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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美術)에 있어 한가지 기능도 없으며, 또한 공학(工學)에 대한 실기도 상식도 닦은 일이 없다. 그러므로 미술을 감상할 역량을 가지지 아니하여 감히 이 문제를 걸어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학(美學)을 기초하여 여러 사람들이 저술한 동서 미술사를 대조하고 각처에 있는 박물관을 두루 관찰하여 분석적 논구(論究)를 시도하며, 재래 문헌상에 적혀 있는 미술 및 공예품 설명을 탐사하여 보면 적이 해득이 생기고 투리(透理)됨이 있으매 그것으로써 재료를 삼아 이 글을 기초(起草)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논문을 바르재려 한 동기를 말하면 각각의 학설을 정정코자 함에서 나온 것이다. 외국 학자들이 조선미술에 대하여 너무 과찬(過讚)한 일도 있으며, 또 혹은 근거 없이 타박도 한 일이 있으매, 나는 그들의 부적당한 의론을 교정(校正)코자 한 의도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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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여러 비평가의 각설(各設)을 초월하게 비평하여 조선미술의 진상을 천명코자 하는 생각을 가졌으매, 이로 인하여 겸삼수사(兼三隨四)로 재래의 문헌과 실물과의 관계를 정당히 하려 함도 있다. 말하건대, 본래 문헌은 혹시 위조와 수단으로 한 것이 있지만 미술은 어떤 의미로 위조하기 어려운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헌을 위주하여 미술을 설명하기는 뻔뻔스런 일이 없지 아니하다. 더욱 예로부터의 역사 기술은 정치 및 제도의 변천을 주로 한 때문에 실업실능(實業實能)에 대한 것은 몹시 공소할뿐더러 예부터 내려온 제도는 기능(技能)은 천업으로 낮추 본 습관이 있음으로 하여 미술에 대한 기록은 많이 폐기되었다. 그러므로 문헌을 의심하는 외에 또한 그 실적(實蹟)을 조사하기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하여 문헌을 전혀 몰교섭할 수는 없으니, 만일 문적(文蹟)을 도외시하면 단계를 정리하고 풍속을 알 수 없다. 이럼으로써 미술공 자신이 공급하는 바의 문헌을 취함도 있을 것이요, 고문헌(古文獻)을 그대로 방증(傍證)함도 취하는 동시에 그 문헌을 미술로 하여 보정(補正)하여 가는 일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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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개인 또는 각처의 보존품이라든지 고분(古墳) 중에서 출토된 유물이라든지 그런 실물에 대해서도 개인적 감상(感賞)만에 의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개인의 미술품 감상(鑑賞)이란 것은 일종의 종합 작용이니, 곧 개인의 심성에 한정된 것이요 분석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감상은 개인의 사안(私眼)을 떠나서 공평한 변별심으로써 평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런 논란에 있어서도 미술을 분류하는 것은 골동품의 수집적 방법이요, 또 한 융성과 쇠퇴기에 대하여 분류하는 것은 사회학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런 소운동적(小運動的)인 분류법을 취하지 않고 미술의 평면적 활동형을 주로 하는 분류법으로써 설명코자 한다. 곧 미술의 각 형식 각 상태에 대하여 논구함이 아니라 정신의 운용인 상상적 창작을 해설코자 함이다. 대저 심의상(心意上)과 사회상의 전력(展力)은 각국 각 민족이 서로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미술도 각국 미술품이 서로 근사하며, 동양미술도 각처 제작이 피차 비슷한 것이 그 때문이다. 미술은 조화 있는 공간을 차지한 것이다. 오직 실물에 의지하여 그 기술상의 요건을 다르게 할 뿐이매 각국 미술의 차이는 오직 기술상의 차이요 동시에 정신상 운용의 상위뿐이다. 한 나라 미술의 경과해 온 역사도 또한 그 범위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한한 공간을 한계 있게 하는 형(形)이든지 그 한계의 형을 표현하는 제일의 방편인 선(線)이든지 안목에 반사되는 광선의 분량을 조화적으로 배합하는 색(色)이든지 그 형·선·색 등의 삼요소를 활용하고 풍부케 하며, 그로써 실물을 표현, 혹은 취미를 암시하는 등에 대한 조화 방법은 몇 만 몇천이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인의 그 다양다종의 조화미를 표현한 바의 기록이 곧 미술사이다. 그러므로써 그 다양다종으로 표현되는 미술을 연속적인 소운동으로 설명함보다 창작적인 정신 운용으로 관찰함이 요긴한 것이다. 물론 역사는 전혀 창작적에만 있지 아니하나 미술의 원리를 주로 해서는 창작을 먼저 하는 비창작을 그 종속적으로 논하기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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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미술의 표현은 회화(繪畫·건축(建築)·조각(彫刻)에만 한정한 것이 아니요, 공예(工藝) 및 일용물 제작품에도 표현되고, 그 정신 운용으로 언어(言語)·문학(文學)·음악(音樂)·정치·도덕·전쟁까지도 뻗혀가 있음으로써 일반 역사를 통틀어 대조하지 아니하면 안 되나니, 이에 미술상 정신작용은 문화 전체를 발로(發露)함에 대하여 주재(主宰)가 되는 것이매 우리들은 미술을 광의적(廣義的)으로 강심(講尋)하여 보고자 하는 동시에 민족의 성질을 예술상으로도 판단하여 볼까 하는 의도도 없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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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술의 개념을 계통적으로 이해할 재료는 실물과 문헌의 2종을 대상으로 할 것인데,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물로는 근일에 땅속에서 출토된 병기(兵器)·동기(銅器) 등의 물건이 있고 문헌으로 말하면 선사시대에는 문자가 없으매 고찰할 곳이 없다. 그러나 중국인은 우리보다 선진(先進)하였던 까닭으로 고기록이 있었는데 그 중국 기록인『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산해경(山海經)』등 여러 문서에 적혀 있는 고징(考澂을 살펴보면 족히 고대의 미술을 추상(推想)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에 있어서 조선인은 동양에서 중국인을 제외하고 가장 문명을 발휘한 민족이니, 이는 실물이 증명할 뿐 아니라 중국 각 기록에 의해서도 알 것이다. 그런데 조선인은 본래 주부분이 조선 본토에 정착한 주인이거니와 3국이 건설하기 전 200년간에 있어서는 중국인이 여러 번 대군(大群)으로 옮겨왔으며 한인(漢人) 이외에도 사방의 여러 종족이 사이사이 내왕하였다. 우리 조선(祖先)은 그들 외래족에 대하여 강경히 격퇴도 하며 일방으로 그 치하(治下)에 복속시키기도 하매 이 강유 겸전(强柔兼全)의 활동력은 스스로 성정(性情)을 단련시키는 동시에 미적 심정의 창조력이 높아가게 하였다. 말하자면 외래종이 이주(移住)함과 더불어 재래(齎來)한 특색의 문화는 우리 고유문화에 의하여 포용되어 크게 확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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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사시대의 조선미술의 원상(原相)은 이 외국문화를 한갓 모방하거나 감화만 받은 것이 아니다. 조선인은 본래 예술성이 풍부하였던 것으로 각종의 외래문화를 종합하고 이용하여 그의 생활력의 왕성을 따라 발휘시켜 나간 것이다. 동서양의 어느 곳을 물론하고 원시인의 미술이 미개한 것은 물자가 풍부치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천연적으로 기이한 물자가 풍부함으로써 그 외계의 감화로 인하여 창조적 심미심(審美心)이 크게 발달하였던 터이다. 부여(夫餘)의 송풍석(松風石)이란 것은 한쪽이 1장(杖)이나 되는 큰 수정(水晶)의 보석으로서 그 내형부(內形部)에는 송수형(松樹形)이 스스로 비치어 기관(奇觀)의 물건이 된 것이니, 이것을 자랑삼아 또는 토산품삼아 외국에 예물로 보낸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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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옥(玉)은 조선의 특산물로서 그 광채가 수십보를 비추는 것이 많으니, 이런 천작물(天作物)에 대한 미감(美感)은 예술적 성정을 크게 발달시켰으매, 말하자면 눈에 반사하는 광선의 분량을 조화하는 색의 미감이 천분위(天分位)는 습관으로 발달되었으며, 그로부터 실물을 표현하고 취미를 암시하는 여러 가지 미술품을 묘출(描出)함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당시 사람은 호신(虎神)을 숭배하며 호피(虎皮)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그 조호(雕虎)·반표(斑豹) 등을 일종의 활동 미술품으로 본바 거기서 감득한 선미·형미 등을 상징하여 그것을 공업품 제작 방법에 활용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당시의 것으로 감정할 만한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의 확증은 고고학적(考古學的) 조사를 기다릴 수밖에 없으나 여하간 당시 미술은 이상적이 아니요 묵약적(黙約的) 상징으로 된 것은 사실이니, 이는 각 문헌도 증거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는 그렇듯 물산이 풍부하여 생활이 향락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통일력을 표현함이 없이 각기 부락 생활을 해왔다. 그러므로 북방에는 예(濊)라 저(猪)라 옥저(沃沮)라 부여(夫餘)라 하는 국가가 분립하고 남방에도 삼한(三韓)이 나열하였었다. 그렇듯 통일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문화도 통일적 양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외래문화가 수입됨에 대하여 그를 이용함에도 나라를 따라 혹은 고전(古典)을 묵수한 데도 있고 혹 미적 양식을 훨씬 변화한 데도 있었다. 그래서 고문헌상의 기록도 한결같지 못하여 중심이 될 설명상의 구도를 찾아내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그렇듯 각 지방을 따라 그 생활 양식이 서로 다른 형편이었지마는 정적 생활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한 정조(情操)를 가졌으니, 그 하나로 숭배하여 신의 영능(靈能)을 신앙하는 것은 통일되었다. 