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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역대 무인사(戊寅史)를 돌이켜 볼 때에 가장 흥미있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일천 사십년전 신라 경명왕 이년(新羅景明王二年〓西紀九一八[서기구일팔]) 무인 유월에 왕건 태조(王建太祖)가 고려의 나라를 새로 창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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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전말을 말하자면 먼저 왕건 태조의 인물이 어떠한 인물인가 하는 것을 잠간 말하는 것이 좋을가 한다. 태조의 성은 왕씨(王氏) 요 명은 건(建)이요 자는 약천(若天)이니 금성태수 왕융(金城太守王隆)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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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융이 일찌기 한씨부인(韓氏夫人)과 결혼하여 한주 송악군(漢州松嶽郡〓지금의 開城[개성]) 송악산 남쪽에서 살았더니 하루는 신승도선(神僧道詵)이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그집 문 앞에서 쉬다가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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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더니 융이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를 맞아 들이어 특별한 대우를 하니 도선이 글 한수(詩一首)를 써서 주며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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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명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터이니 장성 하거던 이 글을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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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이듬해 태조를 탄생하니 때는 바로 신라 헌강왕 삼년 정유(新羅憲康王三年丁酉〓西紀八七七年[서기팔칠칠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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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낳을 때에 이상한 빛과 붉은 기운(所謂神充紫氣[소위신충자기])이 마치 큰 용이 꿈틀거리고 돌아 다니는 것과도 같이 집을 싸고 돌으니 일반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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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자(天姿)가 영명하고 용안일각(龍顏日角)의 이마와 모난턱(廣額方頤)으로 용모가 비범할 뿐 아니라 도량이 크고도 깊어서 제세안민(濟世安民)의 큰 뜻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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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살 때에 전에 왔었던 도선(道詵)이 일부러 찾아와서 병법(兵法)과 천문지리(天文地理)의 비술(祕術)을 가르치니 그는 무엇을 시키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이 다 능통하여 나이 스므살때 벌써 이름을 나라 안에 떨치니 때에 태봉국왕 궁예(泰封國王弓裔)는 그를 뽑아서 발어참성(勃禦塹城〓開城東部歸仁門附近[개성동부귀인문부근])의 성주(城主)를 삼었으며 스물 두살 때에는 벌써 정기대감(精騎大監)이라는 중요한 무직(武職)을 하게 되고 그후 수년 후에는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淸州) 등지에서 후백제 견훤(後百濟甄萱)의 군사와 싸워서 큰 공을 세우게 되니 그의 장한 이름이 한 세상을 압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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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육전과 수전(陸戰水戰)의 전술이 모두 능하지만 대대로 서해안에 살아서 항해술을 전습(傳習)한 까닭에 특히 해전은 누구보다도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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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서남해 방면에서 후백제의 수군들을 여러번 격파해서 왕업(王業)의 기초를 이루게 된 것도 이 해전에 능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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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예(武藝)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또한 능하였으니 그가 친히 지었다는 강원도 원주땅에 있는 흥법사 비문(江原道原州興法寺碑文)은 천고의 명문으로 익재이제현(益齋李齊賢)이 일찌기 평하여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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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뜻이 웅대심원(雄大深遠) 하고도 고와서 현규적석(玄圭赤舃)이 낭묘(廊廟)에 읍양(揖讓)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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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고 또 변방(邊防)을 순시하며 지은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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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추일만(龍城秋日晩) 고무모연생(古戊暮烟生) 만리무금혁(萬里無金革) 호아하태평(胡兒賀太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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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에 가을 날이 저물었으니, 옛 진터에 검은 연기 일어난다. 