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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과 신세대의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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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2.27~
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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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신시대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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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선문단 특히 창작단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경향은 현실에 대한 관심과 묘색력(描索力)이 현저 증대해진 것이다. 그래서 소위 세태문학, 풍속문학, 성격문학, 가족사 문학 등의 기술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역작들이 상당한 양으로 제작되어 나오는데, 그것은 물론 현실문학으로서는 좀 더 심각한 진실성을 요하지마는 어쨌든 그들은 이 현실을 될 수 있는 대로 진실하게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과 지향이 의심할 수 없을만치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어떠한 ‘이즘’을 머리에 두고 그것의 충실을 위하여 제작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의 표현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그들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일반 시의 평론가, 감상가들까지도 소설은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당연하지마는 시가 현실을 노래하는 건 이단이며, 그러한 시는 상식적(常識的) 시라고 오인하는 이가 많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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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은 소설에 있어서도 상식적 소설을 배척하는 것이 시와 다를 것이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시에 있어서 현실을 창조의 대상과 요소로 하는 것이 소설과 같을 것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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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소설과 시의 현실에 대한 취급방법이 다르다. 그래서 그것의 장르까지 달라진다. 그러나 현실을 창작의 대상으로 하고 요소로 하는 근본적인 관계는 마찬가지다. 소설이 현실적 사실을 묘사하는데 대하여, 시는 현실적 정서 ─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다를 따름이다. 현실적이 반드시 상식적이 아니다. 시문학의 현실에 대한 관계가 소설문학의 그것보다 소원(疏遠)하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인 듯하다. 첫째는 정서문학인 시가 묘사문학인 창작보다 현실에 대한 접촉적 평면과 범위(範圍)가 비교적 적으니, 그것이 곧 관계의 원소(遠疏)인 줄로 오인하기 쉬울 뿐 아니라, 또 관심도 깊지 못하기 쉬우며, 둘째로는 시가 현실에 대한 평면과 범위는 비교적 적지마는 그 관계는 더 한층 긴밀성을 요하여 창작이란 어느 정도까지 현실의 방측(傍側)에서 그것을 응시하는 태도를 갖게 되어, 어떤 경우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이 도리어 그 표현을 정확 충실하게 할 수 있지마는 시는 그와 다르게 조그마한 거리도 용허(容許)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 그것을 시인의 머리속에 용해하지 않으면 참다운 현실적 정서의 시를 창조키 불능함으로 그러한 시의 창조는 소설보다 더 많은 노력을 요함을 따라 많은 시인들은 도리어 현실을 염기(厭忌)하고 경원(敬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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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이 시 창조(創造)의 유일한 대상이며 요소인 이상, 시인이 더럽고 악취 나는 현실을 고귀한 자신과의 접근을 싫어하며, 또 그것의 머리 속에의 용해공작(溶解工作)에 노력을 게을리 하는 동안에는 그의 시는 공각(空殼)의 시와 혈맥(血脈)없는 시가 안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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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말하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생활의 진실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그 자신을 사랑하는 이상, 그 자신의 전체인 인간을 신뢰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상, 인간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진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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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고귀(高貴)와 순수를 사랑하는 시인이라도 그 자신이 인간의 일 분자(分子)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그는 현실의 조야(粗野)를 고귀와 순수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현실을 사랑함으로써 현실적 경향 ─ 정서를 거짓없이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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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는 시적 흥미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냐하면 평범한 대상에서 흥미있는 방면을 끌어 낼만한 재기(才氣)있는 점이야말로 시인의 가치가 있지 않은가. 현실이‘모더부’를 표현점을 진수(眞髓)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 (괴테) 그러나 현실이란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인간생활의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니, 시인은 어디까지 그 진실을 잃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진실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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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생활에서 흥기(興起)되는 잡다(雜多)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잡다한 정서를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설령 그것을 모조리 다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진실한 표현이 아니며, 또 어떤 정서 그것을 틀림없이 정확하게 표현한다고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재적 정서’에 불과하다. 그 소재 가운데서 참된 진실과 순수를 추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그 중에는 우연적, 또는 비본질적인 정서가 얼마든지 섞여있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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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나는 오장환, 김광균 양씨(兩氏)의 시론(《인문평론》2월호 소재)에 대하여 논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최근에 상당한 많은 시론이 발표되었으나, 이 양씨의 시론은 신시대 시인으로서 보는 시의 진로를 말한 것으로 특별한 주목을 가지고 본 때문이다. 