그로 인하여 문예로서의 신화(神話)·신가(神歌)가 발생하니, 그 정적 생활은 천상과 인간계와의 이원적 인생관을 가졌었다. 그 종교적 양식에는 각 지방이 다른 색채를 띠었으나 그 정신적 상상(想像)은 동일하였다. 그런데 그 천의 신앙은 이상적이라느니보다 실감적이었다. 곧 자연계의 영(靈)을 두려워하여 존경한 것이다. 그 실감적 배경에서 나온 미의식도 역시 사실적(寫實的) 동기로 되었으니 외래문화를 이용한 것도 곧 이 사생적(寫生的) 정신의 기초 위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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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논한 바를 다시 거두어 말하면 선사시대의 미술은 그 정신은 사실적이요, 그 예술적 양식은 고유 기술과 외래물을 구조(構造)한 것의 2종으로 분간하니, 부여왕의 인각(印刻)에‘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한 것과 진한왕(辰韓王)의 인각에‘위솔선호추장(魏率善胡酋長)’이라 한 한자(漢字) 사용같은 것이 있었던바 이런 것이 모조(模造)에 속한 것이다. 복식(服飾)에 있어서는 오늘에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화려를 다하였으니, 남자든지 여자든지 모두 수경(首頸)과 이식(耳飾)에는 주옥(珠玉)으로 장식하며 모자에는 금은으로 꾸미며, 혹은 은화(銀花)를 제조하여 의복에 찬 것도 있으니, 이는 다 화려한 구상력(構想力)의 넉넉한 표징이다. 방적업이 발달하여 목화와 양잠을 이용하여 포목·비단 등의 공업품이 성(盛)하였고 『사기』에“남녀는 모두 곡령(曲領)을 입었다. (男女衣[남녀의] 皆着曲領[개착곡령])”고 하였으니, 곡선의 우아한 형미(形美)를 쓴 것이 여기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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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읍루인은 돼지를 많이 길러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입고 털을 짜서 덮는다.(挹婁人多養猪[읍루인다양저] 食其肉衣其皮[식기육의기피] 績毛以爲布[적모이위포])”라고 하니, 어떤 지방에서는 돼지털의 모직 의복품을 입음도 있었던 모양이다. 북방인은 서양 고대인처럼 혹시 반나체 또는 나무 껍질, 수풀잎 같은 것으로써 몸을 가리는 일도 있으나 이는 원시시대의 자연식이며, 부여인은 의복에 회수(繪繡)를 입고 삼한인은 문신(文身)을 그려넣음이 있으니, 그 문신과 회수의 문양 구성은 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선·형·색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육체의 예술적 관념으로 표현된 장식이 발달한 것은 사실인바 이는 다 장식적이요 순수한 미술은 아닌 듯하다. 어느 것이든지간에 당시의 미술 양식은 통일이 없이 지방적 색채를 띠고 자유로 발전하는 창작적 활력 시대의 표현물이 됨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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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建築)은 소박한 제도로 됨이 많은데 혹은 외란(外亂)을 반항하는 사상으로써 굳이 고전(古典)을 굳게 지켜서 지하실을 곧 움집을 지은 일도 있지만 목재로 상당한 수법으로 건축함이 대부분이 된 것인데, 그 제도는 왕궁은 그 권위를 위하여 삼엄 장중의 정신을 발휘하며, 평민의 가옥은 실용상 안이(安易)와 간결을 위주하였다. 그 목재의 배합은 역학적 균형을 위하고, 성곽은 원형(圓形)의 목책을 주로 하니, 이 원성(圓城)은 기하학적인 모양으로써 동심원·대각선 등을 취한 것이다. 송사(送死)에 대하여 매장하는 일은 인사(人事)의 중시되는 사실로서 큰새의 깃을 나열하는 예식을 취하니, 이 새깃의 뜻은 죽은 자의 영혼이 날아가기를 위함이다. 저 서양의 분묘 사상은 죽은 자를 땅속에 편히 잠들게 함을 취하였으나 우리의 풍속은 그와 정반대로 되어 죽은 자의 혼이 속히 청정(淸淨)한 세계로 날아오름을 기도하니, 이 사상은 신에 대한 신앙이 피차에 다른 입각지(立脚地)로 되었던 것을 알 것이다. 분묘의 구성은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대체로는 제단(祭壇)의 뜻을 표하고 초목을 봉식(封植)하여 자연 풍물과 조화를 되게함에 마땅케 하였다. 어떤 지방에서는 무덤 위에 집을 건축하여 비와 습기를 막게 함도 있었다. 관(棺)은 나무로 함이 통규(通規)나『고적도보(古蹟圖譜)』제3책 306면에 보면 옥저인은 석관(石棺)을 쓴 일도 있고 부여왕은 옥으로 만든 관을 썼으니, 이 옥관(玉棺)을 쓴 것은 실로 대단한 장식이라 할 것이다. 본래 동양에서 옥조품(玉彫品)을 쓴 것은 터키 사탄(斯坦) 지방에서 수입되어 중국에 성행한 것인데, 부여의 옥제품은 당시 이 지방에서 주옥(珠玉)이 많이 산출되었던 까닭으로 그 많이 산출된 것을 활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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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예술상 의상(意想)은 모두 사생적(寫生的)이요 실감적이니, 이는 원시적 사상의 자연스런 태도라 할 것이나 일방으로 보면 미술적 감정은 삶을 위함으로써 고유 정신이 되어온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신적 신앙도 인본종교(人本宗敎)로 되어 인생을 위하여 신을 숭배하였다. 병기(兵器)에 대한 의장(意匠) 정신은 인간의 사활(死活) 문제가 붙은 것으로서 사실(寫實) 중에도 더욱 사실이니, 각처 박물관에 소장된 태고의 돌칼·돌도끼 등을 보면, 예리한 구상(構想)의 표현과 정치(精緻)한 수법은 족히 세계적이라 할 수 있어서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작품인 것을 알 것이다. 궁시(弓矢)는 동양에서 가장 특제품으로 되니, 단궁(檀弓)은 유명한 기계며, 호시(楛矢)에는 독약까지 사용하여 명중하면 즉사케 한 것이다. 이 특산품은 각국에서 흠모함이 많으므로 예(濊)에서는 외국에 예물을 주어 보낼 때에 궁시를 주요 물품으로 한 일도 있었다. 진류왕(陳留王) 경원(景元) 3년에 숙신(肅愼)이 석노(石弩) 300매를 예물로 보낸 일이 그 예다. 가인(家人)이 죽으면 즉시 그 집을 헐어버리고 새로이 가옥을 신축함이 있으매 이것도 곧 삶을 위함에서 나온 의상(意想)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풍속·습관·법제·예의 등도 다 동일한 미술 정신으로 발로되었으니 그 사생주의(寫生主義)가 일반 문화의 종자가 되어 후일 문화의 발아(發芽)를 지은 것이다. 그 의상(意想)이 전래하여 삼국 때에 와서는 한층 찬란한 미술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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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미술은 선사시대의 의상(意想) 및 재료를 이어받아 발달을 전개하였다. 최초에 부여에서 주몽왕(朱蒙王)이 남쪽으로 옮겨오고 그의 일파 온조왕(溫祚王)이 또한 일전(一轉)하여 더 남쪽으로 내려와서 북쪽에는 고구려(高句麗)가 설립되고 남쪽에는 백제(百濟)가 건설되며 진한(辰韓) 옛땅에는 자각적으로 경장(更張)하여 신라(新羅)를 건설하게 되었다. 삼국 건설하기 전 약 200년을 앞두고 민족 대이동을 행하더니, 삼국 건설 초기에 이르러서는 민족 이동의 최후의 종지(終止)를 고하고 정착에 이른 것이다. 동시에 그 삼국이 분립하여 인근 여러 소국 곧 자치부락을 통일함에 성공하였다. 그로부터 소국이 대국으로 합중(合衆)하니만큼 통일적 양식의 표현과 창작 활력이 일층 강화하여 자기의 특성을 발휘함도 공전(空前)의 세를 나타내고 외래문화를 활용함에도 응용하는 수법과 의상이 크게 진흥하였다. 그러나 전국이 삼국으로 병립(並立)되니만큼 또한 각지의 예술 활동도 서로 상위점이 없지 아니하니, 문헌 및 유물에 따르면 또한 전설 및 그 성격의 방면으로도 상위(相違)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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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최초 전설은 그 시조 주몽왕의 탄생설이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수중왕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결혼함에 이르매 하백은 해씨(解氏)가 과연 천제(天帝)인 것을 확실히 알기 위하여 경기로 시험할새 하백이 잉어가 되니 해씨는 수달이 되어 잉어를 잡고자 하고, 하백이 다시 꿩이 되면 해씨는 매가 되어 그를 쫓았다. 그리하여 하백은 마침내 그에게 패한 결과 그 딸과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 경기의 승리로써 결혼한 부부간에서 시조 주몽이 탄생하였다 하니, 이 전설은 그리스의 경기적 조각에 비해 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조각은 희곡적(戱曲的)임에 불과하되 이 주몽왕의 전설은 왕의 권위를 신성화하려는 정신이 있는 동시에 역적(力的)의식의 발동이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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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건국의 기초 정신이 그런 역적 욕망을 앞세운 것임으로써 그 정치적 활동 또는 일반 문화의 기운이 전혀 자유분방하며 우월적임을 꾀했다. 따라서 그 미술도 역시 일반적 구도와 의장(意匠)에 있어서 역감(力感)을 발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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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고분(古墳)에서 발견된 벽화는 일체 그 정신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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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현(輯安縣) 무용총(舞踊塚)의 벽화, 통구현(通溝縣) 광개토왕릉(廣開土王陵)의 벽화, 순천군(順天郡) 팔각총(八角塚)의 벽화, 강서(江西) 용강(龍岡) 지방 고분의 벽화 등 여러 능묘(陵墓)의 현궁(玄宮)을 장식한 벽화는 모두 한가지 의장과 수법으로 그려져 있는 것인데, 그 성질은 3종으로 갈라져 보이는 것이니, ① 풍속도로서 씨름 경기, 무사의 수렵, 여자, 소,수레, 궁전, 누각 등을 짝한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서양 앗시리아 조각에 궁정 생활과 수렵 모양을 부각(浮刻)한 것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고구려 풍속을 추상할 재료를 제공한다. ② 풍물도(風物圖)로서 구름·연꽃·일월성신(日月星辰)·당초화(唐草花)·산악 ‧봉황·사슴 기타 동물이다. ③ 전설도(傳說圖)로서 청룡·백호·주작(朱雀)·현무(玄武) 등 4신(四神)과 축귀신(逐鬼神)·천인(天人)·신선 등이다. 