만리에 병정이 없게되니 오랑캐 아이들이 태평을 하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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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것은 호기가 뻗치어서 제왕의 천하 태평한 기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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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그렇게 위덕이 날로 성하여 일반 인민이 모두 열의있게 명령에 복종하는 반면에 태봉왕 궁예는 나라의 세력이 강한것을 믿고 점점 교만하고 사나운 정치를 많이 하던중 특히 불교와 참서(讖書)를 극히 미신하여 국호와 연호(國號 年號)를 조변석개(朝變夕改)하고 무고한 백성을 함부로 죽이며 심지어 심복의 부하와 처자까지도 화(禍)를 면치 못하게 되니 인심이 크게 소란하여 잠시도 안정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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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때마침 태조가 후백제의 금성(錦城〓지금의羅州[나주])을 쳐서 함락시키고 개선하여 돌아오니, 궁예는 태조의 공을 표창함은 고사하고 도리어 시기하고 의심을 하여 반역(反逆)의 죄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니 한때 태조의 신변이 퍽 위험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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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행히 태조와 평소에 친한 사이에 있던 궁예의 시신(侍臣)들의 묘책(妙策)으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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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하는 일이 전부 그와 같이 광폭 잔악하니 부하의 인심이 모두 이상하게 돌아가던 중에 특히 무장(武將) 중에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知謙)등은 먼저 반혁(反革)의 뜻을 품고 비밀히 태조의 사저(私邸)에 가서 태조와 회견하고 태조를 추대(推戴)할 의논을 하려고 할제 마침 태조의 부인 유씨(柳氏)가 한 자리에 있으므로 태조는 그런 중대한 일을 부인한테 알리는 것을 재미없게 생각하고 참외밭(苽田)에 가서 참외를 따오라고 하였더니 원래에 영민하고 눈치 빠른 유씨는 벌써 그 눈치를 채고 참외밭으로 가는 척하고 슬며시 휘장 뒤에 숨어서 의논하는 말을 엿듣다가 태조가 여러 장수들이 추대하는 것을 한사코 사양을 하는 것을 보고 분연히 좌중으로 뛰어나와서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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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의(義)를 들어서 악한 것을 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니 이제 여러분의 말을 들으니 나같은 아무것도 모르는 연약한 여자라도 의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못견딜 지경인데 하물며 대장부가 그래서야 쓰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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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당장에 친히 갑주(甲冑)를 들어다가 태조에게 입히고 또 무기를 갖다가 태조에게 올리며 속히 거사(擧事)하라고 독촉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며 태조를 옹호하여 노적석(露積石) 위에 앉히고 즉위식(即位式)을 올리며 군신(君臣)의 의를 확정한 후 즉시 군병들을 호령하여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궁문(宮門)을 향하여 풍우같이 돌진하니 궁예가 크게 놀래며 허둥지둥 도망을 치고(그뒤 평강 땅에서 난민에게 죽었다) 태조는 포정전(布政殿)으로 바로 들어가서 정식으로 등극식(登極式)을 올린 다음에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수(天授)라 하여 내외에 선포하니 때는 지금으로 부터 일천 사십년 전 신라 경명왕 이년 무인유월(新羅景明王二年戊寅六月〓西紀九一八年[서기구일팔년])이요 태조의 그때 춘추는 사십이세(四十二歲)의 장년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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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그와 같이 일거에 궁예를 내어 쫓고 그 궁전 도성(都城)을 위시하여 기타 영토까지 전부 차지한 뒤에 또 남으로 후백제를 내려쳐서 운주(運州〓지금의 洪城[홍성]) 에서 그 군사와 크게 싸워 이기어 웅진(熊津〓지금의 公州[공주]) 이북 삼십 여성을 점령하니 후백제의 세력이 크게 꺾인중 그 나라왕 견훤(甄萱)은 아들 신검(神劒)과 골육상쟁이 생겨 견훤이 그 아들에게 왕위까지 빼앗기고 금산사(金山寺)에 갇히어 있다가 태조에게로 귀항하니 