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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어렸을 때에 심술을 내고 울던지 하면 어머니나 아버지께서는 달래시며 하는 말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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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에-비 곽쥐가 온다. 에비 곽쥐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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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는 여러분도 어린 동생이나 조카가 심술을 내고 울 때에 또한 그러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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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곽쥐라는 의미를 잘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곽쥐라는 것은 무슨 호랑이라든지 사자 같은 무서운 귀신도 아니요, 독갑이나 야차(夜叉) 같은 무서운 귀신도 아니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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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선조대왕 때에 곽씨 중에 달아날 走자 행렬로 이름을 지은 곽준(郭?)과 곽월(郭越)이라 하는 이들이 어찌나 인물이 무섭게 잘났던지 그때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 하야 그들이 어디를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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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리하야 그들이 어떤 고을에 감사가 되면 그 고을에는 도적놈이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그의 이름만 듣고도 혼이 나서 곽쥐야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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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럿 중에도 곽월이라 하는 이가 제일 더 잘났었고 또 곽월씨의 아들 중에는 곽재우라 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곧 여기에 말씀코자 하는 천강 홍의장군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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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려서부터 지혜가 남보다 많고 큰 뜻이 있어서 남과 같이 벼슬할 생각이나 부자되고 싶은 생각이 없고 전혀 학문과 무슨 신기한 술법 배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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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야 나이가 40여세가 되도록 서울 같은 번화한 땅에는 발도 들어놓지 않고 헌 삿갓과 짚신감발로 팔도의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여러 명사들과 같이 놀며 또 낚시질과 글 읽는 것으로 낙을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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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원래 충의가 갸륵한 어른인 고로 뜻인즉 항상 국가에 있어서 밤낮으로 자나 깨나 나라 일을 걱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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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임진란 때를 당하였습니다. 적군이 벌 떼같이 조선에 달려들어 무인지경처럼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간 곳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니 당당한 관군들도 한번 싸우지도 못하고 쥐 숨듯이 모두 도망질을 하였거든 항차 민간에서야 누가 감히 꿈쩍이나 하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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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입니다. 장군은 크게 분노하야 하늘에까지 뻗치는 의기를 뽐내서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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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있는 세간이란 세간은 모두 팔아 군비를 삼고 의병을 모집하니 그때에 응모한 사람이 겨우 70명밖에 아니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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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같으면 그까진 70명을 가지고 강대한 적군과 싸울 생각이나 감히 하겠습니까마는 장군은 원판 충의가 갸륵하고 지모가 출중한 까닭에 그것을 조금도 걱정치 않고 강대한 적과 싸워서 제일차에 의령군 정진이란 땅에서 크게 승전을 하고 또 함안군에서 싸워서 적군의 머리를 50두름이나 베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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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전술이야말로 참으로 신출귀몰하였습니다. 몸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기에는 天降 紅衣將軍(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란 여섯 글자를 크게 썼으며 군사는 모두 광대 모양으로 땅재주를 가르치고 의복은 찬란한 오색 옷을 입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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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야 적과 싸울 때에는 반드시 군사를 산중에 매복시켰다가 이른 아침에 안개 낀 때를 타서 별안간에 북을 울리고 군악을 치며 매복하였던 오색찬란한 군사로 하야금 일제히 진전에 나와 땅재주를 넘고 활을 쏘게 하니 날래기가 새와 같고 또 그 뒤에는 天降紅衣將軍이란 깃발을 흩날리며 산상으로부터 홍의 입은 장군이 고함을 치며 내려오니 적이 한번 보매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신병(神兵)인 줄 알고 크게 놀라서 감히 싸우지도 못하고 그냥 똥줄이 빠지게 도망을 하다가 중도에서 또 복병에게 습격을 당하야 모두 함몰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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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문이 한번 난 뒤로는 우리나라 사람이나 적군이나 모두 그를 곽재우라 하지 않고 그저 홍의장군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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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적군들은 그이를 어찌나 무서워하였던지 길에 지나가다가 붉은 저고리 입은 아이들만 멀리 바라보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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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도망을 치며 붉은 치마 입은 색시를 보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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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도망질을 쳤습니다. 그때에 장사로 유명한 김덕령 장군도 장군을 크게 홈모하야 글을 보내 치하하야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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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공은 반드시 제일 첫째 공신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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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 것을 보아도 장군의 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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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때입니다. 경상감사 김수라 하는 사람이 정부의 명령으로 관군을 거느리고 적군을 토벌하려고 서울로 오다가 중도에서 도망을 하야 다시 경상도로 돌아왔더니 장군이 듣고 크게 분개하야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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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외적뿐만 아니니 내가 먼저 감사 놈부터 쳐 죽이고 왜병을 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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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통제사 김성일이 억지로 말리어서 그만 중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간특한 김 감사는 제 죄는 생각지 않고 도리어 장군을 해하려고 조정에 참소하되 장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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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이라 가택하고 군사를 많이 모아서 역적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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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조정이 또한 장군을 의심하야 장군의 몸이 일시는 위태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김성일이 극력으로 장군의 그렇지 않은 것과 공이 많은 것을 말하야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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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정유년에 또 왜란이 일어나매 여러 골의 성 지킨 장수들이 모두 도망을 하되 오직 장군만은 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 하니 체찰사 이원익이 장군의 위태한 것을 염려하야 속히 군사를 걷어가지고 피하라하니 장군이 듣지 않고 답서하야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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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제나라의 70여 성이 연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었으되 홀로 전단의 즉묵성만이 보전되야 다시 그 나라를 회복하였고 고구려의 양만춘은 조그마한 안시성 하나로 당나라 백만 대병을 쳐서 무찔렀으니 다른 골이 모두 함락이 되었더라도 내가 어찌 같이 따라서 도망을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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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원익이 크게 감복하야 장군의 충의를 찬양하고 장군도 필경 그곳에서 또 적군을 크게 파하고 큰 공을 이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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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마침 장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그때 법에는 상제가 되면 아무 일도 못하고 집에 있는 법이라 장군도 할 수 없이 군직을 버리고 강원도 울진으로 가서 패랭이 - 패랭이는 옛날에 상제나 천한 사람이 쓰던 대갓입니다 - 장사를 하야 생활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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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나라에서는 다시 장군을 불러서 벼슬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장군은 굳이 사양하고 듣지 않으며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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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쥐를 잡자는 것인데 쥐를 다 잡은 다음에는 소용이 없는 것이라 나라에 만일 큰일이 있다면 내가 비록 생명을 받치고라도 나아가서 일을 할 터이나 이제 난리를 다 평정하였은즉 우리 같은 무인은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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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그것은 물론 당시의 조정이 당파 싸움으로 너무 어지럽고 시끄러운 까닭에 장군이 다시 출세치 않기로 결심한 까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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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어렸을 때에도 술법을 좋아하였지 만은 절대로 끊고 다만 솔잎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있다가 후에는 또 축산(鷲山)으로 옮기었었는데 나이 많아도 얼굴은 소년과 같이 혈색이 좋고 몸이 또한 건강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신선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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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일 많이 싸운 곳은 경상남도 창녕군 화왕산성이었으니 그곳에는 아직까지 장군의 싸우던 고적이 많이 남아 있고 또 당시에 쓰던 군호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지방에서 정월에 줄다리기를 할 때에 여러 사람들이 뛰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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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말은 오왜승전(?倭勝戰)이라고 하는 말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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