이것을 부분적으로 보면 각각 다른 것이라 할 것이나 분묘를 일물(一物)로 볼 때는 풍속·풍경 및 전설 등의 3제목을 일개의 구도로 통일한 것이다. 그 형식감으로 말하면, 범상한 눈으로 보면 희곡적 긴장미가 있다 할 것이나 미적으로 살피면 더없는 가치가 그 속에 나타나 있다. 직선·곡선의 운용을 위주한 중에 청·황·자·흑 등의 색채를 교묘히 배합하였는데 인물도는 그 수법이 세려(細麗)하여 기교(奇巧)를 다하고 풍물도는 유완풍미(幽婉豐美)하고 장려화미(壯麗華美)의 광경을 나타내었으며 전설도는 주경(遒勁)의 필(筆)과 웅호(雄豪)의 기상이 넘쳐 있다 모두 . 사생(寫生)의 묘를 위한 것이나 그 화풍은 모름지기 사실을 초월하여 작자의 이상을 표현한 바 신운표묘(神韻漂渺)의 정취를 발휘한 것이니, 이 벽화의 가치는 1300년 전의 영구한 기념물로서 동서양을 물론하고 벽화 중에는 가장 오랜 진품(珍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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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유물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문헌에 의하건대 왕궁 내에 사방 1리(里) 되는 수정성(水晶城)이 있어 그 반사하는 광명으로 인하여 밤도 낮과 같다 하였으니, 당시의 궁궐은 장려한 구조로 위엄이 대단했던 것을 추상키 좋다. 벽화에 있는 궁궐 누각을 살펴보면 걸치고 버틴 부분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통일됨이 충분하며 풍미(豐美)한 장식의 색조가 수려하여 발달한 예술의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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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 분묘의 구조도 근래 출토기(出土記)에 의하여 보건대 정방형과 또는 장방형의 2종이 있고 축조는 토축(土築)과 석축(石築)이 있는데, 석축은 화강석으로 3층 내지 7층 되는 것이 있고 너비는 100척 내지 170척, 높이는 29척 내지 49척 되는 것도 있어 안정되고 장려한 외관을 꾸몄으며, 천정은 3각문 또는 8각조로서 궁륭의 형을 짓고 운문(雲文)을 그리고 있으니, 그 건조 수법은 역학 응용이 대규모로 되어 장려를 다하였으며 강서(江西)의 소위 쌍용총(雙踊塚)이란 데는 현궁(玄宮) 통로에 8각형의 2본(本) 석주(石柱)로 수립(樹立)하되 기둥의 상하에는 연꽃·비룡(飛龍) 등을 채화(彩畫)하여 진기(珍奇)의 수법을 다하였으며, 일견에 신전(神殿) 같은 감상이 일어난다.『후한서』에 고구려 풍속은 살고 있는 좌우에 큰집을 세우고 귀신을 제사한다 하였으니, 신전은 보통 가옥 이상의 대규모로 구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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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서』와『신당서』에 보면, 대규모의 신전이 곳곳에 있었는데 그 신전에는 목조품의 부인(婦人) 신상(神像)이 있었으며, 그 목물(木物)의 조각은 어떤 수법으로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 구도는 신적 위엄을 표현한 동적 자세를 나타냈을 것이다. 각지 박물관에 보관한 기와는 파편(破片)이 많으나 평와(平瓦)·환와(丸瓦)·파와(巴瓦)이 3종이 있는데 연꽃문·인동문(忍冬文)·수면(獸面) 등의 각종 무늬로 양각(陽刻)한 것으로서 웅건(雄健)의 기풍이 있는 동시에 그 무늬의 의장(意匠)은 매우 자유로 하여 다취다양(多趣多樣)의 수법을 베풀었으며, 그 질은 극히 견실하여 남방물보다는 특이한 성질로 조성하였다. 복식은 대체로 부여식을 인습하여 금수(錦繡)와 금은(金銀)으로써 장식하였는데, 가장 특별한 인상을 주는 것은 두건(頭巾)에 깃털 2개로 높이 꽂은 것이니, 고구려인은 건축·회화·조각 어떤 것이든지 자유분방하고 기이한 효과를 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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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미술은 선적 의상(線的意想)이요 신라 미술은 색적(色的) 의상이다. 이것이 내가 삼국 미술에 대하여 연구해 오던 결론이다. 고구려의 벽화는 일체로 형 또는 색보다 선을 위주하니, 선이란 것은 기하학상으로 이 점에서 저 점으로 향하는 유동(流動)이다. 고구려인은 어찌하여 이 동적인 선에 취미를 가졌느냐 하면, 앞에 말한 대로 고구려의 건설은 민족 이동의 최후기로서 그 활동적인 민족성을 심미상에 있어서도 선에 의하여 그 표현욕을 만족시켰던 것이다. 더욱 그 지방은 한기(寒氣)가 심하여 농작에 잘 맞지 않아서 수렵 생활이 성하고 또한 건국 이래 외적과의 전쟁이 쉬지 아니하였으매 그 수렵적·전투적인 심정의 작용도 또한 동적이 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선적 사상은 한편으로 그 실생활상의 감명에서 온 것이라 하겠다. 신라인은 이동보다 정착 생활에 벌써 오래 전부터 익숙하여 농경의 단계에 오른지 오랬다. 그러므로 일보를 나아가 그들의 감성은 분수(分殊)되는 공간을 조화적으로 배합하는 광선의 성질 곧 색(色)을 취함에 이른 것이다. 고구려인이 굴〔穴[혈]〕을 숭배하였는데 신라인은 태양을 숭배하여 왕궁도 나을(奈乙)이라 하며, 나라도‘나라’라 하니, 이‘奈乙’[나을]과 ‘나라’라는 말은 곧‘날〔日[일]〕’과 같은 것이니, 이 태양 숭배심은 그들의 색조적(色調的) 관념에도 관계 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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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은 광선의 분량으로 인하여 거의 무한한 배합성이 있다. 신라인은 화상주의(華想主義)가 있으매 그 제도부터도 다양다체(多樣多體)로 조직되었으니, 건축 및 공예에 관한 관부(官府)를 상고할진대 그 장부(匠府)·6대장척(六大匠尺)·대장대감(大匠大監)의 3부가 있고, 그 밖에 벽전(壁典)·와기전(瓦器典)·석전(席典)·궤개전(机槪典)·사비국(司篚局)·칠전(漆典) 등이 있으며, 피전(皮典)·모전(毛典)·피타전(皮打典) 등과 직방국(織紡局)·별식방(別飾房)·금전(錦典)·채전(彩典)·염전(染典) 등과 철유전(鐵鍮典)·마전(磨典) 등의 각 전문적 관청이 배설되었으니, 거기서 나오는 각종의 공예 미술품은 전문적으로 발달하여 기려(奇麗) 찬란했던 것을 추측키 어렵지 않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도성에 초가집이 없이 기와집이 즐비했다 하니 이를 미루어 보면 건축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것이다. 분묘의 건조는 고구려와 전혀 달라 관념적인 필촉(筆觸)의 벽화가 없이 부장물(副葬物)의 실제 공예품이 많았으니, 이는 각 박물관에 소장한 유물을 보아 알 것이다. 각지에서 출토된 공예품은 대략 이하의 7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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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금속제 복식품 ② 주옥 파리(珠玉玻璃)류 ③ 무기류 ④ 마구류 ⑤ 동철품(銅鐵品) ⑥ 도기류 ⑦ 포백(布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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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들은 구라파 고대 미술품과 마찬가지로 모두 고분 가운데서 발굴된 것이다. 복식품 중에서 왕관(王冠)은 순금제가 유명한 것이니, 주위에 환옥(丸玉)·구옥(勾玉) 등등과 원형 금속을 달아 늘였으며 우아한 곡선미가 풍부하고, 뿐더러 그 장식이 흔들릴 때는 황홀한 광선을 반사하게 된다. 이 왕관은 얼마쯤 불식(佛式)을 쓴 동시에 신라 독특의 의장(意匠)을 조화한 것이다. 귀고리는 금릉 세공(金綾細工)으로 된 것이 유명하니, 이는 한식(漢式)으로서 중국에서도 보전되지 못한 고물(古物)이다. 동철기(銅鐵器) 등은 북위식(北魏式)이 많아서 수법이 정려(精麗)하고 도기류는 회흑색을 띤 것이 대부분인데 그 질이 견치(堅緻)하며 음각(陰刻)을 한 각종 문양이 있고 이형(異形)의 인물·고기·용·새 등을 새긴 것도 있으니, 공예품은 어느 것이나 한식(漢式)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고유의 특색과 고안(考案)을 발휘하기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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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유물은 첨성대(瞻星臺)와 분황사탑(芬皇寺塔) 둘이 있는데 이것은 삼국시대 가장 말기 인도 문화를 이용하던 초기에 나온 것이다. 첨성대는 경주(慶州)에 있는데 평면 원형으로 밑둘레 17척 1촌, 높이 29척 1촌의 석축이니 흡사 도장 모양을 띠고 있어 고대에는 최상부에 관측기를 놓았던 것이다. 그 구조 수법은 그리 웅장하다 할 수 없으나 동양 천문대 유물로서는 가장 오랜 것인바 고문화 연구의 귀중한 재료다. 분황사 석탑은 불교가 성행하던 때의 유물인데 당시는 이 탑을 국보로 치던 것이요, 현재에 있어서도 신라 최고(最古) 유물로 첨성대와 동일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3층의 방형석(方形石) 등으로 중국 전축탑(塼築塔)과 같은 것인바 초층 4면에는 입구(入口)를 지었고 그 좌우의 입석(立石)에 불상(佛像)을 육조(肉彫)로 새기고 단상 네 모퉁이에는 가장 웅혼(雄渾)한 돌사자를 놓아두었다. 이런 종류의 조형미술은 불교 유행의 반영인데 법흥왕(法興王) 때 저명한 공사이던 황룡사(皇龍寺)의 장육불상(丈六佛像)이란 것도 같은 종류니, 이것은 다 중국 남조 미술의 모조이다. 그 남조의 유송(劉宋)시대에는 장육(丈六)·장팔(丈八) 등의 동불상(銅佛像) 제조가 성행하였고 진(陳)에서는 엄청나게 100만구(軀)의 불상을 만들었다 하니, 선비(鮮卑)의 불상과 남조 유물과 이 황룡사 장육 및 기타 불상을 서로 비교하면 그 양식·의문(衣文) 및 수법이 피차 서로 같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불교미술은 골동적 가치가 주요, 미적 가치로는 감흥이 그리 나지 않는다. 