가 未久[미구]에 자신이 동정받어야 하고 구함을 받아야 할 인간으로 변한다는 것을 한개의 운명이라고 보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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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鐵領[철령]까지」에서 작자가 같은 主題[주제]에 봉착함은 무슨 의미일까? 속단을 피하거니와, 一言[일언]하자면 현대에 處[처]할 새로운 관념을, 주제를 얻기에 작자는 고심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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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뒤 南天[남천]의 작품에서 이런 과거를 가진 型[형]의 인물이 다시 등장하지 않게 됨을 주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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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갖지 아니한 인물만으로 소설을 쓴다! 이것은 과거를 가진 작가에게 있어 일대 변화이다. 혹은 작자와 과거와의 결별일지도 모른다. 淸新[청신]한 몸으로 현대와 동화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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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예는 玄民[현민]에게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51
「金講師[김강사]와 T教授[교수]」이후, 「어떤 夫婦[부부]」 「離婚[이혼]」 「나비」 「滄退亭記[창퇴정기]」 「가을」(은 별개의 계열에 속한다)에 이르는 과정은 긴, 그러나 괴로운 과거의 처리 기간이다. 「나비」에 있어 그것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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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또 民村[민촌]이 걷는 길은 특이하다. 일본의 농민작가는 과거를 처리하는데 ‘土[토]의 文學[문학]’으로 갔다. 그것은 농촌생활의 자연주의적 묘사에 중점을 둔 문학이다. 그러나 民村[민촌]은 그러한 길을 갈 듯도 하다가, 본래의 재능의 하나인 풍자문학을 시험하다가 귀착하는 곳은 常識[상식]의 문학이었다. 市井[시정]의 세계를 그림에 있어 자연주의의 정신으로 하는 대신 様式[양식], 手法[수법]만에 자연주의와 상식이 결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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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 말하면 자연주의적으로 보아진 市井生活[시정생활]을, 혹은 농촌생활을, 시정인 혹은 농촌인 자신의 견식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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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벌써 작자의 정신이나, 작자 자신과 같은 型[형]의 인물이 작품 가운데 필요치 않게 되었다.
 
55
비록 인테리의 모습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야 그것은 벌써 시정인, 농촌인이 된 젊은이다. 요점은 그 청년도 과거를 갖지 아니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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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과거를 가진 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과거를 가진 인물들이 총퇴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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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과거를 갖지 아니한 인물만으로 소설이 구성된다. 이 사이에 먼저 말한 世態小說[세태소설]의 荒荒[황황]한 一幕[일막]이 지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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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들이 世態小說[세태소설]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것은 지금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南天[남천]이 告發文學論[고발문학론]에서 風俗論[풍속론]으로, 혹은 가족사로, 혹은 연대기로, 이론적 관심을 옮긴 일례를 보면,(물론 그가 장편 「大河[대하]」를 기도했던 데도 많이 기인하지만) 인물보다도 묘사에 치중한 것만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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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態小說[세태소설]이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이 이렇게 나타났는가? 물론 그렇게 속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찌기 말해온 것처럼, 인간의 운명이라든가, 환경의 성질이라든가, 모두 외부묘사에 시대의 기풍이란 게 점차 정착되고 있었던 것만은 확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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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당연한 순서로 생활의 기술이란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61
雪野[설야]의 최근작 「泥濘[이녕]」은 이 과제에 대답한 유력한 작품이다. 대체 그 소설에 주인공이 있다고 할 것인가? 오히려 그러한 소설에는 과거를 가진 인간이 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 것이 주위의 풍물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세속의 泥濘[이녕] 가운데서 주인공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그 鬱勃[울발]한 기분, 풀곳 없는 정열, 오래 은닉되었던 가족에 대한 애정, 이런 것을 그려낸 「泥濘[이녕]」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62
그러나 이것 때문에 작자는 200매가 넘는 소설을 기도하지는 아니 했으리라. 그것만으론 소설이라기보다는 감상과 노래로 소설은 滑落[활락]할 따름이다.
 
63
문제는 이 소설 結尾[결미]에 있다.
 
64
주인공이 쪽제비가 닭을 물던 翌日[익일] 아침 나갔다 돌아와서, 소설은 어찌되는가?
 
65
거기로 부터 과거를 가진 인간의 현대적 운명이 개시되는 것이 아닐까? 소설은 정히 여기서부터 다시 씌여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66
그러나 아마도 거기에서부터 소설이 다시 씌여질 때, 그 後作[후작] 술집」같이는 되지 아니할지도 모른다. 그가 생활과 동화될 수 있는 길은 만인이 안다. 그러나 주인공이 가진 정열, 鬱勃[울발]한 기분, 용기는 어디다 처치할 것인가?
 
67
생활이란 본시 성격이 행동하기엔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일찌기 雪野[설야]가 현대작가 중 제일 곤란한 주제와 직면해 있다고 말한 것이다.
 
68
결국 소설 「泥濘[이녕]」의 주인공은 인물이라기보다, 작자의 기분이 자리를 잡고 앉은 空席[공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69
玄民[현민]의 「나비」와 혹은 南天[남천]의 「바다로 간다」에 나오는 여급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文章増刊[문장증간]」 32人集[인집]에도 이런 인물과, 또는 이와 비슷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요악하면 그 인물들은 환경에 대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即[즉]하여 있는 인간들이다.
 
70
바꿔 말하면 행위하는 성격이 아니라, 생활하는 인물임에 그친다. 사람은 현명한 생활인으로 족하지 않은가 하고 물을지 모르나 현명한 생활이 대체 무슨 의의가 있는 것일가? 문학은 생활이 아니라 창조였다. 성격은 생활인이 아니라 창조자였다. 성격만이 실로 소설을 자기 중심으로 구성할 수 있는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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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과연 우리는 현대소설에 주인공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72
인간을 만나고 싶다는 것은 현대 독자의 슬픈 염원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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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7)
【원문】현대소설(現代小說)의 주인공(主人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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