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큰 변란이 일어날 것같으면 하늘의 명령이라 할까 귀신이 한 노릇이라고나 할까 반드시 출처도 모르는 이상한 동요가 먼저 유행된다. 외국은 그만 두고 우리 나라에서만 말하여도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날 임시에는 소위 「동동곡」이 크게 유행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는 『호발가 타령』이 유행하였다. 여기 말하는 동학란 때에도 일종의 동요, 즉 『아랜녘 새야 웃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청포 밭에 앉지 말아 녹두 덩쿨 다 썩는다』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동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물론 누구나 그 뜻을 알지 못하였을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난을 지내고 보니 즉 전의 노래는 아랫녘(下道[하도]의 뜻)인 전주 고부에서 전녹두(全綠豆=전봉준의 별명)가 동학란을 일으켰다가 외국청병(外國請兵) 아래 패한다는 뜻이요 뒤의 노래는 동학이 갑오년에 속히 성공을 하지 못하고 을미년까지 지지하게 끌다가는 병신년에는 꼼짝도 못한다는 것을 의미함이었다. 과연 그랬었다. 갑오년에 만일 외국의 청병이 없고 동학군이 서울을 급거 점령하여 시간만 잃지 않았었으면 동학당이 그 당시에 용의하게 벌써 대성공을 하였을 것이다.
5
기괴한 재변을 그리 미신적으로 말할 것은 아니지만 큰 변란이 있 때에는 또 이상스러운 재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동학란 때에도 이상한 재변이 많았으니 공주의 금강은 삼일간을 피의 빛갈로 변색이 되고, 고기들이 모두 죽어 나가오며,장성 황룡장(長城黃龍場)터에 있는 우물 하나는 과거 경험을 통하여 보면 큰 난이 날 때가 아니면 변색되는 법이 없었는데 그때에 별안간에 황탁(黃濁)하여 먹지를 못하게 되므로 난리가 난다고 인심이 크게 소동되었으며, 공주 객사(客舍)집웅 위에서는 참새가 하루아침에 수백마리가 저절로 죽고, 계룡산(鷄龍山)에서는 꿩이 수십마리가 일시에 날아서 강경시장으로 왔었는데 그것을 잡아 먹은사람은 개개(個個)가 다 즉사를 하고, 강원도 홍천 서석리(江原道 洪川 瑞石里)에서는 가축이 일시에 모두 산으로 도망을 가고 오지를 않았다. 이것을 그때에 과학으로 연구하여 보았으면 어떠한 원인으로 그리되었다고 알았을는지 알수 없으나, 그 당시에는 그로 인하여 인심이 몹시 소동되고 또 공교롭게도 그러한 재변이 있던 곳은 동학란 때에 다 교전장(交戰場)이 되어 인축의 참상(慘狀)이 많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그곳의 노인들은 심상한 일이 아니라고 서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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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당은 표면으로는 민중자체로만 움직인것 같지만 실상 내면에는 당시 정계의 일대 권위인 대원군과 암약(暗約)이 있었다. 즉 전봉준은 본래 동학당의 주요 인물로 큰일을 일으키자면 무엇보다고 그 정계의 형편을 잘 살피고 내응을 얻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표연히 서울에 올라와서 당시 명성이 당당한 대원군 문하(門下)에 출입하게 되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의례히 벼슬자리를 구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다 못하여 궁토(宮土)나 역토(驛土)의 사음운동(舍音運動)이라도 할터인데 그는 원래부터 큰뜻이 있는 까닭에 아무 요구도 없이 몇해동안을 열심으로 다니었다. 대원군도 처음에는 그를 일개 향촌의 궁조대(窮措大)로 알았으나 그 사람의 됨됨이와 행동이 범인(凡人)과 다른 점이 많고 또 자기 개인을 위하여 아무 요구가 없으므로 특히 이상하게 생각하고 하루는 조용히 불러 묻되『나의 문하에 출입하는 사람이 대개는 엽관호구(獵官糊口)의 운동을 하는데, 그대는 아무 소청이 없으니 어찌된 까닭이냐』한즉 전봉준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적은 청을 아니하는 사람은 큰 청이 있는 까닭이라 하니, 기민한 대원군은 벌써 눈치를 차리고 밀실(密室)로 불러들여 자세히 물으니 전씨는 그제야 동학당의 세력이 어떠한 것과 국정개혁의 필요한 것과 세계대세가 어떠한 것을 자세히 말하니, 십년세도지여(十年勢道之餘)에 새로 일어나는 민비(閔妃派[민비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권토중래파(捲土重來派)의 