불상 회화에 있어서는 솔거(率居)가 대표적 명장(名匠)이니, 솔거는 각 사찰의 장식화 및 불상을 전문으로 그렸던바 색조의 미와 빛의 효과를 선용했던 모양으로 그때 사람이 신화(神畫라고까지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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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의 백제 미술은 이상한 발달을 하였다. 그 시조는 본시 부여인으로서 남으로 옮겨와서 현재 충청도의 서부 및 전라도를 점령하였었다. 그들의 선천성은 북방 부여의 강용(强勇)한 의상(意想)이 있었으나 남방 온습 지방에 정착하여서는 다시 후천성으로 유약(柔弱)을 겸하여 이 유약과 강용과의 혼성성을 스스로 배합하여 기교로 발전했다. 그 기교성이 미적으로는 고구려식과 신라식을 혼성 절충함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백제 고분(古墳)을 출토한 기록에는 고구려식의 벽화도 있고 신라식의 부장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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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미술을 이용함에도 그 남북조 미술을 융화(融和)함에 노력한 자취가 보인다. 그 혼성적 또는 절충적인 예술욕이 도수를 증가하여갈 때에는 왕왕 신운표묘의 걸작품을 산출하였다. 그러나 그 남은 작품은 본국에 있는 것보다 해외에 진출하여 만장(萬丈)의 기염을 토한 일이 많았으니, 비조(飛鳥) 시대의 법륭사(法隆寺) 등의 건축과 도기·회화 심지어 음악까지도 건설하는 데 기여함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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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페놀로사 씨의『동아미술사(東亞美術史)』에는 백제인의 조각인 법륭사 불상은 세계의 유일한 미술품이라 말하기까지 하였다. 근세에 전라도 공예품이 전국에 으뜸이 된 것도 그 유풍(遺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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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묘의 벽화에는 고구려식과 동일한 사신도(四神圖)와 운문(雲文) 등이 있으며 금식구(金飾具)의 왕관도 있으니, 이는 신라식이다. 그러나 그 구도는 신라 왕관보다 특색이 있어서 팔화형(八花形)을 투조(透彫)한 것이다. 불상의 조각도 신라식을 면치 못하나 그 묘경(妙境)에 들어가서는 걸작이 많다. 문헌에 보면, 무왕이 궁전 남쪽에 연못을 파되 20여리의 인수(引水)를 행하고 사안(四岸)에 양류(楊柳)를 봉식(封植)하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의하여 조성하였다 하니, 20여 리의 인수 같은 것은 다른 두 나라에서 보지 못하는 장려한 기관(奇觀)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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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진흥왕 때부터 공전(空前)의 세력을 확장하여 100년간의 계속적 큰 전쟁을 일으키니, 그 전쟁이 성공하여 드디어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이 100년전쟁은 인명·물질이 총동원이 되었고 의력(意力)·지력(智力)·재력(才力) 등 그야말로 물심 양력 전체의 총출동으로서 문화 전체가 흔들려졌다. 그 결과 미술의 급격한 발달은 실로 미술사상(美術史上)의 경이한 시대를 양출(釀出)하니, 말하자면 통일 시대를 경계선으로 하여 그 미술 양식도 새 신라의 양식으로 전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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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전쟁은 자아(自我)를 위하고 적을 섬멸함에 온갖 힘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인하여 제삼자에 대한 관계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사정 교섭이 생기는 일이 있으니, 말하자면 원수도 친근해지고 친우도 구적(仇敵)이 되는 일이 있다. 이는 현대 열국간에서도 많이 있는 실례다. 신라가 100년전쟁을 계속하는 동안에 그 전쟁 목적을 관철키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 동시에 제삼자에 대한 교섭도 이상한 관계를 맺게 되니, 그것이 곧 제삼국인 당(唐)과의 교섭이다. 당이 본래 고구려에게 전패(戰敗)한 일이 있어 그 보복의 숙망(宿望)을 가지고 있더니, 신라가 그 지망(志望)을 알고 100년전쟁에 참가하기로 시사한대 당은 그 기회를 타서 병력과 재력을 신라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통일업이 달성된 뒤에 당은 야심을 가지고 신라 내지(內地)를 점령코자 한대 신라는 그를 분히 여겨 반대하는 동시에 당군을 영영 국경 밖에 축출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일시는 당의 문화를 수입하여 자국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니, 이는 당의 문화를 그대로 모조(模造)함이 아니라 당의 문화의 정신점은 구축해버리고 그 형식만 참고하여 자국의 독특한 양식을 발휘함에 이르렀다. 경덕왕(景德王)이 관호(官號)를 당제(唐制)로써 개칭하다가 불과 30년에 일체 구호(舊號)로써 다시 회복한 일도 그 예이다. 이 정신이 대신라 미술의 기초 정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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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미술은 후한(後漢) 때에 파사국(波斯國: 페르시아)으로부터 불교를 수입한 후에 발달을 한 것이니, 그때로부터 인물화·석각물·문방구 등이 진흥하였고, 진(晉)나라 때에는 화성(畫聖) 장묵(張墨)이 산수화(山水畫를 창설하고 파사로부터 밀타승유(蜜陀僧油)를 수입하여 유화법(油畫法)을 시작하며, 석굴암 가회랑 등도 발달하였다. 그 남북조 시대에는 북조에 산수화·인물화 등이 이론적으로 발달하며, 남조에 불상 조각이 크게 발달하니, 이것을 이른바 남북 양파의 미술이라 한다. 수나라 때에는 그 남북 양파의 의상(意想)이 합류(合流)되다가 당(唐)에 이르러 공전의 대발화(大發花)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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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당 문물을 수입 이용함에는 그 남북 양파의 미술을 취하여 자기의 창작적 천재와 고유 정신으로써 그를 융합한 것이다. 불상 조각에 있어서도 당나라 식과 인도식을 합하여 독창적 의장(意匠)으로써 혼합한 것이다. 이 혼합적 의상은 전일 백제의 필법과 동일한 정신이 있다 할 것이나 그 실상은 위에 말한 대로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정치 수단과 동일한 의취(意趣)인 동시에 통일업을 중심으로 한 구심적 경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요소를 일보 더 나아가 논구(論究)하면, 그것이 신라나 백제에 한한 특수성이 아니라 조선인 고유정신의 계통이라 할 것이니, 이는 통일시대가 시사하는 역사적 현상과 출토된 유물을 서로 비겨보면 그 특징이 명료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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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묘의 건축은 태종무열왕으로부터 흥덕왕까지 7, 8분묘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이 또한 가장 발달한 구도로 된 것으로서 모두 그 장식물은 인형·신형(神形) 및 수형(獸形) 등을 부조(浮彫)한 석물(石物)과 주석(柱石)·호석(護石)·상석(床石) 등이 있고 봉분의 주위는 돌난간을 쌓아 놓았으니, 그 조각의 수법은 장려와 웅호(雄豪)의 기풍을 띠어 일견에 백려(魄麗)하고 엄숙한 감각이 일어나며, 석물은 대개 당나라 식을 적용한 것이나, 그 배치의 예술적 사려(思慮)는 조선식 의근(意根)에서 피어났다. 호석·돌난간 및 상석을 설비한 것은 전혀 조선의 고전 양식으로서 장려를 다한 것이다. 곧 석물 배열의 전체적 구도와 그 중심적 부분은 고전식이요, 장식적인 당물(唐物)은 일종 전리품으로 진열한 것이다. 말하자면 석상은 특히 제례(祭禮)를 행하기 위한 실용적 요소가 갖추어진 것이요, 분묘마다 미술적 장식인 비석(碑石)이 있으니, 이는 죽은 자를 위한 기념비로서 통일적인 외관(外觀)을 갖추어 둔 것이다. 대개 분묘의 예술적 장식은 조상 숭배의 관념을 표현한 것이니, 희랍이 외란(外亂)을 격퇴한 뒤에 신전·신상을 성대히 영조(營造)한 것처럼 신라가 통일전(統一戰)에 개선한 뒤에는 신공성덕(神功聖德)을 사모함이 배가하여 조상을 숭배하는 정조(情操)가 예술상으로 굴러나와 분묘도 그렇게 장엄하게 치장한 것이니, 다시 말하면, 시대 정신과 사회 제도 변천의 산물이다. 그 정조가 일층 나아가서 국민적으로 보급 전승되어 이조 말기까지 미쳤으니, 근일에도 개인이 그 선조를 위하여 분묘를 치장하는 일은 일종 인습으로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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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불교가 홍포(弘布)하여 완전히 국민 종교로 되었다. 사원 전면(全面)에는 농후한 장식의 보조를 빌려서 거대한 힘이 있는 인상을 주게되니, 당시 미술은 불교도가 그 큰 세력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불교미술은 전혀 인도 및 당제를 모조한 듯하나 실은 그렇지 아니하여 이 역시 큰 걸작품은 일체로 신라적 특징을 갖추었으니, 그 대표적 건축은 경주에 있는 불국사(佛國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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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의 전체 건물이 장려를 다하였거니와 그중에도 함영루(涵影樓)는 기려(奇麗)한 기둥으로써 받치고 전면에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라는 돌계단이 있으니, 이 돌계단은 극도로 기교(奇巧)하게 된 것으로서 동양 각지에는 그 비류(比類)가 다시 없게 된 것이다. 뜰앞에 있는 다보탑(多寶塔)은 3층으로서 화강석을 목재같이 치조(治彫)하여 독특하고 정교한 수법으로 건조한 것이니, 형태도 수려하고 권형(權衡)도 또한 아름답다. 