후백제의 영토도 또한 태조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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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신라(新羅)는 나라의 세력이 크게 쇠약 하던중 견훤의 난(甄萱亂)에 경애왕(景哀王)이 피시(被弑)하고 국토가 소탕이 되어 비록 경순왕(敬順王)이 새로 왕위에 올라 왕업을 부흥시키고자 노력은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그릇되어 도저히 나라를 유지할수 없게되었으므로 경순왕은 백성이나 구제한다고 국토를 전부 고려에 내어 주려고 하니 여러 신하 중에 누구나 감히 이의를 표명 하는 자가 없었으나 다만 태자인 김전(太子 金全〓俗稱 麻衣太子[속칭마의태자])이 비분강개하여 단장의 눈물을 흘리며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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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忠臣) 의사(義士)가 힘을 합하여 최후까지 악전고투 하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일천년 사직(社稷)을 일조에 경솔히 남에게 넘겨 줄수가 있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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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말이 의리로는 당연하나 대세가 이와 같이 된바에야 어찌 할수 있으랴. 공연히 무고한 백성들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나의 참아 못할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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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드디어 고려에게 귀항 하기로 결정하고 시랑 김봉휴(侍郞 金封休)로 하여금 글을 지어 태조에게 귀항 하기를 청하니 왕자는 울면서 왕궁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即金剛山[즉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초식(麻衣草食)으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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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조는 그 글을 받으시고 대상왕철(大相王鐵)등을 신라까지 보내서 왕을 맞이하니 왕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나 송도 서울에 다다르니 향거보마(香車寶馬)가 삼십여리(三十餘里)에 달하고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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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왕을 맞이하여 유화궁(柳花宮)에 머므르게 하고, 맞딸 낙랑공주(樂浪公主)로 하여금 아내를 삼어 신란궁(神巒宮)에 거처하게 하며 관광순화위국공신상주국 낙랑왕 정승(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承)을 봉하여 지위가 태자의 위에 있게하고 매년 일천석의 녹위(祿位)를 주며 경주(慶州)로 식읍(食邑)을 삼고 따라서 온 신하들도 또 상당한 관직을 주게되니 신라의 일천년 역사는 종막을 마치고 태조는 완전히 삼한을 통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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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무공으로 왕업을 이어온 만큼 그 부하들 중에는 명장과 용사는 많았지마는 글을 잘하는 사람과 정치적 인물은 별로 없었으므로 개국초에 제도를 정하고 나라의 모든 시설을 계획하는데는 전혀 궁예의 유신인박유(弓裔遺臣朴儒) 같은 이의 의견을 듣고 또 신라를 통합한 뒤에는 신라 사람들을 많이 채용하여 건국의 대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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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치상으로 그 중요한 것을 말한다면 첫째 전제(田制)를 개정하여 백성의 세금 부담하는 것을 경감하고, 둘째는 심곡사(審穀使)를 두어서 곡식을 저장하여 수재(水災) 한재(旱災) 흉년(凶年)등 비시상에 대한 준비를 하게 하고, 셋째로는 국고의 곡식과 포목을 풀어서 빈한한 백성과 노예(奴隸)가 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하고 관제(官制)는 중국의 당나라제도(唐制度)를 기초로한 신라 태봉 두 나라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내의(內議) 광평(廣評) 내봉(內奉)의 세성(三省)과 선관(選官) 병관(兵官) 민관(民官) 형관(刑官)예관(禮官) 공관(工官)등 여섯 상서(尙書)와 그외에 구사(九寺) 육위(六衛) 등을 두어 모든 정사와 무비(武備)에 관한 일을 맡게하고 종교(宗敎) 방면으로는 불교를 특별히 존중하여 왕이 즉위하던 해 겨울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새로 설립하고 그것으로 나라의 연중행사를 삼았으며 도성안에는 법왕(法王) 왕륜(王輪)등 사찰(寺刹) 십여개를 건축하고 후백제 군사를 쳐없애고 황산군천호산(黃山郡天護山)에는 개태사(開泰寺)를 건축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죽은 장병들을 장사 지냈었다. 