야심이 솟아오르고 있는 그는 이것이 천재의 호기라 하고 서로 굳은 맹세를 하되, 전은 지방에 가서 개혁의 난을 일으키고, 자기는 내응이 되기로 하며, 또 전이 떠날 때에는 석파산장(石坡山莊)으로 친히 초대하여 술까지 부어주고 또 친필로 강(江)자 한자를 써주며 말하되 동학군이 만일에 동작진(銅雀津)까지만 깃발을 날린다면 나는 당장에 관병과 내응하여 궁중부중(宮中府中)을 점령하고 친히 동작진까지 영접하마고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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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번운복우(飜雲覆雨)는 정치가의 상사(常事)이라 처음에는 대원군이 이와같이 내약을 하였으나 동군(東軍)이 외병(外兵)의 방해로 손쉽게 북진을 못하고 일‧청 양국의 세력쟁탈 틈에 자기가 또한 일본공사 오오도리게이스게(大鳥圭介[대조규개])의 지도하에 정국(政局)에 임하여 제삼차로 집정을 하고 김홍집일파의 개화당 내각을 조직하고 자기의 평생강적인 민비를 폐(廢)하여 서인을 삼으니, 당시 정국은 다시 자기가 주인이 된 바람에 동학군의 승리는 도리어 자기한테 불리할것 같고 또 자기가 동학당과 암통한 것이 세인에게 알게 되면 전일 임오군란(壬午軍亂)때의 전감(前鑑)이 소소(昭召)한고로 자기에게 책임문제가 있을가 하여 전연 냉정한 태도로 일군의 세력에 위하여 동학군을 토벌하였다. 그것은 당시 정국 또는 동양 대세가 어찌 할수 없음이니 그저 시운(時運)에 부칠수 밖게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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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홍의 장군이라면 누구나 임진란 때의 곽재유(郭再祐)장군을 연상하기 쉬울것이다. 그러나 이 동학란 때에는 곽재유 보다도 더 용맹스럽고 신기한 소년장군이 있었다. 충남 예산군 신례원(忠南 禮山郡 新禮院) 접전 때 였다. 그 싸움은 동학란이 일어난 후 관병과의 최대 격전으로서 피차의 사상이 수천여명에 달한 큰 접전이었다. 그때 관병은 새로 일병이 가세하여 기세가 당당한바 이삼일 격전에 민병이 다소 불리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제삼일째 되던 날에 뜻밖에 동군측으로 일개 홍의소년(紅衣少年) 용장이 돌출하여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관병을 쳐 무찌르는데 그야말로 옛날 중국 삼국시대 장판교(長板橋)싸움의 조자룡(趙子龍) 모양으로 동으로 번쩍 서장(西將(서장)을 베이고 남으로 번쩍 북장(北將)을 베어 그 소년이 가는곳에는 관병이 물결 쓰러지듯하여 동군이 드디어 대승리를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싸움이 끝나자 그 홍의소년의 종적을 알수가 없게 되었다. 혹은 귀신인지 사람인지 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주 알수 없었다. 당시 세상사람들만 모를 뿐만 아니라 싸움에 참가하였던 동군까지도 누군인지줄 알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저 홍의소년이라고만 말할 뿐이다. 옛날 중국의 진시황(秦始皇)때에 열세살되는 소년 진무양이 형가(荊軻)를 따라서 대담하게도 만승천자 진시황을 죽이려고 흰 칼날이 번쩍번쩍한 비수(匕首)를 넣은 연(燕)나라의 독항지도(督亢地圖)를 짊어지고 대낮에 함양전상(咸陽殿上)에 가서 자객이 되었다는말만 사기(史記)에 오르고 그뒤에는 어찌되었다는 말이 없으므로 후일 사기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무양의 부지하락(不知何落)한 것을 탄식하는 것과 같이 나는 언제나 동학란을 이야기 할 때이면 이 홍의소년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고 또 그뒤에 어찌 되었는지 알고 싶어서 퍽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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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임진왜란때 쥐가 물을 물어다가 적군의 총구멍에 넣었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옛노인의 입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동학란 때에는 대포 구멍에서 정말 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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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맣게 나온 것도 아니고 아주 장마통에 개샘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로 인하여 동학군은 신출귀몰(神出鬼沒)의 조화가 있나하여 일반 인민이 모두 향응(響應)하고 관군은 도처에서 산산이 도망가 버렸다. 