매 층이 다8각형의 평면이요, 또 석층마다 구란(句欄)을 둘러싸며 위에는 8각형의 옥개(屋蓋)를 씌우고 정상에는 상륜(相輪)을 꽂았고 기단(基壇)에는 1, 2구(軀)의 돌사자를 앉혔으니, 각처 탑 가운데서도 가장 걸작이라 하겠다. 다만 중국탑이든지 조선탑이든지 모두 인도의 저굴(底窟) 중에 조각한 불탑(佛塔)을 전문(傳聞)하여 상상적으로 축조한 것인 때문에 인도의 본탑과는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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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의 후방에 있는 석굴암(石窟菴)은 당시 건축술이 놀랍게 발달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석굴암의 기원은 본래 인도에서 일어나 중국 진(晉)과 그 남조인 진(陳)에서 성행하던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인도에서 석가(釋迦)가 죽은 뒤 238년에(중국 전국말) 영주(英主) 굽다왕의 손 아육왕(阿育王)이 즉위하여 불도(佛道)를 크게 전파할 때에 석굴(石窟)을 뚫고 불상(佛像)을 조각하는 법이 일어났다. 진(晉)나라 때에 그 조각법을 모조하여 소규모의 조상법(造像法)이 유행하더니, 남조시대 진국(陳國)에서는 대규모로 시작하여 양주(涼州) 남쪽 100리의 산안(山岸)에 석굴암을 조성(造成)하니, 이것이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도 사주(沙州)의 동남 30리 삼위산(三危山)의 안(岸)에 오히려 280구의 불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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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의 석굴암은 곧 진(陳)의 유법을 모조한 것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중국의 석굴은 천작(天作)의 석벽(石壁)을 이용한 것이요, 불국사의 석굴은 인조(人造)다. 곧 석재(石材)를 취합하여 석벽을 조작(造作)하고 거기다가 부처의 군상(群像)을 조각하되 그 구도는 회화(繪畫같이 전개된 것이다. 이 곧 인조 석굴은 그의 천연 석굴보다 백배나 더한 기교의 표현이다. 뿐더러 인조 석굴이란 것은 중국에서는 물론이요 인도에도 없는 건축이다. 실로 세계에 다시 없는 보물이다. 이 석굴은 평면 원형으로서 경(徑)이 12척 6촌인데, 그 전면(前面)에 입구가 있고 그 밖에 다시 장방형의 전실(前室)이 배풀어졌으며, 전실에서 석굴로 들어가는 좌우 벽에는 고육조(高肉彫)의 불상과 반육형(半肉形)의 팔부신장(八部神將)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나누어 배열하였다. 내부 주위에는 박육조(薄肉彫)의 11면입불상(立佛像), 10나한(羅漢)의 입상(立像), 천인상(天人像)과 기타 보살 등의 좌상(坐像), 정좌(正座)에 석가좌상이 있고 천정은 궁륭(穹隆)으로 구성하며 중심석에는 웅려(雄麗)한 연꽃이 새겨 있으니, 그 장려한 의장(意匠)은 세계에 유일무이한 석조 신전(神殿)으로서 실로 귀신도 탄복할 것이다. 다시 세부로 들어가 말하면, 조각의 자세는 장중하고 또 단엄(端嚴)하며 의문(衣文)의 수법은 유려한 중에 경건(勁健)의 운(韻)이 띠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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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수한 조각은 동양 각처의 작품이 이에 비견할 것이 없는 걸작이거니와 형식은 신라 고유의 특성을 발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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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寺院)에는 반드시 시간을 울리는 종(鐘)이 있으니, 불사(佛寺) 건축이 성함을 따라 종을 주조하는 일도 성행하였는데, 당시에 기능을 다하여 만든 종으로서 오늘날에 유존(遺存)된 것은 상원사종(上院寺鐘)과 봉덕사종(奉德寺鐘)의 2개다. 이 종의 양식도 신라의 독특한 양식으로 종체(鐘體)에 조각된 문형(文形)은 보상화(寶相花)·연화(蓮花) 등을 부조(浮彫)하고 용과 천인 등도 새겨 있다. 그중에 봉덕사종은 12만근의 동(銅)으로써 구조(構造)한 것인데 구경은 7척 5촌의 대종이요, 종구(鐘口)는 8능형(稜形)이며 구대(口帶)·견대(肩帶) 및 유곽(乳廓)에는 부려(富麗)를 다한 보상화(寶相花)를 새기고 따로 호경(豪勁)한 용두(龍頭)와 웅려한 비천상(飛天像)은 조각이 정미(精美)하고 기공(技工)이 숙련되어 고금 무비의 걸작으로서 중국에도 이런 대규모 또는 굉걸한 종은 없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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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에 있는 불상은 수효가 많아 환조(丸彫)·부조(浮彫)·선조(線彫) 등 으로 구별해 볼 것이니, 그 수법은 배광(背光)이 구족(具足)하고 권형미(權衡美)가 웅려하며 그중에는 중심력을 응용한 반원형의 불입상(佛立像)도 있다. 모두 신라 독특의 의상으로 된 것이다. 그 밖에 문헌에 나타난 만불상(萬佛像)이란 것이 있으니, 이는 단목(檀木)과 주옥(珠玉)을 주재(主材)로 하여 높이 1장(丈)의 산을 조각한 것인데 그중에는 7, 8촌 내지 1촌 되는 소형의 불상을 새긴 것이 무수히 있는데 그 몸이 비록 적으나 이마·눈·입·손의 모습이 역력하여 섬세하고 고움이 다하여, 금·옥·수정 등의 장식물이 갖추어 9색의 빛이 비치매 당시 사람은 그것을 신물(神物)로써 탄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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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구조로써 공간 배치의 미를 나타낸 서도(書道)에 있어서는 그의 숭상이 많지 아니하였으나 김생(金生)과 요극일(姚克一)의 2인은 명필로 중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김생의 필치는 아름답고 교묘하여 여성적인 태도가 있고 요극일의 필치는 준경(遵勁)하여 남성적인 기상이 있는데 어느 것이고 그들의 필적은 모두 기품(奇品)이다.『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 보면, 혜공왕 때 사람 김충의(金忠義)가 화법(畫法)에 선(善)하여 교절(巧絶)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수법이 정교하여 벼슬이 장군(將軍)에 이르렀다하고『화사회요(畫史會要)』에 보면, 발해인(渤海人)의 대간지(大簡之)는 화공(畫工)으로서 송석소경(松石小景)에 선(善)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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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시대에 있어서는 문화가 전대보다 한층 진보하여지고 따라서 미술도 가히 황금시대를 나타냈다. 그의 원인은 셋이 있으니 ① 전대 말기의 쇠약을 대광(大匡)하여 혁구쇄신(革舊刷新)의 정사를 개장(改張)함에 있다. 곧 전대 말기에는 정사와 민지(民志)가 문약(文弱)으로 흐르는 동시에 나태해지매 일반 문화가 퇴보하더니, 고려조가 수립되면서부터는 문화의 약풍(弱風)을 버리고 무풍(武風)의 장점을 발휘하니, 곧 세공(細工)의 수법을 배척해버리고 다시 웅려(雄麗)의 정신을 취하였다. ② 전대보다 불교를 더욱 전상(專尙)하매 그 세력이 크게 진흥하는 동시에 불교는 종파를 각기 나누어 여러 갈래로 나뉘니 그 분열됨에 따라서는 각파의 활동에 따라 인재가 많이 일어나는 동시에 미술도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다. ③ 우리의 미술 영역을 광범케 하고 세계의 풍조를 받아들이려 했다. 그래서 송·원(宋元)의 문화를 수입하여 그를 참고 또는 이용하는 운동이 있었으므로 고유의 미술은 한편으로 외래 미술에서 새 경험을 얻어 풍부해졌다. 이 세 원인 중에 미술 활동에 직접 관계가 큰 것은 불교의 왕성과 그 당파의 경쟁이다. 본래 불교가 왕성케 됨은 천수대왕(天授大王: 太祖[태조])이 전대로부터 유전된 민중의 신앙심을 해방한 까닭인데 이미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락할진대 왕의 위력 하에 인도함이 통치상 득책이라 하여 왕은 국법·국력으로써 불교를 크게 홍포(弘布)할새 사원(寺院)을 다수 창건하고 승과(僧科)까지 설시하여 고승(高僧)·재니(才尼)를 크게 택용하였다. 불교가 성해가자 불교도가 정치에 간섭을 행한 일도 있어 묘청(妙淸)은 평양(平壤)에 장엄한 궁궐과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고 국도(國都)를 그리로 옮기며 거기서 만국의 조공(朝貢)을 받으며 세계를 통일코자 하는 웅도(雄圖)도 있어서 그 큰 포부가 심미적(審美的)으로 옮겨 나와서는 천하의 미술품을 포괄하여 자기 것을 삼는 동시에 자기의 독특한 이상(理想)을 발휘코자 하였다. 또한 불파(佛派)가 12파로 분열하여 서로 격렬한 경쟁을 하여 나가는 동안에 각파에 인걸(人傑)이 많이 출현하였다. 각 사찰에 둔 장식적 미술품·공예품 들도 역시 경쟁적으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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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은 신전·왕궁·능묘(陵墓)·사원(寺院) 등이 주인데 신전은 산중수림 사이에 자연미와 조화하여 설치하되 수십간의 거옥(巨屋)도 있으나 대부분은 희랍 고대 신전처럼 신상(神像)을 안치(安置)하여 그를 보호하면 족한 것으로서 실용적인 요소가 적게 건축하매 그 결과 충분한 예술미를 발휘 하기에 족하였다. 왕궁은『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그 위치의 미(美)와 화문(花文) 단청(丹靑)의 장식이 굉려(宏麗)하며 석재·목재 등의 통일적 구조가 매우 굉걸하였으나 신전이든지 왕궁이든지 지금에 전하지 못하매 오직 상상만 야기할 뿐이다. 능제(陵制)는 전대의 형식을 의지하여 석 물·돌난간·비각(碑閣) 등을 장려하게 배설하되 일보를 나아가 양석(羊石)·호석(虎石) 등의 상설(象設)을 더하며, 어디든지 석등을 진설(陳設)하니, 이 양호(羊虎) 및 석등 등은 고려조의 새 특색으로 된 것인데 그 석등은 불교식을 가미한 것이다. 각 능묘 중에 공민왕릉(恭愍王陵)이 가장 굉장하고 화려한 기상을 나타냈으니, 석물은 다 부조로서 수법이 정려(精麗)하고 풍모가 수미(秀美)하며 그 석등은 4각형으로 권형(權衡)은 낮으나 안정된 모습이 있고 유불식(儒佛式)을 융화하여 태극문·연화문·보주(寶珠)등의 조각에 있어 장중 웅려의 기상이 떠돈다. 