그리고 일반 시민에게는 예절(禮節)을 밝히며 알려 주기위하여 정계(政誡)라는 책 한권과 계백요서(誡百寮書)라는 책 여덟편을 만들어 국내에 발표하고 또 대광 박술희(大匣 朴述熙) 등을 명하여 지금의 헌법(憲法) 비슷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만들어서 국가의 한 준측(遵則)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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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외교(外交)에 있어서는 역시 신라의 외교정책을 그대로 밟아서 중국 후당(後唐)과 서로 화친을 하되 특히 거란(契丹)과는 엄격히 교제를 단절하여, 개국초에는 거란이 오십필의 낙타(駱駝)를 공물(貢物)로 보내고 건국하사(建國賀使)를 보냈으나 모두 거절할 뿐아니라 그 사신 일행인 삼십 여인을 섬(島)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다리에 매어 굶어 죽게 하고, 훈요심조(訓要十條) 중 제 사조(第四條)에도 『거란은 금수국(禽獸國)으로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 의관제도가 또한 서로 다르니 삼가하여 본 받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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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명백히 기재하여 역대의 한 국시(國是)로 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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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거란이 전날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발해국(渤海國)을 쳐서 멸망시킨 것을 불의부도(不義不道)하게 생각한 것도 한 이유겠지만 그것보다도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遺民)들로서 나라를 세운 까닭에 민족적 감정으로 나온 것이 큰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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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로 미루어 본다면 신라(新羅)가 소위 삼국통일을 할때에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같은 민족의 나라인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쳐서 멸망시킨것은 이 왕건 태조에 비하여 얼마나 졸렬하고 비루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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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수백번 싸움을 하여 별로 실패한 일이 없었으나 후백제왕 견훤(後百濟王甄萱)과 공산동수(公山桐藪〓지금의 永川郡面達城郡境[영천군면달성군경]에 있다)에서 싸울 때에는 참패 중에도 큰 참패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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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견훤이 신라의 국도(國都)를 무찌르고 경애왕(景哀王)을 시(弑)하며 왕비와 후궁을 강욕하고 왕의 아우 효염(孝廉)과 대신 영경(英景)을 사로잡은 뒤에 또 난병(亂兵)을 시켜서 함부로 민간의 부녀와 재산을 약탈하여 그 참혹한 형상이 참으로 형언 할수 없게되니 태조가 그 변을 듣고 크게 노하여 친히 정병 오천을 거느리고 견훤을 토벌하게 되었던 것이다(원래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여 태조가 구원병을 거느리고 가는 도중 견훤이 먼저 신라의 서울에 침입하여 그 작란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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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산에 이르러 견훤의 복병을 만나니 태조의 군사는 먼길을 행군하여 군마(軍馬)가 모두 피로하던 중에 더우기 지리(地理)에 어두어서 피차 싸운지 얼마 아니되어 견훤의 군에게 크게 참패를 하고 견훤의 군사가 몇겹으로 태조를 에워싸고 들이치니 태조의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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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마침 태조의 부하 중에 신숭겸(申崇謙)이란 이가 있었으니 용모가 태조와 꼭 같고 충성심이 남보다 뛰어나며 갸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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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옛날 초한전쟁(楚漢戰爭)때에 기신(紀信)이 한패공(漢沛公)과 얼굴이 꼭 같은 것을 이용하여 한패공을 대신하여 죽던 그 계책을 써서 태조는 숲속에다 감추어 두고 자기가 태조의 복색으로 변복하고 앞장으로 나아가 싸우다가 죽으니 견훤의 군사가 그를 정말 태조로 알고 목을 베어 가지고 포위 하였던 군사를 풀어서 물러가니 태조는 그 틈을 타서 도망하여 겨우 화를 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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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태조는 숭겸의 은공을 생각하고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그 몸둥이와 같이 춘천(春川)에 장사 지내고 또 태조가 삼한을 통합하고 개국연(開國宴)을 할때에는 그와 또 그때 같이 싸우다가 죽은 김낙(金樂)의 공을 생각하여 가상(假像)을 만들어 공신의 자리에 같이 앉히고 술을 부어 놓았더니 그 가상이 생존한 사람모양으로 일어 나서 절 하고 술을 마신 뒤에 또 여러 신하들과 같이 일어나 춤을 추니 일반이 모두 신기하게 생각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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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든지 창업의 임금이 새로 일어날때에는 흔히 참서(讖書)와 비기(祕記) 같은 것이 먼저 