그 사실이 있기는 바로 홍의장군이 나타나던 신례원(新禮院) 접전 때였다. 그때에 관군은 예산의 무한성(지금 예산역밖에 있음)을 점거하고 그곳에다 대포를 걸어놓고 동군을 방어하였는데 그때에 관군의 부패와 행악이야 다시 말할수 없을만큼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동군을 방어하는것은 둘째 문제로 치고 민간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과 주식(酒食)으로 판을 짷을 뿐이었다. 그러나 동군은 조금도 양민을 해치치 않을 뿐아니라 부자와 관청의 재물을 뺏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민중에게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웨치니 누구나 다 서로 응하고 환영하였다. 그중에도 무한성 근처에 있는 부녀들은 더욱 관군을 미웁게보고 동군을 환영하여 관군의 잠자는 틈을 타서 밤중에 물을 길어다가 관군의 포대(砲台)에다 부으니 대포가 터지기 커녕 대포구멍에서 개구리가 새끼를 치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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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알지 못하고 있던 관군은 동군이 무한성을 육박하여 들어올 때 대포를 놓으려고 하니 대포 구멍마다 물이 가득가득 차있으므로 대경실색하여 도망을 하며 『익크 동학군은 무슨 조화가 있어서 능히 대포 구멍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든다』하고 그뒤 부터는 관군이 동학군의 깃발만 보면 숨도 제대로 못쉬고 도망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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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세상 사람들은 그때에 동학군이 인심을 선란(煽亂)시키느라고 미신적으로 대포 구멍에서 물이 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는 사람이 간혹 있지마는 실상은 그 말이 관군의 입에서 나온 것이요 동군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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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도야지나 말의 불알을 까는 일은 있었지만 사람의 불알을 까는 괴상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옛날에도 악형중에 부형(腐刑=고환을 잡아매서 썩히는 형)이 있었고, 또 처형의 악습으로 인공적 내시를 만들기 위하여 불알을 까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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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동학란 때처럼 양반의 종자를 박멸하기 위하여 불알을 깐 일은 없었다. 그때에 여러 곳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지마는 그중에도 한 예를 들어 말하자면 홍주 갈산리(洪州葛山里)김씨(金氏) 집에서 생긴 일이 가장 뚜렷한 것으로 세상 사람이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그 김씨로 말하면 외척(外戚) 안동김씨(安東金氏) 일파로 세력이 상당하고 따라서 그 지방에서 횡폭한 일을 많이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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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란이 일어나자 그 집의 노예들은 부자형제 할것 없이 다 동학에 가입하였다. 동학군이 홍주성을 쳐들어오며 각처에서 행악하던 관리양반을 모조리 죽이는 판에 김씨집 노예들은 무엇보다도 소위 상전(上典)의 집부터 없애버리자고 공론(公論)을 하고 사랑방으로 달려가서 상전 김씨를 잡아다가 대추나무에다 달아매고 때리며 이놈의 양반은 불알을 까야 종자가 없어진다 하고 사기 깜팽이로 불알을 깠었다. 