이 석등류에는 은진(恩津) 관촉사(灌燭寺)의 것이 가장 풍미한 수법으로 되니, 그 형상은 돌로 기둥조각을 만들어 둘러싸고 불을 켜는 데는 평면의 방형(方形)이고 그 위에 2층 석개(石蓋) 및 보주(寶珠)를 덮어놓았으니, 이 석등은 고려대의 제일가는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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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佛寺)로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니, 이는 전대의 형식으로서 우왕(禑王) 때에 개수한 것이다. 조선 건물에는 제일 오래된 것이니, 형태가 장중하며 구조의 양식 및 그 수법은 기교를 다한 것이다. 기둥은 중부가 팽대(膨大)하고 상하부는 세(細)하여 수직선의 효과를 나타내 우리들이 미감을 느끼게 한다. 치목(治木)이 모두 웅경(雄勁)하며 연목(椽木)은 둥그나 부연(付椽)은 모가 지니, 이 부연은 고려 신제(新製)라 하나 기실은 신라 고전(古典)이요(『三國史記[삼국사기]』권30 三屋舍條[삼옥사조]), 천정은 복잡한 조물(組物)을 자유로 응용하고 2중 규량(虬梁)으로써 기교하게 구성하니, 채색은 녹청(綠靑)을 주색으로 하고 기둥과 용재(用材) 하단 등의 색은 동일하게 하여 대조법을 지었다. 그 자유로운 구조와 능란한 수법은 실로 고려조 건축술의 크게 발달한 인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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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절에 있는 석탑의 양식은 전대 고전식과 신양식을 취함에 있어 4각·6각·8각 또는 기형(奇形) 등의 별식(別式)으로 건조함이 많다. 평양 영명사탑(永明寺塔), 오대산 월정사탑(月精寺塔) 등은 다 8각이요, 평양 대동공원 탑(大同公園塔) 같은 것은 6각형이다. 월정사탑은 9층으로서 형태가 장중하고 수법이 웅경하며 정상(頂上)에 상륜(相輪)을 꽂아 놓고 각층 처마 끝에는 고유식의 풍경을 달아 무한의 풍취를 첨가하니, 8각탑으로는 최대의 걸출(傑出)이다. 폐지된 개풍군(開豐郡) 경천사탑(敬天寺塔)은『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같이 몽고 공장(工匠)을 사용하여 조성한바 원식(元式)으로 된 것이니 하3층은 8각 옥개형이요, 그 상7층은 방형인데 회색 대리석으로 축조하고 부처 ‧인물 ‧초화(草花) ‧반룡(蟠龍) 등을 양각(陽刻)하되 탑 전신에 빈틈이 없이 도상(圖像)을 새겼으니, 권형이 완전하고 수법이 기묘하여 장려 부섬의 기상을 발휘한 것이다. 이 원식으로 된 것은 실상 중국에도 이만큼 선미(善美)하게 축조된 것이 없는 것이다. 여주군(驪州郡) 폐고달원(廢高達院)에 있는 원종대사기념탑(元宗大師紀念塔)과 충주군 폐정토사(廢淨土寺)에 있는 홍법대사기념탑(弘法大師紀念塔)은 8각형으로서 다서로 참신한 양식으로 된 것이니 원종탑은 2중의 보개상(寶蓋狀)을 만든 것인바 형태가 기발하고 수법이 웅혼하며 기공(技工)도 정련(精鍊)하다. 홍법탑은 탑신(塔身)이 구상(球狀)으로 된바 새 의장(意匠)으로서 섬려(纖麗)를 다한 걸작이다. 이 8각형에 대하여 관야정(關野貞) 박사는 송식(宋式)이라고 하나 나의 연구로는 불국사 다보탑도 8각이요, 봉덕사종도 8 능(綾)으로 되었으니, 그러므로 고려조에서 4각 이상의 다각(多角) 양식을 쓴 것은 신라식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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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은 그다지 발달되지 못한 듯하되 우수한 제품이 많이 있다. 평산군(平山郡) 태백산성(太白山城) 태사서원(太師書院)에 봉안(奉安)한 4태사(太師) 철상(鐵像)은 최승로(崔承老)의 감독하에 주조된 것인데, 고려 초의 공신 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신숭겸(申崇謙)·유검필(庾黔弼) 4인의 동상이니, 이는 배씨(裵氏) 족보에서 조사해 얻은바『선조실록(宣祖實錄)』 29년(1596) 12월조에도 있는 말이다. 그 상모(相貌)는 우아한 중에 웅위한 기상이 떠 있으며 그 의문(衣文)은 정숙한 선조(線條)를 양각하였는데 수법은 고졸(古拙)하나 순화미(純化美)가 넘쳐 있다. 동양에서 인물을 기념하여 주조한 철상(鐵像)은 이것이 가장 오래된 유존품이니, 나는 이것을 발견할 때에 받은 인상은 다른 불상보다 더욱 강하였다. 개풍군 폐적조사(廢寂照寺)에 있는 철조불상(鐵造佛像)은 고전 곧 전대 수법으로 주조한바 우아한 풍취가 들여다보인다. 목조품(木造品)으론 동신사(東神祠)에 여자신상(女子神像)이 있었다 하나 전하지 아니하고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있는 불상은 자세가 당당하며 면상(面相)은 온아(溫雅)한 중에 웅위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 옷무늬 선조는 자유로서 준경(遵勁)하며 배경은 유려한 보상화(寶相花)를 부조(浮彫)하고 주변에는 타오르는 불꽃을 새긴바 목조로는 유일의 걸작이다. 석조품(石造品)으론 은진미륵(恩津彌勒)이 대상(大像)으로서 높이 64척이요, 수법은 간졸(簡拙)한 편이나 형이 큼으로써 인상을 깊게 하는 것이요, 북한산에 있는 석벽불상(石壁佛像)은 높이 21척의 바위면에 새긴 것인데 수법이 자못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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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윤언민(尹彦旼)·이녕(李寧) 부자 등의 휘호(揮毫)가 유명하였는데 그중에 이녕의 산수화는 천하에 견상(見賞)하였던 것이다. 당시 송(宋)의 화풍은 개인주의 산수화가 발흥하였다. 그러나 고려조의 회화는 그런 개인주의가 아니요 사실주의(寫實主義)에 있었으니, 이녕의 산수화도 예성강(禮成江)의 실경(實景)을 묘사한 것이 천하의 절품(絶品)으로 되었던 것이다. 태백산 부석사(浮石寺)에 있는 불상의 벽화는 녹청지(綠靑紙)에 채화(彩畫)한 것인데 용필(用筆)이 간모(簡模)하고 전채(傳彩)가 담아하며 표정은 불심(佛心)의 자비함을 남김없이 나타낸 구도로서 일견에 고려조 정신의 정취가 나타나 있다. 개풍군 수락동(水落洞) 고분에서 발견한 벽화는 고구려 고전식으로 되어 사신상(四神像)을 채색으로 그리고 방위신상(方位神像)은 어느 것이든지 고대 또는 중국식을 물리쳐버리고 고려 당시의 의관(衣冠)을 입었으니, 필의(筆意)가 온아하고 면모와 자세도 정제미가 있는바 전설을 현실적으로 표출하는 의상(意想)이 알려진다. 공민왕의 화격(畫格)은 가장 높아서 그 필적을 많이 볼 수 없지마는 창덕궁 박물관에 보존한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를 볼진대 용필이 주밀하고 기품이 웅경 또는 고일(高逸)하여 당세의 사실주의의 정신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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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書道)에는 출중한 명필이 나지 아니했으나 보통 능필가(能筆家)는 배출하니 홍관(洪灌)·이인로(李仁老)·김방경(金方慶)·김간(金間)·곽예(郭預) ‧성석린(成石璘) 등이 다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의 능수다. 그 능필가가 종출(從出)함에 따라 문방구가 발달하였다. 진(晉)나라 때에 서화가가 발흥함에 말미암아 측리지(測理紙)·밀향지(蜜香紙)·어란지(魚卵紙) 등의 지물(紙物)이 발달한 것처럼 고려조 때에도 서화에 따라 그의 기기(機器)되는 문방구가 크게 일어나『산곡집(山谷集)』『묵사(墨史)』『삼재조(三才藻)』『철경록(輟耕錄)』『동파집(東坡集)』등에 보면 고려의 성성모필(猩猩毛筆)은 능유능강(能柔能剛)하여 소동파가 항상 아끼고 묵공(墨工) 해초 부자는 (奚超) 남당(南唐)에 건너가 집대성하였다 하고 고려산의 견지(繭紙)·청자지(靑磁紙) 등은 품질이 극기(極奇)하여 송나라 서화계의 주용품(主用品)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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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로 인하여 실용미술의 공예품은 상상 이외로 크게 발달하였다. 개인의 사장품, 절간의 보존품, 분묘에서 출토된 것을 걷어보면 종류도 수북하거니와 그 의장(意匠)의 풍부함과 수공(手工)의 세교(細巧)함은 놀랄 만한 것이 많다. 범종(梵鐘)의 양식은 고유의 고전식도 있고 개성 남대문 종은 이른바 가사금양(袈裟襟樣)·범문자(梵文字)·팔괘(八卦)·불상 등을 새긴 것으로서 순전히 원나라 식을 본뜬 것이요, 경성 동본원사(東本願寺)에 보유한 것은 특별히 고유식과 중국식을 절충 융화하여 만든 것인데 수법도 매우 우아한 기풍을 띠고 있다. 땅속에서 발굴한 동경(銅鏡)은 다양다종으로서 일체 중국식으로 되었는데 여진문자(女眞文字)를 새긴 금국식(金國式)도 있다. 이 동경(銅鏡)은 생각건대 당시인의 직접 제조가 아니요 외국물을 수입하여 차장품으로 사용한 것인 듯하다.『고려도경』에 보면, 기물·침구·잡품 등의 설명이 있는바 금은으로 제조하고 동물형의 투조(透彫)와 조수(鳥獸)·화초 등의 조각이 부려(富麗)한 모양이다.『고려사』에 보면, 당시에 사용하던 은전(銀錢)은 본위화(本位貨)로서 15냥 1근쭝에 2냥 5전쭝은 구리를 합하여 주조한바 그 합동(合銅)은 전질(錢質)을 강하게 하고 또한 주조비를 당하기 위함이니, 이는 현대 주전법과 똑같다. 당시 금공의 의장(意匠) 및 수법도 발달하였거니와 합금술도 크게 발달함을 알 것이다. 그 은전에는 고려 지도(地圖)를 새겨 그로써 부호를 삼으며, 이름을 샐입〔闊口[활구]〕이라 하니, 조선 화폐제도는 이때에 이르러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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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沙器)는 다른 공예품보다도 우수하게 발달되었다. 그 실물들은 항아리·병·주전자·잔·대접·향로·연적(硯滴)·필통 등인데 그 형태는 정호(精好)하고 사용에 적당하며 문양도 연화·보상화·교룡(蛟龍)·파문(波文)·운학(雲鶴)·모란(牡丹)·포도 및 문자의 여러 가지요 형형색색이다. 조법(彫法)은 부조(浮彫)·비조(箆彫)·투조(透彫) 등으로 부려한 성질을 발휘하였다. 와법상(窪法上)으로 보면 백토·흑토 또는 진사(眞沙)를 감입(嵌入)하고 그 위에 유약(釉藥)을 베풀어서 소성(燒成)한 것도 있고 흑유(黑釉)를 베푼 위에 백유(白釉)로써 무늬를 지은 것도 있다. 어느 것이고 완호(完好)하고 전아하며 함축미가 있어 볼수록 감흥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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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일에 이 사기 연구에 대하여 분류 설명한 학자가 여럿이다. 그러나 그중에 고유섭(高裕燮) 씨의『조선의 청자』라 한 소책자가 가장 완전하다. 그런데 나는 고증보다 소성(燒成)의 제조법으로 보아 어떤 가치가 있나 하는 것을 주로 연구하고 싶다. 