유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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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건 태조때에도 소위 경참문(鏡讖文)이라는 이상한 참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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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직 등극하기 일개월전 바로 궁예왕정개오년무인(弓裔王政開五年戊寅) 오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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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상인 왕창근(唐商王昌瑾)이 태봉국의 서울인 철원에 와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본즉 모양이 점잖고 괴이한 의복을 입은 어떤 백발 노인이 왼편 손에는 사기그릇을 들고 오른편 손에는 옛날 거울(古鏡)을 가지고 와서 사라고 하므로 창근은 쌀을 주고 그 거울을 샀더니 그 노인은 그 쌀을 갔다가 거리에 있는 거지아이(乞兒)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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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근은 그 거울을 벽뒤에 걸어 두었더니 햇빛이 그 거울에 비치어 아래와 같은 가느다란 글자가 완연히 나타나는데 어떻게 보면 옛날 고시(古詩)와 비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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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근은 처음에 그 글자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뒤에 발견하고 퍽 이상하게 생각하여 궁예 왕께 알리었더니 왕은 관헌에게 명령하여 창근과 같이 그 거울 임자를 찾게 하였으나 마침내 찾지 못하고 다만 발살사 불당(勃颯寺佛堂)에 진성(鎭星)의 흙상(塑像)만 있을 뿐인데 그 모양이 꼭 그 거울 임자와 비슷하다고 하므로 왕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한참 개탄을 하다가 당시 문신 중에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을 불러서 그것을 해석하라 명하였더니 그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논의하여 해석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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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중사유하(三水中四維下)는 신라 말년이란 말이며 상제강자어진마(上帝降子於辰馬)는 하느님이 아들 즉 천자(天子)를 진한 마한땅(辰韓馬韓地)에 탄강 하셨다는 말이고 선조계후박압(先操鷄後搏鴨)은 먼저 계림(鷄林) 즉 신라를 차지하고 뒤에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년중이용견(巳年中二龍見)에 일즉장신청목중(一則藏身靑木中)하고 일즉 현형흑금동(一則顯形黑金東)이란 말은 육갑(六甲)의 사년 중에 두 인물이 낳아서 하나는 푸른나무 즉 소나무 송자(松字) 들은 송악군(松嶽郡)에 근거를 잡게 되고 하나는 검은쇠 즉 철자(鐵字)들은 철원군(鐵原郡)에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을 종합하여 다시 자세하게 말한다면 신라말년에 궁예와 왕건 두 인물이 나와서 한사람은 먼저 철원에 도읍하였다가 망하고 한사람은 송악에 도읍하여서 삼한을 통합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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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주상이 심히 포악하여 조금만 잘못하면 모두 죽이는 터이니 이것을 우리의 해석한대로 바로 말한 다면 우리도 물론 화를 당하려니와 왕의 시중까지도 그 해를 입을 터이니 거짓말로 꾸며 대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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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궁예에게는 매우 좋은 상서라고 꾸며서 말하니, 궁예는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럴듯이 들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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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조는 나이 설흔 되던해에 우연히 꿈을 꾼즉 광채가 찬란한 구중의 황금탐(黃金塔)이 바다속에서 솟아 나오는데 자기가 그 위에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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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이상히 여기고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그는 해몽 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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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왕위(王位)에 오를 천하의 귀한 꿈이오니 비밀에 부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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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태조가 마음에 홀로 기뻐하며 항상 자부(自負)함을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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