그 일이 잘되고 못된 것은 별문제이거니와 그일 한가지를 보아도 당시 상민계급(常民階級)이 양반에게 얼마나 학대를 받았으며 또 양반에 대하여 얼마나 원한을 가졌던가를 짐작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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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동학군의 활동은 어찌나 컸던지 각지방의 아전관속(衙前官屬)은 동군이 아니라도 심복(心腹)이 되어서 관군의 모든 동태를 보살펴서 일러바쳤다. 전봉준이 이인통천(異人通天)을 하게 된 것도 이 탐정에 밝은 탓이었다. 그가 동군의 지휘자로 고부 김제등을 점령하고 전주에서 오는 관병을 무찌를때 관군측에서 허실(虛實)을 알기 위하여 정탐을 보내면 관군측에 있는 이속(吏屬)들은 그것을 알고 어느달 어느날 어느 곳으로 어떠한 복색을 한 관군의 탐정이 갈터이니 먼저 주의하라고 통지하면 전봉준은 그 말대로 군중에 호령을 내려 똑 들어맞게 그 탐정을 다 잡아다가 문초하여 도리어 관군의 내막을 잘 알게 되니 군중(軍中)이 다 신기하게 생각하고 감복하며 관군도 감히 정탐을 함부로 보내지 못하였다. 그 뒤에 동군이 장성의 황룡시장을 점령할 때에는 관군이 대광주리 속에다가 무기를 가득히 넣고 상인의 행색을 차린 다음에 동군의 뒤를 습격하여 안팎을 서로 통하기로 하였었는데 동군은 그것을 먼저 알고 일시에 상인을 모두 잡아서 죽이고 장계취계(將計取計)로 동군이 그 복색을 하고 시중으로 들어가 불의에 습격을 하니 관군이 다 패주하고 그 시장이 동군의 손으로 돌아왔다. 지면(紙面)의 관계로 여기에서는 자세한 말을 약하나 그때의 접전도 상당한 접전이거니와 대광주리를 써가지고 승전한 것은 당시 전라남도 동학군의 한 자랑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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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전주에는 남무영(南武營)이라는 병영이 있고 군기(軍器) 군량(軍糧)이 풍부한 곳인고로 동군은 그곳을 점령하려고 힘을 썼었다. 관군이나 동군이나 이 전주성을 차지하고 못차지하는 것으로 호남일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군도 죽을 힘을 다하여 그것을 지키었다. 그러나 처음 싸움에 영장(營將)과 서기 이돈승(書記李敦昇)이 싸움에 저서 죽고 그 다음에. 초토사 홍계훈(招討使 洪啓薰)이 경성 병정을 데리고 오니 홍은 본래가 무감(武監)출신으로 임오군란때에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초천(超遷)하여 청주병사(淸州兵使)등 중요 무직에 있다가 이제 초토사가 되었으나 잔악횡폭한 사람이라 임지에 도착하자 즉시에 먼저 김시풍을 죽이고 전주에는 다만 나머지 병정과 민간의 활잘쏘는 사람만 지키게한 후 (민병은 다만 점심값만 주었다) 전군을 동원하여 장성 고부등지를 추격할 때 전주를 떠나서 삼십리되는 김구(金溝)에 이르러서는 또 장교 정석희를 죽이니 군인들이 다 무서워서 안심치 못하고 동군에 투강하는 자가 많았다. 이틈을 타서 동군은 샛길을 쫓아서 사월 이십칠일 바로 전주시장날 새벽에 전주의 요새지인 완산 칠봉을 점령하고 성중을 향하여 대포를 쏘니, 관찰사 김문현은 먼저 도망하고 통판 민영승은 경기전(慶基殿) 위패(位牌)를 가지고 위봉산성(威鳳山城)으로 도망하므로 나머지의 관군과 민병이 다 문을 열고 동군을 맞아들이니 당시 동군의 기세는 실로 당당하여 온갖 산과 들에는 깃발이 휘날리고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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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훈은 그 다음 날에야 겨우 소식을 듣고 다시 군사를 돌려 주반위객(主反爲客)으로 완산(完山)에 의거하여 성내를 공격하였는데 오월삼일에는 일대 격전이 시작되어 피차 수백명의 사상자가 났었다. 그러나 동군이 원래 굳게 지켜서 승부를 결정지우기 어려우므로 홍은 그 불리한 것을 알고 군수를 청화사(請和使)로 삼아 삼례역에 있는 동군의 대본영에 가서 전봉준과 휴전회담을 열자고 말하여 놓고 피차간에 조약을 논의하던중 때마침 순변사(巡邊使) 이모가 평양병을 인솔해 가지고 와서 안무(按撫)의 조(詔)를 전하니 동군도 또한 양보하여 서로 교전, 침략치 않을것을 조건하여, 동군은 호의적으로 관군에게 전주성을 도로 내어주고 오월 육일에 서문(西門)으로 물러나서 경기도로 향하였다. 이것은 물론 전봉준의 마음으로는 전주성 하나만 가지고 관군과 날자만 질질 끄는 것보다는 먼저 한성을 직격하는 것이 득책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봉준의 큰 실책이었다. 