대강 말하건데, 고려조의 사기는 급속한 발달을 겪으니만큼 난숙한 경험방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처녀작적 시험방에서 나온 것이라 문자 이상으로라도 중국의 정(定)이라 여(汝)라 균(均)이라 또는 와(窪)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없이 오직 어떤 소성의 방법을 투득(透得)하였지마는 토질의 분석, 화도(火度)의 적의 등을 일정한 규정으로 한 것이 아니요, 모두 되는 대로 시험적으로 하여 그 세부분의 소성이 자연적으로 완전하고 좋으면 천하에 제일이 되고 불완전하면 질박한 하품으로 되는 것이라 말하자면 반은 과학적이요 반은 자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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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각종 기물의 형식 및 그 내용을 보면, 중국 고도기(古陶器), 터키 물건, 페르시아 물건, 월남 등의 물건과 같은 것이 있으니, 이 수법은 몇백년 전부터 숙달한 교공(巧工)이 외국물을 모조한 것이 아니요, 화도(火度) 및 토질에 대한 미숙달의 방법이 우연적으로 묵계상사(默契相似)를 나타낸 것이다. 둘째로 터키소(燒),페르시아소(燒) 등은 저화도(低火度)로 된 연유(鉛釉)의 연도기(軟陶器)로서 색채의 문양미를 고조(高潮)로 한 것이요, 중국소(中國燒)는 점토질분이 많은 태토(胎土)에 독특의 토산(土産)인 석회유(石灰釉)를 써서 고화도(高火度)로 된 것이니 강미(强味)가 있다. 고려 사기는 현대 와법상(窪法上)으로 보면 태토는 조(粗)·세(細)·백(白)·적(赤)이 일정치 아니한데 유약은 대체로 백토에 석회 또는 식물의 재〔灰[회]〕를 섞은 것으로서 저화도와 고화도의 중간물로 된 듯하다. 흑회(黑繪)의 색료(色料)는 거의 철염(鐵鹽)에 의하여 정색(呈色)한 것인데 이 흑회의 조자(調子)는 소성 화도(火度)가 불충분함에서 나온 것이니, 유약의 용융(溶融)이 완전하면 흑미(黑味)가 줄어드는 것이다. 애급의 고도(古陶), 희랍의병, 옛 페르시아 산물 및 당·송(唐宋)의 고기(古器)가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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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허심(虛心)으로 묘사한 대담한 문양의 미와 형체의 묘작(妙作)이 상품됨은 다시 말할 것이 없거니와 그 시험적인 소성의 내면에 있는 미적 활동은 강렬한 사실주의를 가진 것이니, 이 표현은 당시 미술의 일반이 되는 정신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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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500년을 일기로 한 문화 및 미술은 고려조보다 판이한 의상(意想)으로 전개되었다. 얼핏 말하면, 고려조는 사실주의이요 이조는 이상주의(理想主義)다. 이조가 개창하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도(儒道)를 오로지 숭상하여 그 정책으로써 500년을 일관하여 오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전대에 있어서 불교로 발생한 폐단을 일소케 함이다. 그럼으로써 이조는 인적 발정(人的發情)의 번뇌를 정복하고 절대적 평정(平靜)을 취하던 불교의 유령적(幽靈的)미술 사상(思想)을 소탕해버렸다. 그리고 인본적 이상주의의 유도사상이 크게 일어나니, 그 사상의 근저는 태극철학(太極哲學)이다. 말하자면 우주는 한 태극이요 만물도 각기 한 태극이라 인간도 한 태극이다. 그러나 인간과 만물은 불완전한 태극인바 우리들은 그 불안전한 태극을 수양에 의하여 완전한 태극에 도달케 함이 구경(究竟) 목적이다. 이 사상이 정조(情操) 및 현실에 나가서는 만사를 이상화함에 노력하였다. 이 이상적 활동으로 인하여 문화는 물질보다 학술이 크게 진흥하게 되니, 그러므로 이조 문화는 정치의 제도, 언문(諺文)의 발명, 여러 가지 학술의 저술 등 문자공(文字工)의 시설이 굉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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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태극적 철학사상의 발동은 연역적(演繹的)이다. 곧 만사를 큰 진리에 근본하여 해석하고 통일코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군주전제로써 지배하매 그로부터 미술도 절대권을 가진 군주의 위력에 의하여 발전하니, 흡사 구라파에 문예부흥 시대가 지나가고 궁정문화 시대에 돌아와서 미술이 전혀 왕권하에 지배되던 것과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일반 미술은 궁정을 중심으로 하매 건축도 국왕의 권력을 표상한 기념물에 불과하여 최대한도의 재료를 쓰며, 장식을 위주로 하여 단순성을 결한 느낌이 있다. 내용보다 형식이요 사실(寫實)보다 이상화다. 일반 미술가의 충의적(忠義的) 열정이 창일(漲溢)한 것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미술가가 자기의 내부적 의식으로 자기를 발전시킴은 알 수 없는 일로 보니, 곧 미술가는 자기의 개성을 발휘키 불가능한 동시에 저들의 구하는 노력의 촛점은 무엇인지 알 수 없이 지내왔다. 이조 일대의 예술가·건축가 및 공예가들은 상급인이 아니요 하급인으로서 고등 학문도 없다. 제자는 사장(師匠) 표현법에 구니(拘泥)할 뿐이요 특출의 왕재(王才)는 불평을 품고 반미치광인 체 호걸인 체하는 행색을 가지며, 신비한 기술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를 기도치 아니하고 흐지부지로 멸망을 스스로 짓는 기색도 없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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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궁궐·성문·누각 등이 대표물이다.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3년에 창건한 것이더니 (1394) 중년에 불타고 대원군이 재건한 것이다. 북악산하에 대지를 점유하여 앞에 광화문(光化門)을 열고 그 도로 양편에 6조 관사(官舍)를 베풀어 굉장 삼엄한 외관을 꾸미며 궁내에는 장려한 전각이 있으며 쌍봉(雙鳳)·운문(雲文) 등을 양각한 돌난간은 기교를 다하고 내부 구조는 고려조 고전식이지마는 내외 장식이 모두 화려한 수법을 보인다. 지당(池塘) 안에 건축한 경회루(慶會樓)는 둘레 3척이 넘는 높은 돌기둥 48개를 세우니, 이 누각의 미술적 생명은 이 주석(柱石)에 있다. 곧 바깥기둥 24개는 방형이요 안기둥 24개는 원형이니, 이는 태극적 이상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발하여 무한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 위에 광활한 대청을 개설한 바 백관 어연(御宴)의 식장을 삼은 것이니, 그 열립(列立)한 돌기둥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수직선의 장식적 효과가 있는 동시에 건물 전체를 통일한 생명을 나타낸다. 창덕궁(昌德宮)은 경북궁의 다음가는 대건물로 그 정문의 돈화문(敦化門)은 장대한 5간 누문이요, 그 구조는 화려함보다 웅위관(雄偉觀)이 있다. 남대문·동대문의 두 성문은 광화문과 동일한 권형으로서 장중 숭엄의 풍을 띠어 있고 모두 옥개(屋蓋)에 잡상을 베풀고 목재 전체에는 단청 채색을 빌려서 구성 부분의 기능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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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의 성곽은 특징이 곡성(曲城)에 있으니, 이 곡성의 설비는 요새(要塞)의 투식(套式)인데 그 제도는 전술상 사각(死角)으로 들어오는 적병을 섬멸코자 한 것이니, 서양의 옹성(甕城) 측방탑과 같은 것으로서 축성술(築城術)의 발달을 보이고 있다. 수원성(水原城)도 동일한 곡성이 있는데 이성위에는 누각을 건설하여 장졸의 유식소(遊食所)를 만드니, 이 성루 제도는 도처가 한모양의 제도로서 진주(晋州)의 촉석루(矗石樓),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 등이 가장 장려한 구조로 된 것이요, 그 사면의 자연의 승경(勝景)을 기다려 상연한 정취가 넘쳐 있다. 이러한 건축물은 모두 군왕을 중심으로 한 구심적(求心的) 경향에 대한 탄력적 인상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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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은 불교도의 주되는 예술이었었다. 이조시대에 들어와서 불교를 퇴축(退逐)하고 승려는 모두 몰아 산중에 가두었으니, 그런즉 그 부려한 조각술은 승려의 영자(影子)와 같이하여 산중에 매장되었다가 그 불교적 조각술은 절문을 떠나 유교적 사회에 옮겨와 일상생활의 일용품상에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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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제(鐘制)는 본래 사원의 전용이더니 경성 보신각(普信閣)의 대종은 범종(梵鐘)을 이용하여 민간화한 것으로서 경성 거민(居民)에게 신혼(晨昏)을 알려줌에 쓴 것이다. 구경 7척 5촌, 높이 11척 5촌의 대종이니, 봉덕사 대종과 조선의 2대종이다. 그 규모와 기공(技工)도 백중의 사이지마는 보신각종은 유도화(儒道化)다. 그러므로 장식은 용두(龍頭)를 베푼 외에 불미(佛味)를 섞은 것이 없이 오직 순화장려(純化壯麗)의 풍을 띠고 있다. 일반 금공품·도기 등은 전대 의상(意想)을 인습하였으나 그 조각과 무늬 등은 부려함보다 순아하고 웅건한 맛이 있다. 목기·죽기(竹器) 등은 특제품으로서 부조·투조의 수법이 일체로 교치(巧緻)하고 그 도안 모양은 원만 풍부한 곡선으로서 기하학적 무늬를 교묘히 나타냈고 더욱 자개 칠기(漆器)는 특색있는 공예품이니, 세소(細小)한 패편(貝片)으로써 산수·화조·어룡 등의 제재를 선택하여 섬교하게 제조한 것이나 이 패편의 도안은 인간 이상의 세계에 옮기는 이상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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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일대의 미술은 건축·조각 모두 회화의 발달이 주로 되었다. 500년간의 계기(繼起)한 화가는 백수십 명을 헤아리겠는데 그들의 작품은 수집된 것이 없으므로 하나하나 평론하기는 곤란하나 산재해 있는 것을 얻어보거나 문헌에 있는 전기(傳記)들을 상고하건대, 그것을 대별하면 문인화(文人畫·정화(正畫의 2종으로 분간할 수 있다. 