양씨는 다음과 같이 이문동의(異文同義)로 절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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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기실 그분의 의관이란 물 건너온 재생품이건만), 재담과 열매없는 괴임새로써 그것을 시의 전부로 자처하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조선의 시단에는 급기야 춘기발동기의 자연발생하는 최정시(催情時)나 자기 쇠망의 영탄시(詠嘆詩)나 신변장식에 그쳐버리고 영영히 집단적인 한 종족의 커다란 울음소리나 자랑을 노래하지 못할 것인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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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최대한 관심을 가지고 대할 문제 중의 하나로 ‘시가 현실에 대한 비평정신을 기를 것’이었다. 이것이 현대가 시에게 요구하는 가장 긴급한 총의(總意)이겠다. 현대의 정신과 생활 속에서 시는 새로 세례 받고 몸소 그것은 대변하는 중요한 발성관(發聲官)이어야 한다. 백일홍이든 초생달이든 언어의 곡예를 통하여 표현의 묘(妙)를 얻는 것을 제1의를 삼았던 과거의 작시 태도를 떠나서 표현 수준(水準)을 차라리 일보 퇴각하더라도 현대의 감정과 교양을 흔들 수 있는 말하자면 현대와 피가 통하는 시가 다량으로 나와야겠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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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보아 양씨가 신시대의 시인으로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기교주의적 시에 얼마나 깊은 증오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만 그 중에 오장환씨의 시론은 전체적으로 보나 다소 추상적이고, 소극적이어서 명일(明日)의 시단에 대하여 적극적, 또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았고, 또 대체는 별 이의 없으니 따로 더 논급할 필요가 없으나, 김광균씨의 그것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또 적극적 태도로 전개된 이론인 중필자(中筆者)로 보아서 다소 이의 있는 점이 몇 가지 있음으로 거기에 대하여 약론(略論)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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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누구보다도 새로운 시의 창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당한 관심이다. 우리는 현실의 새 발전에 따라 새로운 예술 ─ 시가 창조되어야 할 것은 갱론(更論)할 여지가 없으며, 새로운 시는 어디까지든지 현실의 진실한 표현이 아니면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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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구(舊)’가 아닌 ‘신(新)’이라고, ‘참신(斬新)’하다고 맹목적으로 새 가치를 줄 것이 아니다. 신제(新製)의 인조견(人造絹)은 수공업적(手工業的)으로 짠 진주(眞紬)보다도 못하다. 또 새로 출현하였다고 반드시 진정한 새 것이 아니다. 최근 새로이 시장에 나타나는 미투리가 종래의 양화보다 새 것이 되지 못한다. 문제는 ‘현실’그것이다. 진실한 현실의 표현여부다. 김씨는 거기에 대하여 인간생활의 진실보다도 현실의 표면현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한다. 그래서 씨는 무엇보다도 시각과 조형 등에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씨의 이론 뿐 아니라 씨의 시적 실천을 보아도 역시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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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실은 물론 인간생활의 표면적 현상까지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을 말할 때에 수면과 포말(泡沫)까지도 포함 안 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실의 본체는 인간생활의 표면적 현상보다도 그(현상) 밑에서 힘차게 흘러가는 본류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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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표면적 현상 그것이라도 씨는 소정(所定)한 현실의 그것대로 보려고 하지 않은 것 같다. 즉 씨는 전원보다 도시의 조야(粗野)보다 문명한 생활현상을 동경(憧憬)하여 ‘진실한 현실’보다도 ‘동경하는 그 현상’에만 중치(重置)하지 않은가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현실의 진실을 표현하려면 이 시간이 공간의 소정한 현실에는 택시를 타고 순라로(巡邏路) 위를 달리는 도시의 생활도 있는 동시에 초옥저등(草屋低燈) 켜는 전원 생활도 있는 때문이다. 뿐 아니라 이 소정(所定)한 현실에는 변전만(變電滿), 자동경작기(自動耕作機)보다 물레방아, 허수아비가 중요한 현상일 줄 모른다. 빵과 우유를 상식(常食)으로 하고 침낭(寢囊)에 잠자는 나라에 가면 문제이지마는 이런 ‘동경(憧憬)의 현실’을 ‘진실의 현실’과 혼동하는 과오는 과거의 경향작가들이 졸업하고 버린 그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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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는 또 시각(視覺)의 중요성으로 미래파, 초현실파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이상의 모든 유파가 어떠한 사회적 근거도 어떠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발생한 것인가는 누구나 다 주지한 바이며, 또 그 유파들의 생명이 얼마나 단촉(短促)하였고, 존재가 미약한가도 주지한 바이다. 같은 한 시대적 경향이면서 자연주의, 낭만주의 문학 등은 그의 생명보다도 유장하였고, 또 상당히 위대한 유산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지마는, 전술한 유파의 문학 등은 그렇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자연주의 낭만주의 문학 등은 그래도 현실 속으로 구심적(求心的)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한 그것이고, 전술한 그것들은 현실 밖으로 원심적(遠心的)으로 나오려 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우리는 현실에 대한 관찰(觀察), 인식(認識), 감수(感受)를 어느 한 방면에만 편중하여서는 안될 것이며, 또 현실의 대체는 표면적 현상보다도 그 밑에 숨어있는 본류한 것이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이며, 또 김씨의 의견과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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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씨는 새로운 시의 창조를 위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열정과 노력을 지불하고 있는 시인이며, 또 그래서 현실의 현상 그것만이라도 새로운 그것은 표현을 작품으로 실천하는 시인인 것이 김씨에 대하여 의연히 우리들의 주목할 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씨는 서상(敍上) 인용과 같이 시의 유일한 대상인 현실에 절대적 관심과 탐구욕을 가지고 있는 이상, 김씨와 오씨가 가려고 하는 시도(詩途)의 코스는 역시 리얼리즘의 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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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로 나는 이 시론의 당연한 발전을 위하여 이용악, 장만영, 오장환, 김광균씨 등 주목하는 시인들의 작품에 대하여 약론을 시(試)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은 뒷기회를 기다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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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40. 4. 27)
【원문】현실과 신세대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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