그때 전주를 굳게 점령하여 근거지를 삼은 뒤에 한성으로 직행하였더면 설혹 중도에서 실패를 한다 하여도 그다지 접족(接足)할 여지가 없이 일패도지(一敗塗地)는 아니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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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와 마찬가지로 남원(南原)에서는 김개남(金開男)이 또 일어났으니 그는 갑오 삼월 이십일에 이춘경과 같이 남원읍 서화리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부사 신좌희(府使 申左熙)를 참살한 후 부아(府衙)를 점령하고 오영을 두고 김은 중영 황기대장이 되어 여러 군사를 지휘하고, 담양사람 남응삼은 진영홍기대장, 이사위는 후영흑기대장 그외 두 사람은 백, 청, 깃발로 좌우영장이 되고 서기(書記)는 전화삼 이사명, 모사(謀士)는 김우직이었는데, 한때 영호(嶺湖)일대를 호령하며 약 사십구일을 남원성에 점거하였다가 운봉에 있는 민포대장 박봉양(民砲大將 朴鳳陽=속칭 일목장군(一目將軍).눈 하나를 잃고 문과로 주서까지한 사람)을 습격하던 차에 여원현(女院峴)에서 박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남원성까지 빼앗겼는데 이것은 당시 김개남이 너무도 적을 우습게 보다가 싸움에 진 것이었다. 그때 운봉에야 민병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할 것 없이 전주로 직행하여 전봉준군과의 힘을 합하여 한성으로 향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남원을 중심으로 하고 전주까지 점령하여 근거지를 튼튼하게 한 다음에 관병이나 민병의 내습을 유격하였으면 그다지 실패는 아니하였을것이다. 그러나 구구하게 남원에서 사십구일이나 지체하다가 길도 모르는 운봉으로 향하여 일개 눈먼 아이한테 막대한 군마(軍馬)를 상실하였으니 참으로 우습고도 애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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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전라 충청일대를 점령하고 승승장구의 기세로 공주성(公州城)을 향해서 진격하게 되었는데, 그 부하에 점술(占術)에 능한 사람이 있어서 행진을 할 때면 반드시 점을 쳐 보는 것이 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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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로 행진하는 날에는 점을 쳐서 본즉 『최기경천(最忌敬天)』이라는 점사(占辭)가 있으므로 전봉준은 공주의 경천역이 불길하다는 것을 알고 다른 길로 가다가 결국 공주에서 크게 싸움에 지고 논산에서 군대를 해산한 다음 자기는 다시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몸을 잠시 피하기 위하여 상복(喪 服)으로 전북 순창(淳昌)으로 향하였는데 도중에서 자기 부하였던 전주 사람 김경천(金敬天)을 만나 자기가 순창 「피노리」라는 촌에 가서 숨어 있겠노라고 말하였다. 언제나 실패할 때에는 적보다 부하에게 해를 보는 것이 상예이라 은덕도 알지 못하는 김경천은 그 사실을 관군에게 밀고하여 드디어 전봉준으로 하여금 관군에게 붓잡히어 경성 감옥 단두대의 고혼이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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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치는 사람의 말을 그리 믿을 것은 아니나 공교롭게도 「최기경천」이라는 것이 뜻밖에 이 김경천에게 맞았었다. 그 때에 전씨는 「피노리」민가에 잠복 하였는데 별안간여 관병이 포위하니까, 그는 날쌔게 뛰어서 지붕 위로 올라 가다가 관근의 난도(亂刀)에 왼쪽 다리를 중상입어 도망가지도 못하고 잡히었는데 현장에서 관군이 막때리니까 그는 얼굴빛을 가다듬고 꾸짖어 말하되『사(士)는 가살(可殺)이언정 불가욕(不可辱)이라 내가 나라의 법을 범하였다 하면 당당하게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지 사형(私刑)을 하는것은 틀린 일이다.』하니 아무리 잔악한 관군이라도 그의 기혼에 감복하여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으며 그 뒤 김경천은 그 공으로 인하여 군수(郡守)까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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