그런데 문인화란 것은 문사(文士)가 서도(書道)의 능력을 가지고 달리는데 견실한 묵선으로써 이른바 사군자(四君子)라는 매·란·국·죽(梅蘭菊竹) 혹은 산수(山水)를 그린 것인 이 문인화는 그다지 미술적으로 논구할 가치가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정화(正畫로 말하면, 명화(名畫라 할 것이든지 또는 계통을 맞춰 볼 것은 15, 6인의 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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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보통 교육에는 습자(習字)로 필수과목을 삼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릴때부터 운필(運筆)의 방법을 연습하니 흡사 구라파 중세기에 필법을 숭상하던 풍조와 같이 되었다. 이 습자는 회화 묘사의 한 수단이 되어 제작 방법의 원론을 학습하여서 회화의 예비 지식을 얻음에 이른 것이다. 점차 장성하여 서도에 능하게 되면 스스로 문인화를 묘사함에 취미를 붙이매 이 점으로 말미암아 문인화가 발달하였고 문인화의 감각미가 일보를 더 나아가 공력(工力)을 전심하면 정화가(正畫家)로 되는 것이었다. 다른 일종의 정화가는 도화서(圖畫署)의 화공으로서 그의 미술적 수양이 진보됨에 따라 가치있는 회화를 제작하는 일가(一家)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화가의 성가(成家)되는 경로는 그렇듯 경험을 주로 하기 때문에 화사(畫史)도 없고 화법(畫法)의 과학적 수양도 없었다. 중국과 같이 화사·화리(畫理)·화법 등의 서적류는 1책도 없다. 오직 그 미술적 감각의 진보는 천재(天才)에 맡겼었다. 이 천재적 의상(意想)이 회화의 제일 요건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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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천재적 미술가의 포부는 일체 이상주의를 품었었다. 그러므로 이조 회화는 이상파(理想派)의 술이다. 시인·학자 들도 모두 명미(明媚)한 산수간에 은거하여 자연을 벗삼고 신선으로 자처하여 독선(獨善) 생활을 즐겨했다. 그러므로 그 이상주의란 것은 신선사상과 개인주의를 요소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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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가들도 그 사상을 주로 하여 의미 내용을 표현함을 일삼으니, 그러므로 화면 전체에는 활기가 넘쳐 있어 속어로 말하면‘멋’을 부리는 것이 유일의 수법으로 되니, 곧 천재적 이상주의의 예술이다. 화가가 점철(點綴)에 임해서도 그 순서 법식이 먼저 자리에 단좌(端坐)하여 명상(冥想)을 탐(耽)하고 추상적으로 그를 숙시(熟視)하여 준비가 다 된 뒤에 흥미 있는 중심점으로부터 일필휘지(一筆揮之)한다. 화제(畫題)도 일체로 눈에서 붓에 감각으로 감각에 행하지 않고 구라파 16세기 화란(和蘭) 풍경화같이 서사시적 풍경화로 그리는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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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대가로 안견(安堅)과 강희안(姜希顏) 2인이다. 모두 산수와 인물에 장한데, 안견의 그림은 수법이 세밀하고 구도가 고고(高古)하며 그 화격(畫格)은 특히 원근 투시법을 창시하여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그 화면에는 비범한 묘법(描法)으로써 사물을 암시하는 힘이 넘쳐서 경탄의 느낌이 저절로 일어난다. 이래 사람들은 안견을 곽희(郭熙)에 비교하나 나는 곽희보다 이성(李成)에 비교해 본다. 강희안의 그림은 굉원(宏遠)하고 호방(豪放)의 풍이 있어 고려조의 조각을 보는 듯한 활기가 넘쳐난다. 중종 때 사람 이상좌(李上佐)는 안견·강희안 2인의 수법을 집대성한 자로서 고고한 중에 호건(豪健)의 풍기(風氣)가 있으며, 그 일기(逸奇)하게 표현한 전면(全面)에는 신운(神韻)이 약동하니 가위 신품(神品)이라 하겠다. 명나라에는 희첩(姬妾)·명원(名媛)의 여류화가가 많이 나오니 대부인(戴夫人)·마한경(馬閑卿)·구촌릉(仇村陵) 등 수십명이다. 이조 명종(明宗) 때에는 만록총중(萬綠叢中)에 일점홍(一點紅)으로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여화(女畫가 나오니, 그 필촉은 그리 높지 아니하나 안견(安堅)을 본떠 그 산수·초충 등의 필적은 다 절묘하게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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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 연담(連潭) 김명국(金命國),겸재(謙齋) 정선(鄭敾),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5 대가가 있는데 단원 ‧오원 2인은 가장 후기의 거장(巨匠)으로서 이상주의를 타파하고 일전하여 사실주의(寫實主義)로 나가서 정신보다 기교를 앞세우는 조자(調子)가 있었다. 그래서 단원·오원 2인은 신시대화의 매개자라 할는지 모르나 나의 견해로는 화도(畫道)의 쇠퇴를 초치한 자라 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이 없이 외관적 기교에만 빠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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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壁畫)로는 아악부(雅樂部)에 있는 남녀 병좌(並坐)의 족자가 가장 오랜 것이니, 이는 난계(蘭溪) 박연(朴堧)의 초상이라 하나 기실은 장악원(掌樂院) 신당(神堂)의 신상(神像)이다. 또한 봉상소(奉常所)에 보장(保藏)한 영신전(靈神殿) 벽화는 동양 최고(最古)의 전설도(傳說圖)이니, 곧 황제(黃帝)와 치우(蚩尤)가 서로 싸우는 전쟁화요, 거기 여자도의 1폭이 있으니, 이는 아마 황제에게 방법을 가르친 태을선녀(太乙仙女)의 상(像)인 듯하다. 이 벽화의 수법은 세려(細麗)치 아니하나 희랍의 전쟁 벽화와 동교(同巧)인 동시에 동양 최고 전설을 형상화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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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 있어 그 문화 진보의 단계적 현상이 구라파와 거진 동일한 조자로 되어온 것은 조선문화사(朝鮮文化史)라 생각한다. 중국 역사는 대통일 하에서 봉건제도로 내려오매 그 문화정신은 사대적(事大的)이요 연역적(演繹的)이다. 그러나 조선 고대사는 봉건제가 없이 부락 자치제로서 자유적·진화적·귀납적으로 내려올새 그 통일적 정신이란 것은 종교적 신앙 또는 조선(祖先) 숭배심에 있었다. 그러므로 태고로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미술은 서양 튜튼 미술과 한가지로 통일의 양식이 없이 지방색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 조선(祖先)의 미술 및 공예품이며 그 의상(意想)은 다시 한길로 합하여 대신라 문화를 빚어내게 되니 그로부터 고려를 거쳐 이조까지 오면서 고대의 의상 및 재료를 인수(因受)하여 발달을 전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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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와서 문화 진보의 여러 단계를 정리하여 전부터 전래하는 미술품을 일당에 진열하고 그것을 두루 감상하여 보면 고전식·외래식 또는 참신·기발의 다종다양으로 됨을 알 것이다. 이 다양하게 표현된 요소에 대하여 모모의 외국 학자들은 말하되 중국 역대 문화의 감화를 얻어가지고 그를 모조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독단이다. 옛날부터 문화상 형식 방면에는 외래의 영향이 없지 아니하나 거기에 대한 취용(取用)의 정신은 무조건으로 외물을 숭배 모취(慕取)함이 아니다. 자국의 문화를 풍부케 하기 위하여 채장보단(採長補短)의 이용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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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유정신의 연면한 계속적 활동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가실왕(嘉實王)이 중국의 금(琴)을 이용하여 가야금(加耶琴)을 만들 적에도,“여러나라 방언(方言)은 각기 다르니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로 되랴.”하였으니, 그 취지도 그 정신이요, 신라의 구진천(仇珍川)이 당(唐)에 잡혀가서 본국의 제노법 (製弩法)을 한사코 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도 그 정신이요, 고려조의 문익점(文益漸)이 원(元)나라에 왕사(往使)하였다가 그의 국금(國禁)을 만피(萬避)하고 목화 종자를 붓자루 속에 은폐하여 가지고 와서 본국에 전파시킨 것도 그 정신이요,『몽계필담(夢溪筆譚)』권13에 보면, 고려인이 중국에 사신으로 들어갈 적에 지나가는 곳에 당도하여 중국 지도를 몰래 그려내었는데 압수하여 보니 그 도안 규모가 매우 세밀하여 중국 지도도 그 양식으로 그린다 하였으니, 이도 그 정신이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 사람이 마정(磨頂)을 해가면서도 외국 물건을 취하기에 심력을 다한 것은 그렇듯 자기편의 이용을 위한 정신 활동이요, 외국물에 감화를 받았다 하거나 외국물에 빠져버린 것은 결코 아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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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일에 이르러 신풍조가 일어나면서 문화 양식과 미술상 활동이 갑자기 변하여 개신의상(改新意想)을 일으키매 문화를 지배하기 좋은 타율적인 권위는 없어지고 문화의 각 부문은 각자의 목적을 따라 순수히 자율적으로 발전함을 얻으니, 이로부터 문화 및 미술은 신면목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화가 발전함을 따라서도 조선적인 특수한 미술정신이 큰 비약을 시도하여 자기의 천재(天才)로 한없이 발휘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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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조선일보] 1940 5. 1∼6. 11, 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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